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를 알기 위해서는 굳이 구글링을 할 필요가 없다. <출신>이라는, 어느 책에서도 보지 못한 가장 상세한 자기소개서가 있음에야. <출신>을 통해 소개한 사샤 스타니시치의 가계를 한 번 보자.

 

  할아버지 페로 스타니시치. 용을 퇴치한 전설의 용사 성 게오르기우스를 숭배하는 세르비아의 산골 마을 출신으로 마음씨 좋은 공산주의자였다. 1986년에 비셰그라드의 집에서 TV 앞에 앉은 채로 운명한다. 할머니 크리스티나 역시 세르비아 출신으로 책이 끝날 때까지 거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 할머니에겐 2009년이 생애 마지막으로 보낸 좋은 해로 손자 사샤와 함께 페로 할아버지의 고향인 오스코루샤 마을에 들러 그곳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남편 페로의 산소에 헌화한다. 이후 치매기가 조금씩 도져 2016년부터 치매 투병을 시작해, 책을 처음 시작하는 2018년 3월 7일에는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비셰그라드의 공동주택에 홀로 거주하는 여든일곱 살 노인인 동시에 열한 살 소녀이기도 하다.
  보스니아 출신인 외할머니 네나 메즈레마는 콩알을 카펫에 뿌려 작가의 미래를 예언해주는 능력이 있어 사샤로 하여금 콩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만들었다. 외할아버지는 낚시광이며 무슬림이니, 어머니는 보스니아-무슬림이다.
  그러니까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무슬림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 사샤의 혈통 말고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마케도니아, 터키, 그리스, 이란,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까지 온갖 문화권이 합해진 멜팅 폿 melting-pot, 용광로와 비슷한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야말로 다민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붉은 별이라는 의미의 베오그라드 연고 축구팀인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열성 팬이었다. 지금은 유로파 컵으로 명칭을 바꾼 유러피언 챔피언스 클럽 컵 대회가 1991년에 열렸는데, 8강전에서 독일의 뒤나모 드레스덴을 꺾고(홈 1차전 3:0, 방문 2차전 몰수 승), 4월 24일에 있었던 4강전 2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붙었을 때(방문 1차전 2:1, 홈 2차전 2:2) 아버지와 한 약속대로 베오그라드까지 가서 직접 관전을 한 적이 있다. 이때까지도 유고슬라비아라는 다민족 국가의 정체성으로 모든 관중들이 흰색과 빨간색 줄무늬 머플러를 흔들며 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상대팀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폭죽을 터뜨리는 일체감을 보여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해 유러피언 챔피언스 클럽 컵 대회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으나 6월 27일 슬로베니아에 의하여 첫 번째 적대행위가 일어난다.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 이어서 소규모 전투 끝에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이어 보스니아 전쟁이 발발한다.
  사샤의 집안에서도 외할머니가 보스니아 출신이다. 게다가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는 낚시광 외할아버지는 무슬림이기도 하다. 그대로 비셰그라드에 앉아 있다가는 살육을 면치 못할 어머니는 비 내리는 1992년 8월 24일, 사샤와 함께 국경을 넘어 난민 신분으로 하이델베르그에 정착한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이 된 후에 가족 모두는 다시 드리나 강이 흐르는 비셰그라드로 돌아가지만 사샤 스타니시치는 이제 함부르크에 살고 독일 여권을 소지했으며, 함부르크 스포츠클럽 HSV의 팬인 동시에 세 살 먹은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이도 함부르크 출생이다.
  사샤 스타니시치가 1978년생. 열네 살까지 살았던 “드리나 강의 다리” 가까이에 있는 도시 비셰그라드의 모습을 잊지 못했을 터(이 책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의 세계적 소설가 이보 안드리치와 그의 대표작 <드리나 강의 다리>가 한 백 번쯤 나온다). 그는 비록 독일인으로 살고 있으나 잃어버린 조국,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자신의 정확한 정체성에 혼동을 느끼면서도 특히 할머니와의 유대를 결코 놓으려 하지 않는다. 나하고는 좀 다르다. 많은 사람들과 비슷하게 나도 은퇴하면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 낙엽이 잔뜩 떨어진 창경궁과 비원의 궁궐 담을 ‘호젓하게’ 걷고 싶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교통량 때문에 70년대 중반까지만 가능했던 꿈)도 있다. 그러나 갈 수 없다. 염병할 집값이 보통 올랐어야지. 절대 갈 수 없다. 그러나 독일에 살고 있는 사샤 스타니시치는 최상의 문화와 편의시설이 있는 독일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 하긴. 더 살아봐야 아는 일이지만. 그리하여 그는 소년시절의 유고슬라비아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냈던 난민시절 풍경, 2009년 마지막 좋은 시간을 보낸 할머니와의 오스코루샤의 풍경과 그곳 사람들, 이제 2018년이 되어 치매가 악화된 할머니를 결국 요양원에 보내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의 주특기라고 스스로 고백하듯, 산만하게 풀어내고 있다.

 

  산만하다고? 그렇다.
  먼저 시간이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많은 소설작품이 현재를 이야기하고, 갑자기 저 먼 과거로 돌아가 왜 현재와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는지 설명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출신>은 2018년 3월 7일 크리스티나 할머니가 3층 창문을 통해 도로에 서 있는 소녀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소녀가 크리스티나 할머니 본인일 수도 있고, 할머니의 언니인 자고르카일 수도 있고, 열한 살 시절에 함께 소년기를 보낸 동무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3월 7일은 3월 7일이지만, 1978년 3월 7일, 드리나 강이 흐르는 비셰그라드에서 태어난 자기 얘기를 좀 하다가, 또다시 2008년 3월에 독일 국적을 획득하기 위한 자필이력서를 써야 하는데, 비셰그라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슬라브 학을 전공했다고 쓰고 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는 또다시 위에서 이야기한 1991년 유러피언 챔피언스 클럽 컵 축구시합에 이어, 전쟁. 이어지는 2009년 할아버지가 태어난 오스코루샤 방문. 이어서 곳곳에 우화와 은유를 숨겨놓은 장치 속에서 이렇게 때와 장소가 섞여버리니 양심이 있는 작가라면 스스로 산만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물론 성공적으로 정리해가며 앞부분을 읽어냈다면 뒤는 속도를 낼 수 있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말이다.
  하여간 2018년에 커튼을 뜯어 빨래를 하려던 크리스티나 할머니가 높은 곳에서 낙상을 해 팔이 부러지고 치매도 심해 더 이상 가족이 관리할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해 요양원에 보내는 일이 생긴다. 그러면 사샤 스타니시치가 <출신>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벌써 끝난 상태다. 책을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그렇지 않은가. 자기 출신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작가 입장에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지만, 이젠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어디 출신이라 해야 하나. 세르비아? 보스니아? 아니면 할아버지가 태어난 오스코루샤? 그것도 아니라면 하이델베르크? 할 말 다 하고 이제 남은 것은 결론이다.

 

  출신에 대해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제 첫 장면, 크리스티나 할머니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남았다. 사샤 스타니시치는 잡지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독자의 의견을 요구한다. 즉, 열린 결말이기는 하지만 이 속에 독자의 판단을 적극적으로 포함시켜버린다. 예를 들어, 할머니를 안전한 요양원에 계속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423쪽으로, 자유를 찾아 요양원을 탈출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409쪽으로. 이런 거 많이 보셨으리라. 정말이다. 이렇게 여섯 가지의 결말을 마련해놓고, 독자의 취향대로 결론으로 향하게 해놓았다.
  독서모임이 있다면 참가자들이 서로 자기가 만든 결론을 비교해가며 어떤 것이 다른지 토의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내 의견? 방법 또는 발상이 참신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책읽기 2021-11-29 09: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작가님. 일단 찜해요.^^ 참신하나 좋지만은 않았다는 거죠. ㅋ 저는 요즘 책도 플친들 글 읽기도 만만찮네요. 삶이 산만의 극치에요^^;;; 폴스타프님 글이 딱 위에 걸려 있어 휘리릭 눈팅만 하고 물러갑니다. 굿데이~~~~^^

Falstaff 2021-11-29 09:27   좋아요 3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월요일, 즐거운 한 주 만드시기 바랍니다. ^^

파이버 2021-11-29 1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뒷장면이 게임북을 읽는 듯해 참신했습니다ㅎㅎ 산만하다는 말씀에는 100번 동의합니다

Falstaff 2021-11-29 11:11   좋아요 3 | URL
사실 저는 사샤 스타니시치를.... 다른 작가인줄 알고 얼른 읽은 거였답니다.
ㅋㅋㅋ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다락방 2021-11-29 10: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샤 스타니시치 의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도 다소 산만했는데 저는 이 산만함의 시작이 조너선 사프런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는 엄청나게~를 엄청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그 후에 군인은~을 읽었는데 형식이 닮아 있더라고요.
저는 시간이 왔다갔다 하는 것도 그렇지만 책 속에서 화자가 여러명인 것도 좋진 않더라고요.

저 이 책 읽고 리뷰까지 썼는데 폴스타프 님 리뷰 읽으면서 내용이 너무 생각 안나서 와 .. 도대체 나는 독서를 왜하는가... 하다가 마지막에 이러면 저쪽으로 가고 저러면 고기로 가라~ 하는 거 보고 살짝 기억나네요 ㅋㅋㅋㅋㅋ 그랬어요, 그랬어. 이 책은 그런 책이었어요.

Falstaff 2021-11-29 11:14   좋아요 4 | URL
저도 <엄청나게...> 재미나게 읽은 1인입니다! 별 다섯 개 줬습지요! ㅋㅋㅋ
다락방 님도 책 많이 읽으시잖아요. 그래서 그럴 겁니다. 저도 무지하게 헷갈려요. 책 읽으면 독후감 꼭 써놓는 게 다 이유가 있어서거든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11-29 13: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사놓긴 했는데...산만하다는 얘기들어서 읽기 싫었거든요. 근데 재밌다고들 하시니 기쁘네요😚

Falstaff 2021-11-29 13:54   좋아요 3 | URL
와... 읽으셔요, 읽으셔요!!!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