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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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뒤에 둔 시선


축복받은 집 Interpreter of Maladies, 줌파 라히리,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2013.


  줌파 라히리의 글은 편하게 읽힌다. 섬세하다. 따뜻한 느낌과 아릿한 느낌이 오랫동안 머문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장편 <이름뒤에 숨은 사랑>이기에 인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계속된 질문을 단편집에서 느끼게 된다.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저 줌파 라히리가 관계하는 이민생활을 하는 인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이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어느 순간의 감정들을 잘 포착하고 그것을 편안하게 내밀한 감정의 언어로 잘 묘사한다. 격정적인 사건을 보고 있지 않음에도 마음의 격랑이 크게 이는 것은 이 감정의 여운이 사그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심한 관찰자의 시선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어서 문자 언어인 이 소설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잘 떠올려졌다.

  이 단편집은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평론가는 단편집의 전체 작품에 대해 찬사했다. 정말로 특정한 작품만이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단편 하나 하나가 뚜렷한 느낌으로 생생하다. 아이의 시선이 포착된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센 아주머니의 집」에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를 둘러싼 불안과 고독을 감지하는 그 시선때문이었고 미국에서 살아가는 인도인이 처한 현실 모습을 뼈저리게 느끼며 타인이 아닌, 낯선 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를 건네는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이 적응의 긴 버전이 「세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인 것 같다. 자알, 견뎌내고 버틴 그 삶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p309

 

  한편,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선 일상에서 한순간 급격하게 단절되는 순간의 감정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마치 어느 순간 배가 부르듯, 물 한방울이 컵에 가득찬 줄 모른 채 마침 딱 한방울에 의해 흘러내리는 그 어떤 날의 감정들. 삶의 불편과 환희의 감정이 들어차던 순간을 터뜨리는 것보다 조용히 멈춰버리는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

  이 대표적인 느낌이 「일시적 문제」다. 한국의 문학상 수상 작가의 표절 의심에 중심에 선 작품이다. 쇼바와 슈쿠마의 아이가 사산된 후 그들 사이에 생겨난 거리감에 관한 이야기인데, 한공간에 살지만 타인처럼 서로 마주하기를 꺼리는 두 부부의 모습이 줌파 라히리의 장편 <저지대>를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드라마 「연애시대」가 생각났다. 아내가 사산한 아이를 낳은 날 남편은 늦게 왔다. 그 순간에 함께 하지 않은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랄까, 끝까지 자신이 없었던 이유를 말하지 않는 남편과 자신이 사산한 아이를 낳았다는 실패한 느낌으로 힘들어하는 아내는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 이혼했다. 남편의 결혼식에서야 그날 남편은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장례 절차를 치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때 아내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사르라지고 미안함과 고마움에 어쩔 줄 모르는데 이 연기를 한 손예진의 모습이 쇼바에게 겹쳐졌다.

  쇼바와 슈쿠마도 아이가 사산된 후 서로 최소한의 마주침만을 하며 견디고 있는 중이다. 정전을 틈타 서로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에  이제 화해의 순간이 도래할 듯한 느낌을 풍긴다. 예상보다 빠른 단전의 복구처럼 그들은 촛불을 켜고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처럼 이제 일상의 대화를 나눌 듯이 보인다. 그러나 슈쿠마는 단전된 시간 속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쇼바의 보다 확실한 헤어짐을 말하기 위한 전초였음을 안다. 서로에게 상처를 새기기 위한 말들. 그때 남편, 슈쿠마가 내뱉은 말은, 그날 아이를 품에 안고 느낀 아이에 대한 묘사다. 함께 슬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소원했던 관계는 이제 일시적인 문제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쇼바가 다시 전등을 껐다는 것에.

  「축복받은 집」 또한 그렇다. 새 집에서 여러 성물들, 십계명이 적힌 행주, 그리스도상이나 성모 마리아상을 찾아내는 트윙클은 집을 “축복받은 집“이라 칭한다. 하지만 정돈된 깔끔함을 원하는 산지브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들은 기독교인도 아니니까. 불필요한 물건들에 관심을 두고 굳이 쓸모를 찾는 트윙클의 갈등은 쇼바와 슈쿠마처럼 어느 순간 소통하지 않는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한다. 그러나 또한 사소한 트윙클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이해를 넓혀가는 산지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기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렇다. 쉽게 내뱉지 않고 마음속으로 자신이 가진 인상과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고 한순간 깨닫고 또 한순간 깨닫는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쉽게 내비치지 않지만 「질병 통역사」에서처럼 타인에게 기대어, 또다른 계기를 통해 문제에 핵심에 가 닿는다. 이 책의 원제가 이 단편이라는 것 역시 의미있다고 여긴다. 관광안내원이자 질병을 통역해주는 직업을 가진 카파시에게 자신의 문제를 터놓고 마음을 편하게 해줄 말을 요구하는 다스 부인의 요구처럼.

  마치 스스로 문제의 원인을 알지만 그것에 가 닿지 않으려 빙빙 돌다가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의 느낌과 감정은 이제 처음에 느꼈던 그때의 느낌과 감정과는 다르다. 해결의 방식은 항상 의미의 재발견이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그것은 타인에 의지해 혹은 먼 훗날의 내가 이 모습을 서술하는 듯한 느낌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내가 과거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처럼 줌파 라히리의 등장인물들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그렇게 돌고 돌아 한걸음 뒤에 서서 바라보는 시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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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물리학

 

중력의 법칙, 장 퇼레, 성귀수 옮김, 열림원, 2008.

 

   이 소설이 연극이라면, 영화라면 등장인물은 몇 명 출연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은 단 두 명이다. 두 명의 대화로 이어가는 소설의 전개는 흥미진진하다. 작가 장 퇼레는 『자살가게』에서도 블랙 유머를 가득 구사하는데 프랑스가 자랑하는 이야기꾼이라 불린다. 그의 소설을 읽을수록 이 말에 동감하게 된다.

 

한쪽 눈이 여자를 무죄방면하는 동안 다른 쪽 눈은 여자를 단죄하는 것인가……그렇다면 질이 지금 처해 있는 정확한 위치는 두 눈 사이가 되는 셈이다. p137

 

   경찰관 질 퐁투아즈의 두 눈 사이에 있는 여자. 여자는 10년 전 지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러 경찰서에 와 있다. 공소시효 3시간 정도를 앞두고서. 여자의 죄는 12층 아파트에서 남편을 떠민 것이라 말한다. 12층 창문에서 떨어진 남편은 양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사망했다. 그 사건은 자살 시도 전력이 있는 남편의 자살로 결론 났다. 이 떨어짐, 이에 대한 중력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떨어짐은 잠깐이고 경찰서에서 경찰관과 여자의 대화만이 진행된다. 머릿속에 막연히 ‘중력’과 ‘중력의 법칙’이 무언가에 대한 물음을 희미하게 붙잡고 소설을 읽는데 두 사람의 대화속에 빨려 들어가 지켜보는 내내 긴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데 중력은?

   경찰관이라면 자수하는 이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더라도 정확한 사항을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직업적인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경찰관은 사건경위를 듣고 범죄혐의를 파악하고도 ‘절대로’ 체포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겨 적극적으로 여자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절대로’ 10년 동안 자신의 죄의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노라며 감옥에 들어가기를, 합당한 벌을 받기를 원한다.

   오래도록 죄의식에 시달려 온 여자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경찰관은 도대체 왜 이토록 여자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가.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자주 여자와 아이들을 구타했고 자살 시도로 잦은 치료를 받고 있기도 했으며 그날도 역시 창문에 매달려 자살하겠다고 외쳤기에 여자는 그럼, 소원대로 해주겠다며 남편을 밀었다고. 그러나 당시에 경찰관들에겐 남편이 자살했다고 진술했다는 이 여성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체포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만. 그전에 우리의 경찰관은 3시간 후의 당직에서 벗어나 휴일을 맘껏 즐기고 경찰업무를 잊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다. 그러니 3시간만 참으면 경찰관은 아무런 일처리를 할 필요없이 휴일을 향해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라고 하더라도 질 퐁투아즈 경찰관에게 이 여자의 자백과 행동은 도대체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다. 실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결정이다. 어쨌든 남편은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망나니같은 놈이고, 그런 놈이 이 사회에 없는 것이 훨씬 좋은 일 아닌가.

 

책상 위의 텅 빈 성모마리아는 여전히 감색 의상을 걸친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그 발치에는 고전적인 윤곽을 갖춘 머리 모양 마개가 책상에 볼을 댄 채 누워 있다. 자세히 보니, 성모마리아의 한쪽 눈에 묻었던 수의와 약물 한 방울이 방금, 마치 베게처럼, 자기 머리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한 장의 얼굴사진을 슬그머니 적시고 있다.

마리아가 지미를 애도하고 있는 셈이다……. 리지외 출신의 경찰관은 도대체 이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신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무얼 뜻하는 걸까? 그럼에도 죄지은 여자를 체포하지 말아야 하는가? p149

 

   처절하게 여자를 설득하기 위한 경찰관의 노력은 여자의 삶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경찰관 자신의 인생을 끄집어내게끔 한다. 탈법과 타락의 비루한 제 이야기 하나하나, 낱낱이. 마치 경찰관의 자백, 고해성사 같다. 이제 체포되어야 할 사람은 경찰관인 것만 같다. 이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경찰관에게 여자의 위치는 성모마리아, 신부와 같았을 지도 모른다. 죄를 지었으나 언뜻 무결해 보이기도 하는 여자의 상태, 그 도덕심에 대해 경찰관의 자기고백이 나왔을지 모른다.

   아무리 범죄자들을 조사하고 체포하는 그런 좋지 못한 일상만을 접하는 경찰업무에 시달린다 한들 그 조서 하나를 피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절절하게 이야기를 내뱉는 경찰관의 이 노력이 처음엔 웃기다가 차차 경건해보이기도 한 까닭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던진 경위는, 축 늘어진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가만히 누워 있다. 붕대를 감은 왼손의 반지 속 어금니가 마치 작은 수도원처럼 보인다.

이제 그는 그 어떤 꿈의 기억도 지니지 않는 죽음의 형제, 깊은 잠 속에 빠져든다……. p187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압박을 가해도, 공포를 심어줘도 여자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여자의 온 생은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곳곳에서 남편의 얼굴을 만났고 이제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 이상 시간이 없는 것이다. 결코 여자를 떠나지 않을 죄의식이라는 중력장. 그리고 경찰이지만 경찰이라는 업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찰에게 되돌아오는 경찰업무라는 중력장. 그리고 그들에게 잔잔히 파동치는, 그러나 전체를 휘감는 ‘도덕’이라는 중력장. 알 수 없이 흐르는 중력이 인간의 생을 결정짓는다. 그 어떤 발버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의 집결지는 경찰관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가 쥐고 있는 듯하다. 수도원처럼 보이는 반지. 결국 중력의 법칙은 도덕의 또다른 이름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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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광기


육식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임호경 옮김, 문학동네, 2010.


   독특하다,라는 말에 걸맞은 베르나르 키리니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 작가는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독특한 스타일의 작가에게 주는 ‘스틸’상을 수상했다는 말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는다. 베르나르 키리니. 이 작가를 프랑스문학계에선 환상 문학계의 대표적 작가인 보르헤스, 포 등을 잇는 작가로 거론하는 모양이다. 열네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육식이야기」에는 여전히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작가의 스타일이 펼쳐진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보다 일단, 기괴하군이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간다. 작품 전반의 분위기는 음산한 열대우림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 속에서 서늘했다가 놀랐다가 나가고 싶어 했다가 포근함을 느끼기도 했다가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움츠러들기도 했다가, 별별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상상력만큼이나 별개로 환상속으로 통과하게끔 하는 맛이 있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단편은 현실에서 벌어질 개연성이 있긴 하겠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형태, 또는 등장인물의 절대 악과 같은 류의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는다. 당연 이상한 상황이 등장하는데 그 상황은 더 이상한 상황과 더 이상한 등장인물의 사고패턴으로 이어진다. 역시 적절한 말은 기괴하다, 정도일까. 유쾌하다는 말은 선뜻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구 머리야’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이런 류의 상상이란, 이런 류의 환상이란 마법이란 단어에서 느끼는 귀엽고 유쾌하고 재밌는 종류의 환상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생각해보니, 단편의 제목뿐만 아니라 단편집 전체의 이야기가 육식으로 가득찼다. 「육식이야기」는 거대 식물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굳이, 육식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였는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언뜻 알듯하다. 단편 「밀감」이 반복적으로 밀감과 오렌지를 꺼내들며 이야기해도 사그라지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 피의 이미지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밀감」은 그 껍질을 벗기고 상큼하거나 시큼하거나 달달한 과즙을 상상할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시작부터 오렌지 주스에 피를 섞어 마시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것은 현실이라도 궁금한데, 하물며 소설이니까 적극적으로 이 남자의 사연을 궁금해 하는 이가 어떤 사연인지 물어준다. 그리하여 남자는 온몸이 오렌지 껍질로 되어 있었다는 아리따운 여인과의 만남을 이야기해준다. 오렌지 껍질을 까먹듯 그 여인과의 오렌지향 가득한 사랑을 나누지만 환상적 사랑이 지나고 난 이후에 오렌지 껍질로 가득찬 여인을 직시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침몰한 배에서 유출된 기름이 잔뜩 유출되어 그 덩어리로 출렁이는 바다를 찬양하는 학자도 등장한다. 기름 범벅인 바다에 대한 탁월한 찬양을 하는 자의 사고 또한 식물적이기보다는 육식의 이미지에 가깝게 느껴진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독 잘 청취하는 놀라운 청력의 소유자도 등장한다. 육신이 늘어나는 주교도 등장한다.    

 「육식 이야기」속 식물학자는 식충식물에 반해 모든 것을 제껴두고 식충식물 연구에만 매달린다. 연구용으로 채취해 온 거대 파리지옥과 늘상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이 식물학자의 점점 더해지는 광기를 보며 조수는 식물학자를 떠나고 몇 년 후 식물학자가 의문사 했음을 전한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짐작가는 범인을 가까이에 두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읽다 보면 유출된 기름냄새가 온몸을 휘감은 듯 머리가 아프다. 조금 신선한 공기를 쐬지 않으면 같이 미쳐버릴 것만 같다. 이 단편집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처럼 광기에 빠지는 일은 욕망에 빠지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욕망은 내도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기도 하다 싶다. 욕망을 쫓는 일은 힘든 일이라는, 발목 잡힐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완전한 욕망에 빠지는 일도 쉽지 않다. 온전히 욕망에 빠져 그 욕망을 과감하게 가감없이 발산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선택인 것일까, 환상에 매몰되는 것일까. 문득, 욕망에 광기에 빠지는 일이라는 것은 신선한 공기를 쐬지 못하는 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욕망이란 옳지 않다는 이미지로 인한 생각일까. 어쨌든 육식이야기에서의 육식, 이 단편집에서의 육식이란 욕망을 욕망하는 이야기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생각을 하며 작가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로부터 빠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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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거짓의 문장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 2012.

 

    한국의 단편은 정해진 분량을 대체로 가늠할 수 있다. 각종 공모전들이 소설의 분량을 일률적으로 정하고 있으니까. 단편이라면 원고지 몇 페이지, 책으로 몇 페이지 정도라는 것을 안다. 셜리 잭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단편은 이야기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분량이라는 것이 주어질 뿐, 한국처럼 천편일률적이진 않다)의 단편은, 분량이 자유롭다. 이것이 경향인지 최근 한국소설에도 짧은 이야기라 기획으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나오는 것이지 특정한 분량으로 제재를 두어야 할 것은 아니긴 하다. 그래서 단편이라는 양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이야기의 분량에 가끔 당황하긴 한다.

   이런 짧은 분량의 이야기는 종종 유머와 풍자를 곁들인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내가 읽은 단편 소설들에서만 판단하건대 그렇다. 키리니의 작품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상당한 풍자와 유머들이 튀어나온다. 장편소설에 피에르 굴드가 나오는데 이 단편집이 키리니의 첫 출간작이었으니 피에르 굴드는 작가의 페르소나인가 싶다. 16개의 단편 곳곳에서 피에르 굴드를 만날 수 있다.

   단편집의 제목인 「첫 문장 못쓰는 남자」가 가장 인상적이다. 첫문장을 못떼는 이야기가 너무나 공감되어 요즘 유행말로 웃프게 느껴진다. 결국 첫문장을 쓰지 못하고 문장 속에 갇혀버리는 그런.

 

첫 문장, 그것이 문제였다. 수년 전부터 구상해왔던 책을 쓰기로 결심한 날, 굴드가 고민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백지를 앞에 놓고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느라 몇 시간을 흘려보냈다. 금방이라도 글을 써내려갈 듯이 끊임없이 만년필촉을 종이 위에 갖다대고 손목을 부드럽게 풀면서 첫 글자의 획을 그어보려 했지만, 글을 시작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신경이 쓰여 매번 멈추고 말았다.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것은 바로 그 첫문장에서 비롯될 것이고, 따라서 첫 문장을 잘못 시작했다가는 책 전체가 망가져버릴 게 틀림없었다. p9

 

   굴드처럼 모든 문장을 쓰는 일은 어렵지만 첫문장은 유독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시작을 하던 때도 많았는데 줄거리만큼이나 “문장” “첫문장”에 대한 관심도 증가한 것 같다. 이 단편에서 굴드는 첫문장을 써내기 위해 엄청나게 고심을 한다. 그래서 그는 글쓰는데 어려움을 느끼는데 결국 굴드는 작가가 되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어서 결국 아무 내용도 쓰지 못한 소설의 작가.”

   그럼에도 굴드는 계속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단편집 곳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기 위한 피에르 굴드의 종횡무진 활약상을 만날 수 있다. 피에르 굴드는 단 한권의 책을 쓰고 영원히 글쓰기를 포기한 ‘이클립스들’에 매료되어 첫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을 쓰고자 하지만 쉬울 리가. 첫 문장을 못쓰는 남자 피에르 굴드가 마지막 작품 「단검에 찔린 유명인들에 관한 안내서」를 쓰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찔러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재밌고 독특하게 생각을 전개시킨 소설들을 만나다 보면 외국인들의 환상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의 세계들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이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일 지도 모르지만 다소 ‘문화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 곳곳에서 글쓰기와 작가에 대한 정체성과 고민이 지속된 단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괴한 이야기의 나래를 펼쳤다. 곳곳에 들어있는 피에르 굴드의 활약들이 글을 쓰기 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대부분의 작가는 거짓말하는 재능이 바닥나 이제는 진실밖에 이야기하지 못한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교묘하게 얽힌 이야기들을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야기들을 하려는 작가들이 있고 작가가 되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힘들고 어렵다는 문장들을 나열하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건. 거짓을 위함일까, 진실을 위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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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사고와 말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수전 손택·조너선 콧, 마음산책, 2015


 수전 손택을 알게 된 건 수전 손택의 글을 읽어서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책을 읽는 중에 수전 손택의 이름과 글과 책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왔다. 마침내 난 수전 손택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고 그녀의 글을 읽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글을 읽고 나선 수전 손택의 생전에 더 많이 읽을 것을 후회했다.

  타인의 책에서 반복되어 나타났기에 수전 손택을 알게 된 처음엔 수전 손택의 글을 읽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은데 사실, 수전 손택의 책들은 책의 두께와 말의 무게에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소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해도 다른 소설들에 비해 더듬거렸다.

  그에 비해 수전 손택의 사후에 나온 책들은 얼마나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가 생각하면 놀랍다. 이 책 또한 인터뷰 형식이라서인지 글이 쉬이 읽혀진다. 역시나 수전 손택의 말이고 생각을 담고 있는데도 그렇다. 어쩌면 질문과 답으로 이어진 형식은 나홀로 묻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전 손택의 육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글을 통해 생각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실제 목소리는 내가 느낀 것과 너무 달라 놀란 작가들이 몇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느낌과 수전 손택의 실제의 괴리가 얼마만큼인가 알고자 하는 걸까.

  옛 사진이란 것이 항상 그렇지만, 더구나 흑백사진에서 풍기는 느낌이란 것은 사람을 참 인상적이게 만든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과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습게도 타인같지가 않다. 오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들여다본다. 안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면서도, 안다고 그렇게 느낀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 남겨진 자신의 결점. 말이 많은 것이라는 일기가 생각난다. 말이 많다는 것은 수다스럽다는 것으로 통칭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런 느낌은 없다. 하지만 글로 보는것과 또 다르니까. 1978년 파리에서의 12시간 인터뷰 전문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수전 손택의 말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는데 “명료하고 권위적이고 직접적인 말투를 갖기 전에는 인터뷰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후의 인터뷰로 그 완성의 결과라고 한다. 인터뷰 당시의 호흡 그대로라고 하는데도 정말이지 명료하다. 삶에 대한 확고한 자기 생각이 없다면 말로 명료하게 나와지지 않는다. 마흔 다섯의 수전 손택은 완결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거든요. 일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사실 글을 쓸 때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죠. 대중을 경멸하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제가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린다는 건 내가 믿는 바로서―글을 쓸 때는 물론 실제로도 믿죠―그걸 전달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다 쓰고 나면 제가 다른 관점으로 옮겨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훨씬 더 복잡해지죠…….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런 얘기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글을 쓰고 나면 전 이미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랍니다. p177~178


  수전 손택식의 사고와 글쓰기는 내게 유사점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당한 거리감 또한 준다. 이것은 여전한 사고속에 머물러 자기확신이 없는 나와 수전 손택의 차이점일까. 또한 지성의 한없는 부족의 이유도 있겠다. 아무도 내게 인터뷰하자고 조르지는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수전 손택처럼 생각들이 좀더 명료해질 때까진 말을 남발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다. 하긴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공표되었기에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낌으로써 일을 진행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반면 나는 내가 그것을 행한 이후에나 말을 해애 한다는 강박을 느끼긴 했는데, 그런 점에서 글은 또 다른 것 같다. 글이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도 같다. 말이란 조심스럽고 글또한 조심스럽지만 어떤 형태로든 모두가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상은 생각의 연속이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등등의 말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이것참 삶에서 내 확고한 생각하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야 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전 손택처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행동력이 주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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