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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어디든, 타국
파친코. 이민진, , 문학사상사, 2018.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들이 토해내는 외침은 증오도 원망도 아니다. 어쩐지 이 말은 체념 같기도 하고 그 무엇이든 견디고 이겨내리라는 의지 같기도 하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을 배경으로 한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에서 선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까지의 4대의 삶이 펼쳐진다. 1부는 부산 영도 바닷가에 살던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의 이야기로 급박하게 읽힌다.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인물이 처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를 응원하며 보게 된다. 2부는 일본생활이 중점적으로 다뤄지는데 다소 더디게 읽힌다. 등장인물이 늘어나는 만큼 고민이 짙게 드리워지는 까닭이다. 인물마다 맞닥뜨린 ‘나’라는 존재의 자각이 내게도 여러 갈래의 생각과 감정을 안긴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선자는 ‘고생’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삶이 고생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게 없는가,라고. 노년의 선자는 그녀의 삶에도 아름다움과 영광이 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었노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무엇을, 어느 순간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그녀는 평생 동안 다른 여자들한테서 ‘여자는’ 고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 말을 하는 여자들 역시도 고생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어쩐지 ‘어린 소녀로, 아내로, 엄마로’ 고생하다가 죽는 삶에 대한 순응이 느껴진다. 고생이란 기차에서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건가. 양진과 선자 그리고 경희,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그 기차를 탄 ‘여자’이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생계책임은 남성, 아버지의 역할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은 ‘여자’다. 선자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아버지들은 장애를 가졌거나 병자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는 언청이이며 절름발이다. 모자수의 아버지 이삭은 결핵을 앓는다. 노아의 아버지 한수는 아버지라 불리지 못한다. 그 누구의 아버지도 되지 못한 요셉은 무능력해져가며 피폭자로서 오래도록 병상에 있게 된다. 분명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이긴 했지만 일찍 사망하거나 감춰진 존재가 되거나 변해간다.
이런 상황에서 선자의 어머니 양진과 선자, 요셉의 아내 경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전면에 선다. 겨우 끼니를 떼우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 안정될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돈을 번다. 이때의 여성들은 전통적인 역할에 갇혀 있지 않다. 어쩌면 아내와 어머니로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강한 일념으로 더욱 더 치열하게 일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경희는 어머니로서의 삶을 바랬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지는 남편과 선자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지식인 여성으로서 하고픈 일과 여성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한 남자의 구애를 밀어낸 경희의 삶은 결국 선자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가 싶은 경희의 삶 또한 고생일 수밖에 없는 여자의 삶, 그 자체이다.
하지만 선자의 아주버님이자 경희의 남편 요셉은 다르다. 전통적인 역할인식에 갇혀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 자책하고 탄식한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제수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 요셉은 생계는 남성 책임이라는 명분에만 치중한 채로 타인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가장으로 군림하며 가정의 모든 결정권을 쥐려 하며 여자들을 바깥으로 굴리며 일하게 했다는 비난을 감수하지 못한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가부장적 사고는 완고하며 변화하지 못한다. 요셉이 가진 신앙에 기대어도 이러한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당시 서구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인으로 모순되고 잘못된 사회에 대한 변화를 강렬히 열망하며 변화에 대한 의지 또한 실행력으로 보여주리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요셉은 조국을 위해서, 위대한 이상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 생각한다.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셉은 가족이 함께 겪는 힘겨운 현실에서 자의식만을 붙든 채 사회변화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청이 유전을 두려워하는 이들로 인해 순자의 아버지 훈이는 겨우 돈을 주어 양진과 결혼한다. 같은 이유로 선자 역시도 나이가 들어도 혼인을 청하는 이들이 없다. 이때 선자는 우연히 도움을 준 일본을 오가는 생선 중매상 한수를 만나고 임신한다. 하지만 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먹고 한수의 첩이 되길 거부한다. 평양에서 부산으로 온 이삭은 선자의 하숙집에 머물다 선자 모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결핵을 치유한다. 살아남은 이삭은 선자와 결혼하여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여긴다. 그것은 이삭의 희생이자 임신한 선자에겐 구원이 된다. 그렇게 이삭은 자신의 형 요셉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로 선자를 이끈다.
일본에서 한수의 아들 노아와 이삭의 아들 모자수가 태어난다. 자손들은 모두 기독교식 이름을 갖는다. 노아, 모세, 솔로몬. 그러나 단 한번도 이름이 힘이 된 적이 없다. 종교가 그들 삶에 어떤 위로가 되어 주지 못한다. 요셉은 힘겨운 상황에서 가족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존재가 되어 갔을지언정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암울한 시대 종교가 삶을 버텨내는 구원이자 타인에 대한 관용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이뤄지지 못한다. 기독교가 일본인의 의식을 좌우하는 종교가 아니기에 일본인에게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들을 기대할 수 없다. 선자의 가족이 기독교인이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이삭이 선자와 결혼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용도로 보일 뿐이다.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 해도 더없는 고통의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삭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죽음도 이것을 보여주는 한 요인으로 보인다.
모자수는 성경의 모세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이끈 모자수. 그는 가족들이 일본에서 차별과 모욕을 당하며 살지 않도록 이끌 수 있을까. 그가 파친코에서 일하게 되는 것도 신의 뜻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이 겪는 모든 상황 하나하나에 의도가 있다고 할 지 모른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의 아버지 이삭은 믿었을지 모르나 살아서, 살아가야만 하는 다른 가족들에겐 전달되지 않았는지도…. 모자수는 “인생은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간대도 모자수의 삶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삶,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현재 불행이 잔뜩 굴러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불행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의 아이러니란 삶 자체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어떤 일본인은 “운명이라는 말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의 게으른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조작이 이뤄진 파친코 게임에서 선택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운명이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의 변명이 아니다. 조작을 일궈놓은 이들이 책임지고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일’일 뿐이다. 사람에게 행해지는 경멸과 차별도 조작의 한 맥락이 되지 않을까. 이유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 자체가 경멸과 차별의 이유가 된다.
노아와 모자수의 삶이 부모와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자와 경희와 요셉이 조선인임을 인식하며 살아온 반면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태어나 살고 있지만 각종 제도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당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경멸어린 시선과 모욕을 견디어야 하는 삶인데 더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지는 것도 어렵다. 그나마 재력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파친코이기에 이곳 사업장으로 조선인이 몰린다. 일본은 1952년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들이 열네 살 생일이면 거주 허가를 받아야 하고 3년마다 등록증을 갱신해야 한다고 정했다. 솔로몬은 이 운명에 속해 있다. 일본인은 질서이자 법이라 하겠지만 범죄자에게 적용되는 이 절차를 적용받아야 하는 조선인에게 그것은 조작된 파친코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삶이 결코 공정하게 이뤄질 리 없는 확증 같기만 하다. 결과적으로 노아도 모자수도 솔로몬도 파친코에서 일한다. 그것은 선택으로 불리지만 선택지가 있을 때에 온전히 선택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하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노아와 모자수가 일본에서 ‘자이니치’로서 겪는 차별과 모멸은 그들 삶의 방식과 태도를 결정하게 만든다. 노아는 열심히 공부하며 누구보다 뛰어난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희망을 꿈꾸고 모자수는 자신에게 조롱을 일삼으면 패주는 등 자신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대응한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자 일찌감치 일하는 것을 선택한다. 노아도 모자수도 보통 이상의 노력과 열성으로 공부하고 일을 한다. 두 형제의 선택은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선택이다. 하지만 죽어라고 교육을 받아 일본인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져도 부자가 되어도 노아와 모자수를 한 인간으로 보거나 존경하는 일 따위는 없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금융권에 취직한 솔로몬 역시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끝내 부당해고 당한다. 있어서는 안되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일본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애당초 그럴 의도는 조선인이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사람을 ‘조선인’이라는 존재성만으로 그들 입맞에 맞게 취급할 뿐이다.
‘자이니치’. 일본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노아와 모자수를 지칭하는 언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일본사회에서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인들 구분하여 배제하기 위해 부르는 단어. 차별의 당위성이 마치 단어의 존재에 있는 듯이 ‘자이니치’라는 명명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정신을 파고든다. ‘당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익숙해질 때보다 부정당하고 공격당할 때다. 이들을 극단의 상황으로, 하나의 답으로 몰고 가도록 이끈 자이니치라는 단어에는 조선인이기에 겪어야 하는 차별과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이라 생각하며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기에 느끼는 혼란과 억울함이 담겨 있다. 가령 솔로몬은 애인 피비가 일본이 조선인을 국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따질 때,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화를 낼 때면 일본을 옹호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렇다고 했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말하고 사고방식을 익히며 성장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비에게 일본편에 서서 옹호하더라도 자신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하지는 못한다. 오로지 부당함과 이해할 수 없음은 자신의 내부에서만 행해지는 전쟁이 될 뿐이다.
매슬로우는 인간은 단계적 욕구를 가진다고 했다. 각각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생존의 욕구라면 점차 소속과 인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자이니치에게는 단계적으로 충족시켜가야 할 인간의 욕구가 박탈된 상태이다.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동력을 상실하게 한다.
노아의 극단적 선택은 소속감과 인정의 욕구를 배제당하고 더 이상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처절함을 보여준다. 노아의 비극적인 선택은 자신의 친부가 한수이며 야쿠자라는 것을 알게 된 충격보다 자신의 정체성으로는 일본에 소속될 수 없다는 좌절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 어떤 재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없는 위치의 조선인 야쿠자의 피가 자신에게 흐른다는 것은 그가 욕망하는 욕구에 대한 완전한 단절로 여겨졌을 것이다. 가족 모두를 외면한 채 잠적한 노아를 십여년의 노력 끝에 순자가 찾아냈을 때, 노아는 자살한다. 제 아내와 아이를 두고 벌인 선택이다. 그것은 가족이 자신을 찾아냈을 때 이미 결심한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살며 가족에게서 철저히 떠난 노아가 가족이 자신을 찾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외침이 되는 건가. 노아의 죽음은 충격적이었을지언정 노아에 대한 이해를 더해주진 못했다.
소설 카테고리를 어디에 놓을지도 약간 고심한다. 소설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계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계 1.5세. 글은 영어로 쓰였고 번역되었다. 번역서이자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니만큼 미국문학이 맞는데 '한국인', 재미교포라는 말은 자꾸 '한국'쪽으로 당기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면 파친코 속 등장인물들처럼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확연히 '한국인'이란 말을 적용하는데 어색함을 느낀다. 이 무슨 편견이고 차별가득한 느낌일까.
『파친코』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일본인에게 자이니치라고 불리는 재일동포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강제로 끌려가 되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건만…. 그럼 나는 그들을 재일동포로서 바라보려 한다, 이렇게 말하려니 뭔가 어색하다. 굳이 이런 다짐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뭐라고 그들을 동포로 인정하겠다고 한다는 건지도. 이 생각 자체가 오만이다.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행하는 ‘갑질’ 아닌가, 이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노아의 말이 떠오른다.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국적에 신경 쓰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다는 그 말이…….
사상가 성 빅토르 휴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이와 같고 어디든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 어디든 타국처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라고 했다. 어쩐지 강한 사람보다도 완성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노아의 바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