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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영국의 베팅 업체에서 누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될까 하는 사이트를 개설한 바, 캐나다의 추리/미스터리, 페미니즘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공동 3위의 낮은 배당률을 기록했다.
뭐 대한민국의 시인 고은 역시 다른 세 명과 함께 공동 6위로 랭크되어 배당률에 의한 선정 가능성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애트우드, 하면 근래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의 연작으로 장안 을지로 인쇄골목의 종이 값을 대폭 올려놓은 바 있으나, 나는 <눈먼 암살자>로 이이를 처음 읽었던 바, 그거 딱 한 권 가지고 팬이 되리라 작심을 해버렸다. 그렇다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나오는 책마다 족족 읽어 해치운 수준은 아니고 이후 <시녀 이야기>, <도둑 신부>, <고양이 눈>에 이어 이번에 겨우 다섯 번째 애트우드를 읽은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일단 애트우드의 책을 한 마디로 하자면, 재미있다. 재미야말로 소설문학을 즐기는데 제일 중요한 요소 아닐까. 전에 읽었던 것들과 달리 1996년 작품인 <그레이스>는 1843년 토론토에서 있었던 엽기 살인사건을 소재로 가져왔다. 그럼 책 이야기를 해보자.
북부 아일랜드의 신교도로 감리교회 목사를 하다가 교회 운영비에 관한 수상한 집행의 혐의로 목사직을 박탈당한 전직 목사가 있었는데, 딸, 아들, 딸을 두었다. 큰딸은 집안이 그래도 괜찮을 때 건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 잘 살았는데, 두 번째부터 거덜이 나서 아들은 신대륙과 구대륙을 왕복하는 선원을 한다고 집을 나가 이후 전혀 소식이 없다. 작은 딸은 아일랜드 사람들 눈에는 가시 같아 보이는 잉글랜드 출신의 석수장이로 생긴 건 멀쩡한데 하는 일이라고는 애 만드는 일하고 돈 생기면 술 퍼먹는 일밖에 없는 날건달에게 시집을 갔다. 이 석수장이는 목사님 둘째 딸과의 사이에 무려 열세 명의 아이를 만들었으니, 이 가운데 살아 있는 게 아홉이요, 일찌감치 고단한 세상 마감한 것이 셋이고, 나머지 하나는 조용한 출생still born을 선택했다.
석수장이 일도 일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근데 때마침 아일랜드에 기근이 닥쳤으니 무려 열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꼬. 그래 큰이모와 후덕한 이모부의 도움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다가, 이모부 댁에서도 하루 이틀, 한 명 두 명이지 어떻게 하고 한 날 열하나의 군식구를 봉양하겠느냐고. 그리하여 신대륙으로 이민을 권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잉글랜드 출신 아버지는 누더기를 걸친 처자식을 데리고 이민선 삼등실에 몸을 뉘었던 거다. 그런데 그리 많지도 않은 나이에 열세 번이나 출산을 겪은 엄마가 아기집에 그만 종양이 생겨,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쥐들이 어슬렁거리는 배 밑창에서 밤새도록 복통을 호소하다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큰딸 그레이스의 가방 속에는 집에서 가져온 낡은 린넨과 이모가 이별선물로 준 깨끗하고 좋은 린넨 천이 있었고, 그레이스는 이미 죽은 엄마도 자식들에게 좋은 린넨을 남기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 낡은 린넨으로 숨을 거둔 엄마를 싼 다음에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차디찬 대서양에 엄마를 수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북아메리카. 캐나다. 애초부터 처자식에게 별 애정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는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육갑을 하시느라고 돈은 하나도 벌어오지 못해 아이들을 만날 쫄쫄 굶기면서도 자기만 어디 가서 떡이 되게 술을 마시고는 소위 ‘주취폭력’을 자식들에게 가하기 시작했다. 불과 조금 후 가정폭력이 상습화된 무능한 아버지를 피하고,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그레이스는 하녀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한다. 당시 하녀로 들어가 돈을 웬만큼 모은 다음 건실한 청년을 만나 시골에 작은 집을 짓고 가축도 몇 마리 기르면서 조금씩 가세를 확장하는 것이 이민 온 가정의 딸이 밟는 코스였단다. 그래 친절한 부자 올더먼 파킨슨 저택에서 월급을 1달러 받기로 하고 잔심부름을 했고, 월급날만 되면 아버지가 쳐들어와 삥을 뜯으려 했으나 그레이스는 25센트만 주고는 했다. 동시에 자기보다 고참인 ‘메리 휘트니’라는 절친을 만나 메리가 죽을 때까지 깊은 우정을 쌓는 행복을 누린다. 하녀 신분이라고 행복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러다가 메리가 죽은 다음, 어떻게 죽는지는 알려드리지 않겠지만, 몇 번의 이주를 거쳐 월급 3달러를 받기로 하고 리치몬드 근방의 시골에 있는 토머스 키니어 씨 댁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집에는 안주인이 없고 자신을 영입한 하녀 출신 가정부, 쉽게 말해 여성 집사인 낸시가 안주인 대신 집안일을 주관하고 있었다. 흠. 19세기 중반에 다른 집의 두 배(1달러→1달러 반→3달러) 수준에 달하는 월급을 받는 하녀. 유럽 작가들의 많은 작품 속에서는 주로 집주인의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들이 자연스레 성적 접촉을 경험하게 되는 대상이 주로 하녀들이었던 터라 아랫것들 대하는데 별로 허물이 없는 키니어 씨가 처음부터 좀 수상하긴 했지만 결국 그레이스를 상대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왜 그런고 하면, 이미 낸시 몽고메리 양이 주인님의 침대 봉사를 담당하는 대신 가정부 주제에 심지어 순금 귀고리까지 달고, 멋진 드레스에 기타 부속 의류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아지 버릇을 남 줄 수 있나. 아직 열여섯 살이 채 되지 않은 그레이스. 아버지 닮아 곱게 생긴 외모에, 그래도 목사님의 손녀딸이라 예절도 바르고, 손까지 매워 일도 잘 하니 예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이런 와중에 모난 돌 하나가 벌써 이 집에 들어와 있었으니 전직 사병私兵 출신 삐딱이 제임스 맥더모트. 주인님 키니어 씨가 새로 온 하녀 그레이스를 조금씩 귀여워하기 시작하니까 침대 봉사하는 낸시가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것. 게다가 맥더모트는 사람 자체가 뻣뻣하니 매사에 삐딱이라 벌썬 눈 밖에 나 언젠가는 해고할 것임이 분명했는데 여기에 눈치 없는 낸시가 날이 갈수록 그레이스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맥더모트 자신도 그레이스의 어린 몸에 욕심이 없는 바는 아니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낸시와 키니어 씨를 살해하고 현금과 귀중품을 챙겨 미국으로 도망가 결혼하자고 제의했고, 위협적은 맥더모트의 말에 그저, 불만이 있는 상전들에게 하녀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그러자고, 절대 실행하지 않을 것이란 전제로 죽여버리자고 동의를 했는데, 정말로 맥더모트는 낸시의 머리통을 도끼로 팍 찍은 다음 피가 철철 흐르지만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은 낸시의 목을, 하필이면 그레이스의 손수건 또는 스카프로 졸라 죽인다. 이어서 외출하고 돌아온 주인님 키니어 씨의 가슴에 엽총을 발사해 살해하고 지하 창고에 쑤셔 넣은 다음, 계획대로 귀중품을 챙겨 주인의 말과 마차를 타고 밤새 토론토로 달려 새벽 다섯 시에 힐튼 호텔에 도착, 종업원들을 깨워 아침을 먹는다. 날이 밝자 배를 타 호수 건너 미국 땅에 도착해 여인숙에 방을 두 개 얻어 따로따로 자다가 새벽에 캐나다 리치몬드에서부터 따라온 추격팀에게 붙잡혀 토론토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맥더모프는 즉시 교수형, 그레이스는 최초로 사건을 수임 받은 법정변호사의 전략적 변호로 무기징역을 받아 목숨을 구하는, 당대의 엽기 사건이었단다.
이게 1843년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시간이 흘러 1859년, 정신병원을 거쳐 그리스 신전 양식으로 킹스턴에 신축된 교도소에 입감된 그레이스는 맵찬 손끝으로 바느질과 재봉, 하여튼 그런 방면에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고, 수감생활 역시 타의 모범이 되던 바, 낮에는 교도소장의 집에서 침모 역할을 하고 밤에는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 잠만 자는 행운을 얻게 된다. 여기에 지역 목사를 위시해 킹스턴에서 방귀 좀 뀐다는 부인네들을 주축으로 그레이스의 사면을 위해 진정서를 넣기 시작하는 일단의 집단이 생겨, 유럽에서 정신병리학을 전공한 의사이자 남자 주인공인 사이먼 조던 박사를 초빙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조던 박사는 아름다운 그레이스 양을 자기가 원하는 날의 오후에 몇 시간씩 마주 앉아, 물론 방문은 열어놓은 상태로, 어렸을 때부터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의 모든 것을 듣고, 이를 메모해 정리한 다음, 진짜로 그레이스가 살인에 가담을 했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려고 한다. 여기서 그레이스는 침착한 태도로 바느질을 하면서 바늘땀을 쉬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며 무죄를 주장하는데, 바로 이게, 여태까지 앞에서 떠는 모든 건 다 곁가지에 지나지 않고, 그레이스가 진짜로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적어도 살인에 관해서 무죄인지, 아니면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걸 밝히는 과정이, 찐이다.
물론 그레이스가 진짜로 낸시의 목을 조르는 맥더모트를 도와 함께 교살에 가담을 했는지 아닌지, 나는 죽어도 알려드리지 않겠다. 진짜다. 지금 누가 내게 달려와, 그레이스가 죽였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라고 목에 칼을 들이밀고 알려달라고 해도 난 그럴 수 없다. 아 글쎄 진짜라니까. 하나만 말씀드리지. 그레이스가 사십대 중반, 한 마흔네 살 가량 되었을 때 정말로 사면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해 나름대로 편안한 인생 후반을 누린다는 거. 이 정도야 말해드릴 수 있지. 나머지는 알아서들 생각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