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리크 뷔야르는 1968년 프랑스 리옹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데, 웃긴 건 아니고 우리 동양인 인식으로 보면 약간 이상한 집안이다. 에리크가 10대에 접어든 어느 시점에 의사 아버지는 만사를 때려치우고 알프스의 벽촌으로 이사를 해버렸단다.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아 그럼 에리크는 엄마하고 같이 지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이틴 시절의 이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돌아와 통과하기 쉽지 않은 바칼로레아에 덜컥 합격해버리고 대학에서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한다. 이어 1999년에 첫 번째 책을 출간하고 시나리오, 소설 등을 쓰는 등 현재까지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데, 이 책 <그날의 비밀>로 2017년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하니 잘 나가는 작가인 건 맞는 거 같다.

  근데 다른 건 몰라도 소설에 관해서는 주로 역사를 바탕으로 전환기가 되는 시점을 다시 조명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을 다룬 <7월 14일>, 벨기에가 현 콩고 민주공화국 지역에서 자행한 악랄한 제국주의적 만행을 그린 <콩고>, 미국 백인이 인디언들을 학살한 내용의 <대지의 슬픔> 같은 것들이 있단다. 물론 뷔야르의 이런 저작들을 더 읽어볼 마음은 없지만 <그날의 비밀>을 위시한 그의 모색이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도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소설이지만 개전과 확전, 종전에 이르는 격렬한 전투 장면 같은 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140쪽의 짧은 분량을 통해 공쿠르 상을 받을 정도라면 전쟁의 단면을 직접 포착하여 날렵하게 처리하는 능숙한 외과의사의 메스 사용법을 익혀야 했을 터. 뷔야르는 첫 장면에서 독일의 경제인 스물네 명이 국회의장 헤르만 괴링의 초청으로 의장 궁전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때는 1933년 2월 20일.

  뷔야르는 스물네 명의 경제인 가운데 빌헬름 폰 오펠을 예로 들어 그가 영위하는 활동을 설명한다. 브라흐바흐 지역에서 소농으로 시작해 결혼을 통해 땅을 늘리고 자산을 축적한 가문으로 몇 대 선조 아담이 사용하고 있던 재봉틀을 대폭 개선해서 발전된 기계를 고안했고, 마침 지참금을 제법 가져온 조피 셸러와의 결혼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자전거 공장까지 지어 소위 사업다각화를 이루어 아담의 계승자인 빌헬름의 대에 와서는 종업원이 1천5백 명이 넘는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회사라는 이름의 ‘법인’은 사람보다 생명이 길어 ‘법인 오펠’은 레바논, 독일,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들, 신들이 머무는 장소라고 일컫는 부탄보다도 더 오래된 회사로 자리 잡았다.

  이런 경제인 스물네 명을 모아놓은 제3제국의 항공부 장관, 르프트바페 총사령관, 산림 및 수렵 담당 장관이자 게슈타포를 창설한 내무부 장관을 겸직하는, 그러나 무장폭동을 선동한 이력이 있고 과시적 제복 취향이며 모르핀 중독이란 세평을 듣는, 스웨덴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있고 폭력성이 강한 헤르만 괴링이,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3월에 있을 선거에서 나치당이 180석 이상을 차지한다면 앞으로 10년, 혹은 영원히 투표 행위가 없을 것이라 주장한다. 경제활동을 위해 견고하고 안정된 체제가 요구된다는 파시스트의 세계 공통의 연설을 한 후 등장하는 히틀러.

  그는 자신이 허약한 정치체제를 끝내고 공산주의의 위협을 멀리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을 박멸하겠다고 자신 있지만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 기업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상냥하고 심지어 친절하게 연설을 한 후,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는 돌아간다. 이어지는 순서는 선거를 위한 모금 시간. 이것이 경영자들이 나치와 타협한 역사상 유일한 순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업인 스물네 명이 소유한 회사는 앞으로 경영인의 이름 대신 특정한 레이블, 즉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오펠, IG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켄이라고 불리면서 오늘에 이른다. 법인은 쉽게 죽는 것이 아니라서.

  뷔야르는 이런 장면에 이어 특정한 스토리를 엮어내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에서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점령일 것인데, 그것을 위하여 영국의 핼리팩스 경과 괴링이 쇼르프하이데에서 함께 한 사냥, 오스트리아의 작은 독재자 쿠르프 폰 슈슈니크가 히틀러에게 당한 모욕 등과, 슈슈니크가 히틀러의 지시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국민투표 운운하니 침공해버린 바로 그날,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알베르 르브룅이 1938년 3월 11일에 서명한 ‘보졸레 와인의 원산지 증명 호칭에 관한 법령’ 같은 것을 아프게 꼬집어버린다.

  지금에야 정설이 됐지만, 애초에 히틀러로 하여금 2차 세계대전을 발발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이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과 체코 일부분의 흡수를 방기해, 내국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국외로 돌릴 틈새를 마련해준 일과, 독일로 하여금 소비에트의 서진西進의 경계로 삼아 군비 축적을 알고도 모른 척했던 일, 그리하여 히틀러의 허파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것을 꼽고는 한다. 그러니까 초장부터 독일과 나치의 허풍에 지레 겁을 먹은, 또는 먹은 것처럼 보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미온적인 대처, 오스트리아에서의 지배권 인정과 뮌헨 협정이란 이름의 체코 일부 수용을 인정한 순간, 거대한 전쟁이, 히틀러가 원했건 그렇게까지 크게 발전하기는 원하지 않았건 간에 터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주인공도 없고, 별 스토리도 없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예상외로 섬세한 문장이 곳곳에 박혀있으며 2차 세계대전 개전의 배경과, 그것이 나중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의 광경과 재미있게 연결되기도 한다. 공쿠르 상을 받을 만한 특색 있는 구성도 좋기는 하나,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2-13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3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3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3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탈루냐 작가 자우메 카브레의 2011년 작품. 이런 것을 우리는 ‘명작’이라 부른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타이틀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계적으로는 성가를 누릴 작품을 발굴해낼 때 더 빛이 나는 법. 더구나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카탈루냐 문학작품을 직역해낸 결과물 <나는 고백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370, 371번은 두고두고 크게 상찬할 일이 될 것이다. 카브레의 작품이 이것 말고 우리나라에선 번역이 되지 않아 이름이 낯설다. 이 책의 번역을 계기로 그의 다른 작품이 속속 번역, 출간되어 독자들이 계속 읽는 즐거움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고백한다>는 15개 언어에 통달한 인문학자이자 바르셀로나 대학의 교수인 아드리아 아르데볼 박사가 육십이 넘어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아르데볼 박사는 완만한 사형집행인인 알츠하이머의 손아귀에 들어 결코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 기록을 시작하는 바람에, 무려 14세기 말의 지로나에서 싹이 터 17~18세기의 파리를 거쳐 2차 세계대전 시절의 네덜란드, 아우슈비츠, 로마를 위시해 21세기의 유럽 전 지역을 망라하며, 무수한 인물이 등장하는 복잡한 소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14세기 말, 지로나의 엄격한 종교재판관 니콜라우 에이메리크 신부는 한 기독교인의 악의적인 중상을 믿고 아무 증거도 없이 지로나의 유대인 의사인 조제프 샤롬을 고문해 이단의 죄를 뒤집어씌운다. 샤롬을 불에 태워 죽일 오직 하나의 증거는 ‘사도신경’을 한 번 외울 동안 고문대를 돌리고, 그래도 에이메리크 신부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두 번 더 외울 동안의 고문을 통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불에 태워 죽여도 좋으니 더 이상의 고통만은 멈춰달라고 절규하는 피의자의 입에서 나온 자백이 유일하다. 지구가 편평했던 시절, 이미 화형 판결이 난 죄수의 혀를 미리 잘라, 불에 타 죽어가며 저주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신부의 명령을, 오직 하나, 사람의 고통을 더 볼 수 없는 재판관의 비서, 미켈 데 수스케다 수사가 거부함으로써, 유대인 의사 조제프 샤롬은 기독교 유럽을 향한 저주를 뿌리면서 한 줌의 재로 변한다.

  미켈 데 수스케다 수사의 앞에 무릎을 꿇고 등장하는 살트의 사팔뜨기 여인은 자신이 종교재판관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고발하지만, 수사는 감히 이를 믿을 수 없다. 여인은 수사에게 전나무와 단풍나무의 씨와 솔방울이 든 주머니를 주며 말하기를, 제가 썩은 기둥에 목을 매면 믿으시겠습니까. 자살은 죄악이라고 수사는 이를 극구 만류하나 여인은 기어코 건초다락 안의 썩은 기둥에 종교재판관의 묵주로 목을 매고 만다. 여인과 수사를 용서할 수 없게 된 종교재판관은 미켈 수사에게 여인의 자살을 방기한 책임을 물어 이미 순례자의 복장으로 방랑의 길을 나선 그를 찾아 처형하라고 판결한다. 미켈은 몇 군데 수도원을 거쳐 최후로 저 외딴 성 페레 데 부르갈 수도원에 정착하고, 마지막 수도원장이 죽은 후, 단 한 명의 수도사만 남으면 수도원을 폐쇄해야 한다는 수도원의 규약에 따라 성 페레 데 부르갈 수도원을 닫는 날, 종교재판관이 보낸 청부 살해업자 라몬 데 노야의 칼에 맞는다. 이때 그의 주머니 속에 있었던 씨앗들이 함께 묻혀 몇백 년이 흐른 후, 단단한 재질의 단풍나무와 전나무가 그의 몸을 흡수하며 대지를 굳게 딛고 서게 된다.

  몇백 년이 흐른 후의 파르다크에서 훌륭한 악기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감별하는 특별한 눈을 가진 자키암 무레다는 모레나의 뚱보 불사니 브로치아가가 고의로 숲에 불을 질러 이제 나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홧김에 그를 찌르고 북쪽으로 도주해 몇 년 만에 폐허가 된 성 페레 데 부르갈 수도원에 도착한다. 한눈에 단풍나무를 알아본 자키암은 나무를 베어 그것을 가지고 역사 이래 최고의 악기 제조 장인인 스트라디바리에게 가서 판다. 스트라디바리가 죽고 두 아들 오모보노와 프란체스코가 소유했다가 카를로 베르곤치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고 베르곤치의 막내아들인 악기 공방의 장인 조시모가 자신의 도제 청년인 로렌초에게 나무를 써서 바이올린을 제작하게 만드니 후에 ‘비알’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는 스토리오니, 정식 이름 ‘라우렌티우스 스토리오니 크레모넨시스 메 페킷 1764.’ 조시모 장인은 제자 로렌초에게 나뭇값을 받지 않는다. 대신 자기 딸과의 사랑을 끝맺을 것을 요구할 뿐. 그리하여 사랑의 포기를 대가로 한 이 바이올린은 중개상 라 리테 씨의 손에 의해 크레모나(라틴어로 ‘크레모넨시스’)를 떠나 파리로 가서 작곡가 장마리 르클레르의 수중에 넘어갔다가 그의 처남 기욤프랑수아 비알이 르클레르의 두개골을 찔러 죽여 작곡가의 피가 바이올린 케이스에 튄 상태로 또다시 몇백 년이 흐르며 소유주가 바뀌게 된다.

  둥글던 지구가 다시 편평하게 될 무렵의 네덜란드. 알페르츠 씨 가족이 평화롭게 점심을 먹으려 식탁에 모인 순간, 갑자기 들이닥친 독일군에 의하여 여태 유대인임을 숨기고 살았던 가족 모두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행 열차에 오른다. 이때 세 딸의 외할머니 네트예 데 부크의 품에 바로 이 바이올린 비알이 있었다. 아이들의 엄마이자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던 딸 베르타 알페르츠를 위해 평생 모은 돈과 자그마한 집을 팔아 산 악기. 할머니는 바이올린을 끝까지 품에서 놓지 않고 있다가, 악기 케이스를 열어 보라는 군의관 아리베르트 보이트 소령의 명령을 거부하는 바람에 숱한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령의 권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만다. 이렇게 악기는 음악애호가이자 의사인 소령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러나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소련군이 몰려와 로마로 피신한 소령은 이를 팔아 도피자금으로 쓰기 위해 바르셀로나에서 온 골동품상 펠릭스 아르데볼에게 5만 달러를 요구하지만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아르데볼은 1천5백 달러에 넘기고 만다.

  펠릭스 아르데볼 이 기테레스. 천재적 지능을 가진 악당이자 주인공 아드리아의 아버지. 그는 어려서부터 영재였다. 비크 출신으로 안드레우와 로잘리아의 아들. 조제프 토라스 신부이자 교수의 추천장에 의하면 신학도로서 매우 학구적이고 신실한데다가 나이에 비해 우아하고 교양이 넘치며 빼어난 라틴어를 구사한다. 그가 얼마나 총명한지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도 매우 뛰어난 학업을 성취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중이었지만 신학교 학생들은 세상의 갈등과 우여곡절을 잊고 학업에만 매진할 수 있었는데, 펠릭스는 파피루스에 적힌 고문서, 이집트의 민중문자, 곱트어, 그리스어, 아람어 등의 문헌을 섭렵하면서 팔루바 신부로부터 사물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를 감상하는 법을 배운다. 후에 평생의 업을 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그러다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사학년 때 숙명적으로 만난 여인, 카롤리나. 성당에서 평소와 다르게 오후 세 시에 난타하는 종소리가 전 로마 시내에 퍼지던 때, 그의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집안으로 끌고 들어간 과일 가게 외동딸. 전쟁이 끝났다는 외침이 골목을 떠돌 무렵, 펠릭스는 당시의 시각으로 봐서,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사제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동시에 평생 그레고리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심각한 열등의식을 지니게 된다.

  카롤리나가 이제야 소개하는 우리의 주인공 아드리아 아르데볼의 어머니는 아니다. 그녀와 딸 하나를 둔 채 펠릭스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오랜 보물을 알아보는 식견을 더 기르고 때마침 도래한 야만의 시기를 맞아 프랑코와 히틀러 치하에서 막다른 곳까지 몰린 부자들로부터 무수한 보물을 헐값에 수집하기 시작한다. 천부적인 감식안과 협상술은 저 위에서 말한 것 같이 비알의 대가로 요구한 5만 달러를 단돈 천오백 달러로 후려치는 냉혈의 면모를 과시하지만, 어느 날 비밀번호 6,1,5,4,2,8을 누르고 급하게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간 후 아라비사다 고속도로에서 머리통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다.

  등장인물 아무도 모른다. 오직 독자만 아는 사실. 평소에 비알을 보관하고 있던 금고의 비밀번호 6,1,5,4,2,8. 연달아 쓰면 615428. 나치 친위대 중령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 군의관 아르베르트 보이트 소령이 명품 바이올린 한 대를 손에 넣은 것을 알고 그에게 취득품을 넘기라고 하자, 보이트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치 친위대의 중령이자 지휘관인 회스가 유대인 여자 수용자, 615428번과 시시때때로 관계하고 있는 것을 자기가 안다고 협박한다. 순혈의 아리안 인이 제거해야 할 악의 덩어리인 유대 여자와 접촉한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회스 중령은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던 것.

  소년 아드리아 아르데볼은 비밀번호에 이런 내력이 있는 줄도 모르고 비알을 친한 친구이자 바이올린 연주에 영재가 있는 베르나트 플렌사에게 며칠 빌려주고 대신 악기 케이스 안에 자신의 연습용 바이올린을 넣어두었던 것. 아드리아는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짐작하고 깊은 회한에 싸인다. 만일 아버지가 진품 비알을 들고 모종의 협상에 임했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내용은 여기까지. 처음에 밝힌 대로 화자는 ‘나’. 그러나 화자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내용의 상당한 분량이 알지 못하는 공백이라 그곳을 허구로 채워놓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알츠하이머 환자. 그리하여 14세기 말을 이야기하고 있는 화자는 문장의 줄도 바꾸지 않고 단번에 현재 시점의 현재 이야기로 돌아오기도 한다. 수도 없이. 놀라운 것은 이렇게 시간적 배열과 사건의 배치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어도 독자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짧은 소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세 권, 1천2백 쪽이 넘는 장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모호한 치매의 시선으로 서술을 하는데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여기까지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태까지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를 말하지 않고 있다. 지고한 사랑에 관하여. 몇십 년을 오직 한 여자만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결국 만나고, 다시 그녀만을 위해 사랑하고, 살고, 눈물 흘리고 또다시 그리워하며 죽어가는 남자를. 그 쓸쓸함을.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21-02-09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또 보관함 푱...

Falstaff 2021-02-09 22:24   좋아요 2 | URL
아, 이 책은 읽으셔야 합니다.
심지어 물려주셔야 합니다. 말 그대로 명작이거든요.

비연 2021-02-09 22:24   좋아요 2 | URL
그럼 바로 장바구니로...

Falstaff 2021-02-09 22:27   좋아요 2 | URL
좋은 선택입니다. 전 읽으라 권해드렸다고 나중에 틀림없이 칭찬받을 겁니다. ^^

coolcat329 2021-02-09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화자가 알츠하이머이고, 이야기가 14세기에서 현재를 왔다갔다 하다뇨...근데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다니... 저도 도전해보고 싶어집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1-02-09 22:35   좋아요 1 | URL
글과 (모르긴 몰라도) 역자의 우리말 실력이 좋아 저절로 몰입하게 되고, 안 통할 거 같은 이야기들이 술술 잘 풀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실 거예요. ㅋㅋㅋㅋ
(이래도 안 읽으시면..... ㅋㅋ)

coolcat329 2021-02-09 22:38   좋아요 1 | URL
네...저도 장바구니로 가겠습니다~

Falstaff 2021-02-09 22:42   좋아요 2 | URL
등장인물이 워낙 많고 가명까지 쓰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어서, 메모장을 옆에 두시고 메모를 해가면서 읽으시면 더 좋을 겁니다.

수이 2021-02-10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꺼번에 지르면 감당 못할까봐 일단 1권 질렀어요 폴스타프님 (소곤소곤)

Falstaff 2021-02-10 14:2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매사 튼튼이 젤입니닷! ^^

mini74 2021-02-10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거 3권짜리 아닌가요 ㅠㅠ폴스타프님 선택이니 저도 장바구니로 *^^*

Falstaff 2021-02-10 16:27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여러 분이 지르시니까 이젠 슬슬 겁이 나는 걸요? ㅋㅋㅋㅋ
세 권짜리 맞는데요, 다 읽는데 한 나흘 걸립니다. 집콕이라면 연휴에 딱 맞는 장편입지요. 근데 역시 명절이라면 고기 안주에 쐬주를....안 할 수 없잖아요? 그죠? ㅋㅋ

유부만두 2021-02-12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여기도 프루스트 냄새가 나요.

Falstaff 2021-02-12 19:56   좋아요 1 | URL
이 책 재밌습니다. 프루스트처럼 한 얘기 또 하고, 아까 한 얘기 다시 한 번 더 하고, 막 그러지는 않습니다. ㅎㅎㅎㅎ 아니, 한 얘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한 번 더 하고 막 그러긴 하는데요, 프루스트 생각이 나진 않더라고요. ^^

북극곰 2021-07-02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찬하신 글을 읽고 (앞머리만!) 사서 이제 마지막 3권의 몇 페이지만 남겨 놓고 있어요.... 스포일러 일 것 같아 아껴두었다가 이제 와서 찬찬히 다 읽었습니다. 문단도 안 바꾸고 시공간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그게 또 금세 익숙해지더라고요. 그리고 그 기술에 정말 감탄. 첨엔 잘못 읽었나 하고 몇 번이나 앞으로 왔다갔다 했지요. 아, 마지막의 반전 아닌 반전도.... 너무 슬프네요.
내용과 달리 유머러스한 묘사도 많아서 큭, 웃음이 터지는 구석도 있었고요. 이 작가 완전 근사합니다.

Falstaff 2021-07-02 09:33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아 정말 괜찮은 작가 한 명 찾았습니다. 다른 작품도 얼른 번역해 나오기 바랍니다.
아주 오래된 서재 친구님이신데, 제 독후감 읽고 좋은 책 찾으셨다니 더욱 기쁘군요. ^^

행복한책읽기 2021-08-21 1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대단하십니다. 이 복잡한 소설을 이리 질서정연하게 정리해 주시다니요. 저, 조제프 샤롬이 누구였더라?? 생각이 나지 않아 검색하다 폴스파프님 서재 딱 걸림. 와~~~~~ 이 작품 읽으면서도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와~~~~~ 폴스타프님 리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와~~~~~~ 이렇게 세 번을 외쳐줘야죠. 암요. 명작이고 걸작이고 전무후무할 듯합니다. 저는 간만에 진짜 맛있게, 사라질까 아까워 천천히 씹어 먹고 있어요.^^

Falstaff 2021-08-21 19:49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하.... 고맙습니다.
하여튼 이 책은 정말, 아휴, 말이 필요없이 명작, 앞으로 세기를 넘어서 읽힐 거라는 데 의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책읽기 님의 칭찬은 참 넘치게 기분이 좋습니다!!!!!
 
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전문)



  시집에 첫 번째로 나오는 시다. 문태준이라는 이름은 꽤 오래 전부터 알았다. 문예지에서 이이의 시도 곧잘 읽어오곤 했다. 그럼에도 새삼스레 이 시를 읽고 시집의 앞날개를 펼쳐 얼굴을 확인했다. 농촌진흥청의 전 먼 시골 분소에서 소장 정도 하면서 농림부장관상 가량을 수상할 얼굴 또는 관상. 대강 짐작하시겠지? 그 아래 보니 195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고, 시집을 다 읽을 때까지 잘못 읽었다. 맨 마지막 시 <뻘 같은 그리움>을 읽을 때까지 난 문태준의 생년이 50년 범띠인 줄 알았다. 그렇게 알고 시를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데, 1, 2년이 아니고 20년을 잘못 읽었다. 1970년생이다. 이런.
  1970년생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다고? 서울에서 낳고 자라고, 학교를 마친 다음에야 먹고 살려고 공장을 찾아 지방도시를 전전한 내가, 만일 어찌하고 저찌해서 시인 면허증을 땄다고 해도 난 죽어도 이런 시를 쓰지 못했으리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시골 풍경조차 모르겠는가 말이지. 포천군 이동면 이리 노니는 골, 낭유리에서 군역을 치루던 1982년에 시인은 겨우 열세 살밖에 안 됐을 텐데, 그의 시 속 풍경은 나의 낭유리 보다 더 먼 시간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북 김천이면 다른 지역보다 그래도 조금 더 발전한 촌 동네 아니었나? 이런, 이런.
  그래 시를 다 읽고 뒤표지에 쓰인 이성복의 발문을 읽어보니 내 마음에 딱 들어맞는다. 이 시집을 읽은 감상으로 어찌 이를 능가할 수 있을까 싶어서 전문을 옮긴다.


  “어찌 보면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은 그의 시의 목소리는 비 온 다음날 뻘밭을 기는 지렁이의 행보를 닮은가 싶더니, 어느새 뿌연 수면을 내리찍는 물총새 부리처럼 날카롭다. 쥐를 삼킴 뱀의 몸통처럼 꾸불텅거리는 그의 시의 행갈이는 기필코, 포획한 대상을 흐물거리는 단백질 덩어리로 만들어 놓는다. 그의 시 행간마다 육식 곤충이 내뿜는 끈적한 타액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아니다,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은 장수하늘소 한 마리가 달빛 없는 밤, 세상의 갈라터진 껍질 사이로 배어나오는 수액을 느리게 음미하는 것이다.”

  참나. 이성복의 발문, 비록 영업글 비슷한 찬사일지라도, 이것도 시다, 시.
  시집에 실린 문태준의 모든 시는 지명을 밝히지 않은 시골과 기껏해야 시골 주변에 있는 소도시에 국한되어 있다. 시골의 숱한 나무, 꽃, 곡식, 작은 생명들, 소리 같은 것으로 메웠고, 등장인물 역시 서당골로 산미나리 뜯으러 간 어머니, 식구들이 몸을 열고 쏟은 것들을 지게에 지고 호박밭으로 가는 아버지, 화단의 봉숭아꽃을 보고 있는 여섯 살 난 딸, 오랜만에 친정에 와 돌아가고 싶지 않아 훌쩍이는 누이 등등, 어찌 이런 시집의 초판이 2004년, 21세기에 나왔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이게 지난 4년 동안 쓴 시라고 하니 하나도 빼지 않고 전부 21세기, 이번 세기에 쓴 것들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시.



  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전문)


  그래, 있다. 아직도 이렇게 시를 쓰는 ‘시인’이란 인간이. 그리고 어이없게도, 이런 시를 쓴 시인은 겨우 서른에서 서른 네 살이었다는 거.
  이런 시를 읽으면서 시어 하나, 하나에다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어쩌니 저쩌니 따지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평론을 써서 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냥 시를 읽으면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거 아닌가 싶다. 이 시집을 읽어보면 시인 문태준은, 나이와 관계없이, 그냥 몸에서 사리가 뚝뚝 떨어지는 도인 같다. 도사 말고 이미 달관해서 세상 다 산 사람. 무구하다고, 몸에 낀 때가 없다고. 이이는 시를 쓰기 전에 면벽참선, 목욕재개한 후 다시 두 시간 요가수행 후에 세상의 모든 미움과 번뇌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나서야 펜을 드는 것 같다. 한 편도 눈에 힘주고 사물을 바라본 것이 없다. 가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조금 있으면 봄이다. 제일 먼저 산수유가 피고 이어서 목련, 자목련이 그리고 벚꽃이 핀다. 이것들의 특징이 먼저 꽃이 피고, 지고 나서야 이파리가 돋는다는 거. 꽃이 피면 반드시 진다. 꽃이 지면, 당연히 있다. 꽃 진 자리가.



  꽃 진 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전문)



  시인은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닌가비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록 두 권밖에 안 되지만 이이의 전작 <태고의 시간들>과 <방랑자들>을 읽고 나서 토카르추크의 문법은 짧은 에피소드들과 짧은 소묘들, 즉 수다한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독자로 하여금 조금씩 드러나는 파편들의 정체를 엮어 마치 픽토리얼 퍼즐을 완성하는 유희처럼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방법을 구사했다. 이렇게 같은 방식으로 쓴 두 권의 책을 읽은 경험으로, 이번에도 비슷한 플롯이겠거니 생각하고 새 작품이 출시되었는데도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기도 하지.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아홉시 방향보다 약간 위쪽 체코와의 접경지역인 고지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스릴러 소설이다. 물론 영국을 필두로 여성 스릴러 작가들이 대단한 작품을 많이 썼으나, 토카르추크의 이 스릴러는 매우 독창적이다. 그리고 정말로 읽으면, 당신은 함몰된다.
  일인칭 시점의 주인공 ‘나’의 본명은 야니나 두셰이코. 시리아 등지에서 대규모 교량 건설에 투입된 적이 있는 엔지니어 출신. 귀국해서 영어교사를 하다가 지금은 일 년 중 반년 동안 추위가 점령하는 지역에서 온전히 겨울을 나는 고지대 세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겨우내 일곱 채의 집을 관리해주며 파트타임으로 근처 (‘나’가 트란실바니아라고 부르는) 읍내의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사는 늙은 여자. ‘나’는 ‘나’를 야니나, 라고 서류에 공식적으로 등록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래 자신 말고 산골에 남은 두 남자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자유스럽게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트란실바니아 사람들은 ‘나’를 ‘두셰이코 부인’이라 부르는 걸로 결론을 봤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두솁코 부인’으로 불러대고, 이럴 때 마다 ‘나’는 굳이 이를 두셰이코 부인으로 정정해서 불러달라고 요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원하지 않듯 ‘나’ 역시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아 고지대의 두 남자를 각각 ‘왕발’과 ‘괴짜’라고 부른다. 물론 그들도 안다. 자신을 그렇게 호칭하는지. 직접 대놓고 그렇게 부르지는 않아도.
  이런 ‘나’는 비록 젊은 시절엔 폴란드 전국체전에서 투해머 종목에서 은메달을 받았을 정도로 건장한 체구의 건강체질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여러 질병에 시달린다. 특히 경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몸이 피곤하거나 많이 신경을 써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어깨부터 시작해 다리 끝까지 이어지는 이름이 없고 보이지도 않는 선을 따라 심한 떨림 현상이 생겨 여간 고생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심각하게 공부하게 된 것이 점성술. 천동설 시대의 대가 프톨레마이오스가 집대성하고 이이를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이 더욱 발전시켜온 유럽 전통의 점성술을 아주 심도 있게 공부하지만,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와 심지어 트란실바니아 읍내의 말단 경찰들, 성당의 복사 아이마저 점성술을 근거로 하는 충고를 백안시한다. 이 점성술에 관해 글을 쓰기 위해 토카르추크가 탐색하고 연구한 게 아까워서 그랬는지 분량이 조금 많이 할애한 듯. 이 방면에 관심이 없는 독자들은 지루하기가 십상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일종의 밀교나 믿음이란 측면에서 보면 토카르추크, 그래봐야 <태고의 시간>과 <방랑자들>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속에 점성술 또는 기타 미신, 전설, 신화, 유령 등과의 연관을 감안하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매정하게 추운 산골. 여기에 외따로 남은 세 명의 인간. ‘나’와 괴짜와 왕발.
  괴짜는 세 명 중 유일하게 자식이 있다. 읍내 경찰서에 배속해 근무하는 형사 ‘검은 코트’. 건장한 체격에 무뚝뚝한 친절이 몸에 밴 산중 신사. 생각 외로 생긴 것과 달리 정리정돈에 관해 매우 까다로워 결벽증 증세가 의심스러울 정도. 버섯 관련 커뮤니티의 회계. 본명을 시비엥토페우크 시비에르시친스키. 이름을 어렵게 지은 것은 괴짜의 아버지가 독일인 어머니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는 사이는 아니고 그저 며칠에 한 번 만나 얼굴 보고 인사하는 정도이다. 전에 서커스 단의 회계사였는지 곡예사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워낙 과묵해 말을 걸기 힘든 수준이다. 이는 많은 남자들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겪는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이 아닌가하고 ‘나’는 의심하고 있다.
  ‘나’는 예의 경련에 따르는 열병을 다스릴 생각으로 초저녁에 홉을 우려낸 차와 수면유도 기능이 있는 발레리안 두 알을 복용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한밤중에 무례하고 불길하게 문을 두드리는 이웃 괴짜에 의하여 비몽사몽간에 잠이 깨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왕발이 죽었다고, 그래서 가봐야 한다면서. 왕발은 평소에 전기를 아끼기 위하여 일찍 밤을 먹고 얼른 전등을 끄고 지내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은 지나다 보니까 늦게까지 불이 켜 있는 것이 현관문틈으로 보여 문을 열어봤더니 죽어 넘어져 있더라는 것. 왕발은 ‘나’와 한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 악마와 같은 부류였다. 작지만 근육질이고 구사하는 언어는 주로 욕설에 고유명사를 갖다 붙인 형태였다. 숲에 관해 잘 알아 숲을 의지해 먹고 살지만 전혀 숲을 존중하지 않았다. 항상 숲에서 뭔가를 훔치거나 뒤로 빼돌려온 인간. 밀렵꾼이기도 해서 올가미를 써 숲을 약탈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나’와 괴짜가 왕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괴짜의 헤드랜턴에 야광 빛 연녹색 눈동자 두 쌍을 발견한다. 왕발의 집 바로 근처에서. 사슴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숲으로 돌아가라고 두 손을 휘둘러 소리쳐보았으나 거의 배 부근까지 눈에 파묻힌 채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이게 앞부분, 1장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장면. 처음으로 등장하는, 스릴러에서 독자를 현혹시키는 장치이다.
  왕발의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 악마 같은 존재는 이미 숨을 거둔 채 뭔가 음습하고 게걸스러운 느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양손을 목에 대고 기괴한 자세로 누워 눈을 부릅뜬 채. 아무리 왕발이 인간 같지 않은 존재였어도 그래도 이웃으로 지낸 정리가 있으니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 입혀야 한다는 괴짜의 말에 따라 사후경직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나’와 괴짜는 옷을 다 벗긴 다음 거의 입은 적이 없어 보이는 커피색 정장을 골라 입힌다. 그리고 다시 보니 퉁퉁 부은 왕발의 혓바닥 아래 뭔가 감춰진 것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죽은 사람의 입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낸다. 날카로운 뼈 조각. 어느새 날이 새고 보드카 한 잔씩 마시면서 정신을 차린 ‘나’와 괴짜. 창틀의 알루미늄 쟁반에 사슴의 머리와 네 발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왕발이 덫으로 사슴을 포획하고 도살해 구워먹다가 뼈 조각이 목에 걸려 죽음을 맞는 처벌을 받은 것이었다. 괴짜가 시신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왕발의 별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생년월일이 있는 증명서를 찾다가 사진뭉치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고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며 귓가에 음울한 통곡소리를 듣게 된다.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는데, 이를 본 괴짜가 ‘나’에게 한 마디를 한다.
  “당신이 울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죽임을 당한 사슴의 보복으로 죽음을 맞은 왕발. 그가 가지고 있던 사진 속 무엇을 보았기에 ‘나’는 사람 같지도 않은 왕발의 시신 앞에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못하는 걸까.
  북동유럽의 고지대. 깊은 숲 속의 수많은 영령들과 이들을 태곳적부터 내려다보고 있던 별들 사이의 무슨 전설이 다시 21세기의 산골을 덮쳤을까. 왕발에 이어 왕발의 죽음을 수사했던 경찰서장과 숲 속의 가장 부유한 여우모피 장사꾼 브렝트샥 씨, 이어서 버섯채집협회장과 심지어 교구 신부까지 연쇄적으로 피살당하는 일견 초자연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명왕성과 토성 사이에 어떤 운명의 별이 지나간 것일까.
  이 책을 기본적으로 얘기하자면 스릴러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잘 세공된 생명주의적 작품이라 하겠다. 자기의 생명주의적 주장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가장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인 스릴러의 외양을 채용했다고 해도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 인간이 파리나 개구리 같은 한 생명종일 뿐이라는 진실은 이제는 누구나 안다. 그러나 이 책을 잘못 읽으면, 혹시 토카르추크가 육식을 부정하는 극단적 비건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나도 일정부분 그렇게 읽었음을 인정한다. 인간이라고 자신을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말을 두셰이코 부인은 곳곳에서 크게 주장하니까.
  나도 여흥을 위해 취미로 하는 낚시를 포함한 사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생존을 위해 근육이 아닌 뇌를 키우기 위해 육식을 선택한 진화과정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포함한 육식동물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다른 짐승을 먹이로 삼았을 뿐이고, 지능이 과도하게 발달해 스스로 불행해지기로 결심한 인간만이 그저 재미로 다른 종과 심지어 같은 종의 생명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먹기 위한 도살을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 재미있는 책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주인공 야니나 두셰이코 여사를 통해 토카르추크가 주장한 것이 모든 동물에 대한, 모든 형태로의 도살을 반대한 것인지, 아니면 재미를 위한 살해에만 반대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이야기해놓지 않았다.


  확실히 나이 들었다. 오늘 새벽 두시 반에 깼다. 그 후, 다섯 시까지 이 책 생각했다. 위에 쓴 독후감은 거의 문학적 측면으로만 읽은 느낌이다. 그러나 알라딘 서재, 완전히 공개된 공간에서 "사회적 감상"을 배제할 수 있을까.

  좋다.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사회적 관점에서 읽으면, 이 책은 한 사이코패스의 미친 행적 이상이 아니다. 딸처럼 키우던 개 두 마리를 쏴 죽였다는 이유로 지역사회의 중요한 인물 네 명을 차례로 때려죽이거나 불태워 죽이는 인간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나. 아무리 친자식 같이 애지중지하던 개를 향해 총을 쐈다고 하더라도. 동물권이 인권을 능가할 수는 없는 일.

  이 사이코패스는 계획적으로 살인을 했고, 죽인 시신에 가짜 증거를 남기려 했으며, 세 번째 시신에게는 가혹행위라고 할 수도 있는 장난을 치기까지 한다.

  문학의 힘은 이런 연쇄살인범까지 미화시킬 수 있다. 읽어보시라. 저절로 그렇게(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은 범인이 흉악한 살인자에 불과하다는 진실도 함께 보아야 할 터. 파렴치한 성폭력범이 한 가정의 따뜻한 아버지인 경우를 우리는 가끔 목격하지 않았나.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2-05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야~ 너무나 궁금증을 유발하는 페이펍니다~ 책을 안 담을 수가 없네요;;;;;

Falstaff 2021-02-05 09:24   좋아요 2 | URL
예상외로 토카르추크를 쉽게 선택하지 못하시는 독자가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이 책은 그냥 스토리를 따라 읽어나가면 되거든요.
그리고요, 재미나요.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2-05 16:30   좋아요 3 | URL
재미나요~~~ 이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ㅎㅎㅎㅎㅎㅎ 저도 토카르추크(이름 어렵군요) 행렬에 살짝 끼어보렵니다.

Falstaff 2021-02-05 17:01   좋아요 2 | URL
즐기기만 하면 장땡입니다. 우리 독자들은요. ㅎㅎㅎㅎ
마음에 드시면 나중에 <태고의 시간들>도 한 번. ^^

붕붕툐툐 2021-02-05 23:07   좋아요 2 | URL
ㅋㅋㅋ토카르추크 행렬~ 즐기기만 하면 장땡!!

coolcat329 2021-02-05 0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연쇄살인 스릴러...정말 궁금해집니다. 저도 담아두렵니다. 😅

Falstaff 2021-02-05 09:28   좋아요 2 | URL
좋은 선택입니다. ^^

잠자냥 2021-02-05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작품 마지막이 좀 그렇죠?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긴 합니다. 그나저나 이 작품은 제게 블레이크에 대해 새롭게 알려준 것으로도 꽤 의미가 있었습니다.

Falstaff 2021-02-05 09:56   좋아요 4 | URL
옙. ㅎㅎㅎ 그렇다고 마지막 부분을 상세하게 써놓을 수도 없고 말입니다.
여러분, 아니꼬우시면 읽어보셔요. ㅋㅋㅋ 아 이런 말 쓸 때가 참 상쾌해요. ㅋㅋㅋ
정말 서양 소설책 읽어보면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블레이크를 많이 인용하는 거 같더라고요. 무지 오래된 시인인데도 참 굉장합니다.

잠자냥 2021-02-05 10:11   좋아요 4 | URL
먼저 읽은 자들의 여유. 케케케케
˝여러분 빨리 안 읽으시면 스포일러 해버릴 거예요~~! 귀신은 브루스 윌리스다!!!!!!!˝ 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2-05 23:07   좋아요 1 | URL
악!!! 안돼!!! 스포 금지~🙈

미미 2021-02-05 10: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그냥 지나가려다 연쇄살인에 저도 찜;; <태고의시간들>은 읽었는데 이번엔 이런 주제라니.게다가 <방랑자들>작가네요!(‘태고‘읽고도 몰랐음) 영화만 봤지만요^^~♡

Falstaff 2021-02-05 10:41   좋아요 3 | URL
아니, 아니... 이거 참. 숙녀분들께서 연쇄살인을 좋아하신다니... 아이고.... ㅋㅋㅋ
읽어보시면, 정말 색다른 스릴러라고 인정하실 겁니다. 즐기시기 바랍니다. ^^

붕붕툐툐 2021-02-05 23:08   좋아요 1 | URL
ㅋㅋㅋ미미님 취향 하나 더 적어놔야겠네요~ 연쇄살인..ㅋㅋㅋㅋ

미미 2021-02-05 23:13   좋아요 1 | URL
앗 들킴ㅋㅋㅋㅋ테드 번디보다 제프리 다머 쪽이예욤^^;;

scott 2021-02-05 11: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퐐스타프님이 읽어보시라~*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Falstaff 2021-02-05 11:19   좋아요 3 | URL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ㅎㅎ

붕붕툐툐 2021-02-05 23:09   좋아요 2 | URL
ㅋㅋ스콧님 주섬주섬 귀여워용~😻
 
닥터 코페르니쿠스 - 뿔 모던클래식 6
존 반빌 지음, 조성숙 옮김 / 뿔(웅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출판사 [뿔(웅진)>. 2013년부터 출판한 책이 없다. 그래서 이 책도 품절이다. 존 밴빌. 물 좋은 아일랜드 태생이면서 조이스, 트레버의 맥을 잇는 작가로 이름을 날린 바 있으나, 역자의 간섭 때문인지 유명한 작품 <바다>를 그리 즐겁게 읽지 못해 다른 책을 읽어보기로 했던 차에 눈에 띄어 고른 책. 읽어보면 존 밴빌 특유의 문장이 그대로 드러난다. 윌리엄 트레버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쓸쓸함에 싸인 소년시대. 옛 집과 부모, 남매들을 그리는 것으로 지동설을 주장했던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전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존 밴빌. 세상에. 전기 소설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코페르니쿠스 가문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의 석공에 의하여 1396년 상부 슐레지엔에서 시작하지만 성인이 되어 장사꾼, 즉 상인으로 이름을 알린 그의 아들 요하네스를 코페르니쿠스라는 상인 가문의 시조로 친다고 한다. 1450년대 말 우리의 주인공 닥터 코페르니쿠스의 아버지가 슐레지엔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토룬 시로 사업장을 옮겼고, 여기에서 지동설을 주장하게 될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2남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사실 외가로 보면 니콜라스의 어머니의 경우 보잘 것 없는 집안으로 낙혼을 했다고 봐야 한다. 외가 바첼로트 가문은 13세기 말에 토룬에 정착한 세도가로 당당한 체구의 이모 크리스티나 바첼로트는 언제나 조카들에게 코페르니쿠스 가문이 얼마나 하찮은지 늘 험담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실 니콜라스의 외숙 루카스 신부는 비록 “엄격하고 황홀한 정도로 못생기고 거만한 성격이며, 소문이 사실이면 일생동안 웃은 적이 전혀 없는” 인간이지만 몇 년 후에 로마 교황청과 불화하는 지역의 권력자인 주교의 자리에 앉는다. 이 외숙은 니콜라스의 어머니가 일찍 죽고, 열 살 때 아버지마저 죽고 나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네 형제, 자매를 후원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데, 형제들 입장에선 구두쇠가 과하게 엄격하고, 냉정하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내가 보기엔 당시 독신의 권력자이자 성직자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후원을 했다고 생각한다.
  외숙이 니콜라스가 열 살 때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아이들에게 행한 일을 보면, 애초에 성직에 관심이 있던 맏이 바바라는 쿨름에 있는 시토 수녀회로 보내 훗날 수녀원장까지 지내게 하고, 둘째 딸 카타리나는 자기 성격과 딱 어울리는 상인 남자와 결혼해 왕창 망해버린 아버지에 의해 남의 손에 넘어가버린 집을 다시 구입해 살림집으로 사용하니 비록 싸가지 없는 부부일망정 적어도 자기네 한 식구는 잘 먹고 잘 살았으니 그걸로 된 거다. 셋째 안드레아스와 막내 니콜라스, 두 아들들은 사제가 직접 데리고 키울 수 없으니 폴란드의 중북부에 있는 부오추아베크의 성당 부속학교로 전학을 시키면서, 졸업 후엔 크라쿠프 대학에 다니며 교회 일을 하라고 했다. 비록 조카들을 대하는 태도가 좀 딱딱하고 정이 없다고 해도 이 정도면 어떻게 더 잘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으로도 바쁜 독신 남자가. 뭐 대학 졸업한 다음에는 알 거 없고. 그러나 외숙 루카스 신부는 대학 졸업 후에도 이탈리아에 유학도 시켜주니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디 있어.
  전기에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인간이 바로 위의 형 안드레아스. 이이는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동생 니콜라스를 싫어한다. 책에는 형이 아우를 싫어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냥 형, 아우 사이에 가끔 있는 이유 없는(또는 사소한 갈등의 축적으로 인한) 미움일 수도 있고, 니콜라스가 워낙 총명하니까 형으로서 어릴 때부터 하도 비교를 당하니 볼 때마다 팍 패주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만일 안드레아스도 나름대로 공부 좀 하는데 동생이 상상할 수도 없이 뛰어나면 미움이 더 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차피 책은 품절. <황금 노트북>처럼 다른 출판사가 판권을 얻어 다시 출판해야만 당신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니 스포일러의 위협 없이 그냥 이야기를 풀어버리면, 어쨌든 떡잎부터 삐딱하게 성장한 안드레아스는 명색이 수사이면서도, 수사는 정식 사제가 아니라 언제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기는 하지만, 크라쿠프 대학과 이탈리아 유학 생활 중에서도 한결같이 껄렁패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쁜 짓을 일삼다 결국엔 심각한 매독에 걸려 귀신같은 모습을 한 채 프러시아와 폴란드, 이탈리아를 배회하던 중 동생이 머무는 교구에서 거금을 훔쳐 이탈리아로 달아나 객사할 운명이다. 물론 형제간이니 언젠간 화해를 하긴 하는데, 그건 니콜라스의 죽음의 침상. 먼저 죽은 형의 영혼이 동생의 영혼을 인도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우, 이 정도면 심각한 스포일러? 아니다. 세상에 안 죽는 사람 있어?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지동설을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 박사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는 과정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할 예정.
  니콜라스가 앞으로 살며 위대한 발견을 했으면서도 이것을 굳이 세상에 알릴 생각을 적극적으로는 하지 않았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가 부오추아베크의 부속학교를 다닐 때 논리학, 기하학을 가르치던 엄한 교사 카스파르 슈투름을 비롯한 여러 선생들은 자신들이 어렵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습득한 지식을 니콜라스가 너무도 쉽게 소화해내는 것을 보자 질투를 넘어 분노를 촉발시켜버리고 만다. 교사들이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모욕감에 휩싸이는 것을 발견한 니콜라스는 이후 오히려 약간 둔한 척을 해 이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니콜라스 앞에 등장하는 친절한 교사 보드카 아브스테미우스. 이름이 ‘알콜의존자’라는 뜻이다. 이 선생은 니콜라스에게 신중할 것을 주문한다. 지식은 정신을 단련시켜주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못한다면서. 세상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의심과 두려움의 원천이라며. 즉, 잘난 척하지 말고 살라는 충고. 대수, 기하학, 천문학과 음악이론을 가르친, 교사로는 형편없지만 적어도 니콜라스가 살아생전 파문당하지는 않게 가르침을 준 교사다. 덕분에 지동설의 진리가 그만큼 늦게 알려지긴 했지만 하여튼 코페르니쿠스를 자연사하게 해주었으니 그걸로 된 거다.
  내 눈을 확 끌었던 학자는 크라쿠프 대학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달베르트 브루제프스키 교수. 니콜라스는 몰랐지만 니콜라스의 천재성에 의하여 몇 년 동안 계속 조롱을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 그래서 당혹과 창피로 이루어진 시뻘건 독기를 간혹 뿜어내는 것을 다른 이도 아니고 못난 형 안드레아스가 목격한다. 이이는 엄격하고 매우 배타적인 성격이었다.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원리를 옹호했지만 니콜라스가 교수의 책을 통해 발견한 바로는 내심으로 프톨레마이오스를 의심하여 기어코 메마른 사막처럼 봉인된 정신 속에서 진주보다 값진 의심의 방울을 증류해낸 훌륭한 과학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가 부린 속임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 “현상”을 구하기 위하여.
  브루제프스키 교수 댁을 형 안드레아스와 함께 방문한 니콜라스. 교수의 연약해보이는 겉모습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는 성마르고 차가우며 세상을 혐오하는 노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틀렸으나, 이 믿음을 가장 핵심적인 공모자에게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즉 금기를 들추고 있다는 것을 니콜라스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당대의 최고 학자 브루제프스키는 크게 화를 내며 일갈한다. 니콜라스는 천문학과 철학을 헷갈리고 있다고. 천문학은 우주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한 결과를 말하며, 학자들이 관찰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맞는 이론이라고. 즉, 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원을 그리는 현상. 이건 모든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원운동 한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완벽하다는 주장이다.
  이 시기가 1495년 경. 누가 생각나는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생몰시기가 1451~1506년. 1492년에 서쪽으로 항해해 자신이 생각하는 인도, 서인도-아메리카를 발견한다. 니콜라스는 지구의 차원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틀렸다는 사실을 콜럼버스가 이미 입증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하며, ‘지식은 인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고대사상이 완전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과학의 문은 굳게 닫혀 있는 법”이라고 설파하는 교수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이탈리아에 가서 여흥거리 비슷하게 의학박사 학위도 따고 홀로 천문학을 연구하던 그는 필생의 논문집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쓰지만, 옛 시절의 친애하는 보드카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이의 출판을 계속 머뭇거리기만 한다. 그러다가 결국 독일에서 모종의 경로를 통해 책이 나오고, 그가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 접어들어 의식이 없어지는 찰나, 죽음의 침상에서 그의 가슴 위에 한 권이 놓여진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천재 과학자의 신경줄, 성격 같은 것이 아주 잘 표현시켰다. 핵심만 지향하고 나머지 곁가지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올바른 하나를 위해 상대방의 기분에 전혀 관심을 쏟지 않는 것 등등. 이런 성격이 전편을 통해 고르게 나타난다. 딱 한 장면, 임종 시기만 빼고. 원래 마음 약하고 정도 많은 아일랜드의 작가 존 밴빌은 기어코 코페르니쿠스 박사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세상과 화해를 하게 만들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과학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전기 또는 평전. 이런 책을 품절시키는 건 사실 좀 아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