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에 관한 문제


레몬, 권여선, 창비, 2019.


   오늘도 과자가 탔다.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군요 우리 베티 번 씨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 번 씨」를 찾아봤다. 자작시라고 했으니 실제하지 않을 텐데도 인터넷상에 저 시가 있을 것만 같아서. 첫 연의 다음은 어떤 시구로 채워져 있을까. 시큼한 레몬을 쳐다보며 마무리되지 않은 시의 나머지를 생각했다. 어째서 소설의 나머지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 더웠고 되는 일 하나 없는 또하루였다.

  소설은 날마다 보는 살인사건 기사가 담지 않을 것을 이야기한다. 고교생 A양과 B군 혹은 김양과 한군에 관한 기사가 아니다. A양과 B군 혹은 김양과 한군을 알고 있는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된” 이들의 삶의 이야기다. 다언, 상희, 태림 세 화자가 장마다 연도를 바꿔 이야기를 전개하고 2002년의 어느날 경찰서 취조 장면을 상상하는 다언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뭐라 형용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언니의 죽음. 그후로 다언은 ‘되는 노릇 하나 없다’ 말하지도 못하는 삶을 산다. 나머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삶. 거기다 사실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 용의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명확히 특정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해언의 죽음에 가해자는 없는 셈이다. 소설은 가해자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고 있다. 화자의 독백을 통해 유추하도록 했다. 특별히 미스터리함이 강조되진 않는다. 다언이 해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에서 벗어나 어떻게 애도에 이르는가에 더 중점을 둔다.

  세 화자를 중심으로 했는데 다언 외에 두 사람은 용의자가 아니다. 작가는 이들을 비켜두고 사건의 목격자 태림과 특별한 등장인물을 등장시킨다. 다언의 동아리 선배 상희다. 언니가 죽은 동아리 후배와 잘 아는 자의 삶은 그 ‘죽음’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을까. 다언에서 상희의 시점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다르게 느껴졌다. 왜 상희가 등장할까, 상희의 역할은 무엇일까. 상희의 목소리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제법 한다. 상희가 본 다언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관찰하고 다언의 말을 들으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관대한 척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언에게 내 속을 들키자 발끈하여 그녀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상희는 다언을 관찰하는 위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언의 지적처럼, 상희의 자각처럼 상희는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어설프게, 섣불리 위로하려 들며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려는, 들을 자격을 부여받은 듯이 행동하는 그런. 어쩐지 나도 뜨끔해진다.

  소설은 한편으로는 그 구조가 엉성하게 느껴지면서도 뭔가 단단하게 느껴진다. 이 아이러니를 모르겠지만 그렇다. 먹먹함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용의자로 다언의 증오를 한껏 받은 한만우의 삶이 그의 동생 선우가 그의 어머니가 겪은 삶이 있으니까. 원래 부르려던 이름 대신 바꾸게 된 이름이 죽음을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 죽은 딸의 이름을 개명하려는 다언 어머니의 행동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 줄도 모르고, 당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사모하던 여학생의 기억에 수줍은 웃음을 웃어대는 한만우의 미소가, 계란 후라이를 부쳐먹는 만우와 선우 남매의 모습이 계속 맴돈다. 이건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에 관한 질문과 답이 아니니까, 그래서일 것이다. 삶에 관한 문제니까. 


이제 그들은 죽고 없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