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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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조차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2016.


  한증막에서 들어선 것처럼 물기 가득한 계절이, 6월의 비가 떠올려지는 소설이다. 그 짙은 아예메넴의 기후가 잊혀지지 않기에 오늘처럼의 물기없는 추위가 거센 날에 떠올릴 소설이 아닌데 아룬다티 로이의『작은 것들의 신』가 불쑥 스쳐간다. 인도라는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이 비슷하고, 또한 낙살라이트가 등장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이 소설. 작가의 삶이 반영된 자전적 소설 같이 느껴졌던 이 소설에서 왜인지 아예메넴의 기후 묘사가 좋았다. 좋았다기보다는 그 기후로 인해 더 쓸쓸했다는 것이 더 맞겠다. 

  오래 여운이 남았던 이 소설이 뜬금없이 <조선일보> 사주의 열 살짜리 손녀의 폭언에 의해서 되새겨진다. 전우용 교수의 이 사건에 대한 “어린아이까지도 ‘한국인 고용인’에게 패악을 떠는 고용주 가족 문화는, 일제강점기 악질 일본인 가정에나 있던 것”이라는 논평 때문이다. “자국민을 식민지 노예 취급하는 자들이, 나라에 보탬이 될 리 없는 자들이 이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이 나라는 어찌하여 친일의 청산이 이다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흘러왔는지, 그런 채로 발전이니 진보니 하며 흘러온 이 나라의 비극에 종결은 있는 것일까. 어떤 문화를 떠올리는 일, 이 글을 보며 식민지, 갑질, 비극, 이런 단어 끝에 무수한 ‘벨리아 파펜’의 모습이 떠올려졌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벨리아 파펜이 등장한 건, 바로 이 소설이었다.


벨루타의 아버지 벨리아 파펜은 ‘구시대’의 파라반이었다. ‘뒷걸음질치던 시절’을 보았기에 맘마치와 그 가족이 베풀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범람하는 강물처럼 넓고 깊었다. 돌조각으로 인한 사고가 났을 때, 맘마치가 의안을 알아봐주고 값도 치러줬다. 그는 아직도 그 빚을 갚을 만큼 일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는 이도 없었지만 자신은 결코 갚을 능력도 없었기에, 그 눈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감사함에 미소는 절로 커졌고 허리는 더욱더 굽혀졌다.


  혁명적이며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이끌어 가는 아들 벨루타에게는 버거운 짐이자 방해꾼이었던 벨리아 파펜. 그는 갑질 문화를 반박하지 않는, 순응하며 철저하게 감사하는 인물이다. 벨루타와 그에게는 영원한 아가씨 암무의 관계에 극도로 두려워하며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철저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감사하며 감사하는 벨리아 파펜들이, 현재 이 나라에도 제법 존재하지 않는가. 때론 시대의 비극은 ‘기꺼이 내어주신 그분’을 영원히 받들어 모시는 불가촉천민이기를 자처하는 이들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 그 작은 것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조용히 밀려오는 슬픔을 느끼게 만든 이 이야기에서 벨리아 파펜으로 인해 분노가, 슬픔이 배가되었던 기억이 좀체 사라지지 않아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을 두고서도 벨리아 파펜의 행동과 말들이 먼저 떠오르는 일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자국민을 식민지 노예 취급하는 자들이 더욱 더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내는 경제, 사회, 문화적 형태에서 쉬이 벗어나려 하지 않는 벨리아 파펜같은 인물이 시대의 비극을 더욱 타오르게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갑질 부류들이 등장할 때마다 제법 언론이 시끄러웠건만 이번만큼은 조용하다는 것이 그들 갑에 기생하는 어떤 을들 때문이겠지. 열 살이라는 작은 아이조차도 이 나라의 생태를 너무도 잘 알아가는 모습, 한국식 카스트, 그 아이가 재력과 권력을 쥐고서 형성해갈 문화가 아찔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할머니가 자신의 소녀 시절 카스트제도가 계급에 따라 행동을 달리 해야 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한국 언론사 대표의 열 살짜리 딸이 하는 말들과 참 닮아 있다. 인도의 그 유명한 카스트제도에 의해 지주의 딸 암무와 불가촉천민 벨루타의 사랑에 제약이 있다면 암무는 가촉민임에도 여자라는, 거기에 대해 이혼녀라는 이유로 행동의 제약이 더해진다. 그리고 혁명이란, 그 혁명을 위하여 또다른 제약을 가한다. 세상은 온갖 제약을 만들어내는데 중독된 이들이 지배하는데 재미들린 듯하다.

  1969년 인도 케랄라 아예메넴에서 지배했던 규범과 관습들이 23년이라는 시간을 오가며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인도와 영국, 힌두교와 시리아 정교도, 불가촉천민과 가촉민, 남자와 여자라는 그 차이가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며 사랑을, 가족을 파괴하는지를. 그럼에도 굳건하게 사랑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더 나중에도, 이날 이후 이어진 열세 번의 밤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 미래(그들의 ‘사랑’, 그들의 ‘광기’, 그들의 ‘희망’, 그들의 ‘무하아하 기쁨’)를 거미와 결부시켰다. 매일 밤 (갈수록 커가는 두려움을 안고) 거미가 그날을 견뎌냈는지 살폈다. 자기파괴적으로 보이는 자만심에. 그들은 거미의 다양한 취향을 사랑하게 되었다. 거미의 어기적대는 위엄도.

     그들은 덧없는 것을 믿어야만 함을 알았기에 거미를 선택했다. ‘작음’에 집착해야만 함을. 헤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단 하나의 작은 약속을 얻어낼 뿐이었다.

     “내일?”

     “내일.”

     그들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감정을 배가시키는 문체로 쓰여진 소설이지만 단지 사랑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인도가 처한 현실과 문제를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도 역시 그 과거의 관습이 말끔히 걷어지지 않은 사회인 탓에 23년 전의 일들이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세상의 그 거대한 규칙에, 혹은 신이 내린 운명이라 말하는 것들에 맞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마음들이, 그 시간들이 애틋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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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2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아룬다티 로이의 책들을 섭렵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가의 최고 책인 <작은 것들의 신>
은 가장 끝으로 미루어 두었습니다.

모시빛 2018-11-23 18:39   좋아요 0 | URL
곧 줗은 시간을 보내겠네요.
저는 <작은 것들의 신> 읽는 시간이 좋았어요. 책을 덮고 나서는 많이 허했지만요....
 
나의 다정한 마야
멀린 페르손 지올리토 지음, 황소연 옮김 / 검은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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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마야


나의 다정한 마야, 멀린 페르손 지올리토, 검은숲, 2018.


  어항속 물고기가 뛰노는 듯한 표지에 박힌 책 제목은 다정스러워 난 이 책을 꿀벌 마야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읽고 싶어 담아 두었던 이유는 어디로 날아가고 꿀벌 마야가 아님을 알고선, 마야를 다정스럽게 부르기엔 마음이 잡히지 않아 더디게 책이 흘러가게 된다. 원제는 “가장 위대한”이다.

  이야기는 충격적인 교실 현장에서 시작한다. 한 사람만 총에 맞지 않았다. 총에 맞지 않은 단 한 사람, 마야. 총기소지 국가에서 자주 접하는 기사처럼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의 생존자, 아니 공범자로서의 마야. 소설은 마야의 재판을 다룬다. 현재 마야는 공범으로 9개월째 구속수감되어 있다.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하고 검사는 유죄를 주장한다. 마야는 그 어디쯤에 있을까. 마야가 공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마지막 페이지에 밝혀질 것이다. 남자친구 세바스티안이 제 아버지를 죽이도록 부추기고 총기난사까지 도운 공범, 명확한 사실은 5명이 총에 맞았고 그 중 두명은 마야가 쏜 총에 의해서다. 

  책장이 느릿하게 넘어가는 이유를 책을 읽다 깨달았다. 아직 마야를 다정한 마야로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첫 페이지부터 인천초등학생 살인사건의 두 명의 공범이 떠오른 탓도 클 것이다. 소설이 꼭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마야에게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되지 않아서, 아니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페이지가 더디게 흘러갔던 것이다. 그저 소설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될 것을 이미 유무죄를 판별하고서 마야를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벌써 두 명의 희생이 마야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사건의 내막을 굳이 알 필요없다 판정지은 걸까. 아닌듯 하며 마야에 대해 단정이 거의 완료가 된 상황에 따라 마야를 보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떠신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는 당신이 무슨 일을 했고 여전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안다. 당신은 나를 당신이 추정하는 나의 이미지에 맞추려 한다. 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출세에 목매는 학생 자치위원회 회원도 아니고, 용감한 강간 피해자도 아니고, 전형적인 대량 학살범도 아니고, 꽤 똑똑하고 꽤 예쁘장한 패셔니스타도 아니다. 문신도 하지 않았고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도 아니다. 나는 누구의 여자친구도, 누구의 절친도, 누구의 딸도 아니다. 나는 그냥 마야다.


  어떤 사건이라도 언론과 재판의 말끝하나에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다. 현직 변호사가 썼다는 소설은 그리하여 법정소설로서 스릴있게 이야기를 이끈다. 변호사와 검사의 증거와 추론의 핑퐁게임. 혼란과 충격에 마야의 불안한 심리. 그리고 한 공간에 있던 그들의 이야기들이 흥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청소년 범죄의 수법이나 내용이 충격적이고 경악할 정도로 잔인해지고 그 수도 증가하고 있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에도 결코 빠지지 않는 건 청소년들의 마약중독과 총기발사다.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어른, 부모의 영향력과 인종차별과 부의 축적에 따른 권력형성은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같다. 


사회적 병폐를 소수자의 탓으로 돌릴 때 이득 보는 자들이 있다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음모론이 아닙니다. 그 문제의 원인이 흑인에게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도. 1930년대에는 그 대상이 유대인이었고,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민자들이 되겠네요. 


  마야의 재판을 다룬 소설에서 많은 페이지를 점하고 있는 것은 미국 경제학자의 초청 강연에서의 질의응답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들까지도 강당에 모여 이루어지는 토론이 길게 서술되어 있는 이유는 단지 사미르와 사바스티안이 자란 환경과 그들의 사고를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며 “우리가 공산주의자를 키웠군!” “사회주의자 납셨어.”라 깐죽거리는 어른이 있는 강연장,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점잖고 교양을 갖춘 사람, 어쩌면 박사 학위 소지자나 할 말이고, 그렇게 말한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지도 않는다. 알다시피 현실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다.


  재판을 받으며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의 지난 시간을 생각하며 마야가 깨달은 건, 모든 인간은 현실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같은 공간에서 죽은 어맨다와 데니스가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횟수가 다른 이유라는 것을. 가난한 이와 이민자들, 인종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라면 거침없이 차별을 보여주면서도 또한 보이는 곳을 향해서는 나는 몰상식하고 배려없는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 외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 역시 같은 모양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성적이고 굳건하게 모범생으로서 자세를 견지하는 사미르가 결국 아직 어리다는 것을, 그 미성숙함에 놀라게 된다. 아이는 결국 아이인 것을. 사미르처럼 이 세상을 살면서 의식적으로도 모범적이려하지 않는 세바스티안의 아버지는 어떤가. 마야, 세바스티안, 사미르, 그들의 부모들만이 통하는 그 세계가 세상 모든 총기의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그러고보니 스웨덴 소설, 프레드릭 배크만의『베어타운』법정에서도 ‘마야’가 있었다. 그때 ‘마야’를 둘러싼 세상의 공방도 어른들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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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토니오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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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다 살아진다


프롬 토니오, 정용준, 문학동네, 2018.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외국이다.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 언제부턴가 한국소설에서 외국 배경은 자주, 오히려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구나 느껴질 정도로 나타나기에 낯설지 않다. 드라마마다 해외촬영은 당연하고 첫장면부터 이국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형식처럼 자리잡은 것처럼 소설 또한 마찬가지로 여겨질 뿐이다. 그저 외국이 익숙한 나라인가 아닌가의 거리감이 있을 뿐. 현실 역시도 국경이라는 경계는 형식의 선일뿐 어디든 갈 수 있고, 살 수 있고, 이야기는 만들어지기에 그저 굳이 외국 배경이 필요할까, 외국이어야 했을까 생각되는 소설이 있었을지언정 외국에 대한 특별한 환대도 배척도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배경만 외국이 아니라 등장인물 또한 외국인이다. 한국인은커녕 한국계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표지에 고래가 등장함에도 고래가 나올 것조차 예상치 못한, 아니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고 읽은 이 책이 전적으로 배경이 외국이어야 했던 이유를 그 당연함을 소설 중반에서야 알게 된다. 그때 이 소설은 외국을 배경으로 한 한국소설에서 기억에 남을 책이 된다.

  파일럿고래 스물여섯 마리의 스트랜딩 현장, 즉 스트랜딩, 해양 동물의 집단자살 현장에서 연인의 죽음으로 스트랜딩 상태인 것만 같은 시몬은 흰수염고래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이한 생명체와 마주친다. 시몬에 의하면 사람도 동물도 아닌 이 생명체를 돌보는 것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연인을 잃어버린 화산학자 시몬처럼 슬픔으로 인한 무력함이 휘감던 이 소설이 토니오의 등장으로 기이한 활기를 띠면서 펼쳐지는 세계는 시간을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고 바다로 뛰어든다. 가보지 못한 세계, 미지에 대한 환상이 현실과 엮이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토니오, 이 기이한 생명체의 존재는 이야기의 정점을 찍는다. 토니오는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쉬이 가보지 못한 심해의 공간에 대해 들려준다. 바다속엔 유토가 있고 또 우토가 있고 끝없이, 비밀스럽고 낙원과도 같이 인식되는 세계가 있음을 들려준다. 시몬이 사랑한, 실종된 연인의 소식까지도 전해주는 토니오에게는 시몬의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토니오의 연인에 대한 마음과 닮았다. 시몬과 토니오는 그것으로도 연결된다.


내가 누군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말할 수 있네. 유토피아는 두 가지 어원을 갖고 있어. 유토포스(eu-topos), 말 그대로 ‘좋은 곳’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우토포스(ou-topos),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지. 이 세계엔 유토피아가 없지만 내가 있었던 세계엔 있지. 바다 깊은 곳에 또다른 바다가 있네. 바다의 바다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유토(euto)가 있네. 그곳의 대기가 이렇게 황금빛이었네. 머리 위의 하늘과 흐르는 물결 속에 금이 녹아 있었지. 녹은 철과 금으로 이루어진 바다, 유토. 나는 그곳에서 건너왔네.


  알지 못하기에 상상으로만 그리는 그 세계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곳으로만 상상되지만 유토와 우토를 알려주던 고래에 의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공간이다. 유토는 지구의 중심, 바다 밑의 바다이고 우토는 유토 속에 존재하는 더 이상 존재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모인 세계이다. 이렇게 바다 속에서 또 수없이 공간의 공간이 존재하지만 본 적이 없는 세계이기에 막연한 상상으로만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그곳은 그저 알던 세계와는 다른 곳, 그러나 어쩌면 유토피아는 아닌 곳이다. 그들에게 유토피아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일테니까. 그리하여 토니오가 최종적으로 가고자 하는 곳, 그곳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전체적으로 몽환적이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이들이 그들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는 이른바 과학자들이다. 지각현상을 연구하는 화산학자, 지진학자, 해양학자, 그리고 의사. 대체로 우리는 과학자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고로 증거가 없는 비가시적 세계에 대해 믿지 않는다 생각한다. 이런 과학자들이 토니오가 전하는 현실적이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를 점차 이해하는 과정은 참 동화적인 느낌 가득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자연스레 설득되고 몰입되는 토니오의 이야기, 그의 과거의 행적속에서 알게 되는 그의 존재, 한때 사라졌던 비행사. 그리고 그의 이름!


인간의 생각은 의미와 이해에 대한 집착으로 예민하게 활성화되지. 앞뒤가 맞지 않거나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경계해. 그건 당연해. 기존의 논리로 이해가 되지 않거나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단번에 의심과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을 불가능하다, 비현실적이다 결론 내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지. 상식, 과학, 생물학? 그놈의 논리! 이성! 공부 좀 한다는 바보들은 자기들이 이해가 안 되면 다 부정하곤 하지. 동화라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사과해야 할 거야.


  토니오를 따라 심해의 유토와 우토의 세계를 헤매며 상실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다 이해된다고, 그 세계에 유토에, 우토에 가보고 싶다고 거듭 생각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고 그리하여 책장을 덮는 것이 아쉽다고 토니오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몽환속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언제나 몽환속이다. 가져 본 적 없고 본 적도 없음에도 깊게 느껴지는 상실감, 무엇을 잃은 것인지도 모르게 슬픔은 쓸쓸함은 더해진다. 환상의 이미지가 끝나고 난 후의 허무가 쉬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현실로 돌아와 토니오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된다. 토니오, 그는 정말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삶이지만 그곳을 향해 가면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서 시몬은 한걸음씩 벗어나고, 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데쓰오와 같은 이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교주로 인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던 데쓰오는 마음을 풀어낸다. 이러한 변화가 토니오와 함께 하면서 이루어진 변화, 가만히 있지 않고 토니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걸음씩 나아간 그들이 함께 토니오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프롬 토니오』, 환상과 진실이 잘 설계되어 가공된다. “애도는 자기 연민의 연장일 뿐”이라는 소설 속 말처럼 나의 애도도 이쯤에서 끝맺어야 한다. “이곳에 남은 자로서 이곳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무한의 자기연민을 끝내고서 실체가 몽롱하여 그리기 애매한 유토와 우토의 이미지는 보아 구렁이가 삼킨 모습으로 그려보는 것도 왠지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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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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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영의 기원, 천희란, 현대문학, 2018.


  0의 무게는 얼마큼일까. 죽음이 많아서 참으로 무겁겠다 싶은 죽음이 짙게, 깊게 드리워진 단편집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은 하나라 생각했는데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수만 갈래고 곳곳에 죽음이 서려있다.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외면받은 그들의 삶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 삶들의 가지는 친화되지 못한 이유들을.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해.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죽을 용기와 살 용기, 그것은 과연 같은 종류의 용기일까. 나는 맑스와 마르크스, 그리스인과 희랍인, 자정과 0시, 두 번의 침묵, 분명 같은데 서로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한다는 그 말에 대해 영이 무어라고 답을 할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상상 속에서 어떤 동의나 항변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영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결코 알 수 없다. 물론 내가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이란 거의 없다 해도 좋을 것이다. 빈 편지지와 잉크가 가득 찬 볼펜은 무엇인가를 쓰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라는 것. 영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 그렇다. 그것뿐이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는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은 것으로 또한번 읽게 되어 다른 단편보다 또렷이 기억되었다. 타인의 죽음의 순간은 당연 강렬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해 할 말은 그 모습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라는 것에서 일찌감치 눈치챘어야 했다. 대상이 정해진 편지, 그 속에 담긴 어느 글의 진의가 몰고 올 파장이, 충격이 내도록 머리에 가슴에 머문다. 아니 소설 전반을 뚜렷하게 지휘하는 단어, 죽음. 그 단어가 끌어들이는 무거움과 우울함의 파장이 작가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글 속에 잠긴다. 


절대로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한 작가에게 쓰고 싶지 않은 것은 곧 쓸 수 없는 것일 테다. 비열한 글쓰기란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팔아 연명하는 것도, 핍진한 허구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 지금까지의 절망이 모두 허위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떠난 이는 말이 없기에 그 이유들을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삶을 사는 이들이다. 그들은 눈앞에서 연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목격자로서의 이야기를 하며, 죽기 전날의 눈오는 밤, 술에 취해 찾아와 여러 물건들이 든 편의점 봉투를 내밀었던 친구의 사소한 몸짓들을 기억하며, 아내가 죽은 이유를 알기 위해 일기장을 보고 자취를 뒤따르며, 죽은 동생이 남긴 메모를 쫓아 비밀 모임 속 죽음을 마주하며, 불멸의 삶이기에 기꺼이 자살을 감행하는 예술가를 지켜본다. 이런 일들은 모두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죽음을 보는 것은, 그에 대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느끼는 것은 언제나 목격자, 함께 세상을 살던 자들이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타인에 의해서 더 강하게 각인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이야기는 그들의 삶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단되고 해석된다. 그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자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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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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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인식하는 방식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손보미, 문학과지성사, 2018.


  제법 본 단편이 여기 수록되어 있다. 단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수상작이다. 책 제목과 같은 단편은 없다.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내 관심에선 밀려난다. 고양이는 조용히, 우아하게 밤에 찾아드는 존재가 아니라 한밤 미칠듯이 갸르릉거리는 소리로 싸워대는 고양이가 더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하더라도 끝끝내 이곳이 제 자리라 주장하는 것처럼, 옮겨야 하는 건 나인 것처럼 쳐다보는 고양이들의 그 소리없는 움직임에 오히려 놀라는 건 나라는 걸 기억해 낸 때문인지도.

  소설 속 무단침입한 고양이들처럼 내가 마주친 고양이들은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드럽다니, 이미 침입 자체가 부드러움이란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침입이란 이미 폭력의 한 부류 아닌가.

   

나는 가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이다.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천천히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무단 침입한 고양이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냉정한 방식으로.


  후자의 의미가 이 소설집에 어울린다. 조용히 침입하여 자리잡고 있던 고양이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그 고양이를 발견한 순간에 인식하게 되는 것들. 그로 인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모습을 보게 된다. 아닌듯하면서 줄곧 고양이를 의식하고 있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해야 할까.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고양이에 대한 생각, 즉 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생각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외부에 대한 지나친 의식은 이미 나를 갉아먹는 것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며칠 후 그녀는 혼자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 후 백화점 안 카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들 중 나처럼 진짜 고통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진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삶이 무엇인지 운명이 무엇인지를 한번쯤 생각해보는 일은 달달한 케이크를 맛보면서도 생겨날 수 있는 물음이다. 살아가는 동안 가벼이, 쉬이, 무심히 여겼던 어떤 일들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 인생이란 그냥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란 것, 사는 건 다 그런 거라는 말들이 책속에서 자주 반복된다. 커다랗게 갸르릉거리는 것에만 몰두하고 그것만이 삶을 뒤흔드는 역할을 하리라 생각하지만 소소하고 사소한 일들의 반복과 우연으로 점철되는 삶, 그것이 주는 파장에 대해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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