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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평점 :
한걸음 뒤에 둔 시선
축복받은 집 Interpreter of Maladies, 줌파 라히리,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2013.
줌파 라히리의 글은 편하게 읽힌다. 섬세하다. 따뜻한 느낌과 아릿한 느낌이 오랫동안 머문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장편 <이름뒤에 숨은 사랑>이기에 인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계속된 질문을 단편집에서 느끼게 된다.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저 줌파 라히리가 관계하는 이민생활을 하는 인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이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어느 순간의 감정들을 잘 포착하고 그것을 편안하게 내밀한 감정의 언어로 잘 묘사한다. 격정적인 사건을 보고 있지 않음에도 마음의 격랑이 크게 이는 것은 이 감정의 여운이 사그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심한 관찰자의 시선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어서 문자 언어인 이 소설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잘 떠올려졌다.
이 단편집은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평론가는 단편집의 전체 작품에 대해 찬사했다. 정말로 특정한 작품만이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단편 하나 하나가 뚜렷한 느낌으로 생생하다. 아이의 시선이 포착된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센 아주머니의 집」에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를 둘러싼 불안과 고독을 감지하는 그 시선때문이었고 미국에서 살아가는 인도인이 처한 현실 모습을 뼈저리게 느끼며 타인이 아닌, 낯선 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를 건네는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이 적응의 긴 버전이 「세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인 것 같다. 자알, 견뎌내고 버틴 그 삶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p309
한편,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선 일상에서 한순간 급격하게 단절되는 순간의 감정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마치 어느 순간 배가 부르듯, 물 한방울이 컵에 가득찬 줄 모른 채 마침 딱 한방울에 의해 흘러내리는 그 어떤 날의 감정들. 삶의 불편과 환희의 감정이 들어차던 순간을 터뜨리는 것보다 조용히 멈춰버리는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
이 대표적인 느낌이 「일시적 문제」다. 한국의 문학상 수상 작가의 표절 의심에 중심에 선 작품이다. 쇼바와 슈쿠마의 아이가 사산된 후 그들 사이에 생겨난 거리감에 관한 이야기인데, 한공간에 살지만 타인처럼 서로 마주하기를 꺼리는 두 부부의 모습이 줌파 라히리의 장편 <저지대>를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드라마 「연애시대」가 생각났다. 아내가 사산한 아이를 낳은 날 남편은 늦게 왔다. 그 순간에 함께 하지 않은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랄까, 끝까지 자신이 없었던 이유를 말하지 않는 남편과 자신이 사산한 아이를 낳았다는 실패한 느낌으로 힘들어하는 아내는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 이혼했다. 남편의 결혼식에서야 그날 남편은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장례 절차를 치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때 아내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사르라지고 미안함과 고마움에 어쩔 줄 모르는데 이 연기를 한 손예진의 모습이 쇼바에게 겹쳐졌다.
쇼바와 슈쿠마도 아이가 사산된 후 서로 최소한의 마주침만을 하며 견디고 있는 중이다. 정전을 틈타 서로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에 이제 화해의 순간이 도래할 듯한 느낌을 풍긴다. 예상보다 빠른 단전의 복구처럼 그들은 촛불을 켜고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처럼 이제 일상의 대화를 나눌 듯이 보인다. 그러나 슈쿠마는 단전된 시간 속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쇼바의 보다 확실한 헤어짐을 말하기 위한 전초였음을 안다. 서로에게 상처를 새기기 위한 말들. 그때 남편, 슈쿠마가 내뱉은 말은, 그날 아이를 품에 안고 느낀 아이에 대한 묘사다. 함께 슬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소원했던 관계는 이제 일시적인 문제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쇼바가 다시 전등을 껐다는 것에.
「축복받은 집」 또한 그렇다. 새 집에서 여러 성물들, 십계명이 적힌 행주, 그리스도상이나 성모 마리아상을 찾아내는 트윙클은 집을 “축복받은 집“이라 칭한다. 하지만 정돈된 깔끔함을 원하는 산지브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들은 기독교인도 아니니까. 불필요한 물건들에 관심을 두고 굳이 쓸모를 찾는 트윙클의 갈등은 쇼바와 슈쿠마처럼 어느 순간 소통하지 않는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한다. 그러나 또한 사소한 트윙클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이해를 넓혀가는 산지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기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렇다. 쉽게 내뱉지 않고 마음속으로 자신이 가진 인상과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고 한순간 깨닫고 또 한순간 깨닫는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쉽게 내비치지 않지만 「질병 통역사」에서처럼 타인에게 기대어, 또다른 계기를 통해 문제에 핵심에 가 닿는다. 이 책의 원제가 이 단편이라는 것 역시 의미있다고 여긴다. 관광안내원이자 질병을 통역해주는 직업을 가진 카파시에게 자신의 문제를 터놓고 마음을 편하게 해줄 말을 요구하는 다스 부인의 요구처럼.
마치 스스로 문제의 원인을 알지만 그것에 가 닿지 않으려 빙빙 돌다가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의 느낌과 감정은 이제 처음에 느꼈던 그때의 느낌과 감정과는 다르다. 해결의 방식은 항상 의미의 재발견이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그것은 타인에 의지해 혹은 먼 훗날의 내가 이 모습을 서술하는 듯한 느낌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내가 과거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처럼 줌파 라히리의 등장인물들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그렇게 돌고 돌아 한걸음 뒤에 서서 바라보는 시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