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정신 오늘의 젊은 작가 18
김솔 지음 / 민음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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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의 추출

보편적 정신, 김솔, 민음사, 2018.


  소설보다 작품해설이 흥미로웠다. 소설이 하나의 이미지덩어리로 흘러갔다면 작품해설은 그 이미지를 깨뜨리고 구체적이었다. 보통 평론, 작품해설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여 소설을 더욱 어렵게 느끼게 하거나 소설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번엔 오히려 머릿속 제멋대로 흘러가는 생각들을 잘 모아주어 좋았다.

  회사의 비밀스런 페인트 제조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다섯 원로 중 창업주의 유일한 손녀가 죽었다. 이로써 회사는 사업의 미래를 걱정하고 비상 경영 체제를 선언한다. 전작의 영향으로 회사 내의 암투, 조직이 개인을 억압하는 그런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 했던 싶었으나 소설은 지금 현재의 상황 이전으로 거슬러 창업주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방대하게 뻗어가는 이야기를 등장인물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읽어 가면―작품해설이 안내해준 대로― 시작은 창업주가 태어난 1889년부터다. 결혼하고 출산하고 그리고 연금술에 빠지는 창업주와 결혼한 아내들과 자녀들의 서사가 펼쳐진다. 붉은 염료를 찾아 헤매던 창업주가 스승을 만나 연금술을 익히는 과정, 실패하고 신비한 붉은 페인트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이야기 또한 서사의 한 축이다. 창업주가 신비한 붉은 페인트를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다면 첫 번째 아내는 그 페인트를 판매하는 일에 주력한다. 처음엔 집시들에게 생계를 위해 창업주가 실패한 페인트를 판매했는데 점차 ‘신비한 주술적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며 잘 팔리게 되자 첫 번째 아내는 대량생산공장을 갖추어 판매를 본격화한다. 판매를 하려면 생산이 있어야 하고 이 붉은 페인트의 생산비밀이 자손들에게 이어져 온 것이다.

  이 소설은 뭔가 길게 이어지고 복잡하다. 공간적배경도 한국이 아니라 브라질과 남미를 넘나들며 시간적배경도 100년 이상이다. 현실적인 회사의 이야기를 보여주나 싶었건만 창업신화를 넘어서는 방대함을 갖는다. 연금술, 비밀, 신비로운 붉은 페인트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면서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이야기는 설화적이고 비현실적인 형태로 흘러간다. 조지 오웰의 『1984』와 히틀러도 언급된다. 이의 등장은 폭압·강압적 전체주의를 연상케 한다. 스승이 창업주에게 한 많은 이야기들, 창업주의 비극적 가계도, 그리고 연금술이 어떻게 이 전체주의와 히틀러와 연계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내내 제목처럼 <보편적 정신>을 언급하고, 그런 질문을 답을 하게 한다.


운명을 믿는 자는 결코 위대한 연금술사가 될 수 없다고, 스승은 제자에게 여러 번 강조했다. 연금술이란, 모든 물질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보편적 정신을 찾아내고 추출하여 모든 재료들의 쓸모를 재조정하는 학문이자 실천 방법이라고. 그러니까 납과 황금의 차이는 쓸모의 차이일 뿐이며 각각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정신을 조정함으로써 얼마든지 그 쓸모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금술사의 주된 역할은 물질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보편적 정신이 자유롭게 건너다닐 수 있도록 입구와 다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스승은 말했다.


  생각해보면 ‘보편’이란 단어는 자주 쓰는 단어다. 그럼에도 ‘보편이 뭐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려면 어렵다. 그러다보니 이것이 소설의 멈춤 지점이 된다. 아, 보편이란 게 보편적 정신이 뭐더라, 뭘까, 뭐여야만 하는 걸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건에 대해, 인간에 대해 인류에 대해 세상 모든 것에서 ‘보편이 뭘까’를 끊임없이 묻도록 하는 책. 


가역 변화에 중요한 요소는 보편적 정신이지만 그것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사물이나 현상, 사건, 사건과 사건 사이, 침묵, 어둠, 망각 등에 깃들인 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창조했든 스스로 진화했든 상관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과 쓸모를 존중받아야 한다. 한 가지 존재의 소멸은,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존재 모두의 즉각적인 소멸을 야기하며, 소멸이 진행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해서 거의 동시에 모든 것이 소멸된다고 말하는 편이 진리에 가깝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채무 의식,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경외감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보편적 정신이 아닐까. 인생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조물주의 선한 창조물로 환원되는 과정이다.


  스승은 연금술을, 붉은 페인트의 비밀을 알려주는 듯 알려주지 않고 비밀을 지운다. 굳이 비밀을 지운다는 건 그 비밀스런 방법을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앎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한 우려일 것이다. 오랜 역사에서 붉은 페인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페인트를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려 했는지, 그때 붉은 페인트를 활용하기 위한 인간의 정신은 ‘보편적 정신’이었는지 아닌지. 폭력과 배신을 기본으로 한 인간의 잔혹함이 보편적인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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