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 토니오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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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다 살아진다


프롬 토니오, 정용준, 문학동네, 2018.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외국이다.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 언제부턴가 한국소설에서 외국 배경은 자주, 오히려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구나 느껴질 정도로 나타나기에 낯설지 않다. 드라마마다 해외촬영은 당연하고 첫장면부터 이국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형식처럼 자리잡은 것처럼 소설 또한 마찬가지로 여겨질 뿐이다. 그저 외국이 익숙한 나라인가 아닌가의 거리감이 있을 뿐. 현실 역시도 국경이라는 경계는 형식의 선일뿐 어디든 갈 수 있고, 살 수 있고, 이야기는 만들어지기에 그저 굳이 외국 배경이 필요할까, 외국이어야 했을까 생각되는 소설이 있었을지언정 외국에 대한 특별한 환대도 배척도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배경만 외국이 아니라 등장인물 또한 외국인이다. 한국인은커녕 한국계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표지에 고래가 등장함에도 고래가 나올 것조차 예상치 못한, 아니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고 읽은 이 책이 전적으로 배경이 외국이어야 했던 이유를 그 당연함을 소설 중반에서야 알게 된다. 그때 이 소설은 외국을 배경으로 한 한국소설에서 기억에 남을 책이 된다.

  파일럿고래 스물여섯 마리의 스트랜딩 현장, 즉 스트랜딩, 해양 동물의 집단자살 현장에서 연인의 죽음으로 스트랜딩 상태인 것만 같은 시몬은 흰수염고래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이한 생명체와 마주친다. 시몬에 의하면 사람도 동물도 아닌 이 생명체를 돌보는 것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연인을 잃어버린 화산학자 시몬처럼 슬픔으로 인한 무력함이 휘감던 이 소설이 토니오의 등장으로 기이한 활기를 띠면서 펼쳐지는 세계는 시간을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고 바다로 뛰어든다. 가보지 못한 세계, 미지에 대한 환상이 현실과 엮이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토니오, 이 기이한 생명체의 존재는 이야기의 정점을 찍는다. 토니오는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쉬이 가보지 못한 심해의 공간에 대해 들려준다. 바다속엔 유토가 있고 또 우토가 있고 끝없이, 비밀스럽고 낙원과도 같이 인식되는 세계가 있음을 들려준다. 시몬이 사랑한, 실종된 연인의 소식까지도 전해주는 토니오에게는 시몬의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토니오의 연인에 대한 마음과 닮았다. 시몬과 토니오는 그것으로도 연결된다.


내가 누군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말할 수 있네. 유토피아는 두 가지 어원을 갖고 있어. 유토포스(eu-topos), 말 그대로 ‘좋은 곳’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우토포스(ou-topos),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지. 이 세계엔 유토피아가 없지만 내가 있었던 세계엔 있지. 바다 깊은 곳에 또다른 바다가 있네. 바다의 바다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유토(euto)가 있네. 그곳의 대기가 이렇게 황금빛이었네. 머리 위의 하늘과 흐르는 물결 속에 금이 녹아 있었지. 녹은 철과 금으로 이루어진 바다, 유토. 나는 그곳에서 건너왔네.


  알지 못하기에 상상으로만 그리는 그 세계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곳으로만 상상되지만 유토와 우토를 알려주던 고래에 의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공간이다. 유토는 지구의 중심, 바다 밑의 바다이고 우토는 유토 속에 존재하는 더 이상 존재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모인 세계이다. 이렇게 바다 속에서 또 수없이 공간의 공간이 존재하지만 본 적이 없는 세계이기에 막연한 상상으로만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그곳은 그저 알던 세계와는 다른 곳, 그러나 어쩌면 유토피아는 아닌 곳이다. 그들에게 유토피아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일테니까. 그리하여 토니오가 최종적으로 가고자 하는 곳, 그곳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전체적으로 몽환적이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이들이 그들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는 이른바 과학자들이다. 지각현상을 연구하는 화산학자, 지진학자, 해양학자, 그리고 의사. 대체로 우리는 과학자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고로 증거가 없는 비가시적 세계에 대해 믿지 않는다 생각한다. 이런 과학자들이 토니오가 전하는 현실적이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를 점차 이해하는 과정은 참 동화적인 느낌 가득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자연스레 설득되고 몰입되는 토니오의 이야기, 그의 과거의 행적속에서 알게 되는 그의 존재, 한때 사라졌던 비행사. 그리고 그의 이름!


인간의 생각은 의미와 이해에 대한 집착으로 예민하게 활성화되지. 앞뒤가 맞지 않거나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경계해. 그건 당연해. 기존의 논리로 이해가 되지 않거나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단번에 의심과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을 불가능하다, 비현실적이다 결론 내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지. 상식, 과학, 생물학? 그놈의 논리! 이성! 공부 좀 한다는 바보들은 자기들이 이해가 안 되면 다 부정하곤 하지. 동화라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사과해야 할 거야.


  토니오를 따라 심해의 유토와 우토의 세계를 헤매며 상실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다 이해된다고, 그 세계에 유토에, 우토에 가보고 싶다고 거듭 생각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고 그리하여 책장을 덮는 것이 아쉽다고 토니오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몽환속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언제나 몽환속이다. 가져 본 적 없고 본 적도 없음에도 깊게 느껴지는 상실감, 무엇을 잃은 것인지도 모르게 슬픔은 쓸쓸함은 더해진다. 환상의 이미지가 끝나고 난 후의 허무가 쉬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현실로 돌아와 토니오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된다. 토니오, 그는 정말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삶이지만 그곳을 향해 가면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서 시몬은 한걸음씩 벗어나고, 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데쓰오와 같은 이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교주로 인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던 데쓰오는 마음을 풀어낸다. 이러한 변화가 토니오와 함께 하면서 이루어진 변화, 가만히 있지 않고 토니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걸음씩 나아간 그들이 함께 토니오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프롬 토니오』, 환상과 진실이 잘 설계되어 가공된다. “애도는 자기 연민의 연장일 뿐”이라는 소설 속 말처럼 나의 애도도 이쯤에서 끝맺어야 한다. “이곳에 남은 자로서 이곳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무한의 자기연민을 끝내고서 실체가 몽롱하여 그리기 애매한 유토와 우토의 이미지는 보아 구렁이가 삼킨 모습으로 그려보는 것도 왠지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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