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거짓의 문장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 2012.

 

    한국의 단편은 정해진 분량을 대체로 가늠할 수 있다. 각종 공모전들이 소설의 분량을 일률적으로 정하고 있으니까. 단편이라면 원고지 몇 페이지, 책으로 몇 페이지 정도라는 것을 안다. 셜리 잭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단편은 이야기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분량이라는 것이 주어질 뿐, 한국처럼 천편일률적이진 않다)의 단편은, 분량이 자유롭다. 이것이 경향인지 최근 한국소설에도 짧은 이야기라 기획으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나오는 것이지 특정한 분량으로 제재를 두어야 할 것은 아니긴 하다. 그래서 단편이라는 양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이야기의 분량에 가끔 당황하긴 한다.

   이런 짧은 분량의 이야기는 종종 유머와 풍자를 곁들인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내가 읽은 단편 소설들에서만 판단하건대 그렇다. 키리니의 작품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상당한 풍자와 유머들이 튀어나온다. 장편소설에 피에르 굴드가 나오는데 이 단편집이 키리니의 첫 출간작이었으니 피에르 굴드는 작가의 페르소나인가 싶다. 16개의 단편 곳곳에서 피에르 굴드를 만날 수 있다.

   단편집의 제목인 「첫 문장 못쓰는 남자」가 가장 인상적이다. 첫문장을 못떼는 이야기가 너무나 공감되어 요즘 유행말로 웃프게 느껴진다. 결국 첫문장을 쓰지 못하고 문장 속에 갇혀버리는 그런.

 

첫 문장, 그것이 문제였다. 수년 전부터 구상해왔던 책을 쓰기로 결심한 날, 굴드가 고민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백지를 앞에 놓고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느라 몇 시간을 흘려보냈다. 금방이라도 글을 써내려갈 듯이 끊임없이 만년필촉을 종이 위에 갖다대고 손목을 부드럽게 풀면서 첫 글자의 획을 그어보려 했지만, 글을 시작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신경이 쓰여 매번 멈추고 말았다.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것은 바로 그 첫문장에서 비롯될 것이고, 따라서 첫 문장을 잘못 시작했다가는 책 전체가 망가져버릴 게 틀림없었다. p9

 

   굴드처럼 모든 문장을 쓰는 일은 어렵지만 첫문장은 유독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시작을 하던 때도 많았는데 줄거리만큼이나 “문장” “첫문장”에 대한 관심도 증가한 것 같다. 이 단편에서 굴드는 첫문장을 써내기 위해 엄청나게 고심을 한다. 그래서 그는 글쓰는데 어려움을 느끼는데 결국 굴드는 작가가 되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어서 결국 아무 내용도 쓰지 못한 소설의 작가.”

   그럼에도 굴드는 계속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단편집 곳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기 위한 피에르 굴드의 종횡무진 활약상을 만날 수 있다. 피에르 굴드는 단 한권의 책을 쓰고 영원히 글쓰기를 포기한 ‘이클립스들’에 매료되어 첫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을 쓰고자 하지만 쉬울 리가. 첫 문장을 못쓰는 남자 피에르 굴드가 마지막 작품 「단검에 찔린 유명인들에 관한 안내서」를 쓰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찔러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재밌고 독특하게 생각을 전개시킨 소설들을 만나다 보면 외국인들의 환상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의 세계들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이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일 지도 모르지만 다소 ‘문화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 곳곳에서 글쓰기와 작가에 대한 정체성과 고민이 지속된 단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괴한 이야기의 나래를 펼쳤다. 곳곳에 들어있는 피에르 굴드의 활약들이 글을 쓰기 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대부분의 작가는 거짓말하는 재능이 바닥나 이제는 진실밖에 이야기하지 못한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교묘하게 얽힌 이야기들을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야기들을 하려는 작가들이 있고 작가가 되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힘들고 어렵다는 문장들을 나열하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건. 거짓을 위함일까, 진실을 위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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