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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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함에 기대어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2018.


  올리버 트위스트가 처한 현실에 비해서 책 표지는 참 따스하고 예쁘다. 아마 그것이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고 나서도 번역에 대한 불만이 겹치어 이 따스해 보이는 표지를 다시 펼쳐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완역본이라는 것도 많은 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어쨌든 올리버 트위스트의 마음결 같은 표지의 힘이다. 이 고전이 유치원 비리와 맞물려 생각날 땐 따스한 책표지도 소용없다.

  올리버가 살았던 시대, 그 사회 환경에선 올리버처럼 성장하고 자라나는 것이 미덕일 수가 있을까.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서로 읽혀진다. 그 시대 아동이 처한 현실은 찰스 디킨스가 겪은 일과 맞물려 생생하다. 하지만 아동문학과 아동 영화로 널리 회자된 것처럼 언뜻 올리버 트위스트는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은 올리버 트위스트가 천성적으로 가진 선함으로 헤쳐나가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우린 언제나 착하고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이뤄지기를 응원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렇지 못하다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고 여긴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보여주는 현실의 타개책은 오로지 개인이 가진 ‘선량함의 정도’에 따른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생각하면 미소짓게 되고 응원하게 되는 이 풍자적 이야기에 조금 주춤하게 되는 건 그런 까닭이다.

  개인이 지닌 선량함에 기대어 잘못된 일들이 바뀌기를 기대한다는 건 얼마나 소모적이며 성과없는 일인가. 이 사회는 그것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먼 나라 영국에서 19세기에 일어난 이 이야기의 배경이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몇십년전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지금은 곳곳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형태, 이른바 ‘노예’처럼 지적장애인들을 부리는 일로 지속되고 있다. 개인의 선량함, 그것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인간을 오로지 믿는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두 아이 모두 상태가 아주 나빠 장사를 치르는 것보다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2파운드 싸거든요. 다른 교구에 두 아이를 떠넘길 수 있다면 말이죠. 사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오. 재수없게 도중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죠. 하하하!”

 

  여지없이 돈 앞에서는 선량함을 없앨 수 있는 사람, 선량함이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때로 이 선량함은 늘 피해자들에게만 끝까지 요구된다. 올리버 트위스트 시대 구빈원을 보며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충격이란 말이 무색할 이 사건은 특별법 제정을 청원하고 있지만 워낙 권력을 쥔 이들이 사건의 중심고리와 연결된 이들이 많아서인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도 ‘선량함’도 없어 보인다. 여기에 사립유치원들의 패악이 겹치어 얹어진다. 더할나위 없이 선량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기 위해 감춘 얼굴. 구빈원의 시대가 아님에도, 돈을 받지 못해서도 아니고 돈을 받고 있음에도 수많은 올리버 트위스트를 양산해낸 이 거대한 구조가 그들만의 ‘선량함’. 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그들만의 끈끈함. 너무도 뻔하게 그들의 비리와 잘못들을 당당하게 가벼이 여기는 그들만의 그 순수함.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학대하고 못살게 굴 때, 그 끔찍한 증거가 무거운 먹구름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하늘로 올라가 나중에 우리가 저세상에서 모든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죽은 사람이 뼈저리게 후회하는 고백을 단 한번이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아무리 거만한 인간이라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는 증언을 헤아릴 수 있다면! 매일 일어나는 모욕과 부당함, 고통, 불행, 잔혹함이 있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말들이 얼마나 허황되고 소용없는 것인지 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고 한다.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웃는 얼굴을 하지만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아흔 명이 먹을 국에 달걀 세 개를 깨뜨려 넣는 감사고 사랑이다. 명품백을 사랑하고 성인용품을 애용하느라 바쁜 사랑. 아이들은 그들에게 숫자고 볼모다. 사립유치원의 행태가 이 책 속 구빈원 직원 범블, 구빈원장, 위원회 위원들이 행태처럼 하나같이 익숙하다. 오래도록 당연처럼 이어져 온 그들의 비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 여기는 그 순수함을 보건대 옳고 바른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가지어 잘못을 깨달으라 함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축적된 구조적인 문제가 잠시의 눈물 한방울로 해결될 리 없다. 같은 이유로 이런 구조 속에 놓여 고통을 견디는 올리버 트위스트와 같은 아이들에게도 마냥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과 정직과 선함만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런 상황 속에서 올리버 트위스트가 몇 번의 거짓말을 하고 몇 번의 다툼을 일으킨다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책 속 결말처럼 뒤쫓기지 않고 포근하고 따스하게 지낼 수 없게 되는 건가. 이 모든 것에 회의가 든다.


내가 모두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썼으나 이런 말들은 사족에 불과하다. 뜨거운 사랑과 따뜻한 인간미가 없다면,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만물에게 온정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어쩌면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뜨거운 사랑과 인간미로 아이들보다 돈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미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대다. 또한 그들이 하느님께 감사함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곳은 십자가를 달고 어떤 곳은 만자를 달았다. 어느 한곳도 빠짐없이 하트를 그려놓지 않은 곳이 없다.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아이의 순수함을 마냥 바라는 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시대다. 그렇게 본을 보여주는 이가 없건만! 인간의 선량함보다 인간의 악랄함을 믿으며 미래를 그려나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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