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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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가 필요한 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문학동네.


  새해가 되었고 심지어 황금돼지해임에도 지난 해의 푸쿠가 새해로 넘어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들은 새해 희망과 설렘의 카운트다운을 하는 한해의 마지막 날, 이제 새해를 두시간여 앞두고 불행을 선고받는다면 나도 모르게 푸쿠를 떠올리게 된다. 새해에 생각하는 단어치고는 참, 참으로 희망적이다! 

  계속된 불운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원인이 있을 거라고. 차라리 저주라고 할지도 모를 그 어떤 것이 있어주어야만 불행에 대해 수용하든 맞서든 할 수 있다. 명명을 한 후에야 대상이 명확해진다. 푸쿠. ‘우리는 그후로 줄곧 그 염병할 저주 속에 살고 있다.’

  한 해를 울음으로 마감하고 울음으로 시작한 이들에게…. 사파! 사파! 사파!


산토도밍고에는 제독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들었을 때, 아니면 푸쿠가 수많은 대가리 중에 하나를 곧추세웠을 때 내 주위에 재앙이 똬리를 트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나와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줄 유일하고 확실한 역주문이 있어. 그다지 놀랍지 않게도 그것 역시 한 단어야. (대개 집게손가락을 열심히 포개면서 내뱉는) 한 단어.

사파.


  와오! 이런 주인공을 본 적 없다. 실로 미안하지만 황금돼지해에 딱 떠올려지는 그 몸매의 소유자. 110kg 거구에 사교성과 운동신경은 없는 ‘덕후’ 감성 가득한 도미니카계 흑인 오스카 와오. 그의 덕후 기질은 만화, 영화, 게임, SF와 판타지 소설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무척 바쁠 것 같은데도 언제나 사랑을 꿈꾸는 사랑에 고픈 오스카 와오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랑이 동시만 아니었더라도 한명만을 선택해야 함으로써 모두를 잃는 비극은 없었을 테다. 사랑, 이라 이름하며 동정을 떼는 것이 실천이자 당연한 것인 오스카에게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이 불행의 근원은 오스카의 누나 롤라, 어머니 벨리시아, 할아버지 아벨라르를 비롯한 데 레온 가족 삼대에서 이어진 저주, 푸쿠 때문이다.

  오스카의 불행으로 볼 때 가볍고 코믹스럽게 느껴지는 푸쿠는 어머니 벨리시아와 할아버지 아벨라르의 이야기 속에서 결코 가볍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 잔인성과 폭력성, 끈질긴 푸쿠의 면면을,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미니카에서 건너온 오스카의 가족에게 여전히 끈질기게 붙어 진행중인 푸쿠 또한 도미니카산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도 경험하였듯이 독재자만이 가장 강력한 폭력성과 잔인성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다. 도미니카에서는 실존인물로서 트루히요가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작가는 도미니카에서 푸쿠 탄생의 역사인 독재자의 트루히요의 31년의 활약과 함께 오스카 가족에게 닥친 모든 비극적인 서사를 유머와 풍자를 담아 들려준다.

  오스카가 빠져 있는 세계, <혹성 탈출>을 비롯한 SF판타지는 오히려 트루히요의 세계보다 아름답다. 그럴 지도 모른다. 누나 롤라는 사춘기면 으레 찾아오는 그런 반항과 방황의 기질로 변화를 찾아 헤매지만 오스카에 대한 사랑만큼은 굳건히, 흔들리지 않으며 가족의 몰락과 거듭되는 배신에 이민자로서의 힘겨운 삶, 거기에 암까지 얻은 쉴틈없는 푸쿠의 저주에도 어머니 벨리시아 역시 오스카를 사랑하고 사랑해준다. 그렇기에 오스카가 여전히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내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 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

어떤 이들은 저주라고 말하겠지.

 난 삶이라고 말하겠다. 삶이라고.


  거듭 삶이라 강조하는 롤라처럼 푸쿠가 아니었던 걸까. 푸쿠의 마력에서 뻗어나지 못하고 푸쿠에 잡혀 버렸지만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어머니가, 누나가 푸쿠에 쉬이 동조했던 것은 아니다. 어떻든 저항은 이어졌다. 그 저항이 푸쿠를 중첩하였을지언정. 오스카 또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생 일대의 사랑을 눈앞에 두고서 푸쿠가 찾아와 사랑과 목숨 중 선택을 강요한다면 오스카는 무엇을 가리킬까. 오스카에겐 이미 그런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 것이 푸쿠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오스카의 사랑, 동정 떼기를 코믹하게 엮어 나가는 이 이야기의 과정이, 결말이 권력이란 것이 개인의 삶 하나하나에 관여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저하게 되는 것도 더 나아가게 하는 것도 사랑, 전진하는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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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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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교유서가, 2018-12-05.


  한파에 눈물이 떨어지지 않고 머물러서가 아니라 한해를 마감하는 날이라서가 아니라, 돌아보면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인 나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인생사가 희로애락인지라… 흐르는 시간탓이라고 말할 밖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점점 이 세상과의 안녕과도 가까워짐을 자꾸 인식하며 그런 일들 또한 많아진다. 다친 마음과 몸이 한번에 돌아오는 날 또한 다반사이다. 새삼 나만이 겪는 일이 아닐진대 무어 이리 허우적거리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속에서 너무나도 닮은 아버지, 어머니를, 할머니를 만난다. 심지어 소까지도…. 짜장면이 싫다는 어머니는 이제 햄버거를 맛나게 드시는 광고가 등장하는 판인데 부모님은 여전히 ‘너희 먹어라, 나는 됐다’를 시전하신다. 까마득한 어느 때 손가락이 잘린 아버지는 붕대를 감아 시림을 막았다. 작가가 제 아비의 잘린 손가락을 보며 소설을 영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손가락을 보며 무엇을 했던가. 반복된 수술로 힘겨운 어머니가 내 끼니를 걱정할 때 나이든 딸의 끼니 걱정일랑 마시라며 서로 핑퐁처럼 걱정과 안부를 오가다 결국엔 무조건적인 ‘나는 괜찮다’는 말씀에 버럭으로 마감했던 날들을 떠올리는 것이 정말 사실인가. 그런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너희가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너희 좋은 것이면 다 좋다더니 어찌 그리 선거에서만은 끝끝내 좋고 싫음이 분명하신지 꽁한 얼굴로 노여움을 풀지 않던 할머니…가시던 날도 선거 무렵이었으니 오히려 결과를 보지 못하고 가신 것이 더 나았으려나. 이산가족 상봉은 취소되고 북으로 띄운 편지만이 되돌아왔으니 직접 그곳으로 가셨던 게 더 빨랐을지도.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인데 깊이 절망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이토록 진부하게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을 잃은 뒤로 아버지가 어떻게 절망했는지,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는지를 쓰고 싶다.


  우습게도 절망하는 건 나다. 누군가로 인해 생의 피폐함에 있었을 때도 절망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왔던 그들의 삶 옆에서 젊은 나의 포효가 가장 높았고 지속되었다. 그들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저 ‘아짐찮다’를 온몸으로 내보이고 있을 뿐. 통곡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디에다 쏟고 있는 걸까. 

  이 책 작가인 아버지는 딸의 아픈 팔을 보며 아이가 자라 마음이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많아질 것을 염려하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몸이 아픈 채 돌아온 어머니를, 아버지를 보며 훗날 내 마음이 다쳐 돌아갈 저녁을 염려한다. 아직 닿지도 않은 날을 당겨와 마음이 푹푹 꺼지는 감정을 경험하는 이것은 두려움일까.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으로 그들을 ‘여읠까’ 싶은 마음에는 그들보다 나의 감정만이 우선하여 있다는 생각에 미치도록 놀란다.

  이제는 몇 번을 확인하여 되묻고, 부연 설명을 곁들어야 그들, 내 부모님과의 이야기 한뼘이 지난다. 누군가를 말한대도 몇 번의 사람을 거치고, 몇 번의 사건들을 거쳐야 지칭하는 대상이 명확해진다. 단어는 또 말해 무엇하랴. ‘체험하는 순간에야 오롯이 내 말이 되기에’ 그들 세대의 단어와 지금의 나의 단어가 얼마나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그리하여 돌고 돌아서 말하는 사이 이제야 세월이 품은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간다. 살면서 직접 보지 않은 것들 이외에 알지 못했던 것. 진즉 묻지 않았던 그들의 삶, 이야기.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미는 그의 내부에 있지 않다. 의미는 그에게 허락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태어난다.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지난 세월 서로에게 무심했음을, 우리에게 사연이 없다면 우리가 헛되이 함께 살아오기만 했음을 말해준다.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단어와 문장으로 써 내려간 작가의 지난 시간의 이야기가, 그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가 작가에게 불안을 무사히 건너가는 기제가 되었을까. 작가가 쓴 소설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꿈을 꾸듯이 이 책의 문장속에서 허우적인다. 타인의 슬픔과 비극을 외면치 않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예의’를 배우며 작가가 세상을 담는 동안 이 위안과 후회를 머금게 해주는 시선에서 나도 오래 머물게 된다.

  그토록 말없이 품고 있던 그들 생의 이야기가 또 한해 마감되어 간다. 한편으론 작가는 소설가로서 그들의 삶을 이야기로 담아내었지만 한 사람으로서, 자식으로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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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내 삶의 터닝 포인트 -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후
변화경영연구소 지음 / 유심(USIM)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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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똥덩어리 위에


구본형, 내 삶의 터닝 포인트-‘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 후


  공자가 집 앞으로 이사를 왔다. 그 앞으로 달려가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애쓰며 제자이고 싶다고 간절히 애원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한때는 스승의 날이면 딱히 찾아가고픈 이가 없음에서 오는 허전함이 있었다. 뭔가 기막힌 운명에 방점을 두었기에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주어진 관계엔 운명이라 하길 거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니다, 라는 결론을 맺고 안심한다. 공자는 나의 취향이 아니라 궁합이 맞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 것이 예의와 존경이라는 데 의문을 표하는 바이니 말이다. 예의란 좋은 말임에도 관계에 진전을 더디게 하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설정시키는 공신이다. 그 공신이 미치는 힘이 내 인생에 얼마나 강했던가를 생각하고 있노라니 이 책 속 열두 명이 공신을 어떻게 다루며 스승을 만들어 갔는지, 관계를 맺어갔는지, 인생을 나아갔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죽은 거나 진배없었지만 내 발목을 내어주는 대신 나는 살게 됐다. 떨어져 죽었어야 할 나를, 내 발목이, 자신을 27조각 내며 살려냈다. 산신이 바스러진 발목을 차가운 수술대에 올렸다. 의사는 절단이라는 말을 무덤덤하게 뱉어냈다.


  스승에 대해 말하기 전 제자들은 그들의 지난 삶을 얘기한다. 그 면면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의 ‘나’가 아닌 ‘고호’다. 방황과 절망과 실패의 날들이 지속되며 피폐해지고 자존감을 잃어가고 의미와 목표를 상실한 삶, 그저 분주하기만 한 삶, 공허함에 허우적이는 삶이었다고 말한다.


삶은 구석에 내팽개쳐진 목발처럼 초라했고 짝다리로 서서, 똑바로 선 모든 것들을 경멸했다. 절망이 지배했고 냉소와 비관으로 세상은 가득 찼다. 그때 스승을 만났다.


  그때 스승을 만나 그들이 변했다고 말한다. 당연, 그래서 그 변화를 이끌어 주는 스승의 가르침을 요약판으로 알려주는 것이 이 책이라 기대하면 안된다. 무엇보다 그리하여 그들이 변했다는 말도 적절치 않은 듯하다. 그들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속도를, 방향을 제 마음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들은 항상 변화에 있었다. 상황의 변화를 기회로 디딤으로 삼아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걸 알지 못했을 뿐. 그들이 자신의 변화의 조종자가 될 수 있게끔 해준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의 존재는 강렬한 영웅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로 단번에 모든 상황을 해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런 소리를 기억에 남긴다.


자리를 잡고 무념에 빠져 있던 그때 누군가 내 옆 칸에 앉는다. 바지 벗어제끼는 소리가 조신하게 들렸다. 나는 혼자 눈을 크게 떴다. 움직이지 않았다. 작전상 상황 종료 시까지 음소거를 유지하기로 한다. 괄약근을 힘껏 조여 나오려는 모든 것들을 중단시켰다. 숨을 멎게 했다가 가늘게 내쉬며 숨소리조차 가라앉혔다.

그는 화장실에 앉아 시를 읊었다. 어떤 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읽어 내리는 것인지 외워서 읊조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시를 듣지 않고 그의 멋진 목소리만 들었다. 그리고 이따금 무언가가 물에 빠지는 소리와 굽이굽이 스승의 장기를 빠져나온 가스 소리를 들었다. 귀를 쫑긋 세웠다. 소리들이 만연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시를 멈추지 않았다.


  왜인지 나는 붐빈 화장실을 피해 들어간 공용화장실에서 스승의 배설의 전과정을 몰입하여 듣고 있는 제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참으로 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어쩐지 기묘하고 난감한 상황에서 노동요(?)처럼 흐르는 스승의 시낭송 속으로 빠져들어간 것처럼 다른 제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같은 자세로 귀기울이고 있는 열 두명의 제자를 떠올리며 쓸데없이 파안대소한다. 그때 스승이 외우고 있던 시가 최영철의 「아직도 아직도 쭈구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였으면 아주 좋았을 거라 생각하면서….


누가 쏟아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똥덩어리 위에

또다시 자신의 똥을 내려놓으며

아직도 하나가 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 최영철, <아직도 쭈구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中 -

 

  그들 삶에서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알아가도록 스승은 온몸을 다해 말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궁합과 타이밍의 조화다. 힘들어 죽겠다 말하면서도 그들은 스승으로서 구본형을 선택했다. 이 책은 스승이란 주어지는 것도 내게 무엇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 함께 무엇을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스승의 가르침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호과정을 통해 공감과 공명의 울림임을 보게 된다. 스승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 꿈을 그려가는 방법이 가슴으로 인식되고 머리로 이해되어 손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각각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깨우쳐가는 과정들이 책속에 담겼다. 각각의 지난한 여정들 속에서 변화해가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인식이 뭉클하게 전해진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한순간에 일궈지지 않았고 삶의 변화 또한 완결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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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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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되지 않는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크로스비 마을은 올리브로 인해 가상의 바닷가 마을에서 다양한 색채를 띤 정감어린 실제의 마을로 느껴진다.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주인공 올리브 키터리지. 작가의 이름만큼이나 낯설던 올리브는 배우고파 지는 수학 선생님으로 그녀의 거구가 얼마만큼인지 옆에 서보고픈 충동을 일으키는 존재로, 마주치면 눈흘기게 되는 동네 아주머니로, 그럼에도 늘 옆에서 같이 얘기를 나누고픈 사이로 자리한다.

  열 세편의 단편소설에서 올리브 키터리지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젊은 날, 중년의, 노년의 올리브가 타인의 삶 속에 등장해 그들의 삶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수많은 인생들이 그러하듯이. 삶은 각자의 인생에서 주연이고 타인의 삶에서는 조연이지만 어느 순간에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으며 결코 별일없이 흘러가지 않을 감정을 안겨준다. 그 같은 속도의 흐름을 깊이 있는 감정으로 채어 놓는 작가의 글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이런 올리브 스타일의 아줌마가 동네에 있다면 성가실 것 같은데도 말이다.


올리브 역시 그녀만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왔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짐 오케이시의 차가 도로를 벗어난 후에, 그리고 올리브가 몇 주 동안이나 저녁만 먹고 나면 바로 침실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 후에야 헨리는 올리브가 짐 오케이시를 사랑했으며, 어쩌면 짐도 그녀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한 번도 올리브에게 묻지 않았고, 그녀도 헨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데니즈를 향한 아프도록 절실한 감정에 대해 그가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데니즈가 다가와 제리의 청혼에 대해 알렸고 그는 말했다. “가.” - [약국]


  신기하게도 올리브도 남편 헨리도 각자의 마음속에 잊지 못할 사랑을, 사람을 품고서 살아왔다. 그들 삶에 기쁨이기도 하고 회한이 되기도 한 대상, 그 시절들은 흘러가 버렸고 헨리도 올리브도 부부라는 그 충실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아니, 잘 견뎌내고 있다고 믿었다. 부부란 사실 자그마한 일에도 무수히 싸우기도 하면서 또 자그마한 일로 인해 가장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이를 키우고 아이를 떠나보내고 쓸쓸한 노년의 삶에 서로가 위로가 되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적이자 동지로 살아온 헨리와 올리브의 삶이 주욱 「다른 길」로만 걸어 왔음을 알게 되는 기분은 어떨까. 이것이 삶인가 싶은.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 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튤립]


  애써 추억이라 말해보지만 그 어떤 좋았던 날들의 기억이라도 그쯤되면 이 다른 길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길을 맞닥뜨리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른 길」이 보여주는 파국의 여운은 길다. 인질이라는 엄청난 사건과 마주했지만, 그 대상이 되었지만 헨리와 올리브에게 충격으로 전해진 것은 평생 겪을까 말까한 그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오래도록 숨겨왔던, 감춰왔던 서로의 속내다. 위급한 순간에 드러난 아찔한 말들, 그 부대끼는 독설들은 생애 자체가 거짓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강력하다. 상처 위에 상처, 그 위에 또다시 상처, 거듭된 상처의 중첩. 소설에서는 상실과 상처를 거듭 끄집어낸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 [작은 기쁨]


  돌아봐도 멈춰봐도 씁쓸하고 쓸쓸한 바닷가. 휑한 마음 가득하게 서 있는 노인 올리브의 생애가 이대로 마감되도록 작가는 두지 않는다. 결코 사과할 줄 모르며 변덕 심한 사람이라는 것이 남편과 아들의 올리브에 대한 평가이며 그래서 힘겨워했던 두 사람, 특별히 크게 싸운 것 같지 않음에도 어느틈에 벌어진 관계는 쉬이 되돌려 지지 않는다.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아들의 말 한마디를 바랬지만 결코 이뤄지지 않았고 헨리가 죽은 후엔 외로움을 더욱 더 껴안은 채 여전한 성격을 유지하며 올리브는 살아간다.

  외로움과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듯 철썩 달라붙어 있다. 칠십이 넘은 나이라고 해서 외로움에 면역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올리브는 세상을 등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상처와 고독과 외로움에 자살을 선택하지만  「밀물」 속 젊은 케빈과 패티의 놓고 싶지 않았던 생에 대한 의지가 올리브에게서도 나타난다. 노년에 만난 사랑 때문인지, 깨달음으로 인해 젊은 올리브였다면 관심두지 않았을 성향의 잭에게 마음을 주며, 결코 알지 못했던 알려 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반추하며 작은 기쁨이 필요한 삶을 깨달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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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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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휘어잡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불현듯이 들이차는 상념. 그것은 바쁘게 서둘렀던 마음을 휘어잡고 속앓이를 하게 한다. 굳이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할 리 만무한데도 과거의 기억이 가지는 힘은 크다. 때로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이야기를 생각하기 위한 전조가 아닌가 싶다. 여기, 소설 속 루시 바턴 역시도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한 갈망은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팠던 열망이다. 루시의 삶은 기억의 프리즘을 통해 보아도 아프다. 그 아픔을 루시는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오래 전 오래 병상에 머물렀던 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 루시와 루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엄마 고향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오간다. 기억 속 이야기는 소설가가 된 루시의 소설 속 이야기 같기도 하다.


“픽션 작가로서 작가님의 일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그녀는 픽션 작가로서 자신의 일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모든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라고 루시는 외친다. 모든 생은 감동을 준다고 외친다. 루시가 타인의 생을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루시라서가 아니라 ‘소설가 루시’이기에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대체로 타인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만든 것이라고.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그 자신의 삶에 박힌 그 씁쓸한 모든 기억에서 외로움을 인생의 첫맛이라 기억하는 이라면 외로움을 짝지우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삶에 눈이 갔을 거라 싶다. 그러니 루시가 생각하는 방식이, 타인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껴안으려는 그 마음이 루시를 소설가로 이끌었구나 싶다. 모든 생이 감동이라 여기는 그 마음이란, 어떤 것일지. 소설가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루시’로서 그 마음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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