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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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는.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달콤한책, 2018.


  이 세계는 1980년에 무슨 일이 있던 건가. 1980년의 테헤란에서도 1980년의 광주에서도.

  소설은 임신 칠개월의 여자가 몽둥이를 든 남자들을 피해 삼 층으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그 뱃속에 있던 아기, 마리암이다.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란혁명을 겪은 마리암은 소용돌이의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다. 여섯 살에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마리암이 두 문화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이 수필처럼 현실을 머금고 소설처럼 환상의 이야기를 머금고 펼쳐진다. 망명한 이들의 겪는 이민자의 설움, 정체성의 혼란을 줌파 라히리는 소설에 담았다. 나라가 달라서인지 같으면서도 다른 결을 보이는 이 소설은 이란이라는 나라를 페르시아로 생각하면 떠올려지는 느낌처럼 조금은 환상문학에 가깝게 느껴진다.

  알라딘과 천일야화를 연결지으며 양탄자가 하늘을 나르고 램프의 요정이 등장하는 이미지속에 늘 신비로운, 동화같은 이라고 생각해버리게 하는 단어, 페르시아. 하지만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다른 나라들이, 특히 서양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페르시아는 이란이고 이란 정부는 1935년부터 국호를 이란이라 부르도록 요청하고 있다.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신비와 환상은 사라지고 당장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이란을 미사일을 떠올리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밤마다 식은땀 흘리며 깨어난 마리암의 아버지가 떠올리는 것처럼, 망자들을 떠올리는 마리암처럼. 마리암의 가족이 떠나온 조국은 그때에도 죽음과 공포가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 곳이었기에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에 프랑스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쓰지 않기에 마리암은 머릿속에서 페르시아어를 지웠다. 마리암의 성장기를 채운 것은 상상의 이야기를 짓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었다. 허나, 내면과 소통하는 길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이국적인 이야기에 굶주린 청중들 앞에서 이야기꾼이 되어 일화에 살을 붙이고 내 목소리에 가락을 싣는다. 집중하는 작은 눈들이 보인다. 침묵이 홀을 덮는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린다. 내가 이겼다.

한편으로는 이국적인 나만의 작은 세계에 취해 살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자부심의 정체는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낭만저긴 망명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페르시아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에 맞게 가면을 쓴 마리암은 이란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채로 살아온 시절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삶을 힘겨워한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이란의 이미지는 혁명의 순간마저도 환상의 이미지이듯 소비된다. 자신의 조국을 거부하는 마리암에 의해서 잘 다져진 영화처럼 상영된다.  


“마리암, 네가 가진 두 문화를 이제 받아들이렴. 마음을 편히 가져.”

“그게 싫다는 게 아니에요. 남의 상처를 보고 환상을 품는 위선자들에게 화가 난 거예요.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정중하게 내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위선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요.”


  마리암 역시 스스로 위선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부추겼고 스스로도 그렇게 하고 있었음을 알까. 할머니는 마리암에게 내면을, 고통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마리이 ‘진짜 프랑스인’이 되어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자 할 때 그때 마리암은 다시 이란을 찾고 페르시아어를 찾는다. 망명자, 이민자의 2세들이 겪는 혼란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대체로 이들을 다룬 소설들은 혼란의 최고 해결은 부모님의 조국과의 화해이며 그곳으로 발디딤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와는 다른 지점이 있다. 마리암의 할머니가 마리암에게 하는 말들은 이런 상황에 놓인 ‘할머니’들의 말들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명징하게 현실인식을 하게 된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호메이니는 살인자다’ ‘샤 다음에 호메이니라니! 우리의 혁명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는 삐라를 서랍들 속에 넣었다. 아버지는 반정부 활동을 했다.


  아마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을까. 소설의 원제는 마르크스와 인형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이란 제목으로는 이미지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예상했기에 작가의 원제목을 곱씹게 된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여전히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금기적인 시각이 있어서는 아니겠지 가장 알맞은 상품성을 위한 선택이겠지 생각하면서 제목으로 인해 책에 대한 무게가 확연히 달라짐을 느낀다.


넌 오랜 세월 끝에 이곳에 돌아와서 근원이라는 바다에 푹 빠져버렸어.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네 인생을 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구나. 네 부모는 네가 거기에서 자랄 수 있도록 큰 대가를 치렀어.


  페르시아어를 찾으러 가는 마음의 길은 혼란스러웠지만 마리암은 자유롭다. 그녀는 그녀 세대에서 치뤄야 할 고통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아니 이란 전체의 흔적을 담고 있다. 정치지도자들로 인해 망가진 이란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상징을 낳기 위해 그들의 부모들은 더 큰 고통을 치뤘다. 이것을 인식하는 한 마리암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마리암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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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야기
클레망틴 오탱 지음, 류은소라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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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가 좋니?

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클레망틴 오탱, 미래의창, 2016.


  맨스플레인(mansplain)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찌감치 걸스플레인 콘셉트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누나가 알려줄게, 페미니즘 잘 얘기해주는 누나라고나 할까. 남동생의 질문에 답해주는 형태의 이 책은 짧은 페이지 속에 여성운동의 역사를 잘 설명해놓았다. 무엇보다 ‘마초이즘’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재밌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파리 부시장을 지낸 정치인이며 성폭력, 강간 피해자이다. '정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정신병자에게 당했다'라고만 생각하던 작가가 여성과 억압을 성찰하며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바로 2년 전 오늘, 강남역 살인사건이 촉발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이 단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기도 하다. 여성혐오 확산과 미러링과 함께 전개된 남성혐오, 미투운동과 남성 몰카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성별 대결 논쟁으로 치닫고도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를 테러리스트와 동일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페미니스트를 향한 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빗속에서 추모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염산 테러 공격” 하겠다는 글이 어느 싸이트에 올라왔다. 농담으로, 허세 가득한 글로 치부하기엔 지금의 현실이 녹록치 않고 이런 글을 쉬이 게재한다는 것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이처럼 ‘여성이 싫어서’ ‘페미니스트를 증오해서’ ‘여성이 만나주지 않아서‘ 등등의 ’여성 때문에’를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총기난사사건과 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서. 남자들이 원하는 형태의 ‘여자가 아니라서’의 이유로.

  ‘마초’. 마초적이라는 이 외국 단어를 남성들은 매우, 격렬하게 좋아하는 듯하다. 마초가 되지 못하는 것이 삶의 실패라도 되는 양 마초적임을 발산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마초적’임을 과시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허세와 멸시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들의 마초성은 여성을 억압하거나 여성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런 식의 말에 발끈하는, 억울한 남성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의하듯 마초는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여성을 지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다. 어떤가. 마초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토대를 가부장제로 본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게 “그럼 왜 뛰쳐나오지 않고 같이 사는 거야”라며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결책은 피해자가 집을 나오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식의 이런 판단은 너무 단순하고 미숙한 태도야.

어떠한 권한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세계의 전부인 가정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런 식의 생각은 정작 심리적 가해자 가 가정 폭력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는 거지. 저마다의 개인이 마른 나뭇가지 꺾듯 단박에 가부장제 역사의 무게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이와 같은 말을 오늘도 보았다. 피팅 모델 알바를 하면서 남성들에게 집단 성추행을 당하고 몰카를 찍힌 여성들의 피해를 알리는 글에서다. ‘속옷 촬영을 거부하고 나오면 되지, 왜 못 나왔냐’는 수많은 사람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런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반응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똑같을까.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겠다고 하니 수사를 지켜봐야하겠지만 당장 피해자도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충격적인 것은 남성들의 집단적인 마초이즘의 발현이다. 그들은 집단으로 함께하고 있어서인지 진정 두려움도 없고 범죄의식도 없이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일들을 지속해왔다. 여성을 억압할 확실한 수단을 쟁취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오래도록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죄의식도 없이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퍼붓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생활해 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를 불편하다 못해 혐오까지 하는 그들의 위선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남동생의 질문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여성들이 받는 일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들은 일상의 생활에서 무수히 차별받고 성폭력의 피해 또한 일상적인 여성들의 상황은 간과하면서도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내는 여성들의 목소리나 퍼포먼스들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은 성폭력 피해자의 울분이나 고용 등 각종 차별받는 여성의 목소리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동참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생각하지않고 과장된 제스처로 행주나 브래지어를 태우는 퍼포먼스 같은 것을 행하는 경우에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는 저런 것’이라며 비이성적, 과격하다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렇게 페미니스트들이 전하는 ‘내용’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마초이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지배 관계를 역전하는 것이 아니야. 여성들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버리지 않는 것,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 가증성의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기를 바라는 거야.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것, 동등이라고 무수히 외쳐대도 결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내려온 저 마초이즘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강렬한 열망 아닐까. 성차별 정책에 대해 무조건 역차별이라거나 특히 한국의 경우 그러면 여자도 군대가라는 말로 모든 논의를 펼치는 이들에게도 페미니스트 작가의 딱 맞는 설명이 있다.


‘역차별’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야! 영미권의 ‘적극적 조치’라는 말의 잘못된 표현이야. 이론 인해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오해의 소지가 있었어. ‘적극적 조치’ 또는 ‘자발적 조치’라고 하는 게 옳아. 적극적 조치란 피해를 입은 일부 집단에게 혜택을 주어 불평등을 개선해 나가자는 의도에서 실행되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말하는데, 특히 남녀 불평등과 관련,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혜택에서 시작되었어.


  페미니즘의 역사는 이제 100년 즈음인데 늘 주장하는 바가 큰 차이가 없다. 본질적인 것을 두고 반복된 투쟁의 역사가 지속된다. 작가가 이토록 남동생에게 설명을 잘하고 있는 것도 반복된 투쟁의 역사속에 남성들의 질문들이 늘 한곁같았다는 얘기 아닐까. 이해하려는 마음없이 상황을 인식하려는 마음 없이 그렇게 늘. 가부장제 안에서 마초이즘의 환상을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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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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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다

시월의 저택, 레이 브래드버리, 2018-01-22.


  환상적이고 서정적이다.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된 소설의 풍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싶은 기이한 매혹이 있다. 오랜 시간 씌여진 연작소설이라지만 『시월의 저택』이란 제목 아래 일렬로 모이기에 어색함은 없었다. 워낙 기이한 인물들이 드나들기에 이야기의 전개가 느슨하거나 건너뛰더라도 상상력으로 메꾸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상상의 나래가 작가가 제시하는 것에 비해 모자랄 뿐.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시월의 저택으로 모이는 것은 가족들의 파티를 위한 것이지만 그들이 ‘기록’되기 위함이다. 무수한 시간을 사는 이들, 그들은 그러니까 유령이고 오랜 시간 살아 있어 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려면 하나의 마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유령들이 머문 공간, 시월의 저택이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그 모든 것을 그려낼 존재로 유한한 인간인 티모시가 등장하는 것이 그래서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넌 찾아온 게 아니란다. 우리가 너를 찾아냈지. 셰익스피어로 발을 싸고, 포의 어셔 가를 베개 삼아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단다. 네 윗도리에는 ‘역사가’라는 쪽지가 핀으로 꽂혀 있었지. 너는 우리에 대해 적으라고, 목록을 만들라고, 태양에서 날아 내려오는 모습과 달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록하라고 보낸 거란다. 하지만 어쩌면 너도 저택이 불렀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 너는 글을 쓰고 싶어 조바심치며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성한 빛과 생명의 언약에 대해 말하던 성인 티모시의 이름을 부여받은 필멸의 존재인 티모시가 시월의 저택의 가족들에게 스며들어 어떻게 시월의 저택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가족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록한다. 마음으로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신비한 능력을 지닌 그들처럼 되고 싶은 티모시는 유한한 존재인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며 내내 불멸과 필멸, 삶과 죽음이라는 고뇌를 생각하게 이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기에 티모시에 동화되어 자유롭게 날거나 타인의 생각속을 넘나들거나 벽을 뚫고 들어오거나 나무 위에 살거나 땅속에 살다가 17년 만에 비가 내리면 물을 타고 흘러나오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뛰어나오기도 하는, 먼 옛날 이미 죽었거나 어떻게 해도 죽을 수 없는 이 유령가족들을 신비롭게 바라보며 동경한다. 결국엔 죽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령 가족들은 말한다. ‘삶을 서두르라‘고. 죽음은 신비로운 것이라고.

 

“삶은 방문일 뿐이며, 잠으로 완결되나니. 나는 죽음이라는 잠에서 찾아왔으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거야. 생명이라는 잠 속에서 쉬기 위해 바삐 달려가는 거지. 내년 봄이 오면 나는 누군지 모를 아가씨나 부인의 벌집 속에 깃들인 씨앗이 되어, 생명을 받아 영글기를 기다리게 될 거야.”  


  그들은 분명 떠나갈 것이니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위로처럼 삶에 대해 말한다. 현실과 환상 속을 넘나드는 이야기에서 유령의 시선으로 보면 죽음을 아는 것이 환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유한한 삶을 즐기라고 말하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지도 모른다.


“천국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 도착한 죽은 이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그대는 열정을 알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작은 목소리라고 적어라. 만약 답이 ‘그렇다’라면 그는 천상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지옥에서 불타오르게 될 것이니.”


   그 삶이 행복한가. 영원한 그 삶, 그에 대한 대답은 ‘기억’이란 측면에서 대답된다. 그들은 시간은 무거운 짐이라고 말한다.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수한 전화의 현장을 분노와 파괴와 공포의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또한 이미 죽어 있는 세계일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신비하거나 기괴한 능력을 가지고 사는 그들은 이미 삶과 죽음의 세상을 넘나들은 그들은 끊임없이 티모시에게 살아 있기를, 죽더라도 살아 있는 삶을 주문한다. 워낙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처럼 펼쳐져 유령가족들, 일족들의 삶에 혹하지만 신비롭다는 것 속에 왜인지 모를 슬픔이라 느낌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주 먼 뒷날 방문한 오래 묵은 집을 바라보는 것처럼 진한 향수와 서글픔이 공존하는 시월의 저택에서 시간이 주는 쓸쓸함을 곱씹게 된다. 이상하게도 책을 덮고 나면 한번의 삶이 훅, 지나가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 사진첩을 들춰보고 있었던 듯이. 아직 남은 삶을 향해 행복의 시선을 돌리고 싶지만 아직 남은 사진첩이 남아 나를 끌어당기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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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 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곰돌이 푸 시리즈
곰돌이 푸 원작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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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잔소리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의 동화, 만화를 다시 보는 일은 옛 기억이 떠올라서, 그때의 감정에 젖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곰돌이 푸에 관한 관심은 그 연장선이었을 거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책이었지만, 생각했던 것에 미치지 못해서 ‘멈춤’보다는 주루룩 책장이 넘어간 책. 다만, 곰돌이 푸와 친구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위로받았다. 그림책마냥 그림들이 좋았다.

  하필이면 이 책을 읽기 전 『긍정의 배신』을 읽은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모르긴 해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긍정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부정적인 편이니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는 곰돌이 푸와 만나 대화를 한다면 우리의 대화는 ……이 길어질 것이다. 그래도 한번쯤은 곰돌이 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공감하기도 하겠고 또 때로는 딴지를 걸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스토리가 있지 않았다. 그냥 곰돌이 푸의 그림을 배경으로 어쩌면 익히 아는 에피그램을 시화전처럼 담았다. 그렇기에 왜 곰돌이 푸가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고 페이지마다 담긴 문구들은 그냥 보기에 좋은 말 정도로 여겨졌다. 어쨌든 이런 문구들은 마음에 확 와닿아 실천해 나가면 좋은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면 ‘잔소리’와 다를 리 없는 것 아닌가. 나이를 먹어서만은 아니겠지만 좋은 말도 쇠귀에 경읽기와 같음을 오래도록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아, 하며 감탄하게 되는 경구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앞에 한 말들에 대해 다른 문구가 나와 앞의 말을 반박하는 형태가 된다. 매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런 자세를 견지하기 위한 좋은 생각들을 일러주는 방법이라도 상황이 늘 같지 않을 터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할까. 그러나 여기, 상황은 주어지지 않았으니 인생은 이런 건가 싶어진다. 언제나 갈등이 존재하고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 어쩌면 절대적으로 딱 들어맞는 문구란 없는 것인지도.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태도를 설정하는 힘이 굳건하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아서인지 마냥 좋게 말하는 이 메시지에서 웃음이 난다. 아니, 어릴 때였다면 좋았으려나. 나이듦은 온갖 좋은 말에도 딴지걸고 싶은 건지, 그렇지 못한 생에 대해 한탄하고 싶은 건지, 곰돌이 푸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지기까지 하다.

  전체적으로 행복을 위해서 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메시지가 들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견과 타인의 상황에 귀기울이고 받아들이라는 반복된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지. 세상살이는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오는 경쟁과 갈등과 어울림이니까.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 행복한 일은 매일 있는가라는 물음보다도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야 하나, 그러니까 하루를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가 싶다. 그러니까 내 스스로 생각하는 ‘행복’이란 기준이 무엇이든 좀더 오바스럽게 ‘행복’거리를 만들고 강박적으로 행복하다 생각하면, 정말로 그 하루는 행복한 것인가 싶은.

  곰돌이 푸는 내게 긍정을 심어주고 더 좋은 하루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텐데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그냥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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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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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스토너, 존 윌리엄스, 2015-01-02.


  “평온 속에 숨을 거뒀다.”

  그렇다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생각에 빠졌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평온’하다고 말하는 건 ‘보기에’ 평온함을 말하는 건가, 당사자의 언어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저 말은 안락사 기관 창립자의 말이었다. 말한 이의 직업을 연계해서 생각하니 수술 후 의사들이 항상 먼저 하는 말, “수술은 잘 됐습니다”가 떠올랐다.

  한 과학자가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기사를 스치듯 보고 인터넷에 구달 박사가 오르내릴 때  침팬지 박사 제인 구달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사진이 나온 기사를 보면서도 제인 구달 박사의 안락사를 도와준 사람인가 생각할 정도로 오로지 제인 구달만 떠올라서 『희망의 이유』에서 밀림생활 속 영성을 얘기하던 구달 박사의 선택에 생이란 그런 것인가, 노령이란 그런 것인가, 의아함과 쓸쓸함이 고조되었다. 기사를 제대로 읽고 나서야 제인 구달이 아닌 104세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선택’을 알게 되었고 역시 아는 대로만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반성했다. 하지만 제인 구달에서 데이비드 구달로 바뀌었다고 한들 기사를 보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이 바뀔 리는 없었다. 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파고속으로 출렁이며 20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며 삶을 끝낼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는 안락사를 실행한 생태학자의 말,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때까지 앉아 있다. 그러고 나서 점심을 약간 먹고 다시 앉아 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 을 뚫어져라 보며 소설 속 인물 스토너와 현실 속 인물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조용하게 뒤따르는 시선은 담담해서, 그의 생은 너무 우직해서 보는 이의 마음의 무거움을 길게 가져간다. 스토너의 생을 평범하다고 실패한 생이라고들 말하기에 ‘평범한 스토너의 삶’이란 말에 이의를 제기하며 평범과 실패를 가늠하는 시선이 무얼까 싶었다. 농업을 배우던 그가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알게 되고 문학을 사랑하는 학자로 삶의 길이 바뀌게 되는 일이 소설이라 ‘평범’치 않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은 우리 삶에서 사실 비일비재함에도 판타지처럼 여겨졌다. 무언가에 대해서 강렬함을 느끼고 그것을 선택하고 매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판타지이고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비현실적인 요소가 가득한 게 아닌가. 그의 생이 평범한 것이라면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사람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친구가 말하지 않았던가. 스토너를 향해 “몽상가이자 광인”이라고.

  항상 스토너는 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를 둘러싼 상황들만 휘이휘이 돌아간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지만 1년도 안돼 아내는 떠나가고 교수가 되고 학문에만 열중하지만 학교에서는 늘 밀려나는 신세가 된다. 그것도 친구에 의해서. 그가 한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혼란을 보냈고 그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세상에서 고립되며 병에 걸리며 또다른 사랑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삶에서 스토너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던가. 자신을 위해서, 분노를 쏟아낸 적이 있던가. 아닌 듯해도 스토너는 표면적으로는 늘 일정한 음을 내고 있었다.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세상에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는 스토너였으니 미치게 흘러가는 세상에 억울한 일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분노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의 심리를 알아가는 독자는 더 연민하고 더 아파하게 된다. 끝이 없이 조용히 죄어오는 이 감정이 판타지가 끝났음을 알리는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공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생의 모든 순간 살아 있었던 스토너의 인생이 이쯤되면 부러워진다. 그리고 스토너는 마지막 순간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회한에 대해서도 초연한 스토너는 죽음의 순간 홀로였다. 그의 생의 대부분이 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은 이기적이며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한다라고 생각했으니 끝끝내 이기적이었던 그의 마지막 순간을 굳이 위로하지는 않으련다. 위로는 오히려 내게 필요하다. 그럼에도 슬픔과 쓸쓸함을 느끼는 내게. 돌아볼 내 인생의 나날들에 스토너처럼 생각되지 않을 내 생애들에.

  104세. 마지막까지 말짱했던 구달 박사의 정신과 ‘안락사’라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부러움을 가진다. 어쩌면 이것은 구달 박사와 같은 신체 상태를 지닌 채이지만 한순간 놓아버린 정신 상태를 지닌 할머니의 모습으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일지 모른다. 어느날이던가,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다가 이 나라 근 100년의 역사가 결코 순탄치 않았을진대 그 속에서 살아야 했을 삶이 어찌 평범할 수 있으랴 싶었다. 할머니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의 열정은 어떤 형태였을까. 좋은 것을 느끼고 ‘선택’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속에서 살아내야 했을 삶이라 여겨져 마음아린 삶. 비록 신체는 노쇠하더라도 생을 마감하는 단 며칠전까지 정신만은 온전하기를 바라건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은 삶.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회한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남기지도 못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거나 선택할 상황도 맞지 못한 채로 있다. 가슴에 쌓인 한도 제대로 풀어볼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치매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를 향하 위로일까. 어버이날을 맞아 먼 곳에서 온 자식들은 치매노인의 마른 몸을 보며 눈물바다지만 이틀에 한번 보는 입장에선 어제보다 괜찮은데요라는 말만, 눈물 흘리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분명 스토너를 처음 읽었을 때 오래도록 마음 아렸고 그 여운이 길게 남아있는데 지금은 스토너의 삶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그 여운이 환상이었다 여겨진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한 인간 스토너의 생을 본 것이 아니라 인생이 어떻게 판타지일 수 있는지를 본 듯하여 현실로 넘어오고 싶지가 않다. 스토너의 인생을 쓸쓸히 여기면서 부러워하고 그의 태도를 동경하면서도 연민한다. 스토너와 내 생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보니, 훗날 나는 내 생을 돌아볼 때 스토너처럼 생각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이라서 거기에서 오는 슬픔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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