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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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항상 꽃뱀이 된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7-08-30.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시인의 성폭력 이야기를 들었다. 오히려 지금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의 ‘권위’에 힘입어 이야기의 타당도와 신뢰성도 높았다. 그 시인의 시는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기에 시와 시인이 분리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성향을 바꾸어 진보문학의 대가이자 더없이 능력있는 시인이자 문학활동가가 되었는지, 그와 관련한 이야기에 흥미가 솟기도 했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이다.

  그 시인의 이야기가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 ‘우와, 드디어’라고 안타깝게도 기뻐했다. 잘못을 시인하는 듯이 행동했던 시인은 외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적극 해명하고 시간이 흐른 후 형사소송이 아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0억7000만원짜리 재판이 얼마전 시작되어 인터넷엔 여성 시인 이름만 실시간으로 올랐다. 호텔룸 제안 이후의 성폭력 폭로가 이어졌기에 무언가를 ‘노리는’ 폭로라는 부정적 시선도 있었다. ‘미투 권력’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재판 진행 중인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구름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싶었는데, 내가 시인의 성폭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편해질 수 없는 마음이 리베카 솔닛의 『모든 질문의 어머니』, 침묵의 강요를 생각나게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공격당한 경우라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여자를 비난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비난하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참 이상한 것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남성의 ‘성폭력’은 당연하며 이해해줘야 하는 것으로 여성은 절대로 당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얘기된다. 이런 모순적 인식의 기저에는 오로지 ‘남자를 비난하지 않기 위한’ 이유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리베카 솔닛이 말처럼 페미니즘은 남자들 일이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여자들 일인 것은 그저 그 일이 여자들에게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그 일을 저지르는 건 대부분 남자들이니 어쩌면 페미니즘은 줄곧 남자들 일이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국판 제목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의 원제는 『모든 질문의 어머니』. 리베카 솔닛은 경험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유머가 깃든 언어로 감각적으로 이야기한다. 지금도 여전히 여성혐오, 데이트 폭력,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고 “물어뜯는 질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우리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 질문”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강요된 정답과 강요된 침묵을 ‘추구’받는 현실에서 여성이 침묵에서 벗어나 이야기해야 함을, 그러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세상의 언어는, 이야기는 달랐다. 여성들은 항상 ‘어머니됨’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여성의 삶의 방식은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이라는 인식 속에서 여성의 세상은 가부장제 속에서 차별과 편견과 멸시의 언어의 대상이 되어왔다. 모든 이야기들은 남성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리베카가 제시하는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 목록은 의미심장하다. <에스콰이어>지가 소개한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의 책목록을 비튼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 우려하는 것은 이 목록을 좇는 독자가 이들 책을 통해 여성을 배우게 될 텐데 그들은 “여자를 배우고 싶을 때 찾아가야 할 전문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남자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 책은 여성혐오적인 시선이 가득한 책들로 익히 아는 작가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탐정류의 소설에서 강간은 어떤가. 강간은 강간범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옷이, 여성이 먹은 것이, 여성이 간 장소가 저지르는 것처럼 묘사된다. 

“남자들은 일종의 날씨처럼, 주변에 감도는 자연력처럼, 우리가 다스리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불가피한 무언가처럼 추상화 된다. 이런 이야기에서 남자들 개개인은 사라지고, 강간과 폭행과 임신은 여자들이 적응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는 날씨가 된다.”


이 나라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많다. 믿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이야기, 가난의 원인이나 인종차별의 결과와 같은 현상을 드러내기보다 덮어 감추는 이야기. 결과에서 원인을 떼어내고, 의미를 멀찍이 치워버리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 명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새로운 인식이다. 오래도록 배제되었고 있음에도 그것을 명할 언어가 없었다면 이제는 개개인이 겪고 있는 경험을 묘사할 단어를 만들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물을 보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인식을 위한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 여성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침묵하거나 답정녀의 세상을 살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갖는 일은 그렇기에 필요하다. 결국 리베카 솔닛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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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럴의 이야기



Alice-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존 테일러 (그림), 마틴 가드너, 북폴리오, 2005.


  어느 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판본이 나오고 여러 갈래로 세계로 이야기가 번져갈지언정 그 기본적인 틀은 굳건하고 그렇기에 간단하게 보이니까 말이다.

  주석달린 앨리스를 보면서 일찌감치 다층적인 말재간을 부리는 앨리스의 세계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 시대의 배경에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작가의 생각, 표현의 의미를 더 알게 되니까 말이다. 모자장수와 삼월 토끼는 영국의 양대 정당을 가리키고 겨울잠쥐는 국민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온갖 정치 풍자가 가득하다는 것도. 특히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에 의의를 둔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그 심오한 수학적 계산의 형태는 그냥 이야기로만 흘리기엔 아깝고 흥미있는 요소니까 말이다. 그에 더해 어린 시절엔 이야기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면 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간다.

  직장 상사 리델 학장과의 교류는 학장의 가족과의 교류로 이어진다. 학장의 세 딸들과 함께 정원에서 뱃놀이 등을 함께 즐겼다고 하는데, 둘째 딸의 이름이 앨리스 리델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 둘째 딸을 모델로 지어진 이야기다. 당시 세 살 꼬마라고 하는데 아이는 이 이야기를 다 이해했을까. 세 살 아이에게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도새처럼 내성적이고 말더듬는, 그리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루이스에게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 조르고 함께 즐겁게 놀 수 있는 마음 편한 아이들이 소중했음은 분명한데, 어찌 그런 소문들에 휩싸이게 됐을까.

  널리 알려진 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이들에게 요청받아 즉석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후에 삽화를 그려 넣어 앨리스에게 책으로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직장 상사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시 책으로 선물을 할 정도라면 루이스는 아동문학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뒤늦게 발견한 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그전부터 루이스는 다양한 방면으로 재주를 드러냈다.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의 역할, 성직자, 사진가, 시인 등 예술적 감성이 가득하게 넘쳐난 수학 교수였다. 루이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아동성애자, 롤리타 콤플렉스-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 것은 유달리 아이들을 모델로 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향한 집착과도 같아 보이는 사진과 언행들이 루이스의 기록에 제법 드러나고 이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소문들이 흐르고 넘치고 그렇기에 루이스는 사진찍는 일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앨리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긴 했던 모양이다. 앨리스의 어머니가 이 편지들을 모두 불태웠고 의절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어서인지 알 길 없다. 루이스의 일기 중 의절하던 날들의 이야기가 루이스 가족에 의해 찢겨 있었다는 점이 더욱 궁금증을 당기게 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어떤 글이 쓰여 있었기에. 물론 루이스가 다른 소녀들과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적도 없었고 그런 소녀들에게서 불편한 이야기가 나왔던 적은 없다 한다. 루이스가 주욱 독신이었던 것 때문에도 소문이 보태진 것일까. 결국 동화 이야기보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더 떠올리고 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이것이 동화가 아니라 어른을 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수없이 달린 주석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읽기란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거 자체에 매몰될 때가 있다. 덧달린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흥미. 그런데 무언가 안타깝다. 루이스의 인생이 어떨지도 모르면서 그냥 고독하고 외로움에 휩싸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가 루이스에 대한 소문을 겹치면 마냥 섬뜩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 루이스와 현실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의 간극,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것만 같은 한 사람의 생애. 그리고 이상한 나라로 거울 나라로 간 앨리스의 이야기를 재밌게 즐기면 될 터인데 외적인 부분에 솔깃해지는 가운데 그 상황의 중심에 있었을 실존 인물 앨리스가 느꼈을 감정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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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어린 시절을 채워줬던 앨리스의 세상은 환상이었다. 모험 가득한 세상에서 앨리스처럼 살아보고 싶었던 그 시절에는 앨리스가 우상이지 않았을까. 세월이 지난 지금 앨리스는 낯선 얼굴을 하고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니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 앨리스의 입에서 나오기에 어색한 말, 그런 말들을. 너만의 길을 그려 보라 하지만 이런 말들을 웃으며 전하는 앨리스가 어린 시절의 그 앨리스일까. 지금의 모습을 과거로 이어간다면 어린 시절의 앨리스는 어떻게 토끼 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을까.  꼬마 앨리스의 성장이 가짜처럼 보여서, 생기없는 인형처럼 보여서 방긋 웃으며 건네는 앨리스의 말들을 덮고 기억 속 앨리스를 꺼낸다.    


  그곳엔 앨리스보다 더 흥미를 돋우는 수많은 캐릭터를 만난다. 모두 말재간이 넘쳐나기에 앨리스가 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그 캐릭터들. 그러고보니 앨리스 덕분에 트럼프 카드가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수많은 동화책 속에서 왕과 왕비, 공주의 등장하는데 앨리스에서는 여왕이 등장하는데 무지 희화화되어서 흥미진진했던. 새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니 기억보다 앨리스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열 살은 되었을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일곱 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다. 그 나이의 내가 지녔던 호기심과 모험심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보면 곳곳에 보이는 풍자가득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며 읽고 보았던 건지 새삼 성인이 되어 보는 동화의 느낌은 참 새롭다. 어쩌면 어릴 적엔 이보다 훨씬 축소된 내용의 그림책을, 동화책을 읽었던 것일 게다. 이 책이 완역판이라고 하니까.

 

 모험을 멈추지 못한 앨리스의 겨울 여행은 거울 속으로의 잠입이다. 거울 나라로의 여행은 마치 수수께끼 가득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저자가 수학과 교수라는 사실, 그리하여 수학공식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이 더해지고 그 오묘한 말들의 조합들에 빠져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루이스 캐럴. 본명은 찰스 도지슨. 오래도록 루이스 캐럴에 길들여져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 교수 찰스 도지슨이 앨리스를 탄생시킨 이름으로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그가 창조해낸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즐거이 들은 아이들 덕분에 책으로까지 출간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의미없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에 얼마나 즐거워하는지가 생각난다. 그런 점을 루이스 캐럴은 잘 캐치한 듯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전공과 잘 맞물리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앨리스를 따라, 앨리스인 것처럼 모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말발도 죽지 않은 일곱 살의 앨리스. 새삼 생각하니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라면 두려워하지도 이것저것 재지도 않은 채 하는 말에 귀기울이고 이상한 것을 이상타 말하며 정의감에도 불타오르는 앨리스와 같은 모습일 거라 싶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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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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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편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장은진, 문학동네, 2009.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사람뿐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쯤 전에 편지가 도착했다. 북에 띄운 메시지가 USB에 담겨 왔다. 되돌아온 편지가 아닐 걸 알면서도 전달되지 못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북에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씁쓸했다. 만나지 못하면 소식조차도 받을 수 없는 건가.

  이산가족 상봉 뉴스 속에는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서 연신 말하듯 고령의 노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부둥켜 우는 모습들이 마음을 짠하게 했다.

  “할머니는 저렇게 울진 않았을 거야. 별로 안 애틋했어.”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되기 전에 이산가족 상봉 추진이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작년부터 적십자 관계자들의 연락과 방문을 받았으니 이산가족과의 만남은 준비가 오래 걸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남북 생존자 명단이 교환될 즈음 북에는,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전달되었을까.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은 한번 보시겠구나 했지만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산가족 상봉단이 되지 못했더라도 아쉬울 것 없었을 거라는 이 위안은 할머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다면 동생을 만나고 가셨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내가 갖는 것이니까.  

  아버지는 외사촌들의 소식을 자유롭게 알게 될 날이 올까. 북에서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외삼촌의 생존 소식조차도 전해받지 못했다. 남북 이산가족 만남의 정례화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떤 매체들은 그런 것조차도 탐탁지 않게 이야기한다. 이산가족들의 사연들이 소개될 때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많다는 것을, 남아있는 가족보다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이산가족’은 없어지겠지만 그 쓸쓸하고 슬픈 마음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삶의 시작은 기쁨이지만 삶의 결말은 결국 슬픈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제목과 이 문장이다. 때로 이 제목이 맴돌 때가 있다. 소설은 참 쓸쓸하면서 따스했다는 기억을 준다. 삼 년 동안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이야기하며 친구를 맺은 ‘나’가 그들에게 띄우는 편지. 단 한번이라도 답장이 온다면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데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함께 한 눈먼 개 와조와 전전하며 하루의 마감때 쓰는 편지는 그날의 여행과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편지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띄운다. 여행 중 만난 사람을 번호로 기억하는데 자기 책을 파는 여자 소설가 751과는 여행을 함께하기도 한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것만큼이나 편지가 왔는지를 확인한다. 우체통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절망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편지가, 답장이 오기를 기대한다. 서로 교감하고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맞닥뜨리고 위로하기도 했는데 소통했는데 답장을 하지 않는 일련번호들. 할아버지 장례식날 받은 연인의 이별통지처럼 ‘나’만 그들에게 일방통행의 소통을 했던 것처럼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3년여의 나날. 모텔이 꽉 차는 날 고시원에 묵다가 화재로 겨우 살아나기도 한다. 기력이 다해 가는 와조 때문에 아무에게도 편지받지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돌아온 집에서 와조는 ‘나’의 곁을 떠난다. 편지를 받기를 원하는 집엔 ‘나’를 맞이한 편지도, 가족도 아무도 없다. 

  ‘나’가 와조와 함께 이렇게 편지여행을 다니게 된 시작에는 ‘나’의 지독한 외로움이 담겨있다. 고통과 고독과 절망의 순간을 견뎌가는 ‘나’의 여행의 끝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기대하는 만큼 세상에 혼자이고 싶지 않은 ‘나’가 간절히 열망하는 것은 교감이다. “진정한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둘이 있어서 외로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같이 있다’가 아니라 ‘같이 나누다’이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끝없이 확장되는 일련번호에게 가 닿았으려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10년쯤 전 출간된 소설 제목이 기억나는 건 ‘나’가 여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일련번호들처럼 번호표를 달고서 가족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의 사연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들도 이렇게 한번 만나고서 돌아가면 간절히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겠지. 그러나 받을 수 없었던 편지, 그로 인해 절망하고 그러나 또 희망하면서. 우리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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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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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라서 서평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민음사, 2018.


  공채제도가 한국사회에만 있는 제도였나? 아무튼 이 책은 한국사회에 있는 수많은 공채제도 중에서 특히 문학공모전에 관한 르포다. 저자는 ‘공채라는 특이한 제도, ‘간판’에 대한 집착, 서열 문화, 그리고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시스템이 어떻게 좌절을 낳게 됐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문학공모전에 중점을 두고 공채제도가 가지는 현실의 문제와 대안에 대해 다루고 있다. 관련 종사자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풍부하게 조사하여 다양한 사례를 든 취재 형태로 작가가 전직 기자라는 점이 소설보다 확실히 느끼게 한다.

  장강명은 문학계 공채제도의 혜택을 많이 받은 작가다. 많은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기자전력 사회현실을 다루는 소재들을 글로 녹여냄으로써 스타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또한 그런 작가가 기본적으로 문학 공채제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전제를 두고서 다루는 취재기는 어떤 흥미진진함과 통찰이 있을까, 기대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책을 통해 공채라는 시스템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기도 했음을 좀더 느끼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미국의 사회학자 토비 허프는 서양에서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동양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을 인재 평가 방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동양에서는 국가나 스승이 젊은이들의 능력을 평가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선배들이 세운 기준을 충실히 다르게 된다. 반면 유럽의 대학에서는 일찍부터 논쟁과 토론이 발전했고 이는 체계적인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국식 공개채용 제도가 과연 불합리한 제도일까.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없으니 어떤 시스템이라도 문제가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공개채용은 한국에서 가장 비리가 없는 제도라고 인식된다. 문제은행식 시험이든 어쨌든 공평하게 문제를 풀고 맞은 개수에 의해 합격이 가려지는 이 방법에 대해 특별히 불편부당한 제도라고 하지 않고 오랜 세월 흘러왔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개입되는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문화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한국 문화 자체가 공채제도 이외의 다른 평가방식을 감당할 여건이 미흡한 것도 같다. 미국 사회학자 토비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저자는 공채제도가 사회적 계급을 형성한다고 지적한다. 공채제도의 지나친 경쟁은 합격은 곧 간판을 얻는 것, 권력을 얻는 것과 같게 된다. 합격자간 군대와 같은 기수문화 형성으로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구조가 형성됨은 물론이다. 반대로 불합격한 이들은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공채제도가 아닌 다른 형태의 채용 시스템은, 어떤 장단점이 있는가에 관한 진지한 취재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서양에서 주로 이루는 심층면접과 추천에 의한 채용제도의 한국 적용이 공채제도를 뛰어넘는 대안이 되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제도가 더욱 암울해 보인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다루는 것이 문학상이니 문학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문학상 출신 저자는 이 문학상제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많은 문학상 지망자들이 문학상 제도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으로, 그러면서도 다른 길이 없기에 문학상에 도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길이 없다는 의미는 자기 책을 낼 기회를 말한다. 가장 쉽고 빠르게 자신의 책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장편문학상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장강명처럼 여러 공모전에 도전하는 기출간 작가들이 늘었고 거대 상금을 내건 공모전 또한 폐지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공모전 제도에 대한 대안으로 다른 형태의 책출간 방식을 이야기한다. 몇 개월 사이 5권의 책을 출간한 인기작가, 김동식 작가의 예를 든다.


김민섭 작가는 김동식 작가가 왜 잘 돼야 하는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소수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 ○○문학상이라는 간판을 달고 작가가 되는 일, 그러한 제도권의 선택이 아닌 독자들이 만들어 낸 작가라는 것‘도’ 가능한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고, 여러분은 거기에 동참했고 그 증거가 지금 여기 앉아 있다고, 했다.”


  ‘왜 잘 돼야 하는지’에 대한 김민섭 작가의 김동식 작가의 사례에 대한 의견은 참고할 만하지만 한편에서 바라보면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간판을 달고 작가가 된 사례에 다름 아니다. 단지 특정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게시판 이용자들과 교감하며 쓴 글들을 책으로 엮은 줄 알았더니, 거기엔 김민섭 작가의 적극적인 역할과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명한 간판을 단 이의 적극적인 마케팅에 힘입은 바와 심사위원의 심사를 통한 문학상과 차이는 있지만 또한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의문이 든다. 소수라고 하지만 심사위원은 차라리 복수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젊은 한국 신인 소설가 두 사람이 책을 내고 독자를 만난 과정에 의미시장한 공통점,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공통의 결핍 지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독서 공동체다. 김동식, 또는 이진이라는 신인 작가의 신간 한국 소설이 나왔는데 읽어보니 준수하더라, 또는 보통이더라, 또는 시원찮더라는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 ‘우리 작가’라며 무조건적으로 열광하지도, 미등단 작가(또는 문단 작가)라며 외면하지도 않는 공간.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면 어떤지, 지난달, 지난해에 나온 다른 신인 작가의 작품에 비하면 어떤지 토론하는 공간. 그러다 적절한 맥락에서 호시 신이치와 프레드릭 브라운과 역대 수림문학상 수상자들의 이름과 작품이 언급되는 공간. 그런 대화와 평판이 계속해서 쌓여 가는 공간. 그래서 예비 독자에게 정보를 주고,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공간.


  취향없이 흥미와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공부로 길들여진 독서,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보며 읽는 책, 누군가 유명한 이가 읽거나 추천하는 책들을 읽는데 적극적인 독서 시장과, 독자들. 길들여진 한국사회의 ‘독서’의 세계인데 저자는 독자의 몫이라 말한다. 어떤 형태로든 서평을 쓰라고 말한다. 독자들이 더 많이 책을 읽고 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와 수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 책을 읽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맞는 말인 듯한데 몹시도 허무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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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8-08-1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이었군요. 르포형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그닥 취향이 아니어서 스킵했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이 소설은 특히 작가가 직접 소속되어 있는 분야라 거의 사실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모시빛 2018-08-20 08:10   좋아요 1 | URL
그 분야 관계자의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그 세계가 그렇구나, 나름 정보를 얻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