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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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를 알기 위해서는 굳이 구글링을 할 필요가 없다. <출신>이라는, 어느 책에서도 보지 못한 가장 상세한 자기소개서가 있음에야. <출신>을 통해 소개한 사샤 스타니시치의 가계를 한 번 보자.

 

  할아버지 페로 스타니시치. 용을 퇴치한 전설의 용사 성 게오르기우스를 숭배하는 세르비아의 산골 마을 출신으로 마음씨 좋은 공산주의자였다. 1986년에 비셰그라드의 집에서 TV 앞에 앉은 채로 운명한다. 할머니 크리스티나 역시 세르비아 출신으로 책이 끝날 때까지 거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 할머니에겐 2009년이 생애 마지막으로 보낸 좋은 해로 손자 사샤와 함께 페로 할아버지의 고향인 오스코루샤 마을에 들러 그곳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남편 페로의 산소에 헌화한다. 이후 치매기가 조금씩 도져 2016년부터 치매 투병을 시작해, 책을 처음 시작하는 2018년 3월 7일에는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비셰그라드의 공동주택에 홀로 거주하는 여든일곱 살 노인인 동시에 열한 살 소녀이기도 하다.
  보스니아 출신인 외할머니 네나 메즈레마는 콩알을 카펫에 뿌려 작가의 미래를 예언해주는 능력이 있어 사샤로 하여금 콩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만들었다. 외할아버지는 낚시광이며 무슬림이니, 어머니는 보스니아-무슬림이다.
  그러니까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무슬림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 사샤의 혈통 말고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마케도니아, 터키, 그리스, 이란,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까지 온갖 문화권이 합해진 멜팅 폿 melting-pot, 용광로와 비슷한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야말로 다민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붉은 별이라는 의미의 베오그라드 연고 축구팀인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열성 팬이었다. 지금은 유로파 컵으로 명칭을 바꾼 유러피언 챔피언스 클럽 컵 대회가 1991년에 열렸는데, 8강전에서 독일의 뒤나모 드레스덴을 꺾고(홈 1차전 3:0, 방문 2차전 몰수 승), 4월 24일에 있었던 4강전 2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붙었을 때(방문 1차전 2:1, 홈 2차전 2:2) 아버지와 한 약속대로 베오그라드까지 가서 직접 관전을 한 적이 있다. 이때까지도 유고슬라비아라는 다민족 국가의 정체성으로 모든 관중들이 흰색과 빨간색 줄무늬 머플러를 흔들며 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상대팀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폭죽을 터뜨리는 일체감을 보여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해 유러피언 챔피언스 클럽 컵 대회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으나 6월 27일 슬로베니아에 의하여 첫 번째 적대행위가 일어난다.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 이어서 소규모 전투 끝에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이어 보스니아 전쟁이 발발한다.
  사샤의 집안에서도 외할머니가 보스니아 출신이다. 게다가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는 낚시광 외할아버지는 무슬림이기도 하다. 그대로 비셰그라드에 앉아 있다가는 살육을 면치 못할 어머니는 비 내리는 1992년 8월 24일, 사샤와 함께 국경을 넘어 난민 신분으로 하이델베르그에 정착한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이 된 후에 가족 모두는 다시 드리나 강이 흐르는 비셰그라드로 돌아가지만 사샤 스타니시치는 이제 함부르크에 살고 독일 여권을 소지했으며, 함부르크 스포츠클럽 HSV의 팬인 동시에 세 살 먹은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이도 함부르크 출생이다.
  사샤 스타니시치가 1978년생. 열네 살까지 살았던 “드리나 강의 다리” 가까이에 있는 도시 비셰그라드의 모습을 잊지 못했을 터(이 책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의 세계적 소설가 이보 안드리치와 그의 대표작 <드리나 강의 다리>가 한 백 번쯤 나온다). 그는 비록 독일인으로 살고 있으나 잃어버린 조국,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자신의 정확한 정체성에 혼동을 느끼면서도 특히 할머니와의 유대를 결코 놓으려 하지 않는다. 나하고는 좀 다르다. 많은 사람들과 비슷하게 나도 은퇴하면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 낙엽이 잔뜩 떨어진 창경궁과 비원의 궁궐 담을 ‘호젓하게’ 걷고 싶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교통량 때문에 70년대 중반까지만 가능했던 꿈)도 있다. 그러나 갈 수 없다. 염병할 집값이 보통 올랐어야지. 절대 갈 수 없다. 그러나 독일에 살고 있는 사샤 스타니시치는 최상의 문화와 편의시설이 있는 독일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 하긴. 더 살아봐야 아는 일이지만. 그리하여 그는 소년시절의 유고슬라비아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냈던 난민시절 풍경, 2009년 마지막 좋은 시간을 보낸 할머니와의 오스코루샤의 풍경과 그곳 사람들, 이제 2018년이 되어 치매가 악화된 할머니를 결국 요양원에 보내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의 주특기라고 스스로 고백하듯, 산만하게 풀어내고 있다.

 

  산만하다고? 그렇다.
  먼저 시간이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많은 소설작품이 현재를 이야기하고, 갑자기 저 먼 과거로 돌아가 왜 현재와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는지 설명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출신>은 2018년 3월 7일 크리스티나 할머니가 3층 창문을 통해 도로에 서 있는 소녀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소녀가 크리스티나 할머니 본인일 수도 있고, 할머니의 언니인 자고르카일 수도 있고, 열한 살 시절에 함께 소년기를 보낸 동무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3월 7일은 3월 7일이지만, 1978년 3월 7일, 드리나 강이 흐르는 비셰그라드에서 태어난 자기 얘기를 좀 하다가, 또다시 2008년 3월에 독일 국적을 획득하기 위한 자필이력서를 써야 하는데, 비셰그라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슬라브 학을 전공했다고 쓰고 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는 또다시 위에서 이야기한 1991년 유러피언 챔피언스 클럽 컵 축구시합에 이어, 전쟁. 이어지는 2009년 할아버지가 태어난 오스코루샤 방문. 이어서 곳곳에 우화와 은유를 숨겨놓은 장치 속에서 이렇게 때와 장소가 섞여버리니 양심이 있는 작가라면 스스로 산만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물론 성공적으로 정리해가며 앞부분을 읽어냈다면 뒤는 속도를 낼 수 있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말이다.
  하여간 2018년에 커튼을 뜯어 빨래를 하려던 크리스티나 할머니가 높은 곳에서 낙상을 해 팔이 부러지고 치매도 심해 더 이상 가족이 관리할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해 요양원에 보내는 일이 생긴다. 그러면 사샤 스타니시치가 <출신>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벌써 끝난 상태다. 책을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그렇지 않은가. 자기 출신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작가 입장에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지만, 이젠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어디 출신이라 해야 하나. 세르비아? 보스니아? 아니면 할아버지가 태어난 오스코루샤? 그것도 아니라면 하이델베르크? 할 말 다 하고 이제 남은 것은 결론이다.

 

  출신에 대해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제 첫 장면, 크리스티나 할머니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남았다. 사샤 스타니시치는 잡지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독자의 의견을 요구한다. 즉, 열린 결말이기는 하지만 이 속에 독자의 판단을 적극적으로 포함시켜버린다. 예를 들어, 할머니를 안전한 요양원에 계속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423쪽으로, 자유를 찾아 요양원을 탈출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409쪽으로. 이런 거 많이 보셨으리라. 정말이다. 이렇게 여섯 가지의 결말을 마련해놓고, 독자의 취향대로 결론으로 향하게 해놓았다.
  독서모임이 있다면 참가자들이 서로 자기가 만든 결론을 비교해가며 어떤 것이 다른지 토의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내 의견? 방법 또는 발상이 참신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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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11-29 09: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작가님. 일단 찜해요.^^ 참신하나 좋지만은 않았다는 거죠. ㅋ 저는 요즘 책도 플친들 글 읽기도 만만찮네요. 삶이 산만의 극치에요^^;;; 폴스타프님 글이 딱 위에 걸려 있어 휘리릭 눈팅만 하고 물러갑니다. 굿데이~~~~^^

Falstaff 2021-11-29 09:27   좋아요 3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월요일, 즐거운 한 주 만드시기 바랍니다. ^^

파이버 2021-11-29 1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뒷장면이 게임북을 읽는 듯해 참신했습니다ㅎㅎ 산만하다는 말씀에는 100번 동의합니다

Falstaff 2021-11-29 11:11   좋아요 3 | URL
사실 저는 사샤 스타니시치를.... 다른 작가인줄 알고 얼른 읽은 거였답니다.
ㅋㅋㅋ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다락방 2021-11-29 10: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샤 스타니시치 의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도 다소 산만했는데 저는 이 산만함의 시작이 조너선 사프런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는 엄청나게~를 엄청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그 후에 군인은~을 읽었는데 형식이 닮아 있더라고요.
저는 시간이 왔다갔다 하는 것도 그렇지만 책 속에서 화자가 여러명인 것도 좋진 않더라고요.

저 이 책 읽고 리뷰까지 썼는데 폴스타프 님 리뷰 읽으면서 내용이 너무 생각 안나서 와 .. 도대체 나는 독서를 왜하는가... 하다가 마지막에 이러면 저쪽으로 가고 저러면 고기로 가라~ 하는 거 보고 살짝 기억나네요 ㅋㅋㅋㅋㅋ 그랬어요, 그랬어. 이 책은 그런 책이었어요.

Falstaff 2021-11-29 11:14   좋아요 4 | URL
저도 <엄청나게...> 재미나게 읽은 1인입니다! 별 다섯 개 줬습지요! ㅋㅋㅋ
다락방 님도 책 많이 읽으시잖아요. 그래서 그럴 겁니다. 저도 무지하게 헷갈려요. 책 읽으면 독후감 꼭 써놓는 게 다 이유가 있어서거든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11-29 13: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사놓긴 했는데...산만하다는 얘기들어서 읽기 싫었거든요. 근데 재밌다고들 하시니 기쁘네요😚

Falstaff 2021-11-29 13:54   좋아요 3 | URL
와... 읽으셔요, 읽으셔요!!! 재미납니다!!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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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초반에 무크지가 유행한 적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은 어엿한 메이저 출판사로 성장한 『실천문학』. 1년에 한 권씩 게릴라처럼 출판하고 싹 사라진 다음에 다시 1년 후에 2호를 펴내고 잠적한다. 이 실천문학 2호 “이 땅에 살기 위하여”가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무크지다. 문익환 목사가 ‘늘봄’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발표했고, 김정환의 <황색예수전>도 2호에서 처음 읽었다. 아, 그리고 시의 제목(<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은 아니다.)은 잊었지만, 양성우! 1982년,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낭유리 군부대 막사에서 이 책 읽다가 고참한테 들킨다. ‘쫄따구 새끼’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와 내무반에서 책을 읽는다는 명목으로 새벽 두 시에 취침인원 전원을 깨워 곡괭이 자루로 줄빠따를 치고, 치사하게 원인제공자인 나는 쫄병이라 탈영할까 겁나서 안 때리겠단다. 책 읽는 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맞을 정도의 죄가 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첫 연인이 보내준 무크지 실천문학은 그래서 이래저래 잊지 못한다. 5호까지 나오고 이후에 베트남 국기처럼 사각형 안에 검은 별 하나가 그려진 로고의 실천문학사가 생겨 이후 계간지로 탈바꿈한다.
  복학을 하고나서 특히 무크지에 관심이 생겼다. 이때 실천문학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또다른 무크지 가운데 『시와 경제』가 있었다. 당시에 나오는 모든 무크지는 하나같이 운동문학에 복무했다. 『시와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복학생이 사는 책이라곤 최인훈 전집을 한 권씩 모으고 오정희의 단행본을 사는 것으로도 빡빡해 주로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을 찾아야 했지만 무크지는 말 그대로 비정기 간행물이라 읽어보기도 힘들었다. 어렵게 구해서 본 『시와 경제』의 발행인이 김사인金思寅이었다. 1호가 나온 것이 1981년이라 한다. 김사인이 1956년 원숭이띠니까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 시대는 잔인한 전두환 정권시절이었다. 이때의 기억은 김사인으로 하여금 이런 시를 쓰게 했다.

 


  일기장 악몽

 


  또 잡아갈라 또 탈탈 털어가서는
  시월 이십구일 다섯시부터 일곱시 사이에 뭘 했는지
  시월 한달 뭘 했는지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쓰라고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무엇을 육하원칙대로 다 쓰라고

 

  속을 들여다보는 눈빛을 하고 다 안다는 눈빛을 하고
  때가 되면 육개장을 된장국을 먹여가며 을러가며
  다시 쓰라고
  또 다시 쓰라고

 

  콧속으로 물이 입으로도, 비명을, 숨이……비명을, …… 컥!
  칠성판에 묶여 개구리처럼 빠둥거리다
  넙치처럼 도다리처럼
  오줌을 싸며 기절하는 거 아닐까
  모를 리 없다고 모를 리가 없다고
  잘 생각해보라고
  친구 꾐에 빠졌을 뿐
  너는 억울한 줄 우리가 잘 안다고
  그러니 솔직히 그놈이 뭐라고 했는지
  그놈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말해보라고

 

  식은땀 흘리며 벌떡 깨네 벌써 삼십년
  말발타 살발타!  (전문)

 

 

  나는 군대생활이 유독 맞지 않아서 그런가 모르겠는데, 아직도, 이 나이에 무슨 얼토당토 않는 서류가 잘못된 것이 밝혀져 다시 입대하는 꿈을 꾼다. 그러면 제대한 지 40년이 가까운데도 속이 상해서 미치겠다. 여태 꿈을 꾸는 것 가운데 하나 더, 내가 학창시절에 공부를 잘 해서 학사경고를 두 번 받았음에도 8학기 만에 졸업을 했다. 그러니 당연히 4학년 2학기에 21학점을 꽉 채워 신청을 하고, 한 학점이라도 F가 나오면 졸업을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게 가끔 꿈에 나온다. 시험시간에 교실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은 벌써 시험이 끝나 교실에서 나오고 있었고,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역임한 완고하기 짝이 없는 한필하 교수는 절대 시험에 응해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미 취업을 한 나는 발만 동동 구르다가 새벽을 맞는 거, 이거 정말 유쾌하지 않지만 가끔 겪는 일이다. 한 가지 경험이 더 있지만 김사인이 당한 물고문 앞에선 입도 벙긋하기 창피한 사소한 경험이라 입 꾹.
  김사인과 비교하면, 아니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일천한 경험이지만, 오래된 일이라도 그게 당사자한테 큰 충격이었다면 언젠가는, 언젠가가 아니고 상당히 잦은 비율로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에 젖어 벌떡 일어나, 아이고 세상에나, 말발타 살발타, 주문을 외우게 만들면서.
  김사인이 역경을 치룬 것이 『시와 경제』 한 번이 아니다. 『시와 경제』 이후 몇 년이 흐르고 노태우 정권 초기, 조금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한 철권통치의 시절에 이번엔 『노동해방문학』이라는 무크지의 발행인이 된다. 말부터 심상치 않다. 당시에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육군 장군 출신이 대통령을 하던 때인데 잡지의 제목에 ‘노동해방’을 붙여? 이거야말로 간이 배 밖으로 탈출한 일이었을 터. 이미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읽어보려고 한 권 샀으나, 술 마시는 일 하나만 가지고도 공사가 다망해 몇 쪽 펴보지도 않고 흐지부지 없어졌다. 하여간 내가 김사인의 시를 집중해 읽은 시기가 『실천문학』과 『노동해방문학』의 사이다.
  그런데, 이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펼치니 처음 실린 시가 눈에 익다.

 


  달팽이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근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전문. 띄어쓰기는 원문에 따름. 이하 같음.)

 


  김사인의 시 같지 않다. 어떻게 읽으면 모던하면서도, 진중하게 느리더라도 꾸준히 배밀이로 먼 길을 가겠다는 의지처럼도 읽힌다. 분명 이거 전에 어디서 얽었는데, 어딘지 모르겠다. 김사인의 세 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이야기하자면, 책동무가 있다면 정말 이 시집이야말로, 다른 술은 안 되고 막걸리 마시면서 밤을 새워서라도 소리 내 읊어보고,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독후감이 너무 길면 욕먹는다. 그래서 하고 싶은 여러 마디 말 가운데 딱 한 가지만 하고 마치자.

 

  시집에서는 그동안 숨을 거둔 시인들에 관한 시가 세 편이 나온다. 먼저 내가 2018년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꼽았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쓴 김태정, 그리고 박영근과 신현정. 오늘 우연히 회사의 동갑나기 박영근과 일과 후에 북어탕 안주에 쐬주 한 병씩 하기로 했는데 그것 참. 김태정을 기리는 시는 제목 자체가 <김태정>이다.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 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할 사람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은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 앞. (부분)

 


  저 세상으로 간 김태정이 자기가 마지막 숨을 쉰 해남 미황사 앞마을에서 늘 가까이 하고 살았던 미물과 자연에게 당부하는 걸 그리고 있다. 다음엔 죽음이란, 죽는다는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역시 고인의 말로 전하고, 이어서 김사인의 기억 속 김태정을 소환한다.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히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닌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 솜씨도 음식 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부분)

 


  그리고 나서 이젠 김태정을 위한 조의.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 새삼 슬픈 시늉을 하지 않겠다.”라고.
  김사인의 각주에 의하면 시인 박영근은 부안 사람으로 2006년에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고, 눈물과 노래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박영근

 


  너무 무서워서 자꾸만 자꾸만 술을 마시는 것.
  그렇게 술에 절어 손도 발도 얼굴도 나날이 늙은 거미같이 까맣게 타고 말라서 모두 잠든 어느 시간 짚검불처럼 바람에 불려 세상 바깥으로 가고 싶은 것.

 

  그 적의 어느 느슥한 밤 쪽으로
  선운사 동백 몇송이도 눈 가리고 떨어졌으리.

 

  받아주세요 두 손으로 고이
  어디 죄짓지 않은 마른땅 있거든 잠시 쉬어가게 해주세요.
  젊은 스님의 애잔한 뒤통수와 어린 연둣빛 잎들과 살구꽃 지는 봄밤 같은 것을
  어떻게든 견뎌보려는 것이니까요.  (전문)

 


  신현정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색해 찾아보니 이런, 낯익은 얼굴이다. 이이 이름이 신현정이었구나. 아직 생존했다면 여든넷. 서라벌 고등학교 교사였다지만, 내가 서라벌 중학교 다닐 때는 중대 문창과를 아직 졸업하지 않았거나 갓 졸업해 부임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교생실습을 왔었을까? 그래서 얼굴이 익었나? 아이고, 그럴 리가. 그때가 언젠데. 이이가 재미있는, 그러니까 유쾌한 성격이었나보다. 좀 길더라도 시 전문을 올려보겠다. 신현정의 네 번째 시집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시의 제목으로 썼다.
  시인 세 명 말고도, 돌아간 부모는 당연하고, 화백 여운을 비롯해 자기가 여태 살면서 주위 배경으로 또 다른 삶을 살았던 보통의 사람들과 키우던 개까지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모더니즘 시들이 흘러넘치는 요즘에 서정시의 맥을 달팽이처럼 지켜나가는 김사인의 시를 읽는 건 얼마나 개운한 일인지. 그의 초기시에서 익숙했던 투쟁과 혁명은, 내 경우에 국한해 말하자면, 서정 앞에서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 신현정을 기리는 시를 옮기며 독후감을 마친다.

 

 

  바보사막

 


  눈부신 가을볕 더는 성가셔 슬쩍 피해 가셨단 말이지.
  헌 우체부 자전거는 훔쳐 타고
  달밤 무지개 길을 씽씽 달려
  (야호! 엉덩이 높이 들고 오두방정도 떠시면서)
  술벌갱이라고들 소문이 도는 하늘님 영감네 동네로 마실가셨단 말이지.
  볼록볼록 보드라운 보도블록 길 걸어
  흰 구레나룻으로 한몫 먹고 드는 그 심술 영감한테로
  내기 장기나 한판 두러 가셨단 말씀이지.

 

  달무리 같은 터번을 쓰고 어린 하마와 고슴도치와 염소와 늙은 낙타를 업고 걸리고
  바보 같은 사막 천치처럼 건너서
  그대는 왕자같이 잘도 가셨나본데,
  가을햇살 속은 조용히 환한데,
  (귓속말인데, 김종삼 천상병 박용래 같은 프로들은 거기 다 계시지요? 한편 부러워요. 혹 채광석 박영근 같은 이들이 왈왈거리며 말 트자고 덤비더라도 속상해 마세요. 괜히 그러지 속은 여린 사람들이에요. 하기야 든든한 이문구 성님이 통반장 한 구찌쯤은 맡아보고 계시겠군요.)

 

  그런데 누구일까 저 백수광부(白首狂夫)
  앞자락 풀어헤치고 광화문 네거리 둥둥 떠 흘러가는 저 사내.
  검붉게 술에 탄 얼굴 다복솔 머리 헐렁한 바지
  이 슬픈 시간에.  (전문)

 


* 근데 꼭 한 마디만 더 해야겠다. “아직도 나는 시 가운데서 서정시가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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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26 08: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시절 꿈을 자주 꿔요. 저도 대학시절 학사경고 받고 4학년 2학기 때 21학점 풀로 채워 들어 졸업 간신히 했거든요. 졸업할 때 학점 평점은 2.0
.
.
꿈에서 다시 대학을 다니면 강의실은 어디인지, 언제 수업을 듣고 언제 과제를 제출하고 나는 언제 졸업할지.. 되게 답답해해요. 그러다 꿈에서 깨면 아 다행이다, 나는 이미 졸업해서 다행이야, 합니다. 휴.. 대학은 공부하기 가장 좋은 환경인데 저는 왜그렇게 공부를 안했는지 후회가 되거든요? 그런데 막상 꿈에서 대학생이 되면 막 답답하고 초조해서 미치려고 하더라고요. 휴..


그리고 이건 좀 사적인 질문인데요,

폴스타프 님 전공이.. 국문학.. 이었나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질문하지만 대답을 꼭 해주셔야 되는건 아닙니다. :)

Falstaff 2021-11-26 08:57   좋아요 3 | URL
다락방 님은 좋은 학교를 다니셨나봅니다. 설대 같은 곳이 F 받으면 0점, 60점? 처리한다고 들었거든요.
저 나온 학교는 F 받으면요, 수강을 아예 하지 않은 것으로 성적표에 표시됩니다. 요즘엔 모르겠고요. C 받기 싫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F를 받기도 한답니다. 덕분에 경고 두 번 받고도 학점은 거의 3.0에 근접할 수 있었습지요.

ㅋㅋㅋㅋ 전공은, 하여튼 이과 출신입니다. 고딩시절부터 물리, 화학, 수학 이런 거에 바짝 흥미를 느껴 20년 후, 그러니까 30대 후반 부터는 연구실에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입학하자마자, 으악, 최악의 선택이란 걸 알아차렸습니다. 이어서, 전공 공부 포기. 너무 늦은 거죠. 당시엔 전과 같은 것도 없었으니. ㅎㅎㅎ 다 인생입니다.

다락방 2021-11-26 09:04   좋아요 4 | URL
제 동기들 중에도 c 받으면 재수강이 아예 안된다고 부러 재수강 하려고 f 받는 친구들 있었어요. 저는 d 나 f 가 수두룩한 가운데 a 는 받아본 기억이 없어서 당시에는 저런 친구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는데(아니, 굳이 왜?) 나중에야 그것이 학점 관리라는 것을, 학점은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요.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원이나 혹은 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요즘에도 종종 생각하는데요, 이 댓글 쓰다 보니까 역시 대학은 다시 안가는 걸로..그냥 이렇게 사는 걸로 해야겠어요. ㅋㅋㅋㅋ

이과 출신이시군요!! 물리, 화학, 수학에 흥미를 느끼는 이과출신인데 세계문학도 다 뿌셔버리시다니. 크- 멋집니다!

Falstaff 2021-11-26 09:12   좋아요 3 | URL
같은 성적 처리 기준이면 제가 다락방 님보다 공부는 잘 했던 걸로....
아휴, 저는 대학 다시 가는 거, 학을 뗍니다. 정말 싫어요.
사실은 고등학교 졸업식 날, 세상에 대고 외쳤습니다.
˝이제 내 인생에서 더 이상의 공부는 없다!˝
뭣도 모르는 열여덟 살짜리가 웃겼습죠. 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11-26 09: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늘 적어주신 시는 천천히 읽으면 다 이해가 가서 좋습니다. 폴스타프님의 여러가지 꿈 이야기도 공감 가고 재미 있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때 첫 미팅한 사람이 서라벌고등학교 출신이었어요.
그 사람이 저의 첫사랑인데 덕분에 그때 생각났어요~~

Falstaff 2021-11-26 09:31   좋아요 5 | URL
그죠, 이런 게 시 아녀요? 읽으면 읽기를 마치는 순간 탁, 무슨 뜻인지 즉각 알 수 있는 서정시. ㅎㅎㅎ
크, 서라벌고 졸업생과. 제가 나온 고등학교는, 북향의 서라벌고에서 북악을 향해 서서 10시 반 방향에 있는 ‘언덕 위의 하얀 집‘ 대일고였습니다. 당시엔 두 학교가 신흥명문으로 전국 1, 2등을 겨루던 때이기도 하는군요. 아, 정말 오래 전입니다. 심지어 전 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으아.....

잠자냥 2021-11-26 09:5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오늘 밑줄 그을 부분은 바로 이 구절입니다.

˝첫 연인이 보내준 무크지 실천문학은 그래서 이래저래 잊지 못한다.˝

대치동 1타 강사 올림-

Falstaff 2021-11-26 09:59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 지금 뭐 하는지 몰라요. 잘 살고 있을 겁니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고, 꿈에서라도 부르고 싶지 않은 이.
심장에 그은 먹줄 같은 사람입니다. (ㅋㅋㅋㅋㅋ 시를 쓴다, 시를 써. ㅋㅋㅋㅋ)

* 오늘 페이퍼 아내가 보면 퇴직금 갈라서 이혼하자 할 거 같은데 이걸 어쩌나...

다락방 2021-11-26 10:01   좋아요 3 | URL
심장에 그은 먹줄...

피 땀 눈물..

아 촉촉한 감성 터지네요 ...

Falstaff 2021-11-26 10:03   좋아요 2 | URL
깊고 깊은 가을 아닙니까.

페넬로페 2021-11-26 10:10   좋아요 4 | URL
잠자냥님, 역시 대치동 1타 강사답게 족집게 시네요^^
밑줄 쫙 입니다 ㅋㅋ

coolcat329 2021-11-26 16:5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게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ㅋㅋ

잠자냥 2021-11-26 0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정시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게 이 험한 세상에 시가 있어야 할 이유라고도 생각하고요.

Falstaff 2022-01-22 22:00   좋아요 3 | URL
옳은 얘기만 하시는 잠자냥 님. 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11-26 10: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사인 시인의 시 읽으면서 아픔을 느꼈어요. 단지 아프다기 보다는 분노와 슬픔과 함께 부채의식마저 느꼈어요

Falstaff 2021-11-26 10:56   좋아요 4 | URL
화내지 마세요. 슬퍼하지도 마세요.
김사인 또래의 사람들은 대가로 여러가지를 성취하고, 누렸잖아요. 오히려 이제 투쟁할 것도, 그래서 성취할 것도 별로 없는 무담론 시절을 사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더 가여울 때도 있습니다.

그레이스 2021-11-26 11:29   좋아요 5 | URL
일반화해서 모두를 그렇게 말할수는 없겠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도 그 담론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들도 있었고,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도 담론을 형성해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죠.

그레이스 2021-12-09 16:45   좋아요 1 | URL
이 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쎄인트 2021-12-09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1-12-09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축하드려요 ~

독서괭 2021-12-09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님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1-12-0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축하드려요 ^^
 
서쪽으로
모신 하미드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수첩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펀자브와 카슈미르 출신의 후예인 모신 하미드는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대학교수의 아들로 1971년에 태어났다. <서쪽에서>의 주인공 사이드도 정확하게 어디라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슬람을 믿는 나라의 한 도시에서 대학교수 아버지와 고등학교 교사 어머니의 늦둥이로 태어난다. 얼마나 늦둥이냐 하면,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혹시 임신이 아닐까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의견을 냈을 때, 아이 없는 중년 부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의심을 했을 정도였다. 작가 모신 하미드 말고, <서쪽으로>의 주인공 사이드가 말이지.
  하미드는 아버지가 박사학위 취득하기 위해 스탠퍼드에서 공부할 때 따라가 세 살부터 아홉 살까지 살았다. 한참 어학능력이 발달할 때였으니 영어 하나는 죽이게 했겠다. 이후 다시 파키스탄 라호르로 돌아가 아빠는 대학교수를 하고, 아들은 파키스탄의 미국인 학교에 다닌다. 열여덟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93년, 스물세 살에 127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 <파키스탄에서의 통합자원계획>을 제출해 프린스턴을 최우등으로 졸업한다. 이어서 내친김에 하버드 로스쿨까지 마친다. 근데 이상하지? 소설가가 이런 논문을 써서 다른 곳도 아니고 프린스턴에서 최우등? 그렇다. 모신 하미드의 직업이 작가이자 뉴욕에서 활동하는 브랜드 컨설턴트이기도 하다.
  프린스턴에서 전공은 경영이었지만 최우등 논문을 쓰는 틈틈이 조이스 캐롤 오츠와 토니 모리슨을 사사해, 컨설턴트로 돈벌이를 하면서 2000년에 서른 살 되는 기념으로 소설 <나방연기 Moth Smoke>를 써 데뷔하기에 이른다. 이래봬도 모신 하미드가 프린스턴 출신이잖은가. 개츠비의 아빠 핏제럴드하고 동문이다. 2007년엔 두 번째 소설, 지극히 짧은 장편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발표해 우리나라의 민음사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읽어볼 기회를 주었다. 와우, 프린스턴 출신으로 2001년 당시 8만 달러 초임을 받기로 하고 기업평가 컨설턴트 회사에 입사해 퍼스트 클래스에 올라 필리핀으로 업무출장을 다니며, 같은 프린스턴 출신의 에리카와 사랑에 빠지는 파키스탄 젊은이 찬게즈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하미드의 책을 수배하다가 이번에 골라 읽었다.

 

  <…… 근본주의자>에서는 느긋하게 누워 필리핀을 향해 가는 도중 911 테러가 터져 뉴욕의 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서쪽으로>는 이슬람 지역의 특정, 그러나 익명의 국가에서 내전이 발생해 원리주의를 요구하고 처형을 밥 먹듯이 자행하는 반군의 폭정을 견디지 못해 조국을 탈출하는 주인공 커플 사이드와 나디아의 이야기다. 대학까지 졸업해 직장을 다니며 야간 강좌를 듣는 두 주인공. 이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는 여자들의 옷차림이나 머리모양을 완전히 자유스럽게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하고 다니던 시절이었지만 나디아는 고전적인 검정색 옷으로 몸을 가리고 다녀, 사이드가 첫눈에 반했지만 함부로 가까이 다가가기는 힘들었다. 마음을 크게 먹고 “커피 한 잔 하실까요?” 라고 말을 붙였으나 결국엔 “물론 학생식당에서 말입니다.”라고 토를 달아야 했다. 나디아가 한 번 쓱 훑어보더니, “아니요.”라고 단칼에 거절해버린다. 이게 처음 만남이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미혼여성이라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럽게, 학교 졸업과 동시에 보험회사에 취직도 했으니 부모에게 집을 나가 독립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정말로 나와 혼자 살고 있는 신여성이다. 나이든 과부가 주인인 삼층집의 삼층에 살면서 스스로를 전사한 육군 장교의 아내로 지금은 독신과부라고 소개해 그나마 방을 얻은 거였다. 언더그라운드 콘서트, 라기보다 그냥 발표회 수준의 공연에서 만난 뮤지션과 한동안 연애한 경험이 있으며 뮤지션의 집에 들른 그날 밤에 바로 처녀성의 짐을 내려놓기도 했다. 사귀다 보니 남자가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오해해 이별을 선언했는데, 남자가 두 달 뒤 폭탄에 터져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있었다는 건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이별 선언을 하던 밤, 뮤지션은 뮤지션답게 이별을 감수했으며, ‘마지막 한 번’을 요구해 받아들였는데, 마지막 한 번이 놀랍지도 않게 놀랄 만큼 좋았었다고 한다.
  반면에 사이드는 둘이 서로 정신적 사랑을 확인하고, 이어서 몸의 사랑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이제 딱 하나 남았는데, 바로 그 순간, 결혼하기 전까지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라고 주장하면서, 한껏 달아오른 몸을 스스로 식히는 고문을 감수한다. 한 번도 아니고 책이 끝날 때까지. 이미 “기쁨을 아는 몸”(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중 <우국>. 1983. 주우. 김후란 역)인 나디아는 속으로,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에 동의하면서도 계속 서로의 몸을 만진다. 물론 이미 죽은 뮤지션과의 경험은 결코 말하지 않은 채.

 

  그러나 도시는 반군이 조금씩 점령하기 시작했고, 사이드와 나디아의 집이 있는 지역이 가장 뜨거운 전선이 되는 바람에 위험은 더욱 심해진다. 이어서 불행하게도, 잘못 날아온 빗맞은 대구경 탄환이 차 속에 떨어진 귀걸이 한 쪽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수그린 사이드 어머니의 머리통 삼분의 일을 날려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완전히 반군이 점령해버린다. 단지 자신과 다른 종파가 쓰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참수를 당하고 머리 없는 시신은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리며, 상습적인 야만이 판을 치는 도시에서 더 살 수 없을 지경이 된 참담함. 이때 문을 열어주는 에이전트가 등장한다. 검은 문. 완벽하게 어두운 검은 문. 도시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문. 사이드의 아버지는 아내가 잠든 땅을 떠나지 않겠다고 끝까지 주장해, 서로 부부의 관계가 아닌 사이드와 나디아만 많은 돈을 에이전트에게 넘기고 문을 통과한다.
  어둡고 긴 터널을 뚫고 나오니 그곳은, 그리스 미코노스 섬의 난민수용소. 여기서 ‘문’은 명확하게 우화적 표현이다. 어떤 수단을 썼든지 하여튼 도시와 나라를 빠져나와 지중해의 그리스 섬까지 도착했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된다. 난민수용소도 결국 사람 사는 곳. 미코노스의 아름다운 구시가지에 사는 선한 그리스인 에이전트가 있어, 이들은 그곳을 떠나 런던으로 옮기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가 정착한다. 이제 난민은 이슬람 지역에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에서 온 갖가지 민족들, 라오스와 미얀마의 소수민족, 미국으로 향하던 라틴아메리카 출신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디아스포라로 확장한다.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여튼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이들은 생명의 이어짐이라는 인간 최고의 숙명을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생활을 이어가고, 생식을 하고, 늙어서야 죽는다. 이게 합당한 일이라서.
  마지막은 샌프란시스코 정착 후 50년이 지난 시점. 시기로 따지면 2050년 중반 이후다. 그러나 ‘문’이 다른 세계로 곧바로 가는 플루 가루(<해리 포터> 시리즈 참조)로 작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웬만한 산술적 계산을 의미가 없어진다. 그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이라고 여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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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1-25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인상 깊게 읽었어요. 소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11-25 08:47   좋아요 2 | URL
옙. 저도 <...근본주의자>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을 골랐답니다. ^^

다락방 2021-11-25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좋았고,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도 나쁘지 않게 읽었는데요, 이 책의 소식은 모르고 있었네요. 둘다 좋게 읽었지만 챙겨볼 작가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나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 작가의 다른 책 소식을 알게된 이상 안읽을 수 없지요. 사실 이 감상문 보니 음 ‘너무 남자가 썼다‘라는 걸 아마도 책을 읽다가 느끼게 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지만, 그러나 저는 모신 하미드의 책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줄거리 보니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 좋아요. 뭔가 읽을 책 생기는 거. 물론 그런 책 넘나 많지만... (시무룩)

Falstaff 2021-11-25 10:41   좋아요 2 | URL
아, 저도 <..부자되는 법> 딱 꼽고 있습니다!
남자가 너무 쓰는 게 어디 있어요. 여자도 마찬가지지요. 다 가서 마지막에 에이, 이제 그만, 이것보다 열 받는 일이 어디 있다고. ㅋㅋㅋㅋ 안 그런 척했지만 패버리고 싶었을 지도 모르잖아요.
하여튼 흥미있는 작가입니다.

- 2021-11-25 1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가 문외한인 부분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네요. 주저하는… 을 먼저 읽어봐야겠지만 언제 읽을 것인가.
퐐님. 어제 이리가레로 밤늦게까지 너무 두뇌 혹사시켜가지도 오늘 나르치스로 하루 시작했는 데…. 수도사들 내용. 어쩜…. 벌써 맘에 쏙 들어요 ㅋㅋ 저의 골드문트는 아직 소년이고 이제막 밤나무와 친구가 된 참입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1-11-25 11:28   좋아요 2 | URL
앗 뭐야 시작했어요? 😱 나도 할래!!

- 2021-11-25 11:32   좋아요 2 | URL
진짜 이제 막 친구가 됐어요 ㅋㅋㅋ 시작하자 ㅋㅋㅋ 근데 난 나르치스도 좋아용 ㅋㅋㅋ 껄껄 ㅋㅋㅋ

Falstaff 2021-11-25 11:5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드디어 첫 장을 넘기셨구먼요! 축하합니다.
하여튼 내년 초부터 문패 바꿔 달 겁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1-25 11: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잠자냥 님은 모신 하미드를 안 읽으셨을 것 같은 느낌이...

Falstaff 2021-11-25 11:58   좋아요 2 | URL
그죠, 그죠?

잠자냥 2021-11-25 11:58   좋아요 2 | URL
어마나 우리 다부장 님 돗자리 까셔도 될 거 같아용!
어쩜 그리 저를 잘 아세요! ㅋㅋㅋ 1개도 안 읽었습니다.
제가 또 은근 작품 편식이 심해서....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1-25 12:02   좋아요 3 | URL
제가 또 감히 짐작해보자면 만약 잠자냥 님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으신다면 별 넷, 아시아 부자 읽으신다면 별 둘에서 셋 일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1-25 12:1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아니 또 이렇게 낚으시네. 이분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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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았어, 알았어. 언어를 가지고 노는 천재적 재능인 건 알아먹겠는데, 불행하게도, 역자 김재성이 친절한 번역을 해주었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하게 네 번째 읽은 앨리 스미스, <가을>은 노잼이었으며, 스미스가 쓴 ‘사계절 4부작’은 이 책 딱 하나만 읽고 그만 두겠다, 라고 결정했다.
  유년시대라고 하지만 소학교 시절이니 사실 소년시대에 주인공 엘리자베스네 옆집으로 이사 온, 팔순에 가까운 노인이며, 작사를 한다니까 시인이기도 하고, 그것보다는 작곡가라고 해야 더 어울릴 대니얼 글럭 씨. 엘리자베스, ‘자’에 z가 아니라 s를 쓰는 꼬마가 글럭 씨와 우정을 쌓았는데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특히 예술적 감수성이 발달했는지 미술평론을 공부하게 됐고, 근 이십 년 만에 글럭 씨가 몰팅스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벌써 백한 살이 된 그의 요양실에 찾아가 책을 읽어주며 옛 생각을 하는 내용이다.
  이 양반이 한 세기를 넘게 살았으니 경험한 것만 해도 얼마나 많겠는가. 서른두 살이 된 엘리자베스가 다시 각색한 글럭 씨의 과거에, 그보다 스무 살이 적은 여성, 영국 유일의 팝 아트 화가 폴린 보티가 있었으니, 글럭 씨가 평생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연모하다 죽어가는 운명이었다. 엘리자베스의 각색에 의하면. 그러나 글럭 씨가 폴린 보티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클라이브와 결혼하기 불과 열흘 전이었으니, 이후 글럭 씨의 가슴은 나무좀에 시달려 구멍이 숭숭 뚫린 나무 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무 얘기가 나온 김에, 다시 첫 장면으로 올라오면, 나는 이 책도 이이의 전작 <호텔 월드>에서처럼 귀신이 등장하나보다 싶었다. 앨리 스미스의 상상력은 도무지 멈추지 못해 별의 별 짓을 다 하니까, 귀신이나 사후 세계가 나온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말이지.
  노인이 조수를 타고 해안으로 떠밀려온다. 귀에도 모래가 가득하고 무엇보다 입에도 모래투성이라 뻑뻑하기 이를 데 없어 퉤퉤 뱉어낸다. 죽음이 인간을 증류시키리라고, 썩어문드러지는 부패를 벗겨내 모든 것을 구름처럼 가볍게 만들어 주리라고 상상했지만, 정작 죽어보니 굉장히 밝고 지독하게 춥다. 태양은 전혀 온기가 없고 나는 알몸 상태. 아오, 죽음아. 나를 받아주어 고맙다. 근데 이미 죽었는데 왜 춥지? 하다가, 노인은 일어서 해변을 떠나 숲으로 들어가고, 숲에서 다시 젊어지는 듯, 체모가 검고 굵어지는 걸 보니 분명 천국은 맞는데, 몸에서 나뭇잎과 풀이 돋아 나무처럼 변신하는 거였다. 이러면서.
  후렴: 한 손에 세계를 몇 개나 담을 수 있을까 / 모래 쥔 한 손에.
  음. 후렴이라고? 사람이 숲 속에 들어가 나무가 됐다고? 오비디우스의 <변신>. 실제로 죽음의 근처에 늘 있는 수면증가기를 맞은 대니얼 글럭 씨의 침상 옆에서 엘리자베스는 환자에게 <변신>을 읽어주기도 한다. 그러면 위의 후렴은 그리스 희곡 특유의 코러스가 노래하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렇지? 상상력만 보면 정말 대단하지? 글쎄 앨리 스미스를 도무지 싫어할 수 없다니까. 근데 왜 이 책에서 우체국에서 여권국 민원을 대행해주며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관료적 우체국 직원들이 민원인을 애먹이는 에피소드가 적지 않은 분량으로 두 번씩이나 나오는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영어의 라임 놀이는 또 뭐고. 이 정도면 애초에 영어를 사용하는 독자들만을 위해 작품을 썼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대니얼 글럭 씨에게 늙은 호모라며 엘리자베스에게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주문했던 엄마가, 이십 년 후에 이웃 조이 아줌마의 무릎 위에 올라 소파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다가 딸에게 직빵으로 들키는 일은 완전 앨리 스미스 스타일이어서 귀엽기라도 하지만.
  하여튼 난 과한 언어유희, 정확하게 '우리말로 쓴 영어유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신선한 아이디어로 산뜻하게 작품을 썼더라도 좋은 마음으로 읽기는 쉽지 않았다. 영어가 유창하여 원서로 읽었다면 흥분했을 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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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1-24 0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데어 벗 포 더’가 많이 보이더라고요. 더 산만하고요. 어지러웠지만 (뭣도 모르면서) 그래도 좋았어요;;; 전 겨울도 읽어볼라구요.

Falstaff 2021-11-24 10:53   좋아요 3 | URL
오, <겨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ㅎㅎ

blanca 2021-11-24 10: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음, 영어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원서로도 저는 개인적으로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지..루..했어요. 저의 문제일 수도...열광하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Falstaff 2021-11-24 10:55   좋아요 3 | URL
아, 원서로 읽으셔도 그렇군요.
앨리 스미스다운 발칙함이 좀 덜한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루해 하시지 않았나 싶기도 하군요.

coolcat329 2021-11-24 11: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이 책 푸근한 그림 표지와 가을이라는 끌리는 제목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정이 안갔던 제 촉이 옳았네요. 😅
폴스타프님이 영어를 모국어로 유럽이나 미국에서 활동하셨다면 날아다니셨을텐데요. 그냥 상상해봤습니다.🤭

Falstaff 2021-11-24 12:27   좋아요 3 | URL
ㅎㅎㅎ 그래도 좋은 평가가 더 많은 책입니다. ^^;;
아이고, 제 주제를 아는 걸요. 자꾸 소쿠리 비행기 태우시면 어지럽사옵니다. ㅋㅋ

잠자냥 2021-11-24 1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아, <가을>이 그렇군요. 내년 가을에 읽는 것으로..;;;

Falstaff 2021-11-24 12:28   좋아요 4 | URL
저도 11월, 아주 제대로 된 만추에 읽으려고 딱 맞췄는....데! ㅋㅋㅋㅋ

scott 2021-11-24 12: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앨리 스미스
넘 장황하게 늘어 놓고는 수습을 못하능 ㅋㅋㅋ

에세이를 더 맛깔나게 쓰는 작가 입니다!^^

Falstaff 2021-11-24 12:29   좋아요 4 | URL
에세이도 잘 쓰는군요!
그래도 전 앨리 스미스의 발칙한 상상력이 참 좋습니다. 이 책도 스토리에 집중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물론 비영어권 독자를 위해서요. ^^

Jeremy 2021-11-24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Autumn, Winter, 그리고 Spring 까지는 읽었는데
겨울은 별루였고 Shakespeare 의 Pericles 와 병렬해서
UK 의 socio-political tension 과 변화를 두 남녀 주인공을 통해
그려낸 ˝봄˝ 은 ˝가을˝ 보다 좋았습니다.

전 ˝Autumn˝ 의 글 전반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내용,
그 자체보다 더 좋아서 Kindle 로 읽었다가 종이책도 샀답니다.
˝Summer˝ 는 ˝Spring˝ 보다 평이 더 좋아서 Amazon sale 노리고 있습니다.
이 Seasonal Quartet 은 끝으로 갈수록
Ali Smith 의 어조와 매력이 더 분명해지나 봅니다.
겨울은 별로 추천하지 않지만.

아무리 부커상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아도
부커상에 4 번이나 Finalist 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통 내공이 아니고 글발 역시 장난이 아니라는 증명이니까요.

Falstaff 2021-11-24 14:40   좋아요 1 | URL
아무리 앨리 스미스라고 해도 쓴 작품 마다 다 대박일 수는 없겠지요.
저는 <데어 벗 포 더>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연이어 매우 재미있게 읽다가 이번에 읽은 <가을>, 기대가 컸는지 좀 안 맞은 경우입니다.
여전히 주목하고 있는 작가이고요.

독서괭 2021-11-24 1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계절 4부작이라니, 참 끌리는데 재미가 없군요.. 저도 외국어로 쓰인 글이 말놀이를 많이 하면 읽기가 힘들던데요. 읽을 책 많으니 일단 뒤로뒤로 미뤄야겠어요.ㅎㅎ

Falstaff 2021-11-24 14:41   좋아요 2 | URL
노잼이긴 합니다만, 얘기하신 말놀이, 그것만 좀 적었어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
 
캐나다
리처드 포드 지음, 곽영미 옮김 / 학고재 / 201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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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포드를 읽으려면, <스포츠라이터>, <독립기념일>, <캐나다> 순서로 읽는 것이 좋을 듯싶다. 지금은 절판된 프레스21에서 찍은 <잃어버린 나날들>은 원 제목이 “Independence Day”로 <독립기념일>과 같은 책을 번역한 것이다. 《여자에게 약한 남자》는 단편집이다. <캐나다>는 1944년생인 포드가 67세에 거의 대부분을 쓰고, 68세인 2012년에 미국이 아니라 제목과 같은 나라,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했다. 단편집은 별개로 하고, 위에 거론한 세 편의 장편소설은 하나같이 결혼과 가정이 붕괴한 이후 구성원들의 소외, 고독, 그리고 상실감을 다루고 있다. 앞의 두 작품(특히 <독립기념일>)은 이혼한 두 남자, 소설가 출신의 스포츠잡지 기자와 부동산거래업자의 상태를 철저하게 파헤치는 훌륭한 심리소설이지만, <캐나다>는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쌍둥이 남매, 이 가운데서 남자동생 델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론에 가까울 수 있다.
  소설은 아주 이색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말할 것인데 이 “강도 사건이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사건이 결국에는 나와 누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이 이야기를 빼면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통상적인 소설에서 보면 아버지가 악당이고, 어머니는 피해자인 경우가 보통인데, 부부가 공동으로 강도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도 의외고, 더구나 소설 주인공이 처음부터 자신의 부모가 벌인 강도행각을 깔아놓고 시작하는 건 여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베브 파슨스. 1923년 앨라배마의 산골 머랭고 카운티에서 목재 견적인의 수다스러운 외아들로 출생한 출중한 외모와 180센티미터의 늘씬한 체격의 소유자. 1920년대생 미국인에게도 180cm는 매우 큰 키였단다(베브보다 10년 젊은 내 아버지도 180이었으니 당시 식민지 조선에선 전봇대라 할 만했겠지?). 193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데모폴리스에서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를 꿈꾸었지만 신체검사, 적성검사 결과 전투기 대신 ‘미첼’이란 이름의 중형 폭격기 B-25를 타고 필리핀, 오사카 상공에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해 수천 명의 인명을 살상한 공으로 훈장까지 받은 예비역 대위였을 뻔했다가 모종의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일계급 강등당한 예비역 중위였다. 천성이 수다쟁이고 편견이 없으며, 친절하고 자상한 성격에 늘 웃는 얼굴이었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수많은 생명을 앗았으니 이젠 국가가 자신에게 이에 합당한 보상을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는 의식의 저변에 깔려있었다. 여기다가 매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 같은 낙천주의가 결과적으로 파멸의 깊은 우물 속으로 헛발을 딛게 만들었다.
  원래 이름이 니바 캄피친스키였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에 의하여 니바 캠퍼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5년 3월에 디트로이트 근처에서 열린 귀환공군 환영파티에서 키 크고 잘 생긴 남부 출신의 대위를 만나 분위기에 휩쓸려 한 번 자빠졌더니 덜컥 쌍둥이를 임신해서 결혼하는 바람에 본격적으로 신세 망쳤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부모 레나타와 보이테크 캄피친스키는 대학졸업장이 있는 딸이 변호사나 회계사, 적어도 교수 사모님의 지위에 오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배신감이 컸고, 이에따라 얼마나 니바의 반발심이 컸던지 결혼 15년이 되도록 부모자식 간에 전화 한 통이 없었다. 하필이면 군인하고 결혼하는 바람에 자주 이사를 다녀 주로 군 주둔지 근방의 중고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날개 꺾인 작가지망생. 얼굴은 예쁘장하지만 왜소한 덩치와 근시, 독립적인 성격으로 밀드레드 렘링거 여사를 제외하고는 친구는커녕 말 섞는 이도 드물다. 즉 외모와 성격, 지적 능력 같은 것이 남편과 완벽하게 반대편이다. 결혼을 하고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전에는 자신과 매사에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 그렇게도 매력적이었는데, 이젠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이질감을 초래하는지를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악착같이 성사시킨 결혼을 깨기가 쉽지 않아 오늘날까지 이럭저럭 살아온 것.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한꺼번에 딸 아들 쌍둥이까지 생겼으니.

 

  전쟁이 끝나 아버지 베브 파슨스 대위는 이제 더 이상 폭격할 일이 없을 것이라 예단하고 주특기를 병참으로 바꾸어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졌다. 다시 참전하기 싫어 국내 주둔을 결정했다는 건 결국 진급을 포기하고 대위로 제대하여 얼마 되지 않는 연금으로 남은 생을 살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병참부대. 이게 전 세계 모든 부대를 막론하고 또 쏠쏠한 거거든. 병참부대의 유구한 전통으로, 몬태나 그레이트폴스 인근 목장에서 암소를 훔쳐 밀도살한 인디언에게 통갈비를 야매로 구입해 부대 장교식당에 넘기는 거였다. 그토록 오래 잠잠했다가 갑자기 무슨 정보가 들어갔는지 부대 감찰반에서 조사를 나와 장물 취득 범죄가 들통나는 바람에 병참대위 파슨스는 일 계급 강등당해 중위로 떨어졌고, 이것이 결정적 이유가 되어 20년 가까이 복무한 공군 경력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천성이 낙천적인 베브는 긍정적인 성격과 특유의 친화력을 자신하여 작은 읍 규모의 공군주둔지 그레이트폴스에서 GM 자동차 딜러를 시작해, 시작하자마자 중고차 매매로 직업을 바꾼다. 중고차 매매를 했지만 별로 소득이 없어 다시 목장, 농장 중개업으로 전직한다. 이 세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베브는 눈부신 옷차림과 외모 꾸미기에 여념이 없어, 겉으로 보면 세상에 이런 온유한 사람이 없었으니, 대강 짐작하시겠지, 어떤 부류인지.
  애초부터 목장, 농장 중개업은 말이 그러했다는 것이고, 올즈모빌, 닷지, 중고차, 오토바이 판매가 생각처럼 되지 않았을 때부터 생각해놓은 사업이 병참장교 시절 재미가 쏠쏠했던 야매 소고기 중개업.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전쟁영웅으로 이 정도의 웬만한 비리는 나중에 발각이 나더라도 국가가 당연히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환상도 있었다. 그래 사업을 시작했는데, 인디언의 고기를 풀 곳이 다시 군대일 수는 없어서, 그레이트 노던 철도회사 소속 열차의 식당칸을 담당하는 흑인 스펜서 딕시와 접촉을 했다. 문제는 딕시는 인디언을 무서워했고, 인디언은 흑인 딕시를 믿지 못했는데도, 인디언들이 고기를 중간상인 베브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직접 딕시에게 전달해야 했다는 점. 하여튼 어느 날, 딕시는 소 몇 마리 분의 고기를 받고, 고기가 상해 미주리 강에다 버렸으며 돈을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그러더니 다음 날, 시카고로 날라버렸다. 이제 인디언은 베브와 베브 가족의 목숨을 위협하며 한 시간에 차를 몰고 두 번씩 파슨스 댁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전화벨이 울렸다.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베브는 은행 돈은 정부 돈이며, 정부를 위해 베브는 그동안 수없이 희생하고 수천 명을 죽인 애국자라서 정부 돈을 일부 사취한다 해도 그리 큰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는 외골수로 빠져버린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나 델과 쌍둥이 누나 버너 파슨스가 열다섯 살일 때, 아버지는 사우스다코타 주로 건너가 아침에 은행 문을 열자마자 농업은행에 진입해 권총으로 위협해 꼴랑 2천5백 달러를 강도했으며, 어머니는 강도가 끝난 후 남편을 집에까지 태워 와, 졸지에 강력범죄자가 되었는데, 주인공 델과 델의 쌍둥이 버너는 이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었다.
  은행 강도의 딸과 아들. 이 꼬리표를 달고 새털처럼 많은 날들, 어머니 니바의 말처럼 남아 있는 수천 날을 살아가야 했으니,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이 아이들은 도대체 어이할꼬.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거.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나도 좀 살았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 예순 일곱 살 작가가 쓴 <캐나다>를 읽고도, 그래도 모르겠다. 하긴 알게 되면, 그걸 아는 순간 숨이 넘어갈 거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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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1-23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정교열 때문에 별점 하나 뺐음!

coolcat329 2021-11-23 09: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잊지못할 첫문장이네요!
인간은 평생 방황하다 끝내 삶의 의미 모르고 죽거나 운이 좋으면 이반 일리치처럼 죽기 직전 알고 가는거 같아요. ㅎ

Falstaff 2021-11-23 09:37   좋아요 1 | URL
모르고 죽는 게 속은 편할 거 같아요. ㅋㅋㅋ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만, <독립기념일>을 워낙 재미나게 읽어서 말입죠, ^^;;;

독서괭 2021-11-23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첨 들어보는 작가인데 재밌어 보입니다. 교정교열만 아니면 별 다섯이란 말씀이죠? <독립기념일>이 더 재밌고요? 메모메모..

Falstaff 2021-11-23 12:22   좋아요 0 | URL
ㅎㅎ 맘 편하게 걍 <독립기념일>로 가셔요!

다락방 2021-11-23 13:55   좋아요 0 | URL
오오 독립기념일 문동세계문학으로 있네요? 1,2권으로.. 재미있을 것 같아요!

Falstaff 2021-11-23 13:59   좋아요 0 | URL
옙. 문둥이네 집에서 찍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톰 울프 <허영의 불꽃>과 더불어 잘 쓴 미국식 대중소설! 전 무지 괜찮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