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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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와 말줄임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문학동네, 2015.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독특한 성격의 저서를 두고서 목소리-소설, 코러스 소설,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는 ‘다성악 같은 글쓰기’라 칭했다. 논픽션 형식의,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면서도 소설처럼 읽히는 책이다. 작가하면 떠오르는 이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 목소리 소설을 처음 읽을 땐 사람들의 인터뷰를 그냥 모아 놓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 생각했다. 그러니까 작가의 글쓰는 역할이 얼마없지 않느냐, 단지 들은 것을 녹취하는 것,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내용을 떠나서 구성에 있어서도 제목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도 작가의 탁월한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형식이 익숙해지고서는 처음의 강렬한 느낌은 다소 약화되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내가 읽은 작가의 첫작품이었기에 그 강렬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점 외에 다른 작품보다 이 소설이 작가의 대표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처음 이 책을 읽고서, 또한 다른 책들에서도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말줄임표였다. 이 책에는 수많은 말줄임표가 있다. 목소리 소설이라고 말하는데,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쏟아냈는데도 목소리를 글로 옮기고 나니 말보다도 말줄임표가……목소리를 지배했다. 말이 쏟아지는 가운데 무수한 그 휴지의 표시는 그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과정이었고 또다시 감정을 토로하는 표현이었다. 말한 만큼 그들은 감정에 휩싸이고 말한 만큼 충격과 공포에 머물렀다. 그것이 말줄임표 속에서 전이되었다. “이 책을 읽을 사람도 읽지 않을 사람도 그냥 모두 다 불쌍하다”고 말한 목소리처럼 나는 매우 불쌍해졌다. 이 수많은 말줄임표만큼, 말줄임표 속에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아서 그 수많은 전쟁의 모습은 다 안다고 생각했다. 문학과 과학과 영화와 다큐 등 다양한 매체가 구현한 전쟁을 보고 이제 충분히 전쟁을 안다고, 전쟁의 모습을 정형화시켰었나 보다. 전쟁은 수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달랐다. 지금까지 알던 전쟁의 이야기는 누구의, 무엇의 이야기였던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속 비극과 희극, 아이러니, 생경함 그리고 처참함, 지독한 붉은색 지독한 검은색, 웃음과 눈물, 사랑… 이러한 이야기가 전쟁속에 전쟁터에 삶이 있었음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건, 그것이 여자들의 시선이었기 때문일까. 처음 사람을 쏘았을 때 느낀 공포, 수많은 부상병들과 시체들을 볼 때의 처절함, 그 속에서도 느끼는 사랑… 여성의 이야기는 달랐다. 전쟁터의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여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읽거나 들어서 익숙한 내용, 그러니까 어떤 이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를 거뒀는지, 아니면 어떻게 패배했는지, 어떤 기술들이 사용됐고 어떤 장군이 활약했는지 따위의 내용은 아예 없거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전쟁에서 늘 여자는 ‘피해자’로 각인되고 규정된다. 전쟁터를 경험하지 못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돌보며 또한 가축을 돌보며 마냥 전쟁터에서 직접 총을 쏘고 있는 남편을, 동생을, 오빠를,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이 전쟁 속 여성의 전형이었다. 그렇지 않고 전쟁터에 있다면 간호병이거나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나라의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끌려간 소녀들이었다.

  이 책 속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다.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가기를 원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저격수였고 탱크를 몰기도 했지만 전쟁 후 이들은 영웅이 되지 못했다. 전쟁후 종전을 기념하며 참전한 군인들이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될 때 여성들은 국가의 영웅도 동네의 영웅도 집안의 영웅도 되지 못했다. 쫓겨나고 놀림받고 배격당했다. 이유는 “단지 그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쟁터에 있었으니까”. 여성의 몸으로 전쟁터에 군인으로 있는 일은 신체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반복되는 생리. 그러나 전쟁에 여성들을 위한 물자는 지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쟁터에서 여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전쟁에선 수많은 여성들의 손길이 필요했다. 단지 부상병을 돌보는 일에서만이 아니라, 간호병으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라.


    - 전쟁터에 가져갈 물건으로 뭘 챙기셨어요?

    - 사탕.

    - 네?


  전쟁터에 가져갈 물건으로 사탕을 챙기는 여성. 하긴 전쟁터에 달리 무엇을 들고 갈까. 사탕을 손에 쥐고 누군가에게 건넬 사탕처럼, 전쟁터라고 사탕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전해져 한순간이라도 사탕의 달콤함이 전해졌다면, 사탕이 녹듯 전쟁의 힘겨움이 일순간이라도 녹을 수 있었다면 그것 또한 그대로 좋았으리라. 그렇게 여성들은 전쟁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들의 기억 속엔 그처럼 사탕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전쟁터에서 소녀는 여성이 되어간다. 하필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시기임에도 소녀들은 전쟁터에서 아름다웠고 또 그런 모습이고 싶어 했다. 삶이 모두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았다.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 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우리 남편들한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전쟁이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아니, 필사적으로 전쟁후 ‘영웅’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한 보상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또다시 전쟁 때 그들을 동원할 수 있기에, 그랬다. 하지만 또다시 전쟁이 오면 여성들을 동원하진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쟁후 모두가 여성을 나몰라라 했다. 이 분위기가 참전 여성들 스스로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그토록 공포의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30년이 지나서야……모임에 초대도 하고……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이해할 수가 없었어……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이 책에서 전쟁 후의 삶에 대해 더욱 눈길이 갔다. 어떤 누구에게라도 전쟁의 경험은 고통스럽게 회상될 수밖에 없고 매일을 트라우마로 힘들어할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이들은, 특히 남성들은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의 전쟁을 증언처럼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매년 전쟁기념식에 참여할 수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전쟁의 상처를 많은 사람들이 위로해 주고 그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함께 전쟁의 고통을 나눠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어떤가. 함께 전쟁터에 있던 남성들에게조차 외면받았다. 전쟁터에서는 그들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요, 사랑인 듯이 대하던 남자들도 전쟁후에 그들 남성들과 여성을 분리했다. 동지애도 없었다. 여성은 그들의 전우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목소리는 묻혔다. 여성들은 전쟁에 참여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영웅, 그까짓 거 필요없고 고통을 상처를 말하며 치유하고 치유받고 싶어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러니 여기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단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또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을 떠나서 여성들 자신의 고통을 소리내어 치유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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