이게 다 프로이트 때문인가?!


정신분석과 문학비평, 김열규 외, 고려원(고려원미디어), 1996.


  이 책의 문제점은 그 모든 정신분석과 문학비평과의 관계와 흥미로운 관점을 맨 마지막, 논문 하나로 잊어먹게 했다는 점이다. 일단 나에겐 그렇다. 여전히 진지하게 읽으며 정신분석과 무의식과 신화비평에 관해 나름 수긍과 비판을 했건만, 이 책의 마지막 글을 읽고선 정신없이 깔깔거린 기억이 있다. 그러고 책을 덮어 잊고 있었는데 언론에 자주 특정 비서관의 이름이 거론되며 여성비하의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업무를 사임해야 한다는 지속된 주장을 보면서 이 책을 떠올렸다. 뭔 연상작용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책은 문학비평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에 대한 주제로 10명의 학자·교수가 쓴 논문형태의 글을 모은 것이다. 문학비평과 정신분석은 무엇인가에 관한 개관을 시작으로 정신분석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와 융의 관점이 문학비평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나라 문학에서의 정신분석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실제 작품이나 작가를 대상으로 한 비평을 수록하고 있다. 어쩌면 실제 작품을 가지고 하는 비평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흥미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프로이트 이론 아래 놓인 글인데 「한국 현대시의 정신 분석학적 해석」이라는 표제 아래 8편의 현대시를 해석한 마광수 교수의 분석에 계속 물음표를 달고 있다. 1989년 발표한 논문인데 이 글에 대한 수용이 가능한 이유는 정신분석학적 비평으로 충분히 타당한 견해라는 것일까. 이 글을 읽고 난 생각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끌어들여 욕망의 분출을 정당화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이의 이론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어 이 이론에 ‘의하면, 따르면, 적용하면’으로 방패를 두르고 성적인 욕망의 표현과 생각을 현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정신분석 이론은 성욕과 그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언어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명한다.


  시인 윤동주, 한용운 시에 대한 저항과 일제에 대한 독립 투사의 해석을 주입식으로 받았기에 정신분석 이론으로 해석하는 방법의 괴리가 너무 커서 놀라는 것이 아니다. 시험문제식, 교과서식 해석에 대해서도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마광수 교수의 해석 역시도 신선하다거나 놀랍다는 느낌보다는 마냥 우습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예술은 「욕구의 대상」으로 설명된다. 한 예술가가 현실에서 좌절된 욕구를 환상 속에서 대신 충족시킨 것이 곧 예술이라고 풀이되는 셈이다. 결국, 문학이나 예술은 「욕구 대상 충족의 메커니즘」의 하나로 범주화되는 것이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에, 예술가는 현실의 실패를 환상 속에서 대신 성취하는 사람, 이를테면 「현실의 실패자 그러나 환상의 성취자」로서 그 개성이 설명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시에 대한 해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까. 프로이트 이론은 그 영향만큼이나 지나치게 ‘성’에 대한 해석만을 고수하고 있음으로 비판받았다. 마광수 교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성욕’에 근원을 두는 것을 수용하여 “음양의 이론으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려고 했던 동양인들의 의식구조에는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가 오히려 더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술가적 기질(또는 시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 있어, 예술 창작의 근원적 동기는 ‘성욕의 대리배설’에 있다”고, “예술가 특히 시인들이 작품을 쓰는 근원적인 심리적 동기는 ‘유아기로의 퇴행 욕구’에 있다“고 전제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의 성욕이 직접 배설될 수 있는 사회란 문명 이전의 사회,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사회라고 보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욕의 억압 없이도, 예술적 대리배설 없이도, 모든 인간의 직접배설이 가능한 문명사회는 가능하다. 성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모든 이데올로기를 없애 버리고 문명 발전의 지표를 오직 “인간의 쾌락”에 둘 때, 미래의 유토피아는 원시 상태로의 복귀가 아닌 진정한 문명 상태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이 글에서 마광수 교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매저키스트로서의 여성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왜냐, 꽃이 개나리꽃이 아니라 “진달래꽃”이기 때문이고 “여성 화자가 님과 헤어지더라도 ‘밟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님과의 격렬하고 비정상적인 교합을 꿈꾸는 것이며” “꽃이 되어 님에게 마음껏 밟히고 싶은 심정이나 님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는다는 것이나, 모두 다 매저키스트로서의 피학적 변태심리를 충족시켜 그녀를 황홀경에 이르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

  윤동주의 「십자가」에선 배설욕구를 읽는다. 피를 흘리고 싶다는 표현이 시인의 잠재의식속에 숨겨진 배설의 욕구라는 것이다.


사실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만 괴로웠던 것은 아니다. 어두운 현실 상황이라고 해서 본능이 그 작동을 멈추지는 않는다. 이 시를 쓸 당시의 윤동주가 한층 정력이 솟구치는 젊은이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을 “성욕의 매저키즘적 대리배설”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유치환의 시 <바위>는 페티시즘의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의 <자화상>은 관음증적 나르시시즘으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선 매저키즘적 취향을,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에서는 페티시즘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성욕의 대리배설 욕구를 읽는다. 이상의 <오감도>를 남녀간 성교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정자들의 무한질주라고 해석하고, 김수영의 <폭포>를 “은폐적 대리배설”의 시로 해석한다. “민중적 사디즘, 집단으로서의  군중이 갖고 있는 폭발적 분노의 심층심리적 근원은 성욕이 충족되지 못한 짜증이 뭉쳐져 증오심과 분노로 변하여 화풀이의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김수영의 <폭포>는 분명 풍자적 알레고리의 시로서 성공한 작품이지만, 이 시가 갖고 있는 심층심리적 상징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김수영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잠재의식 안에는 성적 불만족이 뭉쳐져 있어, 그것이 그 시대의 암울한 상황과 결부되어 이러한 공격적 작품을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들도 미처 알지 못한 무의식을 친절히 알려주는 마광수식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보면서 해석의 다양성과 특정 이론의 집착적 적용이 가져오는 지나친 오독과 폐해에 대해 생각했다.

  상담을 받는데 의사든 상담사든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용하여 나의 모든 표현과 행동 하나하나에 저렇게 해석을 내린다면 난 그 병원을 당장 뛰쳐나올 것이다. 몰랐던 나의 무의식에 대해 놀랄만한 견해를 알려주어 절대적으로 감사하오 따위의 감정이 들지 않을 것은 분명하며 오히려 상담하는 이의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것이다.

  즐거운 사라. 그래서였을까. 당시에도 나같은 이들이 있어서? 이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다. 읽어보고픈 생각도 없다. 다만 이 작품을 통해서 마광수 교수가 법적제제를 받았고 책은 출판금지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옛날인줄 알았는데 1992년이다. 불과 25년 전 우리나라의 의식이 소설책 하나를 수용하지 못했다는 데 놀랐다. 그 당시에도 온갖 외설서적은 난립하고 있던 것으로 아는데 마광수 교수의 작품이 문제시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법무부장관 후보자였던 이는 당시 마광수 작품에 대해 ‘법적폐기물’이란 표현을 썼다. 와설, 음란의 기준이라는 것이 수많은 페이지 속의 몇 개의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는 시각은 얼마만큼일까. 사람들이, 대중이 용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인가, 예술작품에 대한 판단을 건드리는 또다른 시각이 특정한 ‘이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지만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수용되느냐, 더 널리 인정되느냐가 발생한다. 그저 특정인이나 미디어의 힘으로 평가가, 인지도가 상승하는 것을 떠나서 문학이 정치적인 이유로 ‘구속’되어야 할 일인가. 문학적 표현과 수사를 글쓴이로 동일시하는 일이 얼만큼 적정한가. 이런 의문이 계속 맴돈다.

  문학적 표현이든 그냥 일상의 말이든 특정한 표현에 휘둘리는 일은 있다. “세상에, 그런 말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앞으로는 그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드는 일들이. 이럴 때 시간이 지나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움을 발휘한 적절한 생각의 정도는, 방향은 어떤 형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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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에 대한 불안 현대의 문학 이론 44
해럴드 블룸 지음, 양석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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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태어나지 못한 불안


영향에 대한 불안-The Anxiety Of Influence: A Theory Of Poetry Harold Bloom


해럴드 블룸, 문학과지성사, 2012.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일까. 블룸이란 이름에 끌리는 것은. 외국인 이름을 두고 특별히 좋고 예쁘다는 느낌이나 생각을 가지진 않았는데 유달리 생각나는 이름들이 있다. 블룸이 그 하나인데, 이유없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블룸, 블룸 말할 때의 발음의 유연함과 꽃피움의 뜻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블룸 블룸하고 있으면 주위에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드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레오폴드 블룸과 Bloomsday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영향인 모양이다. 해럴드 블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 비평가를 알게 된 것도 오로지 그의 성이 ‘블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밀리기엔 억울하게도 해럴드 블룸은 유명한 문학비평가이다. 많은 책들에 ‘해럴드 블룸의 추천’ 태그가 붙어 있다. 1930년생이니 지금은 87세의 이 비평가는 ‘비평가의 거인’이라 불리며 40권이 넘는 저서를 썼다. 해럴드 블룸에 대한 설명, 평가에는 그의 비평이 시대의 주류 비평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블룸은 ‘보수주의’ 비평가로 분류된다.

  낭만주의 시인들에 대한 비평을 주로 해온 블룸의 대표적인 비평 개념 ‘영향’, 이 책은 “영향”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다. 대체로 문학비평이나 문학이론서가 독특한 어휘를 사용하며 문장을 힘들게 써내려가는 까닭에, 더구나 번역서이기에 이해를 하기 위한 서글픈 노력을 기울여야 했지만 이 책 <영향에 대한 불안>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해럴드 블룸은 자신의 비평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장르에서 개념을 차용했는데 철학과 프로이트 이론이었다. 이 두 개념이 어떻게 문학을 설명하는데 ‘이용’되는지 지켜보는 흥미가 있다.


시적영향은 ―강하고 진정한 두 시인과 관계할 때―항상 이전 시인을 오독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오독은 실제로 필연적으로 오역인 창조적 교정의 행위이다. 풍부한 결실을 낳는 시적 영향의 역사, 즉 르네상스 이후 주요 서구 시 전통은 불안과 자기구원적 풍자, 왜곡의 역사이며, 도착적이고 의도적인 수정주의의 역사이며, 이 수정주의 없이는 근대시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럴드 블룸은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선배 시인의 ‘영향’을 받을까 ‘불안’을 끊임없이 겪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위대한, 독창적 시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영향에 대한 불안>이 다루는 핵심 개념이다. 여기에 앞서 말한 철학의 개념과 프로이트의 방어 기제를 끌어와 선배 시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심리적 갈등과 투쟁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해럴드 블룸에게는 ‘모방이 창조’라는 말보다 선배와의 차이, 왜곡, 오류가 문학 창작에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해석을 두고 벌이는 선배와의 경쟁. 그러니까 선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자각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과정을 여섯 개의 수정률― 클리나맨, 테세라, 케노시스, 악마화, 아스케시스, 아포프라데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클리나맨은 선배 시에 대한 오독, 이탈, 타락으로 수사학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클리나맨을 위한 투쟁으로 블룸은 반동형성을 방어기제로 설정한다. 테세라는 도자기 파편을 의미하는 것으로 테세라는 연결성을 의미한다. 여기에 “자기 자신으로의 선회”와 ‘반전"을 방어기제로 설정한다. 욕동의 대상이 타자에서 자신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테세라는 복원과 재현인데 이것은 새로운 불안과 수축을 야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케노시스로 선재 시에 대한 ’비우기‘를 의미한다. 격리, 취소, 퇴행의 방어기제로 투쟁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자신 속에서 선구자의 힘을 취소하는 것이 자아를 선구자의 입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설명한 방어기제 이론을 적확하게 자기 의미화하며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을 설명하는데 그것이 프로이트 이론이라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여러 비판과 비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문학, 역사, 과학, 의학 등 전반에 걸쳐 거둔 영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쯤되면 프로이트에 맞선 악마화, 여섯 개의 수정률이 필요하다 싶다.


허구의 세계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무한히 상상하는 내면의 자아를 매우 밀접히 알지 못하면서 그런 자아를 재현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말로에게는 변화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그의 과시적 인물들은 모두 똑같은 과시적 인물이고, 희생자들도 똑같은 희생자이며, 마키아벨리적 인물들도 똑같은 악마적 인물이다. 탬벌레인, 바라바스, 마키아벨리적 인물들도 똑같은 수사법을 공유하고 똑같은 욕망으로 어지러워한다. 셰익스피어는 말로에게서 이탈하면서 구별을 창조했다. 이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둔 시적 영향은 없다.


  창조적 작가라면 누군가의 이름에 종속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흔히 다른 작가들과 비견되고 실제로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면 그 이전의 선배 작가를 빌어 표현하는 경우가 작가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제2의 누구다! 이런 수식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불편과 구속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 인정욕구, 자기과시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할 때 뒤늦게 태어난 이유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먼저‘의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해럴드 블룸의 ’영향‘. 그리고 그속에 닮고픈 의지와 벗어나고픈 욕망이 공존하고 있어 ’불안‘한 상태의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비단 ’문학‘에 대한 것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흔들림없이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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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오리배, 세월


세월 The Hours, 마이클 커닝햄, 생각의나무.


  빗속에선 퀴어 축제가 열린다. 무지개빛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 찾아온 어떤 이들의 기발에선 죄악과 타락과 구원의 글씨가 빗물에 흐려진다. 멀리 떨어진 어느 곳, 열아홉의 소년은 물에 뛰어든다. 그의 목숨이 강물 가운데 잡힌 채 회오리칠 때 가장 격렬한 발놀림의 오리배가 소년을 붙들어 맨다. 오리배속 두 명의 경찰관은 탈진해 쓰러진다.


  이 그림에, 왜 느닷없이 세월을 떠올렸을까. 이유없이 눈물나고 이유는 알지만 설명할 수 없는 세월.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지 모를 세월. 버지니아 울프의 그리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



몇몇 사람은 창에서 뛰어내리거나 스스로 물에 빠지거나 알약을 삼킨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대부분의 절대 다수는 서서히 어떤 질병에 삼켜지거나, 아니면 아주 행운아라면 세월 그 자체에 의해 삼켜진다. 위로 삼을 것이라곤 아주 간혹 우리의 삶이 전혀 뜻밖에도 활짝 피어나면서 우리가 상상해 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어린이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그리고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이런 시간 뒤에는 불가피하게 그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더 어려운 다른 시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간을 보다 맛은 잊어버리고 뜨거움만 남은 것처럼, 뜨거움에 혀에 상처가 난 것처럼, 뒤늦게 진정한 혀가 기꺼이 짜다는 맛을 찾아낼 때처럼, 알맞게 농도를 조절한 국냄비가 미끄러져버린 것처럼… 삶의 뜨거움에 진정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너무 뜨거워서 그렇다고 문을 열고 나가면 난 로라가 되는 건가. 나를 진정시켜주는 건 문장, 속도감있는 짧은 문장이 아니라 문장의 길이가 위로의 시간인듯 어깨를 감아오는 문장 속에 푸욱 빠지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로라가 된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로라가 읽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 된다.

  1923년 런던 교외 버지니아의, 1949년 로스앤젤레스 로라의, 1999년 뉴욕 클라리사의 하루가, 맑고 투명한 6월의 하루로 평범하게 시작된다. 먼 훗날에 그 시간을 떠올리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 날이 버지니아의 생애와 버지니아의 소설 속 인물들의 생으로 살아난다. 버지니아의 영향이 모든 이들의 삶에 깊게 드리워진다. 그들 하루의 행적만큼이나 더 격렬하게 흘러가는 생각의 날개들은 너무도 섬세하고 유려해서 운명이 누군가의 생각 하나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깡그리 잊어버리게 한다. 로라도 클라리사의 운명도 오로지 버지니아의, 작가의 창작의 방향 안에서 결정될 텐데, 그것을 또 엮은 작가 마이클 커밍햄의 버니지아식 창조 방법에, 무력한 일상에 담긴 의미들이 다채롭고 새롭게 보인다. 아니, 죽음이라는 그것도 자살이라는 그림자가 아른거리기 때문에 느껴지는 기분인 걸까. 

  “추상적이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관념이지, 특별히 병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죽음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일까, 지극히 현실적인 것일까. 흔히 말하는 삶을 버텨내기 힘든 고통. 거기에 더해진 수치심, 모멸감, 벗어날 수 없는 슬픔, 그런 감정에 휩싸여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에는 질병, 가난의 이름을 붙인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인정인 듯이 여기게 된다. 하지만 죽음은 관념일까. 또 많은 이들이 ‘도대체 그런 이유로’라는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내뱉게 하는 그런 자살도 있다. 죽은 이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남은 이들이 오고갈 대화가 그려지는 말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그녀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정상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녀의 슬픔이 흔히들 경험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 우리는 전혀 알지를 못했다고.


  우리가 전혀 알지를 못했다고 그 죽음에 의문을 품을 이유는 없다. 남아 있는 이들이 타인의 죽음에 심판자처럼 그것은 타당하니 아니니 말할 거리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마이클 커닝햄의 자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삶이 가져오는 죽음에 향한 욕망이다. 문화적인 차이인지 그들은 동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도, 절망이나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보인다. 이미 그들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정착되어 있어서일까. 등장인물마다 동성에 느끼는 특별한 감정의 순간이 드러난다. 그것 자체는 고민의 영역이 아닐 수 있는 배경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안정감인 걸까. 시대가, 사회가 받아들이는 동성애에 대한 비난과 수용의 정도를 알기에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절망의 충동이 더 크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니까, 그러한 동성에 대한 사랑 또한 이겨낸 삶에서 느끼는 일상에 대한 절망이니까. 아니, 샐리와 18년이란 세월을 보낸 클라리사보다 이성과의 결혼생활 속 버지니아와 로라의 자살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하다는 점이, 달리 시사하는 바가 있는 건가. 삶속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재능에 대한 갈망, 일상처럼 찾아오는 두통과 염증들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에 세 여인이 경험하는 입맞춤은 어쩌면 생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에 달라질 것 없는 삶이라도 동성과의 순간의 입맞춤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일상의 삶에 대한 감정을 더 예리하게 파고드는데 한몫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를, 순결하고 착란적이며 일상의 삶과 예술의 불가능한 요구 사이에서 좌절감을 느낀 울프를 상상해본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머니에 돌을 넣고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음걸이를 상상해본다.


맞아, 하루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야, 하고 클라리사는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파티를 연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홀로 조용히 살기 위해 가족들도 내팽개친다. 각자의 재능과 무제한으로 주어진 노력과 가장 호사스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책들을 쓰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내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 일로 이런 일들만큼이나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평범과 일상이라는 말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상실과 답답함, 소외 또한 있다. 세 여인의 일은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결정체이고 행복과 절망이 반복된 순간들이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간’, 나만의 ‘온도’가 있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짠맛, 견딜 수 없는 뜨거움. 적절한 온도를 찾지 못해 그냥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순간이, 특정한 목표를 위해 열정적으로 헤엄질을 하고 나서 느끼게 되는 허무의 순간이, 탈진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여인이 있다. 그들 삶을 가만 들여다보면 세 여인은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며 책임감 또한 잊지 않지만 또다른 역할에 대한 동경과 삶에 대한 의구심이 한가득이다. 지금 또 한 여인의 삶을 보탠다 한들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이라는 게 다르지 않은 듯 시간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듯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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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반인반신은 돌연변이 아닌가


세컨드핸드 타임-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야기가있는집, 2016.


  무언가의 최후는 항상 비장하다. 사라진다는 것은 늘 그렇듯 안타까움을 준다.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라는 소제목의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가 생각났고 몇 개의 감정이 교차되되었다. 이해의 차원과 이해하지 못함이 뒤엉켰다.

  벨라루스 출신 작가가 고국에 대한 애착을 가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고국’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알았다. 또한 이 책을 기획한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현재를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호모 소비에티쿠스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라진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 최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살아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저서들은 한결같이 말줄임표의 문학이라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만큼은 말줄임표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야기를 더하지 못하는 것처럼 쏟아내는 말들의 향연이 인상깊었다. 감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 속에 뿌리박힌 신념과 오래도록 길들여진 삶의 양식이 인간의 의식을, 행동을 어떻게 감싸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탄핵무효를 주장하는 사람들, 여전히 박정희는 반인반신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동들을 비슷한 관점으로 쳐다보게도 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해해서는 안되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는 생각을 또 하면서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떠돌았다.  

  변화의 시대를 산다는 건, 참으로 흥분된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혼란스럽고 힘든 일이다. 오래동안 시멘트처럼 굳어졌던 소비에트 시대가 종결된 시대, 미국과 양강구도를 형성하던 소련의 몰락이라는 상황에 처한 소련인들의 절규와 기대, 설렘, 혼란들이 이 책속에 살아있다.

  생각해보면 공산주의가 사회주의가 뚜렷히 잘못된 체제라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역시. 각각은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자유와 민주’라는 부분이 어떻게 정의되고 실현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또한 그 어느 체제나 권력자의 욕망이 민중들과 얼마나 유리된 것인지 그들이 민중이란 조국이란 이름을 통해 얼마나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왔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를 구현하는 지도자, 권력가들의 가치와 신념, 그들의 욕망이 문제의 핵심이다.

  “스탈린과 닮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운전수도 있었어.”

  대한민국에도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출연을 금지당한 연예인이 있다. 그러니 이것은 체제의 문제라고만 볼 순 없는 아주 단순한 사례다.

  지금도 빈부격차를 발생시키며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게 돈이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살아감에도 여전히 자본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이가 많은 까닭에 욕망과는 별개로 자본은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느끼는 자본의 홍수는 극악할 세계로 느껴질 거란 생각이 든다. 수많은 소비에트들이 넘쳐나는 물질에 황홀해 하기보다 혼란과 공포를 겪는다. 그들의 공포가, 절절하게 이해가 된다.


대체 우리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유연한 사회주의,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얻게 되었죠? 길거리에는 잔인한 자본주의만이 팽배합니다. 총싸움, 말다툼……. 누가 가게 주인이고 누가 공장 주인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뿐입니다. 저 위쪽 지도층에는 강도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암거래상들과 환전상들이 정권을 잡았지요. 사방에 적과 맹수들뿐입니다. 자칼들이요!


  그래서 그들은 1990년대에 대한 지독한 향수에 빠진다. 공산주의를 좋아해서, 자본주의에 길들여지지 못해서. 1990년대, 공산주의 붕괴를 원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더 나은 사회로의 희망을 꿈꾸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 그러나 그 결과는 원하던 모습이 아니어서 그들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짓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우린 정체 모를 아름다운 삶을 믿었어. 유토피아, 그건 유토피아였어.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당신들도 유토피아를 믿잖아.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시장 천국을…….


 스탈린, 레닌, 고르바초프, 옐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상반된 의견을 내놓는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그들은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를 갖는다. 소련, 스탈린을 찬양하며 공산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삶에 대해 적응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가치가 저하된 시대에 물질의 노예로 보이기까지 한다. 수많은 종류의 물질들이 없어도 극도로 가난하지는 않게 모두가 살았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더 이상 동화같지도 않았고, 더 이상 즐겁지도 않았어요. 자유시장을 원하십니까? 자, 원했던 대로 받으십시오! 저와 남편은 엔지니어였어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반 이상이 엔지니어였잖아요. 우리를 대우해주는 곳은 없었어요. “가서 설거지를 하세요!” 페레스트로이카는 우리가 이뤄낸 거였어요. 우리가 우리 손으로 공산주의를 묻었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어요. 어린 딸이 배가 고프다는데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시대가 다같이 물질을 나누어 살아가던 시대로서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전쟁과 공포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강제노동과 수용소의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특별한’ 이유없이 밀고하면 몇 년을 수용소에 살았던 기억들을 갖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혼란이 과거의 기억을 미화하는 지도 모른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과 현재 사이의 괴리는 그들에게 불안을 조장하기에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그들의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는 안타깝게 느껴진다.


문제는 옐친이나 푸틴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노예라는 게 문제예요. 노예근성! 노예의 피! ‘신 러시아인’들을 한번 보세요. 벤틀리에서 내릴 때 주머니에서는 돈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노예에요. 위에 앉아 있는 두목이 “모두 마구간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모두 쪼르르 들어갈 거예요. 


  자유라는 것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도 가끔은 헷갈린다. 자유가 무한정 있지만 따라잡을 수 없는, 내게 주어지지 않는 자유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겠지 생각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만도 같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자본주의, 좋아요!”라고 적극적으로 외치지 못해서 안타깝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강력한 차르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박정희 향수를 꿈꾸는 어른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향수가 진정한 향수인지를. 그들이 그 오랜 시간 길들여진 세뇌가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폭언과 폭력으로 나타날 때마다 이해할 수 없음에 답답했는데, 체제붕괴라는 상황에 처한 소비에트인들의 세대간 갈등을 보면서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욕망’을 감정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이는 행태들은 인정할 순 없다.

  국민을 시민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권력을 잡아놓고 개인의 혼란과 향수와 욕망을 이유로 왕과 신을 만들고 거기에 세금까지 뿌리려는 시대착오적인 이 시대의 권력가 자본가들. 지금이 소비에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변혁기의 시대도 아니지 않은가. 이미 오래전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임에도 1990년대의 소련이 겪는 혼란을 넘지 못한 이들이 나라를 이끌어갈 주체로서의 역량을 가진 자라 말할 수 있을까. 특정한 시대의 이념과 가치를 강요하는 속에 숨겨진 욕망의 내용은 무엇인지 성숙하게 변혁기를 이겨낸 이들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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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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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와 말줄임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문학동네, 2015.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독특한 성격의 저서를 두고서 목소리-소설, 코러스 소설,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는 ‘다성악 같은 글쓰기’라 칭했다. 논픽션 형식의,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면서도 소설처럼 읽히는 책이다. 작가하면 떠오르는 이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 목소리 소설을 처음 읽을 땐 사람들의 인터뷰를 그냥 모아 놓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 생각했다. 그러니까 작가의 글쓰는 역할이 얼마없지 않느냐, 단지 들은 것을 녹취하는 것,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내용을 떠나서 구성에 있어서도 제목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도 작가의 탁월한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형식이 익숙해지고서는 처음의 강렬한 느낌은 다소 약화되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내가 읽은 작가의 첫작품이었기에 그 강렬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점 외에 다른 작품보다 이 소설이 작가의 대표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처음 이 책을 읽고서, 또한 다른 책들에서도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말줄임표였다. 이 책에는 수많은 말줄임표가 있다. 목소리 소설이라고 말하는데,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쏟아냈는데도 목소리를 글로 옮기고 나니 말보다도 말줄임표가……목소리를 지배했다. 말이 쏟아지는 가운데 무수한 그 휴지의 표시는 그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과정이었고 또다시 감정을 토로하는 표현이었다. 말한 만큼 그들은 감정에 휩싸이고 말한 만큼 충격과 공포에 머물렀다. 그것이 말줄임표 속에서 전이되었다. “이 책을 읽을 사람도 읽지 않을 사람도 그냥 모두 다 불쌍하다”고 말한 목소리처럼 나는 매우 불쌍해졌다. 이 수많은 말줄임표만큼, 말줄임표 속에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아서 그 수많은 전쟁의 모습은 다 안다고 생각했다. 문학과 과학과 영화와 다큐 등 다양한 매체가 구현한 전쟁을 보고 이제 충분히 전쟁을 안다고, 전쟁의 모습을 정형화시켰었나 보다. 전쟁은 수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달랐다. 지금까지 알던 전쟁의 이야기는 누구의, 무엇의 이야기였던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속 비극과 희극, 아이러니, 생경함 그리고 처참함, 지독한 붉은색 지독한 검은색, 웃음과 눈물, 사랑… 이러한 이야기가 전쟁속에 전쟁터에 삶이 있었음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건, 그것이 여자들의 시선이었기 때문일까. 처음 사람을 쏘았을 때 느낀 공포, 수많은 부상병들과 시체들을 볼 때의 처절함, 그 속에서도 느끼는 사랑… 여성의 이야기는 달랐다. 전쟁터의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여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읽거나 들어서 익숙한 내용, 그러니까 어떤 이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를 거뒀는지, 아니면 어떻게 패배했는지, 어떤 기술들이 사용됐고 어떤 장군이 활약했는지 따위의 내용은 아예 없거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전쟁에서 늘 여자는 ‘피해자’로 각인되고 규정된다. 전쟁터를 경험하지 못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돌보며 또한 가축을 돌보며 마냥 전쟁터에서 직접 총을 쏘고 있는 남편을, 동생을, 오빠를,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이 전쟁 속 여성의 전형이었다. 그렇지 않고 전쟁터에 있다면 간호병이거나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나라의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끌려간 소녀들이었다.

  이 책 속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다.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가기를 원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저격수였고 탱크를 몰기도 했지만 전쟁 후 이들은 영웅이 되지 못했다. 전쟁후 종전을 기념하며 참전한 군인들이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될 때 여성들은 국가의 영웅도 동네의 영웅도 집안의 영웅도 되지 못했다. 쫓겨나고 놀림받고 배격당했다. 이유는 “단지 그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쟁터에 있었으니까”. 여성의 몸으로 전쟁터에 군인으로 있는 일은 신체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반복되는 생리. 그러나 전쟁에 여성들을 위한 물자는 지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쟁터에서 여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전쟁에선 수많은 여성들의 손길이 필요했다. 단지 부상병을 돌보는 일에서만이 아니라, 간호병으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라.


    - 전쟁터에 가져갈 물건으로 뭘 챙기셨어요?

    - 사탕.

    - 네?


  전쟁터에 가져갈 물건으로 사탕을 챙기는 여성. 하긴 전쟁터에 달리 무엇을 들고 갈까. 사탕을 손에 쥐고 누군가에게 건넬 사탕처럼, 전쟁터라고 사탕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전해져 한순간이라도 사탕의 달콤함이 전해졌다면, 사탕이 녹듯 전쟁의 힘겨움이 일순간이라도 녹을 수 있었다면 그것 또한 그대로 좋았으리라. 그렇게 여성들은 전쟁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들의 기억 속엔 그처럼 사탕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전쟁터에서 소녀는 여성이 되어간다. 하필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시기임에도 소녀들은 전쟁터에서 아름다웠고 또 그런 모습이고 싶어 했다. 삶이 모두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았다.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 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우리 남편들한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전쟁이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아니, 필사적으로 전쟁후 ‘영웅’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한 보상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또다시 전쟁 때 그들을 동원할 수 있기에, 그랬다. 하지만 또다시 전쟁이 오면 여성들을 동원하진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쟁후 모두가 여성을 나몰라라 했다. 이 분위기가 참전 여성들 스스로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그토록 공포의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30년이 지나서야……모임에 초대도 하고……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이해할 수가 없었어……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이 책에서 전쟁 후의 삶에 대해 더욱 눈길이 갔다. 어떤 누구에게라도 전쟁의 경험은 고통스럽게 회상될 수밖에 없고 매일을 트라우마로 힘들어할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이들은, 특히 남성들은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의 전쟁을 증언처럼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매년 전쟁기념식에 참여할 수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전쟁의 상처를 많은 사람들이 위로해 주고 그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함께 전쟁의 고통을 나눠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어떤가. 함께 전쟁터에 있던 남성들에게조차 외면받았다. 전쟁터에서는 그들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요, 사랑인 듯이 대하던 남자들도 전쟁후에 그들 남성들과 여성을 분리했다. 동지애도 없었다. 여성은 그들의 전우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목소리는 묻혔다. 여성들은 전쟁에 참여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영웅, 그까짓 거 필요없고 고통을 상처를 말하며 치유하고 치유받고 싶어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러니 여기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단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또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을 떠나서 여성들 자신의 고통을 소리내어 치유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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