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가겠구나!
■ 고병권에 대한......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는 잘 살아가겠구나…. 그렇겠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존재함을 과시하듯 좀 멀리 사는 이웃 사촌 덕분에 나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분명 그것은 질투와 부러움의 배아픔은 아니었다. 다만……좀 서글퍼졌을 뿐.
삶의 온갖 어려움이 내게 기댈 때 우리는 철학자가 되어 간다. 그리고 철학은 진리를 찾는 것이라 말하는 만큼 삶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노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삶의 복잡성이 그에게는 명쾌한 논제로 풀리지 않을까.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일상이 철학적이기에 또한 단순 이론적인 떠벌임으로 머물지 않기에, 아주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기에 비록 피상적으로 엿보는 그의 삶을 환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읽어 가면서 느낀 자기 연민이 나의 철학적 지식의 모자람에 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삶을 더욱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혼란을 명쾌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철학적 지식이 그의 삶을 보다 더 밝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별로 흔들려 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결코 선한 거짓말도 해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용하고 담백한 얼굴의 사진을 쳐다보며 나는 그에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으신가요.
그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는 그가 그동안 쓴 저서와 그의 학력이 전부였다. 그것이 그의 삶을 말해주는, 아니 이 세상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은 직업과 학력이란 것을 알기에 뭐, 이 정도면 다 알았지 싶다. 다시 보니 그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학부는 화학이었고 대학원에서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철학은 그의 관심사였던가. 아니, 철학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니체에 관한 논문을 썼고 니체에 관한 책들을 썼다. 사람들은 그를 니체 전문가라 말하고 그는,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는 수십년 동안을 재야연구소에 머물며 연구하고 강의해 왔다. 그가 오래 도록 활동하고 있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추장, 이른바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니체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스피노자, 들뢰즈 등의 철학을 공부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써서 공저와 번역서를 포함한 그의 저서는 25권이 넘는다.
저자 고병권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초3때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가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거기에 내는 돈이 부담되기도 하고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어린 그는 길에서 구르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그 캠프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어릴 적 야구를 좋아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가 생겼고 전남 출신인 그는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다. 그가 야구를 좋아하는 만큼 그는 야구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찾아 읽었다.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척하기 위해 정말 공부를 많이 한 것인데, 초등학생임에도 어른들이 보는 신문, 잡지,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서른 넘어서는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웠다. 친구들과 한강시민공원에서 인라인을 타다 한남대교 근처에서 돌멩이에 바퀴가 걸리며 쓰러진 적이 있다. 머리에 피가 흐르고 얼굴이 부어 오른 채 공사용 철재 밑에서 기어 나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곳에 철재가 없었으면 한강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고 후 인라인을 그만뒀단. 같이 배운 그의 친구들은 지금 인라인에 고수가 되어 있다고.
성인이 되어 대부분을 재야연구소에서 보낸 그는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2년의 기간, 8년을 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했고 15년 동안 대학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대학이 싫단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학 강의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그나마 그거라도 해야 할 것인데 줄이는 이유는 다행히 강의를 줄여도 먹고살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쾌한 기억 때문에 그는 강의를 줄이고 있다 한다. 6-7년 전쯤 교양과목 첫 시간에 강의 계획서를 나눠주며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시간에 맨 뒷줄에 앉은 세 명이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엎드렸다. 그는 첫 시간이고 강의 시작하기 전이라 무시할까하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다가 강의 내내 신경이 쓰여 결국 바로 앉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래도 다 들려요.” 그때 그는 화가 났고 그 자리에서 강의를 위해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강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노력은 대학 강의를 말한다.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와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공부하는 이들의 열정이나 태도에 대해 그는 실망하지만 결코 강의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대학이 아닌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유너머, 교도소나 야학에서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가 강의를 하게 하는 토대인 연구소 수유너머는 연구하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가 여기서 공동대표를 맡았기에 공동대표는 추장이라 부르기에 그는 ‘고추장’이라 불린다. 그는 이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동료들에게 감사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결코 혼자서 행복할 수 없다는 친구들과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그의 행복론은 공동체 연구공간인 수유너머의 삶에서 터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자신에게 끊임없이 삶에 대한 철학과 정치와 앎의 가치를 되묻도록 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사유하고 행동하기 위해 여전히 연구하고 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고 자료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너머학교, 2010.
•고병권, 살아가겠다, 삶창, 2014.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오마이뉴스, 2003.2.27
•뉴 파워라이터, 수유너머R 연구원 고병권, 경향신문 인터뷰, 2014.2.1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4&contents_id=57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