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괴테와의 대화, 요한 페터 에커만,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8.


  저자에 대한 기록이라면 『괴테와의 대화』의 머리말과 시작 전 자신이 기록한 이야기, 책 속에 부분 부분 들어 있는 그의 생각들이 전부다. 니체라는 대작가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책”이라 칭한 책의 작가임에도 에커만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내가 독일인이 아니다 보니 그에 관한 자료를 찾는데 어려운 점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고라도 수백 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널리 읽혀지는 책의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위치가 그에게 없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가 아니라 사회가 그에게 부여해준 위치 말이다. 그의 책은 에커만의 책이 아니라, 괴테의 책이고 괴테에 관한 책이었다. 괴테를 빼고서는 에커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기록한 그를 보면서, 연보를 보면서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이겠지만 나는 참으로 안쓰럽고 아련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에커만이 괴테를 만나 성장하고 변화되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에커만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고 느껴진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그만큼의 위치를 점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가난했기에 길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를 곱씹는 동안 신경림의 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구절이 계속 맴돌았는지 모른다. 이 시의 부제가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이다. 1800년대 가난한 독일 젊은이의 쓸쓸한 생애가 내 이웃의 이야기인 것 마냥 책을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였음에도 부채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 혹여 사치스러운 젊은이인가 오해하였더랬다. 오랜 세월 자신의 의지와 꿈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괴테의 전집과 자서전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가던 에커만. 자신의 작품으로서 『괴테와의 대화』의 저자가 되어 이 책을 보다 일찍 출간하고자 했으나 결국 괴테의 뜻으로 인해 출간하지 못했다. 그리고 괴테의 전집을 도우며 유고작을 정리하는 편집자의 역할을 한 에커만은 그렇게 많은 보수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가 따랐던 괴테도 죽고 그의 아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여 그를 떠났다. 그는 그들보다 20여년을 더 세상에 머물렀지만 『괴테와의 대화』이후 괴테와 관련된 서적 이외에 그의 이름으로 된 다른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 가난하다고 해서 꿈조차 없겠는가


 에커만은 1792년 독일 빈젠에서 태어났다. 너무나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어린 시절 일이 곧 놀이였으며 이삭줍기, 도토리 열매 모으기 등을 통해 집안의 생계를 도우며 자란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학교를 다니며 읽기와 쓰기를 익혔다. 우연한 기회에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의 그림이 지방 유지들에게 전해지면서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에겐 그림이 무엇인지, 화가가 무엇인지, 그것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세계이기에 그림에 대한 그의 꿈은 사라져갔다.

  그러나 배움에 매료된 에커만은 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곧 경제적인 문제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법원의 서기로서 기록과 잡무를 맡으면서 일을 했고, 이후 감독청과 군청 등 관공서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일하며 공부를 하다 의용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때 네델란드 그림을 접하며 그림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제대 후 홀로 그림을 그리다 스승에게서 배우기로 결심하며 눈쌓인 길을 40여 시간 동안 걸어 람베르크에게 배움을 청한다. 그러나 6개월도 되지 않아 전장에서 얻은 병으로 치료가 필요하고 생계가 어렵게 되자 다시 회사에 취직한다. 즉 상황에 의해 예술가로의 길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여건에 따른 예술가의 삶에 대한 포기는 괴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에겐 자주 나타나는 일이기도 했다. 병으로 휴식을 취하며 많은 책들을 접하다가 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시를 지어 자비로 시집을 내게 된다. 이 시가 잡지에 실리고 여러 지방에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괴테의 책을 접하고는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더 많은 배움을 위해 일하는 틈틈이 라틴어, 그리스어 교습을 받았고 더욱 더 배우기 위해 스물다섯의 나이에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순수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일을 병행하며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면서 지냈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보니 다시 병을 얻게 되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결국 학교를 그만둔다. 생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에겐 후원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돈이 되는 학문을 하는 경우에만 협력을 약속하였다. 배우고 싶은 열정, 학교를 가고 싶은 열정으로 시집을 내고 수입을 얻게 되자 약혼녀를 두고 괴팅겐으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원자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법학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줄곧 그가 원하는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고 종국에는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 『시학논고』가 탄생되었다. 에커만에게는 이를 통해 충분한 원고를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이 그에겐 어느 정도 생계를 보장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괴테에게로 보냈고 이후 직접 괴테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골짜기를 걷고 걸어서 괴테가 있는 바이마르로 가게 된다. 극심한 더위로 힘든 고비를 수없이 넘긴 열흘 간의 기간을 지나서였다. 그 길로 괴테의 문학 조수가 되어 1823년부터 1832년까지 10여년 동안 괴테와 교류한다.

 에커만은 그 자신도 생계로 인해 꿈을 포기한 일들을 얘기하며 아무도 자신을 탓하지 못하리라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가난으로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가난하여 그것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했을 뿐, 늘 그는 꿈을 위해 내달리며 배우고 또 배워갔던 것이다. 그림을 배우고자 할 때도 스스로 스승을 찾았고, 문학에의 열정이 가득찼을 때에도 배우고 공부하며 시를 썼다. 그리고 또한 힘든 여정들을 거치며 괴테를 찾아 나섰다. 그가 진정 가난으로 예술가의 길을 포기한 자라면 여전히 그는 법학이나 군청에서 일을 하는 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후세에 전하고 있고 그가 남긴 『괴테와의 대화』는 니체를 통해 칭송받는 작품으로 이어지고 있다.

   

2) 가난하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음을


 문학에의 열정으로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며 스스로 스승을 찾는 여정을 떠난 청년은 시간이 지나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었을까.

 에커만은 지금으로 봐선 아직 청춘인 시절인 62세에 사망하였다. 그의 삶에 많은 시간을 괴테와 함께 했고, 괴테의 작품과 함께 했고, 괴테의 목소리와 함께 했다. 그가 괴테의 작품을 읽고 괴테를 만나 그와 함께 삶과 예술과 다양한 학문들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동안 에커만은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숙했으며, 이를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에커만에게 있어 괴테는 지적 동반자이자 절대자였던 것이다.

 괴테 역시 그의 유고작을 에커만이 편집해 주기를 바랐고 괴테가 세상을 뜰 때까지 에커만은 괴테의 원고를 정리하며 <예술과 고대>라는 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괴테 사후에는 <유고 전집>을 펴냈다.

 그의 삶에서 괴테의 자리가 크기에, 그리고 떨쳐버릴 수 없는 가난으로 더디게 도달한 자리였기에 애정이 남달랐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또 한편 외롭게 외면받았을 존재가 있다면 그의 약혼녀이다. 에커만은 괴테를 만나기 전 요한나 베르트람과 약혼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은 하지 못했고 에커만의 공부를 위해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괴테의 아들과 여행을 떠난 에커만은 여행 속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인생에 대해 고뇌하던 중 약혼녀와 함께 하며 안정된 생활을 꾸리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마침 대공의 자제를 교육하는 일을 제의받아 기쁨으로 여행에서 돌아오지만 그와 같이 여행하던 괴테의 아들이 여행에서 사망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일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여전히 에커만은 결혼하지 못하고 괴테의 건강을 걱정하며 괴테의 일을 돕게 된다. 이후 1년이 지나 약혼 12년 만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3) 그는 벽 속에 갇혔다


 어쩌면 에커만에게 괴테는 끊임없는 벽이었다. 오직 괴테의 작품에 대한 감탄과 괴테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찬 한 사나이의 순수한 열정들을 가두는 벽 말이다. 그 자신 어려움 속에서 남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적당한 거짓을 배웠다고 얘기했지만 괴테와의 만남 속에서 그것은 발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피터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처럼 에커만은 괴테 앞에서 너무 작아진 듯하다. 게다가 주눅든 아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청년 시절까지만 해도 당당했고 열의가 넘쳤던 그였는데 말이다. 괴테를 만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학구열에 불타올랐고 그 자신 또한 창작열에 불타는 문학도로서 그는 시를 짓기도 하고 『시학논고』를 펴내기도 했던 그였는데 말이다. 반면 ‘장인님, 이제 장가보내줘유‘를 외치는 ’나‘에게 자꾸 점순이의 자라지 않은 키를 얘기하며 외면해 버리는 김유정 소설 <봄봄>의 장인처럼 괴테는 심술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에커만의 생애마다 괴테라는 존재로 막혀 있었던 듯도 하다.

 에커만은 괴테의 작품을 정리해주는 조수이자 동료로 만년의 괴테에게는 동반자였다고 얘기된다. 물론 에커만에게도 괴테는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자신의 의지로 괴테와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진정 그들이 동반자였다면 같이 성장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괴테는 성장하기에는 이미 다 자란, 그리고 원숙하게 성장해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에커만은 스스로 성숙하였다고 말하고 있고 그러한 면이 책 속에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가 행한 만큼의 강렬함이나 열정이 덜하게 보인다.

 자신의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자신을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한 젊은 청춘의 재능을 보았다면 그의 재능을 더욱 이끌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에커만이 좀더 자신의 순수한 창작물을 생산해 낼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괴테의 그러한 점이 아쉽고 애석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재능과 소질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가 재능을 더욱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참 스승의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괴테는 오히려 그를 가두었다. 그의 재능을 확실히 인지하고서야 그를 동료가 아니라 정말, 조수로 부린 듯한 인상이다.

 어쩌면 에커만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이끌어주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커만의 재능을 평가한 시점, 중요한 지점은 여기다. 그가 이러한 말을 한 시점이다. 그것은 괴테가 아픈 동안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기간이었다. 그때 괴테는 에커만에게 일을 맡겼고 에커만은 충실히 그 일을 해내었다. 괴테는 에커만의 재능과 소질을 발견하며 진심으로 기뻐한다. 물론 처음 에커만이 논문을 보냈을 때도 호의적이었기에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일단 그가 아픈 기간 동안 에커만이 대신한 일을 두고 괴테는 재능이 있다며 환호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네에게 말해 두겠네만 만일 다른 곳에서 문학과 관련된 청탁을 받는다면 거부하게. 아니면 최소한 나에게 미리 말해 주게나. 자네는 일단 나와 연을 맺었으니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진다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아.”(괴테와의 대화 1권, p102)


  이뿐만 아니다. 오랜 시간 괴테와 함께 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문학은 창작하지 못했던 에커만은 드디어, 자신에 대한 각성에 이른다. 진정 익숙한 곳과 결별하고 낯선 곳에서는 자아를 만나게 되는 것인지, 여행을 떠난 에커만은 여행길에서 어느 길을 가야 할 지 모르는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그의 욕구와 마주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식을 늘리고, 그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하고팠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욕구가 강하여서인지 그는 여행에 대한 감흥은 사라지고 오직 원고를 마무리짓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찼다. 바이마르로 되돌아가면 자질구레한 일들에 시달리며 시간만 뺏기고 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약혼녀 곁에 머무르며 원고를 마치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학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얻고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바람도 가지며 글을 쓸 때에 스스로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편지에서 밝혔듯이 오랫동안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그는 스스로의 변화를 필요로 하였기도 했다.

 그러나 괴테에게 전한 이 강렬한 열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떠나 있었기에 진실한 그의 마음을 말할 수 있었을 그 고백들은 괴테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괴테는 대화록을 빠른 시일 내에 발간하려는 나의 생각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문학적 이력을 성공적으로 개시하려던 나의 구상은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괴테와의 대화 1권, p623)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약혼 후 10여년을 떨어져 지낸 이유도 있지만 에커만의 책을 내고 싶은 강렬한 욕구의 좌절이 아마도 약혼녀를 만나고 싶은 갈망으로 그녀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으로 대체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무렵 여건도 그에게 좋게 진행이 되기도 했다. 만약 그때 괴테의 아들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약혼녀와 함께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갈망을 이루지 않았을까. 그의 생에서 조금은 괴테라는 인물이 중점이 되어 돌아가던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갈망을 품고 되돌아 온 에커만은 아들의 사망이라는 슬픈 격랑 속의 괴테를 걱정하며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괴테의 일을 돕는다.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괴테를 만나, 스스로를 너무 낮추었던 에커만의 청춘이 아스라이 느껴진다. 그토록 경외하던 괴테가 사라지고 난 후 그의 남은 생애가 어떠한 모습이었을지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고 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음울하게 있지는 않았을지 궁금하다. 그의 생에서 괴테로부터 많은 교양을 얻고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그의 생을 돌아보며 흔들릴 때, 그는 괴테에게서 독립을 꿈꾸었다. 물론 괴테의 허락을 구하고 그의 격려 없이는 무엇도 시작하기 어려움을 토로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좀더 괴테라는 벽 속에서 튀어 나왔어야 했다. 그 벽 속에 그가 열 수 있는 문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의 생에, 괴테라는 벽 속에서 문을 만들지 못하였다는 점, 그 자신이 문을 여는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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