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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정치사
노중국 지음 / 일조각 / 2018년 12월
평점 :
저자의 백제정치사연구를 개정한 것으로 1988년도에 초판이 나왔다 하니 30년만에 개정되어 나온 셈이다. 몇년 전에 이 책의 초판보을 읽고 난 이후로 저자도 퇴임을 하였고 이후 책을 더는 못 보겠다 싶어 중고로 구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개정증보판이 나오니 기쁘면서도 아쉬움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사료를 대하는 방법론으로는 변함이 없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왕이 졸본부여에서 출자하여 한반도 남쪽의 땅을 얻어 십제를 세우고, 형이 세운 미추홀국이 귀부해옴에 따라 백제라 하고 마한을 병합했다 하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대의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백제는 마한연맹체의 구성원이었다.
이렇듯 나라를 세운 시조에 압축적으로 그 업적을 넣었는데, 이것을 분해하여 국가 발전 단계와 연관하여 재정리 하는 것이 분해론이며,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고구려, 부여, 옥저등의 국이 국가 발전 단계가 동일하지 않은 것을 단계화 하여 백제사를 구성하다는 것이 주요 방법론이다. 삼국지 동이전으로 뼈대를 만들고, 삼국사기 초기기록 내용을 분해하여 살을 덧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조 온조왕에 일어 났던 것으로 기록 된 것을 부체제의 성립은 고이왕대에, 마한 병합은 근초고왕대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이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서다. 거기다 백제사에 있어 중요한 참고를 할 수 있는 일본서기에 경우는 익히 알려진 악명과 같이 윤색된 바가 커서 조심스러게 활용한다 하였다. 그런데, 오랜 세월 공부해온 학자가 못 미더운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자의적이란 점은 변함이 없다.
백제에 대하여는 학창시절 부터 세련된 고대국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받은 인상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는 편이라 지금도 여전하다. 고구려는 강성하고 호전적이며, 문화적으로는 그렇게 볼품이 없는 나라. 신라는 단재선생이 끌어온 프레임에 같혀, 민족의 반역자 쯤은 아니나 괘나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첫 인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신라는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결국에는 해낸 것일 뿐 단재 선생이 짠 인식의 틀처럼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둘 다 시대의 소산일 뿐이다.
다시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면, 왕의 계보를 살필 때가 너무 머리 아팠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온조 집단은 남쪽으로 내려와 당시 마한연챙체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으로 부터 100리 땅을 얻어 십제를 건국하였다. 그러다 형인 비류가 세운 미추훌국의 귀부를 받아 백제라 국호를 정했다고 하는데, 이를 마한연맹체 내의 지역연맹체로서 비류의 미추훌국의 영도를(?) 받다 여러모로 국력이 우월해지며 지역연명체의 연맹장을 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을 왕계를 일원화할 요령으로 온조왕-다루왕-기루왕-개루왕-초고왕...이라는 계보를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루'자로 끝나는 왕이 당시 지역연맹체에서 미추홀국이 우세했던 시기를, 즉 연맹장을 맡았던 시기를 반영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에 백제 초기의 왕성이 부여씨와 해씨로 상이하게 언급되는 것도 상기와 동일한 이유에서라고 본다(거기다 누구의 왕이 전왕의 아들이고 혹은 동생이고 조카이고를 따지는데 흥미로운 지점인 것도 있지만 항상 마지막은 지루하다).
책에서 다룬 내용중 재미있는 것 하나는 의자왕을 해동증자로 불린 사실이 당시 왕의 후계자로 선정이 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어려움 때문에 그런 것이란 점이다. 그럴만한 상황과 여력이 안되는데 효도를 한다. 어렸을 적에는 생뚱맞게 무슨 해동증자... 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는 그런 어려움에 있던 의자왕의 처세였던 것이고, 즉위하며 친위정변을 단행하며 비로소 해소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리봉영기>가 발견됨에 따라 서동(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가 의심 받게 된 것을 두고 무리 없게 이와 같은 사실을 재구성한 것 역시 좋았다. 후손의 나이를 역순하여 의자왕의 출생년도를 추측하여 무왕이 의자왕을 낳은것은 선화공주도, 사택왕후도 아닌 빈천한 시절의 서동때라고 보며, 선화공주의 경우에는 당시 국제정세에 필요로 정략적인 필요로 결혼을 한것으로 보며, 그 이후 사리봉영기에 나오는 것처럼 사택왕후가 마지막 왕후로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노학자의 추측이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통일신라때 만들어진 설화에 당시 신라 왕실을 모독하는 내용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모독적인 이야기를 아예 뺄수는 있겠지만, 없는 모독적인 사실을 일부러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겠다. 그러면 선화공주의 존재를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선화공주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서동요를 비롯하여 미륵사지 창건을 청하였다는 문헌적 사실에서 굳이 청한 주체인 선화공주만 부정한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발굴결과와 미륵사지 창건에 관한 문헌 내용에서 일치한다고 한다).
어렸을때 읽언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가 인상 깊어 눈에 띈 대목이었는데, 이후라도 이와 같은 사실이 진실에 가깝게 구성이 될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면 좋겠다.
백제는 타의로 자의로 총 두 번의 수도 이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면서 왕을 제외한 지배세력의 교체가 큰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백제 지배세력 연구>라는 학술서도 따로 있어 읽어보려고 한다.
+사실 한국고대사 관련 학술서나 교양서를 읽을때마다 드는 생각이 절의 창건이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떻게 왕권강화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냐는 것이다. 고대의 지배자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여러 신이함에 의탁한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게 어떤식으로 구체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이해가 안되어 항상 궁금하다. 종교학과 인류학의 책을 구해 읽어 참고 해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