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오리배, 세월
세월 The Hours, 마이클 커닝햄, 생각의나무.
빗속에선 퀴어 축제가 열린다. 무지개빛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 찾아온 어떤 이들의 기발에선 죄악과 타락과 구원의 글씨가 빗물에 흐려진다. 멀리 떨어진 어느 곳, 열아홉의 소년은 물에 뛰어든다. 그의 목숨이 강물 가운데 잡힌 채 회오리칠 때 가장 격렬한 발놀림의 오리배가 소년을 붙들어 맨다. 오리배속 두 명의 경찰관은 탈진해 쓰러진다.
이 그림에, 왜 느닷없이 세월을 떠올렸을까. 이유없이 눈물나고 이유는 알지만 설명할 수 없는 세월.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지 모를 세월. 버지니아 울프의 그리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
몇몇 사람은 창에서 뛰어내리거나 스스로 물에 빠지거나 알약을 삼킨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대부분의 절대 다수는 서서히 어떤 질병에 삼켜지거나, 아니면 아주 행운아라면 세월 그 자체에 의해 삼켜진다. 위로 삼을 것이라곤 아주 간혹 우리의 삶이 전혀 뜻밖에도 활짝 피어나면서 우리가 상상해 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어린이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그리고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이런 시간 뒤에는 불가피하게 그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더 어려운 다른 시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간을 보다 맛은 잊어버리고 뜨거움만 남은 것처럼, 뜨거움에 혀에 상처가 난 것처럼, 뒤늦게 진정한 혀가 기꺼이 짜다는 맛을 찾아낼 때처럼, 알맞게 농도를 조절한 국냄비가 미끄러져버린 것처럼… 삶의 뜨거움에 진정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너무 뜨거워서 그렇다고 문을 열고 나가면 난 로라가 되는 건가. 나를 진정시켜주는 건 문장, 속도감있는 짧은 문장이 아니라 문장의 길이가 위로의 시간인듯 어깨를 감아오는 문장 속에 푸욱 빠지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로라가 된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로라가 읽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 된다.
1923년 런던 교외 버지니아의, 1949년 로스앤젤레스 로라의, 1999년 뉴욕 클라리사의 하루가, 맑고 투명한 6월의 하루로 평범하게 시작된다. 먼 훗날에 그 시간을 떠올리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 날이 버지니아의 생애와 버지니아의 소설 속 인물들의 생으로 살아난다. 버지니아의 영향이 모든 이들의 삶에 깊게 드리워진다. 그들 하루의 행적만큼이나 더 격렬하게 흘러가는 생각의 날개들은 너무도 섬세하고 유려해서 운명이 누군가의 생각 하나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깡그리 잊어버리게 한다. 로라도 클라리사의 운명도 오로지 버지니아의, 작가의 창작의 방향 안에서 결정될 텐데, 그것을 또 엮은 작가 마이클 커밍햄의 버니지아식 창조 방법에, 무력한 일상에 담긴 의미들이 다채롭고 새롭게 보인다. 아니, 죽음이라는 그것도 자살이라는 그림자가 아른거리기 때문에 느껴지는 기분인 걸까.
“추상적이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관념이지, 특별히 병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죽음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일까, 지극히 현실적인 것일까. 흔히 말하는 삶을 버텨내기 힘든 고통. 거기에 더해진 수치심, 모멸감, 벗어날 수 없는 슬픔, 그런 감정에 휩싸여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에는 질병, 가난의 이름을 붙인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인정인 듯이 여기게 된다. 하지만 죽음은 관념일까. 또 많은 이들이 ‘도대체 그런 이유로’라는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내뱉게 하는 그런 자살도 있다. 죽은 이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남은 이들이 오고갈 대화가 그려지는 말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그녀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정상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녀의 슬픔이 흔히들 경험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 우리는 전혀 알지를 못했다고.
우리가 전혀 알지를 못했다고 그 죽음에 의문을 품을 이유는 없다. 남아 있는 이들이 타인의 죽음에 심판자처럼 그것은 타당하니 아니니 말할 거리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마이클 커닝햄의 자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삶이 가져오는 죽음에 향한 욕망이다. 문화적인 차이인지 그들은 동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도, 절망이나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보인다. 이미 그들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정착되어 있어서일까. 등장인물마다 동성에 느끼는 특별한 감정의 순간이 드러난다. 그것 자체는 고민의 영역이 아닐 수 있는 배경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안정감인 걸까. 시대가, 사회가 받아들이는 동성애에 대한 비난과 수용의 정도를 알기에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절망의 충동이 더 크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니까, 그러한 동성에 대한 사랑 또한 이겨낸 삶에서 느끼는 일상에 대한 절망이니까. 아니, 샐리와 18년이란 세월을 보낸 클라리사보다 이성과의 결혼생활 속 버지니아와 로라의 자살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하다는 점이, 달리 시사하는 바가 있는 건가. 삶속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재능에 대한 갈망, 일상처럼 찾아오는 두통과 염증들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에 세 여인이 경험하는 입맞춤은 어쩌면 생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에 달라질 것 없는 삶이라도 동성과의 순간의 입맞춤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일상의 삶에 대한 감정을 더 예리하게 파고드는데 한몫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를, 순결하고 착란적이며 일상의 삶과 예술의 불가능한 요구 사이에서 좌절감을 느낀 울프를 상상해본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머니에 돌을 넣고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음걸이를 상상해본다.
맞아, 하루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야, 하고 클라리사는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파티를 연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홀로 조용히 살기 위해 가족들도 내팽개친다. 각자의 재능과 무제한으로 주어진 노력과 가장 호사스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책들을 쓰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내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 일로 이런 일들만큼이나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평범과 일상이라는 말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상실과 답답함, 소외 또한 있다. 세 여인의 일은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결정체이고 행복과 절망이 반복된 순간들이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간’, 나만의 ‘온도’가 있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짠맛, 견딜 수 없는 뜨거움. 적절한 온도를 찾지 못해 그냥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순간이, 특정한 목표를 위해 열정적으로 헤엄질을 하고 나서 느끼게 되는 허무의 순간이, 탈진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여인이 있다. 그들 삶을 가만 들여다보면 세 여인은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며 책임감 또한 잊지 않지만 또다른 역할에 대한 동경과 삶에 대한 의구심이 한가득이다. 지금 또 한 여인의 삶을 보탠다 한들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이라는 게 다르지 않은 듯 시간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듯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