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작품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이야기도, 문체도, 구성 방식도 하염없이 좋구나를 외칠 만큼 7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은 기억에 남는 작품이 많았다. 대상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는 작가의 단편집과 함께 출간되어 한참을 베스트셀러에 머무른 것으로 안다. 양희가 주는 그 신선하고 아릿한 연애의 이야기가 드라마화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양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을 읽고 내가 형상화한 이미지가 영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내가 느낀 느낌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어떤 것이 될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솜씨 좋은 작가처럼 거짓을 진짜처럼 혹은 진실을 가짜처럼. 영혼은 편하게 침대에 눕혀놓고 하루종일 내 손을 잡고 유령처럼 산책하다 집에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을 안 하는데 알 수가 있나. 뒷모습으로 남은 얼굴. 아름답게 움직이던 위빙. 오리나무와 자귀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이상한 지식. 오늘 만난 한두운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정용준의 「선릉산책」도 곱씹을수록 기억에 남는다. 선릉을 산책해 보지 않았다면 느낌이 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릉을 산책한 기억이 소설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재현해 내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발달장애를 가진 한두운을 보면서 발달장애센터에서 만난 아이들을 떠올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잠깐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과 지속적으로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것의 차이를, 선릉 산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니, 타인을 이해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그 이해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물며 장애인이라면, 그 이해의 시선은 처음부터 평행선이 아니라 사선이 아니라 우위에 서 있던 것은 아닐까.

  올 봄 비가 거세게 내리고 난 뒤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망한 장애인이 동네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물이 넘었는데 석달이 다 되어 가는데 자꾸 묻는다고 했다.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아버지가 사망한 것을 모를까,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아들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없는 나날, 이 장성했지만 장성하지 않은 상태의 아들은 어떤 하루하루를 보낼까. 아버지와 함께 했던 동선으로 다니면서 아들은 계속 묻는다.

  “우리 아빠 왜 안와요?”

  처음의 안쓰러워하던 마음은 항상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감정은 옅어지고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에는 다른 감정들이 섞인다. 답답함이 쌓이고 자꾸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는 행동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할지 난감해한다. 한없이 갑작스레 홀로 남은 아들의 삶을 걱정하고 도와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란 저 아들의 장애 상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도대체 얼마만큼의 상태인지, 저렇게 혼자 두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옮겨간다. 기꺼이 한두운을 돌보고 한두운을 이해하려던 마음이 시간이 연장되자마자 삐걱거린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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