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물리학

 

중력의 법칙, 장 퇼레, 성귀수 옮김, 열림원, 2008.

 

   이 소설이 연극이라면, 영화라면 등장인물은 몇 명 출연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은 단 두 명이다. 두 명의 대화로 이어가는 소설의 전개는 흥미진진하다. 작가 장 퇼레는 『자살가게』에서도 블랙 유머를 가득 구사하는데 프랑스가 자랑하는 이야기꾼이라 불린다. 그의 소설을 읽을수록 이 말에 동감하게 된다.

 

한쪽 눈이 여자를 무죄방면하는 동안 다른 쪽 눈은 여자를 단죄하는 것인가……그렇다면 질이 지금 처해 있는 정확한 위치는 두 눈 사이가 되는 셈이다. p137

 

   경찰관 질 퐁투아즈의 두 눈 사이에 있는 여자. 여자는 10년 전 지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러 경찰서에 와 있다. 공소시효 3시간 정도를 앞두고서. 여자의 죄는 12층 아파트에서 남편을 떠민 것이라 말한다. 12층 창문에서 떨어진 남편은 양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사망했다. 그 사건은 자살 시도 전력이 있는 남편의 자살로 결론 났다. 이 떨어짐, 이에 대한 중력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떨어짐은 잠깐이고 경찰서에서 경찰관과 여자의 대화만이 진행된다. 머릿속에 막연히 ‘중력’과 ‘중력의 법칙’이 무언가에 대한 물음을 희미하게 붙잡고 소설을 읽는데 두 사람의 대화속에 빨려 들어가 지켜보는 내내 긴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데 중력은?

   경찰관이라면 자수하는 이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더라도 정확한 사항을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직업적인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경찰관은 사건경위를 듣고 범죄혐의를 파악하고도 ‘절대로’ 체포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겨 적극적으로 여자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절대로’ 10년 동안 자신의 죄의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노라며 감옥에 들어가기를, 합당한 벌을 받기를 원한다.

   오래도록 죄의식에 시달려 온 여자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경찰관은 도대체 왜 이토록 여자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가.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자주 여자와 아이들을 구타했고 자살 시도로 잦은 치료를 받고 있기도 했으며 그날도 역시 창문에 매달려 자살하겠다고 외쳤기에 여자는 그럼, 소원대로 해주겠다며 남편을 밀었다고. 그러나 당시에 경찰관들에겐 남편이 자살했다고 진술했다는 이 여성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체포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만. 그전에 우리의 경찰관은 3시간 후의 당직에서 벗어나 휴일을 맘껏 즐기고 경찰업무를 잊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다. 그러니 3시간만 참으면 경찰관은 아무런 일처리를 할 필요없이 휴일을 향해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라고 하더라도 질 퐁투아즈 경찰관에게 이 여자의 자백과 행동은 도대체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다. 실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결정이다. 어쨌든 남편은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망나니같은 놈이고, 그런 놈이 이 사회에 없는 것이 훨씬 좋은 일 아닌가.

 

책상 위의 텅 빈 성모마리아는 여전히 감색 의상을 걸친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그 발치에는 고전적인 윤곽을 갖춘 머리 모양 마개가 책상에 볼을 댄 채 누워 있다. 자세히 보니, 성모마리아의 한쪽 눈에 묻었던 수의와 약물 한 방울이 방금, 마치 베게처럼, 자기 머리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한 장의 얼굴사진을 슬그머니 적시고 있다.

마리아가 지미를 애도하고 있는 셈이다……. 리지외 출신의 경찰관은 도대체 이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신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무얼 뜻하는 걸까? 그럼에도 죄지은 여자를 체포하지 말아야 하는가? p149

 

   처절하게 여자를 설득하기 위한 경찰관의 노력은 여자의 삶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경찰관 자신의 인생을 끄집어내게끔 한다. 탈법과 타락의 비루한 제 이야기 하나하나, 낱낱이. 마치 경찰관의 자백, 고해성사 같다. 이제 체포되어야 할 사람은 경찰관인 것만 같다. 이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경찰관에게 여자의 위치는 성모마리아, 신부와 같았을 지도 모른다. 죄를 지었으나 언뜻 무결해 보이기도 하는 여자의 상태, 그 도덕심에 대해 경찰관의 자기고백이 나왔을지 모른다.

   아무리 범죄자들을 조사하고 체포하는 그런 좋지 못한 일상만을 접하는 경찰업무에 시달린다 한들 그 조서 하나를 피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절절하게 이야기를 내뱉는 경찰관의 이 노력이 처음엔 웃기다가 차차 경건해보이기도 한 까닭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던진 경위는, 축 늘어진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가만히 누워 있다. 붕대를 감은 왼손의 반지 속 어금니가 마치 작은 수도원처럼 보인다.

이제 그는 그 어떤 꿈의 기억도 지니지 않는 죽음의 형제, 깊은 잠 속에 빠져든다……. p187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압박을 가해도, 공포를 심어줘도 여자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여자의 온 생은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곳곳에서 남편의 얼굴을 만났고 이제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 이상 시간이 없는 것이다. 결코 여자를 떠나지 않을 죄의식이라는 중력장. 그리고 경찰이지만 경찰이라는 업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찰에게 되돌아오는 경찰업무라는 중력장. 그리고 그들에게 잔잔히 파동치는, 그러나 전체를 휘감는 ‘도덕’이라는 중력장. 알 수 없이 흐르는 중력이 인간의 생을 결정짓는다. 그 어떤 발버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의 집결지는 경찰관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가 쥐고 있는 듯하다. 수도원처럼 보이는 반지. 결국 중력의 법칙은 도덕의 또다른 이름인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