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을 ㅣ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평점 :
알았어, 알았어. 언어를 가지고 노는 천재적 재능인 건 알아먹겠는데, 불행하게도, 역자 김재성이 친절한 번역을 해주었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하게 네 번째 읽은 앨리 스미스, <가을>은 노잼이었으며, 스미스가 쓴 ‘사계절 4부작’은 이 책 딱 하나만 읽고 그만 두겠다, 라고 결정했다.
유년시대라고 하지만 소학교 시절이니 사실 소년시대에 주인공 엘리자베스네 옆집으로 이사 온, 팔순에 가까운 노인이며, 작사를 한다니까 시인이기도 하고, 그것보다는 작곡가라고 해야 더 어울릴 대니얼 글럭 씨. 엘리자베스, ‘자’에 z가 아니라 s를 쓰는 꼬마가 글럭 씨와 우정을 쌓았는데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특히 예술적 감수성이 발달했는지 미술평론을 공부하게 됐고, 근 이십 년 만에 글럭 씨가 몰팅스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벌써 백한 살이 된 그의 요양실에 찾아가 책을 읽어주며 옛 생각을 하는 내용이다.
이 양반이 한 세기를 넘게 살았으니 경험한 것만 해도 얼마나 많겠는가. 서른두 살이 된 엘리자베스가 다시 각색한 글럭 씨의 과거에, 그보다 스무 살이 적은 여성, 영국 유일의 팝 아트 화가 폴린 보티가 있었으니, 글럭 씨가 평생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연모하다 죽어가는 운명이었다. 엘리자베스의 각색에 의하면. 그러나 글럭 씨가 폴린 보티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클라이브와 결혼하기 불과 열흘 전이었으니, 이후 글럭 씨의 가슴은 나무좀에 시달려 구멍이 숭숭 뚫린 나무 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무 얘기가 나온 김에, 다시 첫 장면으로 올라오면, 나는 이 책도 이이의 전작 <호텔 월드>에서처럼 귀신이 등장하나보다 싶었다. 앨리 스미스의 상상력은 도무지 멈추지 못해 별의 별 짓을 다 하니까, 귀신이나 사후 세계가 나온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말이지.
노인이 조수를 타고 해안으로 떠밀려온다. 귀에도 모래가 가득하고 무엇보다 입에도 모래투성이라 뻑뻑하기 이를 데 없어 퉤퉤 뱉어낸다. 죽음이 인간을 증류시키리라고, 썩어문드러지는 부패를 벗겨내 모든 것을 구름처럼 가볍게 만들어 주리라고 상상했지만, 정작 죽어보니 굉장히 밝고 지독하게 춥다. 태양은 전혀 온기가 없고 나는 알몸 상태. 아오, 죽음아. 나를 받아주어 고맙다. 근데 이미 죽었는데 왜 춥지? 하다가, 노인은 일어서 해변을 떠나 숲으로 들어가고, 숲에서 다시 젊어지는 듯, 체모가 검고 굵어지는 걸 보니 분명 천국은 맞는데, 몸에서 나뭇잎과 풀이 돋아 나무처럼 변신하는 거였다. 이러면서.
후렴: 한 손에 세계를 몇 개나 담을 수 있을까 / 모래 쥔 한 손에.
음. 후렴이라고? 사람이 숲 속에 들어가 나무가 됐다고? 오비디우스의 <변신>. 실제로 죽음의 근처에 늘 있는 수면증가기를 맞은 대니얼 글럭 씨의 침상 옆에서 엘리자베스는 환자에게 <변신>을 읽어주기도 한다. 그러면 위의 후렴은 그리스 희곡 특유의 코러스가 노래하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렇지? 상상력만 보면 정말 대단하지? 글쎄 앨리 스미스를 도무지 싫어할 수 없다니까. 근데 왜 이 책에서 우체국에서 여권국 민원을 대행해주며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관료적 우체국 직원들이 민원인을 애먹이는 에피소드가 적지 않은 분량으로 두 번씩이나 나오는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영어의 라임 놀이는 또 뭐고. 이 정도면 애초에 영어를 사용하는 독자들만을 위해 작품을 썼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대니얼 글럭 씨에게 늙은 호모라며 엘리자베스에게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주문했던 엄마가, 이십 년 후에 이웃 조이 아줌마의 무릎 위에 올라 소파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다가 딸에게 직빵으로 들키는 일은 완전 앨리 스미스 스타일이어서 귀엽기라도 하지만.
하여튼 난 과한 언어유희, 정확하게 '우리말로 쓴 영어유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신선한 아이디어로 산뜻하게 작품을 썼더라도 좋은 마음으로 읽기는 쉽지 않았다. 영어가 유창하여 원서로 읽었다면 흥분했을 지도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