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모신 하미드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수첩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펀자브와 카슈미르 출신의 후예인 모신 하미드는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대학교수의 아들로 1971년에 태어났다. <서쪽에서>의 주인공 사이드도 정확하게 어디라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슬람을 믿는 나라의 한 도시에서 대학교수 아버지와 고등학교 교사 어머니의 늦둥이로 태어난다. 얼마나 늦둥이냐 하면,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혹시 임신이 아닐까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의견을 냈을 때, 아이 없는 중년 부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의심을 했을 정도였다. 작가 모신 하미드 말고, <서쪽으로>의 주인공 사이드가 말이지.
  하미드는 아버지가 박사학위 취득하기 위해 스탠퍼드에서 공부할 때 따라가 세 살부터 아홉 살까지 살았다. 한참 어학능력이 발달할 때였으니 영어 하나는 죽이게 했겠다. 이후 다시 파키스탄 라호르로 돌아가 아빠는 대학교수를 하고, 아들은 파키스탄의 미국인 학교에 다닌다. 열여덟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93년, 스물세 살에 127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 <파키스탄에서의 통합자원계획>을 제출해 프린스턴을 최우등으로 졸업한다. 이어서 내친김에 하버드 로스쿨까지 마친다. 근데 이상하지? 소설가가 이런 논문을 써서 다른 곳도 아니고 프린스턴에서 최우등? 그렇다. 모신 하미드의 직업이 작가이자 뉴욕에서 활동하는 브랜드 컨설턴트이기도 하다.
  프린스턴에서 전공은 경영이었지만 최우등 논문을 쓰는 틈틈이 조이스 캐롤 오츠와 토니 모리슨을 사사해, 컨설턴트로 돈벌이를 하면서 2000년에 서른 살 되는 기념으로 소설 <나방연기 Moth Smoke>를 써 데뷔하기에 이른다. 이래봬도 모신 하미드가 프린스턴 출신이잖은가. 개츠비의 아빠 핏제럴드하고 동문이다. 2007년엔 두 번째 소설, 지극히 짧은 장편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발표해 우리나라의 민음사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읽어볼 기회를 주었다. 와우, 프린스턴 출신으로 2001년 당시 8만 달러 초임을 받기로 하고 기업평가 컨설턴트 회사에 입사해 퍼스트 클래스에 올라 필리핀으로 업무출장을 다니며, 같은 프린스턴 출신의 에리카와 사랑에 빠지는 파키스탄 젊은이 찬게즈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하미드의 책을 수배하다가 이번에 골라 읽었다.

 

  <…… 근본주의자>에서는 느긋하게 누워 필리핀을 향해 가는 도중 911 테러가 터져 뉴욕의 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서쪽으로>는 이슬람 지역의 특정, 그러나 익명의 국가에서 내전이 발생해 원리주의를 요구하고 처형을 밥 먹듯이 자행하는 반군의 폭정을 견디지 못해 조국을 탈출하는 주인공 커플 사이드와 나디아의 이야기다. 대학까지 졸업해 직장을 다니며 야간 강좌를 듣는 두 주인공. 이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는 여자들의 옷차림이나 머리모양을 완전히 자유스럽게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하고 다니던 시절이었지만 나디아는 고전적인 검정색 옷으로 몸을 가리고 다녀, 사이드가 첫눈에 반했지만 함부로 가까이 다가가기는 힘들었다. 마음을 크게 먹고 “커피 한 잔 하실까요?” 라고 말을 붙였으나 결국엔 “물론 학생식당에서 말입니다.”라고 토를 달아야 했다. 나디아가 한 번 쓱 훑어보더니, “아니요.”라고 단칼에 거절해버린다. 이게 처음 만남이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미혼여성이라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럽게, 학교 졸업과 동시에 보험회사에 취직도 했으니 부모에게 집을 나가 독립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정말로 나와 혼자 살고 있는 신여성이다. 나이든 과부가 주인인 삼층집의 삼층에 살면서 스스로를 전사한 육군 장교의 아내로 지금은 독신과부라고 소개해 그나마 방을 얻은 거였다. 언더그라운드 콘서트, 라기보다 그냥 발표회 수준의 공연에서 만난 뮤지션과 한동안 연애한 경험이 있으며 뮤지션의 집에 들른 그날 밤에 바로 처녀성의 짐을 내려놓기도 했다. 사귀다 보니 남자가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오해해 이별을 선언했는데, 남자가 두 달 뒤 폭탄에 터져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있었다는 건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이별 선언을 하던 밤, 뮤지션은 뮤지션답게 이별을 감수했으며, ‘마지막 한 번’을 요구해 받아들였는데, 마지막 한 번이 놀랍지도 않게 놀랄 만큼 좋았었다고 한다.
  반면에 사이드는 둘이 서로 정신적 사랑을 확인하고, 이어서 몸의 사랑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이제 딱 하나 남았는데, 바로 그 순간, 결혼하기 전까지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라고 주장하면서, 한껏 달아오른 몸을 스스로 식히는 고문을 감수한다. 한 번도 아니고 책이 끝날 때까지. 이미 “기쁨을 아는 몸”(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중 <우국>. 1983. 주우. 김후란 역)인 나디아는 속으로,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에 동의하면서도 계속 서로의 몸을 만진다. 물론 이미 죽은 뮤지션과의 경험은 결코 말하지 않은 채.

 

  그러나 도시는 반군이 조금씩 점령하기 시작했고, 사이드와 나디아의 집이 있는 지역이 가장 뜨거운 전선이 되는 바람에 위험은 더욱 심해진다. 이어서 불행하게도, 잘못 날아온 빗맞은 대구경 탄환이 차 속에 떨어진 귀걸이 한 쪽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수그린 사이드 어머니의 머리통 삼분의 일을 날려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완전히 반군이 점령해버린다. 단지 자신과 다른 종파가 쓰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참수를 당하고 머리 없는 시신은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리며, 상습적인 야만이 판을 치는 도시에서 더 살 수 없을 지경이 된 참담함. 이때 문을 열어주는 에이전트가 등장한다. 검은 문. 완벽하게 어두운 검은 문. 도시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문. 사이드의 아버지는 아내가 잠든 땅을 떠나지 않겠다고 끝까지 주장해, 서로 부부의 관계가 아닌 사이드와 나디아만 많은 돈을 에이전트에게 넘기고 문을 통과한다.
  어둡고 긴 터널을 뚫고 나오니 그곳은, 그리스 미코노스 섬의 난민수용소. 여기서 ‘문’은 명확하게 우화적 표현이다. 어떤 수단을 썼든지 하여튼 도시와 나라를 빠져나와 지중해의 그리스 섬까지 도착했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된다. 난민수용소도 결국 사람 사는 곳. 미코노스의 아름다운 구시가지에 사는 선한 그리스인 에이전트가 있어, 이들은 그곳을 떠나 런던으로 옮기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가 정착한다. 이제 난민은 이슬람 지역에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에서 온 갖가지 민족들, 라오스와 미얀마의 소수민족, 미국으로 향하던 라틴아메리카 출신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디아스포라로 확장한다.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여튼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이들은 생명의 이어짐이라는 인간 최고의 숙명을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생활을 이어가고, 생식을 하고, 늙어서야 죽는다. 이게 합당한 일이라서.
  마지막은 샌프란시스코 정착 후 50년이 지난 시점. 시기로 따지면 2050년 중반 이후다. 그러나 ‘문’이 다른 세계로 곧바로 가는 플루 가루(<해리 포터> 시리즈 참조)로 작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웬만한 산술적 계산을 의미가 없어진다. 그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이라고 여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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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1-25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인상 깊게 읽었어요. 소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11-25 08:47   좋아요 2 | URL
옙. 저도 <...근본주의자>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을 골랐답니다. ^^

다락방 2021-11-25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좋았고,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도 나쁘지 않게 읽었는데요, 이 책의 소식은 모르고 있었네요. 둘다 좋게 읽었지만 챙겨볼 작가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나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 작가의 다른 책 소식을 알게된 이상 안읽을 수 없지요. 사실 이 감상문 보니 음 ‘너무 남자가 썼다‘라는 걸 아마도 책을 읽다가 느끼게 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지만, 그러나 저는 모신 하미드의 책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줄거리 보니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 좋아요. 뭔가 읽을 책 생기는 거. 물론 그런 책 넘나 많지만... (시무룩)

Falstaff 2021-11-25 10:41   좋아요 2 | URL
아, 저도 <..부자되는 법> 딱 꼽고 있습니다!
남자가 너무 쓰는 게 어디 있어요. 여자도 마찬가지지요. 다 가서 마지막에 에이, 이제 그만, 이것보다 열 받는 일이 어디 있다고. ㅋㅋㅋㅋ 안 그런 척했지만 패버리고 싶었을 지도 모르잖아요.
하여튼 흥미있는 작가입니다.

공쟝쟝 2021-11-25 1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가 문외한인 부분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네요. 주저하는… 을 먼저 읽어봐야겠지만 언제 읽을 것인가.
퐐님. 어제 이리가레로 밤늦게까지 너무 두뇌 혹사시켜가지도 오늘 나르치스로 하루 시작했는 데…. 수도사들 내용. 어쩜…. 벌써 맘에 쏙 들어요 ㅋㅋ 저의 골드문트는 아직 소년이고 이제막 밤나무와 친구가 된 참입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1-11-25 11:28   좋아요 2 | URL
앗 뭐야 시작했어요? 😱 나도 할래!!

공쟝쟝 2021-11-25 11:32   좋아요 2 | URL
진짜 이제 막 친구가 됐어요 ㅋㅋㅋ 시작하자 ㅋㅋㅋ 근데 난 나르치스도 좋아용 ㅋㅋㅋ 껄껄 ㅋㅋㅋ

Falstaff 2021-11-25 11:5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드디어 첫 장을 넘기셨구먼요! 축하합니다.
하여튼 내년 초부터 문패 바꿔 달 겁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1-25 11: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잠자냥 님은 모신 하미드를 안 읽으셨을 것 같은 느낌이...

Falstaff 2021-11-25 11:58   좋아요 2 | URL
그죠, 그죠?

잠자냥 2021-11-25 11:58   좋아요 2 | URL
어마나 우리 다부장 님 돗자리 까셔도 될 거 같아용!
어쩜 그리 저를 잘 아세요! ㅋㅋㅋ 1개도 안 읽었습니다.
제가 또 은근 작품 편식이 심해서....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1-25 12:02   좋아요 3 | URL
제가 또 감히 짐작해보자면 만약 잠자냥 님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으신다면 별 넷, 아시아 부자 읽으신다면 별 둘에서 셋 일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1-25 12:1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아니 또 이렇게 낚으시네. 이분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