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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리처드 포드 지음, 곽영미 옮김 / 학고재 / 2016년 1월
평점 :
리처드 포드를 읽으려면, <스포츠라이터>, <독립기념일>, <캐나다> 순서로 읽는 것이 좋을 듯싶다. 지금은 절판된 프레스21에서 찍은 <잃어버린 나날들>은 원 제목이 “Independence Day”로 <독립기념일>과 같은 책을 번역한 것이다. 《여자에게 약한 남자》는 단편집이다. <캐나다>는 1944년생인 포드가 67세에 거의 대부분을 쓰고, 68세인 2012년에 미국이 아니라 제목과 같은 나라,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했다. 단편집은 별개로 하고, 위에 거론한 세 편의 장편소설은 하나같이 결혼과 가정이 붕괴한 이후 구성원들의 소외, 고독, 그리고 상실감을 다루고 있다. 앞의 두 작품(특히 <독립기념일>)은 이혼한 두 남자, 소설가 출신의 스포츠잡지 기자와 부동산거래업자의 상태를 철저하게 파헤치는 훌륭한 심리소설이지만, <캐나다>는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쌍둥이 남매, 이 가운데서 남자동생 델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론에 가까울 수 있다.
소설은 아주 이색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말할 것인데 이 “강도 사건이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사건이 결국에는 나와 누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이 이야기를 빼면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통상적인 소설에서 보면 아버지가 악당이고, 어머니는 피해자인 경우가 보통인데, 부부가 공동으로 강도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도 의외고, 더구나 소설 주인공이 처음부터 자신의 부모가 벌인 강도행각을 깔아놓고 시작하는 건 여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베브 파슨스. 1923년 앨라배마의 산골 머랭고 카운티에서 목재 견적인의 수다스러운 외아들로 출생한 출중한 외모와 180센티미터의 늘씬한 체격의 소유자. 1920년대생 미국인에게도 180cm는 매우 큰 키였단다(베브보다 10년 젊은 내 아버지도 180이었으니 당시 식민지 조선에선 전봇대라 할 만했겠지?). 193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데모폴리스에서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를 꿈꾸었지만 신체검사, 적성검사 결과 전투기 대신 ‘미첼’이란 이름의 중형 폭격기 B-25를 타고 필리핀, 오사카 상공에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해 수천 명의 인명을 살상한 공으로 훈장까지 받은 예비역 대위였을 뻔했다가 모종의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일계급 강등당한 예비역 중위였다. 천성이 수다쟁이고 편견이 없으며, 친절하고 자상한 성격에 늘 웃는 얼굴이었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수많은 생명을 앗았으니 이젠 국가가 자신에게 이에 합당한 보상을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는 의식의 저변에 깔려있었다. 여기다가 매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 같은 낙천주의가 결과적으로 파멸의 깊은 우물 속으로 헛발을 딛게 만들었다.
원래 이름이 니바 캄피친스키였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에 의하여 니바 캠퍼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5년 3월에 디트로이트 근처에서 열린 귀환공군 환영파티에서 키 크고 잘 생긴 남부 출신의 대위를 만나 분위기에 휩쓸려 한 번 자빠졌더니 덜컥 쌍둥이를 임신해서 결혼하는 바람에 본격적으로 신세 망쳤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부모 레나타와 보이테크 캄피친스키는 대학졸업장이 있는 딸이 변호사나 회계사, 적어도 교수 사모님의 지위에 오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배신감이 컸고, 이에따라 얼마나 니바의 반발심이 컸던지 결혼 15년이 되도록 부모자식 간에 전화 한 통이 없었다. 하필이면 군인하고 결혼하는 바람에 자주 이사를 다녀 주로 군 주둔지 근방의 중고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날개 꺾인 작가지망생. 얼굴은 예쁘장하지만 왜소한 덩치와 근시, 독립적인 성격으로 밀드레드 렘링거 여사를 제외하고는 친구는커녕 말 섞는 이도 드물다. 즉 외모와 성격, 지적 능력 같은 것이 남편과 완벽하게 반대편이다. 결혼을 하고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전에는 자신과 매사에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 그렇게도 매력적이었는데, 이젠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이질감을 초래하는지를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악착같이 성사시킨 결혼을 깨기가 쉽지 않아 오늘날까지 이럭저럭 살아온 것.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한꺼번에 딸 아들 쌍둥이까지 생겼으니.
전쟁이 끝나 아버지 베브 파슨스 대위는 이제 더 이상 폭격할 일이 없을 것이라 예단하고 주특기를 병참으로 바꾸어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졌다. 다시 참전하기 싫어 국내 주둔을 결정했다는 건 결국 진급을 포기하고 대위로 제대하여 얼마 되지 않는 연금으로 남은 생을 살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병참부대. 이게 전 세계 모든 부대를 막론하고 또 쏠쏠한 거거든. 병참부대의 유구한 전통으로, 몬태나 그레이트폴스 인근 목장에서 암소를 훔쳐 밀도살한 인디언에게 통갈비를 야매로 구입해 부대 장교식당에 넘기는 거였다. 그토록 오래 잠잠했다가 갑자기 무슨 정보가 들어갔는지 부대 감찰반에서 조사를 나와 장물 취득 범죄가 들통나는 바람에 병참대위 파슨스는 일 계급 강등당해 중위로 떨어졌고, 이것이 결정적 이유가 되어 20년 가까이 복무한 공군 경력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천성이 낙천적인 베브는 긍정적인 성격과 특유의 친화력을 자신하여 작은 읍 규모의 공군주둔지 그레이트폴스에서 GM 자동차 딜러를 시작해, 시작하자마자 중고차 매매로 직업을 바꾼다. 중고차 매매를 했지만 별로 소득이 없어 다시 목장, 농장 중개업으로 전직한다. 이 세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베브는 눈부신 옷차림과 외모 꾸미기에 여념이 없어, 겉으로 보면 세상에 이런 온유한 사람이 없었으니, 대강 짐작하시겠지, 어떤 부류인지.
애초부터 목장, 농장 중개업은 말이 그러했다는 것이고, 올즈모빌, 닷지, 중고차, 오토바이 판매가 생각처럼 되지 않았을 때부터 생각해놓은 사업이 병참장교 시절 재미가 쏠쏠했던 야매 소고기 중개업.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전쟁영웅으로 이 정도의 웬만한 비리는 나중에 발각이 나더라도 국가가 당연히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환상도 있었다. 그래 사업을 시작했는데, 인디언의 고기를 풀 곳이 다시 군대일 수는 없어서, 그레이트 노던 철도회사 소속 열차의 식당칸을 담당하는 흑인 스펜서 딕시와 접촉을 했다. 문제는 딕시는 인디언을 무서워했고, 인디언은 흑인 딕시를 믿지 못했는데도, 인디언들이 고기를 중간상인 베브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직접 딕시에게 전달해야 했다는 점. 하여튼 어느 날, 딕시는 소 몇 마리 분의 고기를 받고, 고기가 상해 미주리 강에다 버렸으며 돈을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그러더니 다음 날, 시카고로 날라버렸다. 이제 인디언은 베브와 베브 가족의 목숨을 위협하며 한 시간에 차를 몰고 두 번씩 파슨스 댁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전화벨이 울렸다.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베브는 은행 돈은 정부 돈이며, 정부를 위해 베브는 그동안 수없이 희생하고 수천 명을 죽인 애국자라서 정부 돈을 일부 사취한다 해도 그리 큰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는 외골수로 빠져버린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나 델과 쌍둥이 누나 버너 파슨스가 열다섯 살일 때, 아버지는 사우스다코타 주로 건너가 아침에 은행 문을 열자마자 농업은행에 진입해 권총으로 위협해 꼴랑 2천5백 달러를 강도했으며, 어머니는 강도가 끝난 후 남편을 집에까지 태워 와, 졸지에 강력범죄자가 되었는데, 주인공 델과 델의 쌍둥이 버너는 이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었다.
은행 강도의 딸과 아들. 이 꼬리표를 달고 새털처럼 많은 날들, 어머니 니바의 말처럼 남아 있는 수천 날을 살아가야 했으니,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이 아이들은 도대체 어이할꼬.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거.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나도 좀 살았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 예순 일곱 살 작가가 쓴 <캐나다>를 읽고도, 그래도 모르겠다. 하긴 알게 되면, 그걸 아는 순간 숨이 넘어갈 거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