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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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껄 그대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한겨레출판, 2018.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아직 독립은 먼 1920~30년대다. 생각해보면 이 시기를 살아가던 우리 민족은 헤아릴 수 없음에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삶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유형화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문학작품에서 그릴 수 있는 진정성있는 이야기이자 주권 잃은 민족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실제 모습일 수밖에 없음이다. 이 소설은 그런 전형적인 삶을 살아가야 했던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의 이름, ‘강주룡’으로 ‘두루주에 용룡 자, 내 한 몸으로 이 세상 다 안아주는 용이 되라’는 이름 뜻처럼 오래도록 기억될 삶을 소설화했다. 당대의 전형적인 유형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실존인물이 살아간 삶의 이야기다.

  1930년이 아니라 마치 1970~80년대 여공들의 삶이 아닌가 여겨진다면 강주룡이 한 일에 대한 놀라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노동운동가이자 최초의 고공투쟁가인 강주룡의 인생은 소설에서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는 것은 무언가 삶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으로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가로서의 강주룡의 일생만을 알았다가 소설을 통해 독립운동가로서의 강주룡의 삶 또한 알게 된다.

  1901년생 평안 출생 강주룡의 삶은 시대적 배경 속에 흐르고 흘러가는 삶을 보여준다. 당시 수많은 이들이 간도로 이주한 것처럼 일제의 억압과 가난으로 강주룡의 가족 역시 서간도로 이주한다. 그때 나이 14세, 그 시대의 여성의 삶이란 일제에 의한 억압에 더해 가부장제 속에서의 부모와 남편에 의해 더 억압당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주룡은 말을 건다. 얘, 강녀야, 넌 곧 시집을 간다. 몹시도 고운 이 하고 부부가 된다. 강녀야, 너는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 것 상상이나 해봤니, 서방은 널 집에 돌려보내고 곧 죽는다. 넌 살인범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다. 하나만 일어나도 기가 막힌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이 같은 말들을 꿈속의 강녀는 듣지 못한다.


  스무살,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5살 어린 신랑과의 혼인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독립 운동에 뜻을 품은 남편을 따라 ‘함께’하기로 한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그 선택, 필연적으로 보이는 그 선택은 강주룡에게 내재한 신념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독립군에서도 뛰어난 기지로 활약하는 강주룡이 같은 뜻을 지닌 독립군에게 그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성’으로 부각되어 당하는 조롱과 질투, 멸시를 보고 있으면 그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독립이라는 뜻을 품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그러할진대 ‘시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가부장제의 뜻을 따르는 대표들은 오죽하랴. 아들, 자기 자신의 삶과 안위를 중시하던 그들에 의해 강주룡이라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훼손당한다. 독립운동 하던 남편의 병사의 책임이 오로지 강주룡의 몫이라 규정짓는 그 흔하디 흔하게 하는 말, ‘남편죽인 년’, 당연한듯한 그 굴레에 이젠 나이 많은 지주에게 팔려가야 하는 삶이 그 시대에도 여성들의 삶이었다.


돼먹지 못한 인간이 한 고약한 말은 잊으면 그만이다. 누가 나더러 모단 껄이 아니라 했다고 내가 정말 모단 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하는 남편을 따라가 직접 독립운동활동가가 되었던 것처럼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규정짓는 삶을 살기 위해 강주룡은 그들이 씌운 굴레를 내던진다. 가족을 떠나 평양 고무공장의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물론 그 환경이 여성에게 가하는 핍박이 덜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일이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강주룡은 모단 껄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여성 노동자를 향한 차별과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올바른 것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굳건히 하며, 그 부당한 노동환경에서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더 열악하고 차별받는 상황에서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을 외치며 노동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한다. 평양 을밀대 12m 지붕에 올라 임금삭감을 반대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투쟁의 선구자가 된 강주룡은 이후에도 단식투쟁을 지속한다. 1970~80년대 내 나라에서도 노동운동은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고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허다했으니 일본경찰에 잡히고 감옥을 드나들며 투쟁하는 강주룡의 몸이 쇠해지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렇게 서른살 강주룡의 삶이 이야기가 끝이 난다.


내래 배워 아는 것 중 으뜸 되는 지식은, 대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명예로운 일이 없다는 거입네다. 하야서 내래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우에 올라왔습네다. 평원 고무 공장주가 이 앞에 와 임금 감하 선언을 취소하기 전에 내 발로 내려가는 일은 없습네다. 끝내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는다면 내 고저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길 뿐입네다.


  강주룡의 일대기, 전기문을 보는 듯이 쓰인 소설은 쉬이 책장이 넘겨진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벌써 끝이 난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실존인물의 삶이니까 상상에 보태더라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만 어쩐지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더구나 노동운동의 이야기를 다룬 2부에서의 고공투쟁을 다룬 부분은 생각보다 너무나 휘익 지나가는 듯이 느껴져 단신 기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아쉬움은 강주룡 생애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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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에 대하여 - 2017년 내셔널 북 어워드 대상 수상작
로빈 벤웨이 지음,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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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바퀴로 달리는 가족


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에 대하여, 로빈 벤웨이, 2018.


  그레이스, 마야, 호아킨. 세 아이가 펼치는 이야기에 결국 눈물 흘리고 말았다. 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이라는 제목은 책을 읽기도 전에 예상 전개를 가늠케 한다. 이 아이들이 모두 입양아라는 것, 더욱이 청소년 문학이란 특성이 더해져 그 결말도 예상가능하다. 어쨌든 가슴 따뜻하게, 모두에게 희망이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세 아이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에 뭉클 거릴 수밖에 없었다.

  친부모에게서 나와 서로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세 아이가 성장과정에서 겪는 혼란은 청소년들이 겪게 되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집약시켜 놓았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의 사회문화적 특성이 우리와는 무척이나 달라서인지 그 문제적 상황도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도 참 다르구나라고 느꼈다. 그것은 단지 청소년 문학이라는 이유이기 때문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런 면에서 입양에 대한 시각,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를 보는 방식이 위에서 내려보거나 사선으로 보는 우리네 문화적 특성에선 이런 소설의 분위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 싶다. 제 아무리 청소년 문학이라도 말이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세 아이에게 닥친 문제는 10대에 임신을 한 그레이스의 혼란과 고통에서 시작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책임지고 겪어야 하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 그 상황에서 또래들로부터의 비난은 여자아이 그레이스에게만 집중된다. 그 시간 동안 아이의 아버지란 존재는 없다. 책임을 지지도 같이 비난을 받지도 않는 존재다. 자신의 아이를 자신처럼 제 손으로 입양시키는 결정을 해야만 했던 그레이스에게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증은 필연적이었을 게다. 그렇게 자신의 혈연들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레이스는 형제들에게 메일을 띄운다.

  마야는 제 언니에게 온 메일을 받으며 동생이라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언니의 존재를 기뻐한다. 자신이 입양된 이후로 생긴 동생은 가족사진 속에서 자신을 뚜렷이 ‘다른’ 존재, ‘이방인’이라 느끼게 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입양아에 대한 책자를 보며 자신을 어떻게 잘 키울까를 고민하는 부모님은 동성애자인 마야의 성향 또한 이해하고 수용하며 언제나 마야를 지지해주는 존재인데 이혼을 진행 중인데다 엄마는 알콜중독 증상까지 있다.

  세 아이의 맏이인 호아킨은 여러 번 위탁가정을 전전했다. 현재 위탁 가정의 부모가 자신을 입양하려 하지만 위탁 가정에서 겪은 폭력, 파양 그리고 불운한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서 자꾸 멀어지려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닫아 둔 채 자신의 역사가 없다는 사실에, 자신의 성장 과정의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그런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물이 되지 않는 아이들의 삶이 각자 처한 환경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보게 된다. 그런 세 아이는 오랜 세월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엄마가 같다는 이유로 모여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공유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흐르고 엮이는 마음들이 무척 예뻐서 세 아이에 대한 응원이 넘쳐 오른다. 각자의 성장 속에서 상처받고 고뇌하며,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 부모, 양육자와의 관계 그리고 서로의 존재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내면의 변화를 일으켜주는지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크리스마스에 모두가 자전거를 받았어요. 위탁아이들도요. 정말 큰 선물이었어요. 제 것은 두 바퀴 자전거였고, 전 어떻게 탈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위탁아빠가 보조바퀴를 자전거에 달아 줬어요. 그리고 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넘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보조바퀴들이 절 멈출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자전거 타기를 배웠어요. 그래도 전 보조바퀴를 떼지 못하게 했어요. 왜냐하면 그 느낌이 좋았거든요. 알겠어요? 보조바퀴가 절 언제나 잡아 줬어요. 그게 제가 그레이스와 마야에게서 느낀 것과 비슷해요. 넘어지려고 할 때 넘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걔들이 함께 있었거든요.”


  어떨 땐 입양가족들에 대해 ‘특별하다’ 말하고 어떨 땐 ‘평범하다’ 말한다. 그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특별과 평범이란 말이 가지는 의미는 같은 것처럼 여겨진다. 생물학적인 관계에 연연하는 한국문화, 그럼에도 ‘입양’은 잘 하는, 다시 말해 다른 가족으로 내 아이를 보내는 일은 국가가 나서서도 잘하는 이 나라에서 입양가족은 다른, 아니 ‘틀린‘ 가족이 될 것이고 입양이 자연스러운 다른 나라에선 가족구성이란 이름으로 평범할 뿐. 물론 개인의 성향이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겠지만, 이런 포용력은 개인의 성향을 아우르는 사회문화도 바탕에 있을 것이다.

  이 책 속 세 아이의 부모들은 보통의 부모와 다르지 않다. 내 아이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고 다투고 싸우고 사랑하고 헤매고 그렇고 그런. 어른만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여러 가족의 이야기에서 아이와 부모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음을 알 수 있다. 그건 사실 입양가족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가정의 특징이다. 특별히 입양가족이니까 어떠할 것이다라는 생각들, 그것이 특별과 평범을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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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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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함에 기대어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2018.


  올리버 트위스트가 처한 현실에 비해서 책 표지는 참 따스하고 예쁘다. 아마 그것이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고 나서도 번역에 대한 불만이 겹치어 이 따스해 보이는 표지를 다시 펼쳐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완역본이라는 것도 많은 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어쨌든 올리버 트위스트의 마음결 같은 표지의 힘이다. 이 고전이 유치원 비리와 맞물려 생각날 땐 따스한 책표지도 소용없다.

  올리버가 살았던 시대, 그 사회 환경에선 올리버처럼 성장하고 자라나는 것이 미덕일 수가 있을까.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서로 읽혀진다. 그 시대 아동이 처한 현실은 찰스 디킨스가 겪은 일과 맞물려 생생하다. 하지만 아동문학과 아동 영화로 널리 회자된 것처럼 언뜻 올리버 트위스트는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은 올리버 트위스트가 천성적으로 가진 선함으로 헤쳐나가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우린 언제나 착하고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이뤄지기를 응원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렇지 못하다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고 여긴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보여주는 현실의 타개책은 오로지 개인이 가진 ‘선량함의 정도’에 따른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생각하면 미소짓게 되고 응원하게 되는 이 풍자적 이야기에 조금 주춤하게 되는 건 그런 까닭이다.

  개인이 지닌 선량함에 기대어 잘못된 일들이 바뀌기를 기대한다는 건 얼마나 소모적이며 성과없는 일인가. 이 사회는 그것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먼 나라 영국에서 19세기에 일어난 이 이야기의 배경이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몇십년전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지금은 곳곳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형태, 이른바 ‘노예’처럼 지적장애인들을 부리는 일로 지속되고 있다. 개인의 선량함, 그것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인간을 오로지 믿는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두 아이 모두 상태가 아주 나빠 장사를 치르는 것보다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2파운드 싸거든요. 다른 교구에 두 아이를 떠넘길 수 있다면 말이죠. 사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오. 재수없게 도중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죠. 하하하!”

 

  여지없이 돈 앞에서는 선량함을 없앨 수 있는 사람, 선량함이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때로 이 선량함은 늘 피해자들에게만 끝까지 요구된다. 올리버 트위스트 시대 구빈원을 보며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충격이란 말이 무색할 이 사건은 특별법 제정을 청원하고 있지만 워낙 권력을 쥔 이들이 사건의 중심고리와 연결된 이들이 많아서인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도 ‘선량함’도 없어 보인다. 여기에 사립유치원들의 패악이 겹치어 얹어진다. 더할나위 없이 선량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기 위해 감춘 얼굴. 구빈원의 시대가 아님에도, 돈을 받지 못해서도 아니고 돈을 받고 있음에도 수많은 올리버 트위스트를 양산해낸 이 거대한 구조가 그들만의 ‘선량함’. 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그들만의 끈끈함. 너무도 뻔하게 그들의 비리와 잘못들을 당당하게 가벼이 여기는 그들만의 그 순수함.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학대하고 못살게 굴 때, 그 끔찍한 증거가 무거운 먹구름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하늘로 올라가 나중에 우리가 저세상에서 모든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죽은 사람이 뼈저리게 후회하는 고백을 단 한번이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아무리 거만한 인간이라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는 증언을 헤아릴 수 있다면! 매일 일어나는 모욕과 부당함, 고통, 불행, 잔혹함이 있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말들이 얼마나 허황되고 소용없는 것인지 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고 한다.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웃는 얼굴을 하지만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아흔 명이 먹을 국에 달걀 세 개를 깨뜨려 넣는 감사고 사랑이다. 명품백을 사랑하고 성인용품을 애용하느라 바쁜 사랑. 아이들은 그들에게 숫자고 볼모다. 사립유치원의 행태가 이 책 속 구빈원 직원 범블, 구빈원장, 위원회 위원들이 행태처럼 하나같이 익숙하다. 오래도록 당연처럼 이어져 온 그들의 비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 여기는 그 순수함을 보건대 옳고 바른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가지어 잘못을 깨달으라 함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축적된 구조적인 문제가 잠시의 눈물 한방울로 해결될 리 없다. 같은 이유로 이런 구조 속에 놓여 고통을 견디는 올리버 트위스트와 같은 아이들에게도 마냥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과 정직과 선함만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런 상황 속에서 올리버 트위스트가 몇 번의 거짓말을 하고 몇 번의 다툼을 일으킨다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책 속 결말처럼 뒤쫓기지 않고 포근하고 따스하게 지낼 수 없게 되는 건가. 이 모든 것에 회의가 든다.


내가 모두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썼으나 이런 말들은 사족에 불과하다. 뜨거운 사랑과 따뜻한 인간미가 없다면,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만물에게 온정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어쩌면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뜨거운 사랑과 인간미로 아이들보다 돈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미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대다. 또한 그들이 하느님께 감사함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곳은 십자가를 달고 어떤 곳은 만자를 달았다. 어느 한곳도 빠짐없이 하트를 그려놓지 않은 곳이 없다.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아이의 순수함을 마냥 바라는 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시대다. 그렇게 본을 보여주는 이가 없건만! 인간의 선량함보다 인간의 악랄함을 믿으며 미래를 그려나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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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주 - 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 2018년 뉴베리 대상 수상작
에린 엔트라다 켈리 지음, 이원경 옮김 / 밝은미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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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살의 우주

안녕, 우주-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 에린 엔트라다 켈리, 2018.


  책을 읽으면서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나의 열한살은 어떠했더라, 과거에 잠기어 있다보니 아이들의 이야기를 자꾸 놓쳤다. 다시 책장으로 눈을 돌려 커다란 활자의 책장을 술렁 넘겼지만 내 머릿속은 책속 아이들의 세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그 시절과 지금 이 시절의 어디를 헤매며 무한 글자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라도 사람들의 삶은 다르지 않고 반복되어 간다. 아이들의 세상에서도 어른들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왕따가 있고 고독이 있다.  


할 일이 무궁무궁해.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어.

친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

나만 있으면 돼. 그렇지?

혼자 노는 게 제일 좋아.

그래야 성가신 일도 적지.


  열한살을 보내고 중학교로 진학하게 될 두 아이는 깊은 고뇌를 짊어지고 있다. 소심한 아이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있는 아이. 마냥 수줍고 부끄러움 많고 소심한 아이 버질은 발렌시아에게 호감을 느끼며 친구가 되고파 한다. 하지만 여지껏 한번도 말을 걸어보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 상대는 할머니와 기니피그 걸리버이다. 발렌시아는 친구들이 느리다는 이유로, 발렌시아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일들이 싫다는 이유로 같이 놀지 않기로 한 이후 친구를 잃어버렸다. 홀로 자연과 대화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 말이 참 씁쓸하게 울린다. 모두를 괴롭히는데 탁월한 역할을 하는 쳇 블런스에게 이 두 아이도 예외가 아니다. 놀림과 괴롭힘을 받는다. 그 자신 허풍쟁이에다 겁쟁이면서.

  동화속에서 가장 아이답기도 하고 전혀 아이답지 않은 존재가 카오리와 동생 겐이다. 카오리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점성술을 알려주는 어른은 절대 사절을 고수하는 열한살 점성술사다. 버질이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는 순간, 카오리는 절대 우연이 아니라 운명처럼 이어진 버질과 발렌시아의 점괘를 예언한다. 그렇게 우연인듯 운명처럼 버질은 쳇 때문에 우물 속으로 갇혀버리고 우물 속에서 버질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 책을 연애소설화 시키면 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쳇이란 악역으로 인해 운명처럼 만나게 된 버질과 발렌시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동화를 그런 익숙한 드라마로 봐버리면 신비감이 덜해지고 만다. 어떻든 이 동화가 가지는 매력이란 운명이라는 환상성, 그것이니까. 소심한 버질이 우물 속에 갇혀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할 상황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 존재와 대화하며 자신을 다독이는 일, 발렌시아의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성자 르네에게 이야기하며 홀로 외로움과 상처를 다독이는 일을 보면, 섬세하고 여린 아이들이 누군가의 한마디 말로 인해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안타까워진다.


“우리 동업해야겠어.” “뭐라고?” 

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카오리가 다시 말한다. 

“우린 동업을 해야 해. 나는 영적인 세계를 알고 넌 자연의 세계를 알아. 더없이 좋은 관계잖아. 그래서 운명이 우리를 친구로 묶어준 거야.” 친구.


  하지만 그날의 사건들은 이렇게 아이들의 일상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한걸음 내딛어간다. 점성술사 카오리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의 힘으로, 전 우주가 만들어내는 신비한 마력으로. 물론 어떤 큰 사건을 겪었다고 사람이 쉬이 변하지는 않는다.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어준 말을 나눠보고픈 아이 발렌시아와 만났음에도 말한마디 하지 못하는 버질의 소심함은 여전했으니까.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헤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끝끝내 쳇 블런스는 그 악당의 면모를 유지하니까.

 조용하게 웃음짓게 되는 이야기에 필리핀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전통 설화가 얽이면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장마다 각각의 아이들로 화자가 달라지는 이야기 방식은 동화속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엇보다 허술한듯 모든 우주의 신비를 믿는 카오리라는 점성술사의 존재가 신비로운 세상을 믿고파하는 아이의 마음 같아서 응원해주고프다.

 

새로이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지. 시간의 마술이란다. 오늘 믿은 것을 내일은 믿지 못할 수도 있어. 보고 있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거든.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이 보이는 거야.


  새벽 세 시 삼십분. 이 시간 아이들이 잠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주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별자리도 흘러가는 조용한 그 새벽. “안녕”이라는 인사말. 누군가의 내딛음이 시작된다. 동화속에서처럼 아이들이 거칠고 힘든 세상에서도 신비함을 믿어가며 긍정의 힘을 믿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성술사를 만나러 가고픈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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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백수린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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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빌라에 갇혀

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8.


  몇몇 작가는 다른 작품집에서 본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몇몇 처음 보는 작가가 있다. 문지문학상 작품집에서 본 소설은 다른 문학상 작품집에서 본 소설들의 흐름과 두드러지게 다른 파노라마를 그린다. 대체적으로 한두 편 정도인데 문지문학상은 절반 이상이다. 작가들의 인터뷰가 실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돋운다.

  열한편의 단편이 이 계절의 소설로서 계절로 나뉘어 있는데 계절의 느낌을 담았나, 계절과의 연관성이 무언가 생각했더니 단지 매 계절마다 출판사에서 작품을 뽑는 이름이었다. 아무튼 계절이랑은 상관없었다. 사촌동생이 작품집 제목을 보더니 ‘여름의 빌라, 제목이 좋다’라고 했다. 평범한 제목이자, 일상의 말인데 어떤 면에서 좋다라고 느끼는지 궁금했다. 묻질 못해서 답을 못 들었지만, 그냥 막연하게 여름의 빌라라는 제목을 반복해 본다. 이 작품집에서 유난히 걸리던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한부분이 걸리자 좀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해버린 감정이 여름의 빌라에 있었다.

  문지문학상은 수상작은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 서간체로 써내려간 소설은 주아가 스무살에 만난 독일인 노부부를 삼십대에 다시 만나 남편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던 시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노부부와 주아의 오랜 우정이 한순간 깨어져버리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주아 자신의 눈일까. 남편 지호의 눈일까.


레오니를 제외한 우리 넷이 나란히 앉아 발마사지를 받던 밤. 나는 나의 피부색이 당신의 피부색보다 어둡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의 피부색은 내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던 젊은 안마사의 피부색보다는 밝았지요.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날밤 골똘히 생각합니다. 앳된 마사지사는 무릎을 꿇고 우리의 발을 박하와 레몬으로 정성껏 문질렀습니다. 한국에서였다면, 마사지를 해주는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는 그 후로 승합차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들, 허름한 집들이나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툭툭 같은 것들을 보는 일이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에서 주아가 갑자기 인식하는 ‘인종’에 대한 의식과 그에 대한 지호의 적대적인 감정은 상당히 불편하다. 한스가 캄보디아 사람들의 낙천적인 삶과 천성을 경이롭다고 할 때 지호는 캄보디아의 가난을 이야기하며, 독일인의 자격을 따지며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지호는 평소 윤리와 실존을 떠들던 베레나가 보기엔 ‘반듯한 도덕관념’을 지닌 사람이다. 하지만 내겐 ‘삐딱한 도덕관념’으로 느껴지는 이 모든 행동과 말들은 단지 지호뿐만 아니라 주아에게서도 느껴진다. 지극히 관념적인 도식을 한국의 젊은 부부는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 마사지사로 인해 인식된 피부색의 차이로 거리감과 불편함을 느끼는 주아는 한국이었다면, 한국인이었다면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캄보디아 마사지사가 그들에게 마사지를 하는 일은 자본의 일이지 인종의 일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 그곳에 사는 캄보디아인 모두는 가난하고 불행한 인종으로 분류하는 지호와 주아에겐 캄보디아 보다는 한국이 한국보다는 독일이 더 우위에 있는 나라이며 국민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독일인이라는 것, 전범 국가의 국민이기에 한스 부부를 현재의 가해자로 인식해버린다.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폭력 이외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뿐이라고.


  폭력에 대한 지호의 말이 얼마나 허황되게 들리는가. 그렇게 지호와 주아라는 개인이 한스 부부에게 개인적으로 가하는 잔인한 폭력의 말은 폭력에 대한 관념적 인식에 골몰하는 지호의 의식에 환멸을 느끼게 한다. 한국에서 마사지를 받았다면 지호는 계급의식으로 인해 반듯한 도덕관념에 의해 힘들어 할까.


당신은 우리가 함께 타프롬 사원을 걸었던 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2016년 12월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 소멸되는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 하지만, 주아.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한스부부가 캄보디아인의 삶을 여유와 낙천으로 보며 동경화한 건 테러 피해자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감정의 발로였다. 이 지극히 관념적인 도식 속에서 언뜻 비장하고 비판적이며 자신의 생각의 틀에 맞추어 사고하는 지호에게서 룸펜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 끈끈한 지호의 지배적 사고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 그런 시각으로 지호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무심히도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반듯한 도덕관념’의 소유자는 알까. 자기 세뇌에 빠진 채 머리로만 인식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보고 판단할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노부부가 캄보디아 마을에서 느낀 그 감정이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국가와 인종에 대한 일반적인 도식으로 에워싸면서 개인, 타인의 삶에 대해 얼마나 몰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타인을 바라보는지를 생각하며 끝끝내 불편하게 자리한 지호가 주아가 걸려서 나가지 않는다. 내게 있는 그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여름의 빌라에 갇혀 최근 소설에서 보지 못한 다른 스타일의 소설들에는 덜 눈이 갔다. 한참을 지호에게 소모적인 감정을 발산하고 났으니 선을 지우고 다른 아이를 받아들인 레오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빌라에 갇힌 이 마음을 풀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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