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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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 충성하지 않는다

죽은 자로 하여금, 편혜영, 현대문학, 2015.


  의학드라마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이런 광고인지 모를 연예기사가 새 의학드라마 방영을 앞두고 쏟아진다. 대체로 한국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고 법정에서 연애하고 직장에서 연애하고…그런 기승전‘연애물’이라는 비판이 있다. ‘병원’과 ‘의사’라는 장소와 직업이면 의학드라마로 분류되는 것인지 뜬금없는 의문을 가지면 그렇다면 ‘병원’과 ‘의사’가 나오는 소설은 의학소설이 되는 건가, 절대 망하지 않을 소설이 되는 걸까 쓸데없는 자문을 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이인시의 선도병원이다. 의학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드라마 <하얀거탑>이 다루는 이야기쪽에 가깝다. 스릴러, 미스터리쪽으로 강한 편혜영 작가의 소설이라고 덧붙이게 되면 상상가능한 분위기가 떠올려진다. 하지만 소설은 내게 전혀 다른 부분에서 추리를 가하게 만드는데 『마태복음』 8장 구절이라는 소설의 제목,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석’처럼 곱씹고 곱씹는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계속 곱씹었어. 예수는 인자하고 자비롭다면서 죽은 사람한테 왜 이러나, 사람이 죽었는데 이렇게 야박해도 되나…… 이해할 수 없었지. 한참 새기니까 조금 알 것도 같더라고.”

“무슨 뜻인데요?”

“영혼이 죽은 자는 내게 필요 없다, 불신자는 불신자에게 가고 믿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건 믿는 자로 충분하다는 뜻이려나.”

  

  소설은 수술방의 이야기보다 원무과가 중심이 된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필히 갖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아니라 돈이 흘러오고 나가는 그 구조에, 병원이 지탱해 나가는 힘인 돈, 그것을 다루는 원무과, 병원 경영과 행정에 더 집중한다. 그 상황을 둘러싼 인간의 행동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구체적으로는 선도병원으로 이직한 ‘무주’의 선택이 불러온 파장을 보여준다. 무주는 새로운 조직에서 가장, 아니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대해준 ‘이석’의 자잘한 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폭로할까 고민한다. 그 자신이 실제 행하지 않은 병원 비리에 연루되어 책임을 지고 사직한 경험을 생각하며 무주는 ‘공명’함을 선택하기로 한다. 이제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런 무주는 곧 병원비를 내지 못한 장기환자를 침상에서 내쫓는 일에 앞장선다.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공명심’을 선택한 자의 이 변화된 행동의 이유는 무엇인가.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세계는 애초 구(球)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소설이 그리는 세계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무주의 상황과 변화하는 심리 또한 생생하게 이해가 되며 그래서 무서워진다. 무주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감당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주의 확고함이 부족했던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든 확실하게. 확고함, 그것을 또한 믿음이라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때그때 따라서 행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무주와 달리 이석은 그 유연해보이는 얼굴 이면에 확고한 행동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이석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무주에게 ‘충고’하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보다보면 무주가 얼마나 유약한지 느껴진다. 

  병원의 구매품목을 조작하는 비리자를 고발하는 것은 병원을 위해 옳은 선택이고 정의로운 선택일텐데 무주는 조직 내에서 왕따당하고 한직으로 밀려난다. 아이는 유산되고 아내와는 멀어지는 상황,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있던 이석의 아들 죽음에 대한 죄책감까지 겹친 무주의 일상. 그 속에서 무주는 쉽게 자신을 바로세우지 못한다. 거기에 이석의 복직까지 이어지면 마침내 무주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의심하게 된다.

  ‘조직’이란 언제나 개인을 죽인다. ‘조직’이라는 생물이 굴러가는 방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방법에 파괴되고 무너지는 개인은 언제나 무력하다. 정의와 윤리는 이상이과 관념일 뿐 실제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조직에게 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다. 무주가 그랬던 것처럼 ‘솔직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실은 원하는 것이 정의와 윤리가 아니었는지도.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면 무주처럼 되고 만다는 생각을 한다.  

  문득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는 검찰총장 후보자의 말이 떠오른다. 어찌 생각하면 이 말도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무주의 결정과 방식이 후보자의 방식과 같은 면이 있으면서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무주가 ‘지금 처한’ 상황은 무엇을 해야 할 어떤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무주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쉬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흔들리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생각없음은 아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신념 하나가 조직의 생존방식을 누르고 세상 모든 공존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 이 말, 아주 아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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