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반생기 범우문고 80
양주동 지음 / 범우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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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올라가서 처음으로 교과서를 통해 양주동의 글을 배운다. <몇 · 어찌>. 지금 읽어보니 수필을 중학생 수준에 맞게 자르고 쉬운 말로 풀어쓴 글이었다. 양주동, 자칭 우리나라의 최고 천재이자 국보 1호이자, 연세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 이후로 꼭 ‘박사’라는 호칭을 가져다 붙이는 양주동 박사는, 지금 종편에서 출현하는 정도로 치면 원래 시를 썼다가 문화비평가라고 하기도 하다가 상당한 수준의 음악평론도 했다가, 이젠 별의 별 참견을 다 하는 김갑수 정도의 빈도로 TV에 출연을 해, 익히 이이의 입심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벌써 천국의 환희를 맛보고 계신, 편히 쉬시기를, 이주사께서 직접 양박사를 사사하셨는지라 흑백 TV에 양박사가 나오기만 하면, 이 양반의 말버릇이라든지, 혹시나 강의실에 간혹, 아주 간혹, 당시가 1950년대였으니 진짜 드물게 여학생이라도 한 명 있으면 지금 시절 같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은유법을 사용해 은근한 음담까지 곁들이기도 하고, 양복 윗저고리 호주머니에 든 땅콩을 까먹으며 특유의 구수한 입담을 풀어놓아,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전공 학생은 물론이거니와 학교에 청강 한 번 안 해본 학생들이 없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하시고는 했는데, 그중 백미는 워낙 수강신청 인원이 많아서 시험 본 후에 일일이 채점하기가 곤란하니, 1950년대의 일반 가정에서는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던 철제 선풍기 앞에 시험지를 올려놓고 선풍기 틀어 멀리 나가는 놈인지 아니면 가까이 떨어진 놈인지한테 A를 주었다나, 하여간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아니 될 천만의 말씀을 하시어,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는가, 의심도 해본 적이 있는, 말 그대로 당대의 인물이기는 했다.  선풍기와 학점 주는 이야기? 그거 진실일 거다. 내가 군대 갔다가 와서 복학한 1980년대에도 어떤 선생이 리포트를 요구하는데, 주문이 ‘원고지 다섯 매 이내’였으며 선생한테 잘 보여 학점 좀 좋게 받으려고 다섯 매를 넘겨 작성해 제출했다가 장렬하게 D 학점을 받는 것도 봤으니 하물며 1950년대에랴. 하여간 당대의 문제 교수였던 양박사는 하도 인기가 높아 특강하러 다니지 않은 학교가 없어 내 부모 두 분 다, 편히 쉬시기를, 양박사의 강의를 들은 바 있어 TV에 이 양반만 떴다하면, 사마천의 <사기>부터 <삼국지연의>, <당시>를 거쳐 향가 스물다섯 편과 고려가요의 남녀상열지사를 에두르고 난데없이 세기말 프랑스 시인들으로 훌쩍 뛰어넘는가 싶은데 또 영미 시인 등등 그야말로 국경도 없고 시대도 없고 동서양도 없는 잡학다식의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나니, 오늘에야 알았다. 두 분이 양주동 박사, 국학에 관한 실력으로 말하자면 당대에 감히 누가 있어 양선생에게 ‘박사’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을꼬, 어쨌건 평생소원이었던 ‘박사’라는 말을 듣고 그리 좋아했다 하니 이렇게 불러도 실례는 아니렸다, 이이가 쓴 《문주반생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플레이 온play-on, 하셨던 것이었다.
  지금도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위에 거론한 <몇·어찌>가 무엇인가 하면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幾何라는 것을 처음 접한 양주동 소년이, 기하? 기하? 과연 기하란 것이 무엇일꼬? 기幾는 ‘몇’이란 말이고 하何는 ‘어찌’란 뜻이니 합하면 ‘몇 어찌?’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말이지? 기하란 놈의 정체를 한 열흘 넘어 고민하다가 드디어 중학교에 입학을 해서 첫 기하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교사에게 “선생님! ‘기하’란 말이 대관절 무슨 뜻입니까? ‘몇 어찌’라뇨?”라고 질문을 했겠다. 선생이 한참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너, 영어를 하느냐?” 그리하여 “모릅니다.” 이어 선생께서 못을 박는 말씀. “그럼, 영어를 좀 알게 되거든, 그때에 가르쳐주마. 그런데 이놈아, 그 모가지가 무엇이냐? 내일은 잘 씻고 와!”
  한 번 몰두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이 한 가지 궁리에 빠져버리는 이런 종류의 인간들이 노상 그렇듯이 ‘기하’라는 것의 뜻을 간파하기 위해 소년 양주동은 세수고 뭐고 도통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였다. 그래 목에 새까맣게 때가 앉았던 것. 어쨌든 나중에 기하는 중국말로 ‘지호’라고 발음하며 서양에서 넘어온 측지술, 지오메트리geometry의 ‘geo'를 중국어로 쓴 것을 다시 그대로 우리가 쓴 거란 설명이다. 이게 나 중학교, 아마 1학년 때이지 싶은데, 그때 교과서에 실린 내용.
  근데 더 재미있는 게 있다. 이이가 현해탄을 건너 동경엘 가서 와세다 예과에 들어가려 시험을 치는데, 영어 문제에 “영국 황태자 전하께서 모월일에 본방(本邦:본국, 우리나라)을 내방하시와…”을 영어로 쓰라는 문제가 나왔단다. 그때까지 영어 독학을 했다하나 실력이 뛰어나지 못해 ‘황태자’나 ‘전하’ 같은 단어는 알지도 못하고 영감inspiration이란 단어도 한문을 통해 배운 터여서 ‘연사피리순煙士披里純’으로 발음했던 수준이라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영어로 만들어 답안지를 메꾼 것이, “The First Son of English Emperor visited this country…"였단다. 하여튼 하바드, 아니, 와세다 영어과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전문에 교수로 재직할 때 영어 입시 문제를 낸 바,
  "조선은 6월에 비가 많이 온다."
  라는 시험문제를 내니, 어느 지원학생이 답안지에 쓰기를,
  “Korea six moon rain many come"
  이라 해서 0점을 주었단다. 마지막에 피리어드만 찍었더라면 1점은 주었을 거라 하면서. 근데 미국인 교장이 양박사에게 어찌어찌하여 이 학생을 반드시 입학을 시켜야 하니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더란다. 도대체 마땅한 설명이 없어 이 답안지를 보여주었더니 미국인 교장이 파안대소하며 이런 문장은 영시를 아주 잘 쓰는 해박한 영미 시인들이나 쓸 수 있는 수준이라 우겨, 0점 앞에다가 6자로 보태 60점을 주긴 주었는데, 미국인 교장의 권유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와세다 대학 입시를 칠 때 The First Son of English Emperor가 머리에서 삼삼해 그랬다나?
  이 책 《문주반생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잘난 척이다. 가히 당대의 혁명여걸 강경애와 1년을 동거할 만한 지적 수준의 재원인 것은 틀림없다. 이런 인간이 자기 자랑을 무려 책 한 권에 걸쳐 계속하면 대개 독자들이 짜증을 내다가 욕이나 한 바가지 쏟고는 책을 덮기가 십상인데, 천만의 말씀. 양주동 박사의 《문주반생기》을 읽다가 보면, 그가, “귀엽다.” 양박사의 우리나라 고전 해석에 관해서는 아직도 후학들이 그를 완전히 능가하지 못했을 정도로 탁월하고, 동서양과 시대를 초월한 지식과 정서와 문학적 요소 역시 지금 수준에서도 눈부실 정도에다가, 술에 관한 한 바탕 기행 역시 만만하지 않아 사실 이이가 할 말이 많기는 했을 거다. 그런데 어찌 이야기를 이리도 재미있게 하는지, 이이의 뻔뻔함이 오히려 무구하게 들려오는 것은 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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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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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달아 같은 작가의 책을 읽었다. 러셀 뱅크스. 거 참. 괜찮은 미국 소설가다. 러셀 뱅크스가 이번엔 1993년에 시작해 1년 동안 미국 북동부 뉴욕 주 애디론댁 산맥 근처, 전작 <달콤한 내세>의 공간이었던 샘덴트 마을에서 멀지 않은 오세이블 지역에 사는 열네 살 사춘기 청소년 채피(채플린) 도싯의 방황과 성장을 활극적 요소를 담아 재미있게 써놓았다. 내가 말하는 ‘활극적 요소’ 때문에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북부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고도 했었던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허클베리, 그리고 이 아이와 어울려 온갖 장난을 해대는 톰 소여, 이 아이들, 정말 악당 아니던가? 어린이의 탈을 쓰고 조금이라도 측은지심이 있는 어른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험한 일을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치우고나선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젖히는 소년들. 허클베리와 톰에 비하면 <거리의 법칙>에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인 채피는 진짜 착한 아이다. 불과 열네 살 나이에 비록 마리화나가 주는 몽롱함과 환각과 착란을 너무 사랑해서, 공부 못하고, 말도 안 듣고, 도둑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말이 열네 살이지,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열다섯, 소위 중2다. 북한에서 이 아이들 무서워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중2. 15년 전, 엄마는 그때까지는 돈 좀 있는 집안의 외아들이자, 키도 크고 생기기도 멋들어져 마치 JFK가 다시 환생했다는 소리까지 들은 바 있는 폴 도싯 청년과 눈이 맞아, 오빠를 믿고 피 끓는 청춘끼리 가슴만 맞대고 자자, 했다가 덜컥 채피가 들어서는 바람에 혼인을 했다고 주장을 한다. 이때도 외할머니는 돈 많고 잘 생기고 키 크면 뭐하느냐, 저 청년이 젊은 나이에 벌써 마약쟁이로 떨어져 조만간 가산 탕진하고 신세도 망칠 것이 뻔한 것을, 하며 극적으로 반대를 했지만, 그럼 어떻게 하나, 배 속에선 채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걸. 그래도 초장엔 사이좋게 잘 살았단다. 한 5년. 그러다가 아빠 폴이 코카인과 알코올을 과도하게 탐닉하여 돈도 다 떨어지고 이젠 제법 크고 안락한 집만 하나 남았을 때, 외할머니가 부득부득 강권을 해서 집과 매달 백 달러의 양육비는 엄마가 갖고, 아빠는 대신 언제든지 아이를 접견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는데, 코카인과 알코올로 젖은 세월에 어떻게 양육비를 줄 수 있겠는가 말이지. 외할머니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소송을 진행시킬 무렵, 아빠는 자메이카로 날라버리고 은행계좌에 남은 돈을 몽땅 자메이카로 옮긴 채 이제 작은 섬나라에서 아프리카의 피가 반이 섞인 아이들을 생산해가며 살고 있단다.
  근데 그건 몰랐지? 외할머니가 이제 나이 들어 여태 살던, 우리나라 식으로 설명하자면 다 쓰러져가는 원룸에서 좀 편하게 딸네 집에 붙어 살고 싶어서 딸을 그리 윽박질러 이혼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디 되면 그게 세상살이인가. 엄마는 옆 동네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건설관련 기술자로 있는 켄이라는 남자한테 퐁당 빠져 곧바로 동거를 거쳐 결혼에 이르러 외할머니는, 괜히 딸만 이혼시켜버리고, 여전히 좁은 원룸에서 사는 팔자였다.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외손자가 하여튼 쫓겨나든지 가출을 하고, 부부가 오지게 싸움을 벌여 서로 사랑은 하지만 잠깐 별거상태로 들어가자 난데없이 딸이 베개 하나 들고 좁아터진 원룸으로 잘 곳을 찾아오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여튼 새로 결혼해 이제 호적상 나, ‘채피’의 양아버지가 된 켄이 채피에겐 결정적인 쥐약이었다. 그래 켄에서 뿜어 나오는 겉으로 보면 보통의 아버지 이상의 덕성과 자애와 정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채피에게 잘 된 일이라고 하지만 정작 채피 입장에선 얼굴은커녕 눈도 마주치기 싫은 벌레같이 보이는지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 년 삼 년이 지나 켄을 향한 반발심으로 학교 공부는 아예 작파를 하고 모호크 스타일의 머리모양에 코와 귀에 피어싱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 얘기했듯이 채피의 일탈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해피스모크, 마리화나에 맛을 들여 늘 돈이 필요한 처지로 떨어져 그저 일상이 집에 있는 돈 좀 나가는 물건이면서 내다 팔아도 엄마와 양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할 것이 더 있나 온갖 구석을 뒤지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채피는 드디어 엄마와 켄의 방까지 진입하여 깜깜해 보이지 않는 옷장 바닥을 깊숙이 손을 넣어보니 뭔가가 잡히는 것이 있어 꺼내보니까, 낡은 검은 가죽 가방이 두 개가 나왔다. 하나를 열자 세 부분으로 분해되어 있는 22구경 소총과 소총에 탈착할 수 있는 망원경. 우와. 다른 하나를 열어보니 검은 비닐봉지가 삼사십 개 있는데 전부 옛날 동전, 즉 골동품 수준은 아니지만 희귀성으로 돈 좀 되는 동전 또는 은화 같은 것이 꽉 차 있던 거였다. 그래 이중에서 동전을 몇 개,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만 가지고 나가 전당포에 디밀어봤더니, 무려 80달러를 쳐주겠다는 거 아닌가. 아오! 채피의 짧은 생애 동안 무려 80달러어치의 마리화나를 사본 적이 없었단다. 그래 흐뭇한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의 친구(인 것으로 착각하는) 러스가 사는 비디오가게 위층의 아지트로 가서 함께 이것을 다 피우려고 했다가, 방을 함께 쓰는 거친 폭주족들도 가세하는 바람에 별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다 없애버린다.
  그럼에도 이제 액면가가 몇 센트에 불과한 동전들이 높은 거래가를 형성하는 것을 알고 그것이 거의 다 없어질 때까지 마리화나로 바꾸어 연기로 만들어 날려버렸을 때, 드디어 엄마와 양아버지에게 발각이 나고, 몇 대 쥐어터지고 집에서 쫓겨나 러스의 아지트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천국의 희열을 맛보고 계신 정여사께서 젊어서 청소년 카운슬링을 겸했던 적이 있다. 그때 옆에서 어깨 너머로 갖가지 사례를 보기도 했고,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문제아 시절을 한 두 해 정도 지낸 아이’를 키웠던 입장에서 유심히 보기도 한 결과, 문제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은 문제의 시발점은, 아 씨, 나도 양심의 가책이 좀 되는데, 거의 전부, 99퍼센트, 부모한테 있다. 채피가 왜 이리 골통 문제아가 됐을까? 이건 책의 중간부분에 나와서 여기다가 확 써놓아도 스포일러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는 직접 읽으셔야 한다는 신념으로 소개를 하지 않겠으니, 독후감을 읽어주시는 제위께서는 양해해주시기 바라며, 다시 채피로 돌아와, 채피가 허클베리, 톰하고 다른 점을 하나만 이야기해보자.
  비록 쫓겨나 이제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당했어도 양아버지는 몰라도 엄마한테는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 거다. 이미 일탈 청소년이 된 채피 입장에서 선물을 손에 쥐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어떤 방식으로 얻느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이 아이는 크리스마스를 한 열흘 앞에 두고 ‘빅토리아 시크릿’이란 고급 여성 속옷 파는 상점에 들어가 초록색 실크 나이트가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아뿔싸, 가끔 자기가 조금씩 마리화나를 팔고 했던 흑인 청원 경찰 바트에게 현장에서 들키고 만다. 그래 사무실에 붙잡혀 기어이 엄마와 양아버지가 상점에 호출되어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빈 연후에나, 다시 학교에 들어가 8학년까지는 마치고, 집에서 생활하겠다는 전제 하에 경찰서에 넘기지 않고 돌아가게 된다. 물론 양아버지는 경찰서에 이어 소년원으로 보내 응분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 오히려 더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상점 밖으로 나온 일가족 중에서 외아들 채피는 엄마한테 급하게 쓸 돈 20달러가 필요하다고 하며 곧바로 집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하고 그길로 다시 내빼 20달러어치 마리화나를 사서 다시 러스의 아지트로 향한다. 바야흐로 진정한 청소년 일탈의 길을 걷기 시작.
  이후? 범죄가 있고, 사고가 있고, 누군가가 자신의 안전여부를 확인하고 안전하지 않다면 구해줄 선의의 행동으로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고, 뜻밖에 선의와 지혜가 넘치는 자메이카 사람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채피 자신의 올바른 자존을 되찾는다는, 다분히 미국식 결말. 참 재미있는 소설이긴 한데, <달콤한 내세>에 쓴 것과 같은 얘기로 결말을 맺어야 하는 것이 아쉽다. 꼭 이런 결론을 내야 했을까, 하는 것. 요새 미국 소설을 제법 읽는다. 이들의 공통점, 아니면 적어도 어떤 스타일을 발견하는 것 같아서 찜찜하다. 소설의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하여 작가-(출판)편집자 라인이 ‘정형화된 틀을 만들어 마치 찍어내는 것 같은 작품’들. 미국 소설을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하여간 느낌이 좀 그렇다.
  위에 소개한 스토리는 전체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냥 맛보기니까 스포일러라 생각하실 필요 없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섞여 있는지 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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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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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한테 아쉬운 것이 뭐 한두 개 인가마는, 내 경우엔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접은 것도 중요한 한 가지다. ‘모던 클래식’ 1, 2호를 장식한 <내 이름은 빨강>은 민음사와 이문열이 오랜 계약을 끝냄으로 인해 세계문학 시리즈 51, 52번이었던 <황제를 위하여>를 절판시킨 자리를 채우는 고임돌로 쓰임으로 해서 ‘모던 클래식’의 장례를 만방에 고하였다. 러셀 뱅크스, 라는 처음 들어보는 미국 작가의 책 두 권이 ‘모던 클래식’으로 나온 적이 있었으니 하나가 <거리의 법칙>이요 나머지가  다음 주 월요일 포스트를 올릴 <달콤한 내세>이지만 두 권 나 나란히 절판. 뱅크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엔 ‘모던 클래식’으로는 절대로 중쇄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데 만 원 건다.
  책의 앞날개에 은발에 흰 수염을 기른 러셀 뱅크스의 사진이 나오고 그의 약력이 씌어 있다. 1940년 매사추세츠의 가난한 노동자 집구석에서 장남으로, 1940년에 태어난 러셀은 뉴햄프셔에서 자라 집안에서 배출한 첫 번째 대학생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공부를 무지 잘했을 거 같다. 그러니까 없는 집에서 대학까지 보내지 않았겠나. 그러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는 작가가 되려 했지만 그게 쉽게 되는 게 아니라 그 동안에 유수의 직장에 취직하는 대신 배관공, 신발 판매원, 창유리 절단공 등의 경력을 쌓았고, 이게 나중에 작품 곳곳에서 경험자 특유의 생동감 있는 묘사로 빛을 발한다 하니 젊어서 고생은 뭐? 사서도 한다고? 염병이다. 안 해도 되는 고생이라면 안 하는 게 훨씬 낫지. 미쳤냐? 그것도 사서 하게. 이이도 미국의 60년대에 대기업에 들어가 정글의 경쟁 속에 편입되었다면 돈은 벌었을지언정 작가의 꿈은 영영 날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작품 <달콤한 내세>는 미국 북동부 지방의 애디론댁 산맥 근처, 일찍이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에서 봤듯이 좀 야만스러운(아마 스칸디나비아에서 왔을) 인종들이 살던 뉴펀들랜드하고 가까운 미국-캐나다 국경지역이어서 그랬는지 근친혼을 감행했던 인종들이 조금 섞여 있는, 도시에서 멀고 먼 산악지역 샘덴트 마을에서 1991년 1월 27일 아침에 있었던 불행한 교통사고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말한 ‘도시에서 멀고 먼’은 지리적 거리로 말하면 뉴욕까지 승용차로 불과 여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8월 말에 벌써 짙은 가을의 냄새가 나며 겨울 내내 2미터 높이로 눈이 쌓인 숲 속이라는 자연 생태적 거리에 더 중점이 맞춰질 것인데 여기도 역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생긴다.
  먼저 소개해야 하는 등장인물이 이젠 거의 쓰이지 않는 전형적인 할머니 이름의 돌로레스 드리스콜 여사. 다 큰 두 아들의 어머니이고 1984년에 뇌졸중이 덮쳐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 신세를 지는 남편 에벗을 정성을 다해 돌보며 진심으로 사랑할뿐더러 그의 지혜로운 사고를 존경하는 신체 건강하고 마음 따뜻하고, 동네에서 두루 높이 추앙받는 인격의 소유자로 1968년부터 샘덴트 마을에서 스쿨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운전기사다. 그러니까 같은 노선의 스쿨버스를 23년째 하고 있으니 노선 인근에 자리한 모든 집안의 내력을 빠삭하게 알고 있으며, 가족들의 성격과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외모의 특징, 몇 주의 간격으로 부부싸움을 하는지 까지, 아울러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에 따른 도로의 특성과 피해야 할 장애물의 생성과 소멸, 최적의 회전 반경과 속도 같은 것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이이를 제외하고는 스쿨버스의 운전기사를 생각해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야기의 시작이 1991년 1월 27일. 아침 온도 영하 8도. 눈 예보가 있으나 날씨가 추워 습기를 품지 않은 싸라기눈이 내릴 것 같다고 짐작하는 돌로레스에게 총명한 남편 에벗은, 북극에도 눈이 내린다고 한 마디 했는데, 처음엔 흐리기만 하더니 조금씩, 조금씩 눈이 내리다가, 수차례 산길을 오르고 내리기를 드디어 끝내고, 이제 스쿨버스 안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것 같은 주정뱅이 램스턴의 세 아이들과, 베트남 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일반적인 참전용사와는 다르게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아 지역의 모범이 되는 홀아비 빌리 안셀의 쌍둥이 남매와, 미스 아메리카는 모르겠고 미스 뉴욕 정도는 가볍게 차지할 거 같은 착하고 아름다운 니콜 버넬과 두 남동생, 경매로 사들인 바이더와일 모텔이 장사가 되지 않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리사와 웬델의 자폐증세가 있는 아들 션과, 비트족 출신임이 거의 틀림없지만 누구보다 모범적인 삶을 사는 목각 공예가 완다와 하틀리 오토 부부가 입양한 인디언 족 아들 베어와, 근친혼이 피해야 할 풍습이 아닌 지역에서 온 가족의 아이들 등 스무 명이 조금 안 되는 아이들을 싣고 드디어 산길을 내려와 약간의 내리막 직선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속도를 올리고, 내리막이라 점점 가속되는 것도 충분히, 수천 번 경험했던 돌로레스의 눈앞에 개, 아니면 개 비슷한 형체, 그것도 아니라면 환영 같은, 그러나 분명 뭔가가 갑자기 휙 지나가는 순간, 돌로레스의 머릿속에서는 저 물체가 어떤 것이든지 50인승 버스로 그냥 치고 나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가슴으로는 차마 살아 있는, 솔직히 말하자면 생물체인지 환영인지, 아니면 때마침 버스 앞 유리창에 와이퍼를 작동시켜야할 만큼 내리는 눈들이 바람에 날리며 만들어낸 형체인지 하여간 그것을 버스 정면으로 부딪힐 수 없어 핸들을 오른쪽으로 휙 꺾음과 동시에, 눈 내리는 아스팔트길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콱 밟으니 당연히 대형버스는 그 자리에서 휙, 차체가 한 바퀴 휙 돌면서 내리막을 확실하게 시속 85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미끄러져 길 가에 허술히 걸쳐놓은 가드레일을 부수고 백 여 미터에 달하는 언덕으로 쏟아져 내려가며, 마침 여름 내내 모래를 파내고 생긴 웅덩이에 버스 뒷부분이 풍덩 빠져 많은 어린 아이들이 현장에서 즉사를 해버리고, 적은 수의 앞에 앉은 아이들은 극적으로 경상만 입은 채 빠져나왔으며 극소수는 목숨을 건지는 대신 척추가 부러져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근육을 쓰지 않으면 몸이 뻣뻣해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 남은 생애가 다 할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씩 도시 레이크플레시드로 나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를 당한다.
  작품은 운전기사 돌로레스 드리스콜, 베트남 참전용사이자 자동차 정비공장 사장 빌리 안셀, 멀리 뉴욕에서 와 피해주민들에게 사고에 대한 소송을 종용하고 진행하는 변호사 미첼 스티븐스, 목숨은 건졌지만 하반신 마비가 된 니콜 버넬, 이렇게 네 명의 일인칭 시점으로 구성된다. 화자가 바뀔 때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이한 개인사가 등장해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면서 재미를 배가하는데, 다시 돌로레스 드리스콜이 화자가 되는 마지막 장章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이 소설이 전형적인 미국식 결말로 귀결되며 당신은 약간 실망할지도 모른다. 미국식 결말이 뭐냐고? 그건 직접 읽어보시면 아시지. 아, 근데 이 책이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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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20-07-0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주신 내용 보면 엄청 흥미로운데 말여요, 절판인가요?
민은사 모던 클래식에서 새로운 작가도 알게 되고, 표지도 나름 이뻐서 좋아햇는데 그리 되었나요?

Falstaff 2020-07-03 11:51   좋아요 0 | URL
민음사 모던 클래식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받은 이후 그의 책을 무더기로 찍어냈습니다.
이후 품절된 책 몇 권은 다시 중쇄를 냈는데, ‘절판‘된 건 이제 내지 않는 거 같습니다. 시리즈의 1, 2번이 다른 시리즈로 옮긴 자체가 더 이상 이 시리즈를 계속하지 않겠다는 굳은, 변하지 않는, 초지일관한 의지로 읽힙니다.
 
리브라 - 돈 드릴로 장편소설
돈 드릴로 지음, 정회성 옮김 / 창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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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 노이즈>와 <마오 II>를 재미있게 읽어 서슴없이 <리브라>를 골라 읽었다가 혼쭐났다. 작품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대단히 많은 등장인물들이 본명과 가명을 섞어 사용하며, 여전히 음모론에 휩싸여 혼돈을 자아내고 있는 JFK, 존 핏제럴드 케네디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노트에 메모를 해가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좀 지나고부터 메모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작은 글씨로 무려 아홉 페이지를 노트했다. 당연히 읽는 시간도 보통의 작품보다 배는 더 들었을 듯.
  마거리트 클래버리 오즈월드라는 여인이 있었다. 에드워드와 결혼을 해 살다가 아들 존을 낳자마자 이제 영원무궁하도록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악몽에 시달리던 에드워드는 공포에 질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두 번째 만나 결혼한 로버트 E. 리 오즈월드 씨는 보험 모집원으로 둘째 아들 로버트를 낳고, 셋째이자 막내인 리가 태중에 있던 여름날, 불타는 더위 속에서 잔디를 깎다가 피식 쓰러져 발발발 팔 다리를 떨더니 그만 숨이 넘어갔다. 세 번째 남자 에크달 씨로 말하자면 나이가 지긋한 엔지니어로 한 달에 천 달러 이상을 벌어오는 괜찮은 남자였지만 마거리트의 눈을 속이고 바람을 피운 게 걸리는 바람에 이혼을 해버리고 만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피우라고 해도 바람 같은 거 못 피울 터인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이혼을 해버려,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고 비록 구만리는 아니지만 구천리 정도 남은 인생을 어렵게 꾸려나가기에 이른다. 거 옛 말에도 있는데 말이지. 바람피우는 남편은 참아도 돈 못 벌어오는 남편은 못 참는다고. (시대가 1940년대였으니까 말이지만.)
  첫 남편의 아들이자 맏이이며 착한 존은 결혼해서 엄마와 배다른 동생 리와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다. 어려서부터 외톨이 기운이 있던 리가 하루는 형수한테 주머니칼을 들이밀고 다투는 바람에 엄마하고 리는 존에게서 떨어져 나와 둘만의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근데 미국이나 유럽의 저 피부색 허연 것들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한 번 찢어지면 그길로 영원히 안녕이라 맏이 존은 이걸로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로버트는 이꼴저꼴 보지 않으려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잘 적응하며 복무하고 있다가 책의 저 뒤편 결말 부분에 등장해 눈물바람을 한 번 하는 역할을 맡는다. 리는 집에 있던 해병 교범을 보면서 자신도 해병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열여섯 살 때부터 나이를 속이고 입대하려 시도를 하지만 사실 좀 어려보이는 외모라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결손가정에서 자랄 운명이었던 리는 거기다가 가난, 잦은 이사 등으로 점점 내성적 외톨이, 요새 말로 외로운 늑대의 심정을 차근차근 갖추게 된다. 무단결석이 넘치고 넘쳐 거리를 배회하다가 경찰에 의하여 청소년의 집으로 넘겨지기도 하고, 청소년 상담사와 심리 테스트로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뉴욕 지하철역에서 “로젠버그 부부를 살립시다.”라는 유인물을 구경한 적이 있는 리는 엄마와 뉴올리언스로 이사를 하고 마침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서 지적 영역을 확장하니,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을 독파,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임은 선언한다. 근데 사실 이건 학교나 동네에서 리가 자신들과 달리 북부, 뉴욕 말씨를 쓴다고 아이들이 집단 따돌림, 속어로 ‘다구리’를 가하는데 반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런 경위를 거치면서 리 오즈월드는 자기가 앞으로 할 일로 부두 근처에 있는 미국 공산당의 세포조직에 가담하는 것하고, 해병대에 입대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리가 마르크스주의와 해병 교범을 읽기 전의 유일한 취미생활은 목요일마다 방영해주는 범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교범을 읽으며 살인의 요령을 외우게 된다. 사람이란 것이 하나를 알게 되면 그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정상이라, 데이비드 페리라는 이름의 주요 등장인물로부터 고장난 22구경 권총을 15달러에 사서, 결국은 고치지 못해 형 로버트 오즈월드에게 10달러를 받고 넘기기도 한다.
  드디어 리가 열여덟 살이 되기 한 달 전, 174cm, 62kg의 몸으로 해병대에 입대, 훈련을 받고는 미닫이문과 눈이 가늘게 찢어진 매춘부의 나라 일본, 그중에서 아쯔기에 있는 레이더 기지의 레이더실에서 근무한다. 아쯔기의 레이더 기지에는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 정찰기 U-2기가 상공 24km까지 올라가 주로 소련과 중공을 촬영하고는 했으며 이게 상당한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일본에서 리는 미쯔꼬라는 이름의 서른네 살 먹은 매춘부와 그녀의 관리인이자 사회주의자인 코노라는 남자와 유대를 갖는다. 그래 머리를 굴려보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군사비밀을 소련에 넘기면 소련에서 자신을 환대해줄 거 같은 거였다. 일본 생활에도 염증을 느끼기 시작해 코노에게 선물로 받은 작은 데린저 식 은도금 권총으로 자신의 왼쪽 팔을 쏘아 의병제대를 시도하지만, 팔뚝은 작은 수술로 탄알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고, 자신은 허락받지 않은 총기를 소지한 혐의로 군법재판에 넘겨져 28일 동안 영창에서 별 짓을 다 당한다. 1957년엔 미국 영창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근데 텍사스로 거처를 옮긴 엄마가 때마침 작은 사고를 당해 얼굴에 부상을 당한 것을 기회로 의가사 제대를 해 포트워스로 간 리는 일본에서부터 뜻을 세워 조금씩 러시아어를 공부하더니 스위스 쿠르발덴에 있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 합격한다. 원서에 학기가 끝난 후 핀란드 투르쿠 대학의 하계 세미나에 참석하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백하게 밝히고. 그러더니 정말로 스위스, 핀란드를 거쳐 하루 만에 소련 비자를 받더니 모스크바로 망명해버리는 거다. 소련 땅에만 가면 술이고 음식이고 집이고 자동차고 다 해줄 줄 알았겠지. 그러나 천만의 말씀. 현재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 있는 공장의 노동자로 보내버린다. 소련. 엄청난 대지와 풍광과 사람들의 스케일, 그리고 추위. 여기서 리는 미숙련 금속 노동자로 지내다가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 없어 ‘마리나’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결혼해 딸을 하나 낳고, 다시 미국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귀국길에 오르는데, 소련은 알고도 못 본 척한다. 골치 아픈 인간 하나가 제 발로 땅에서 나가겠다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던 거다.
  그리하여 이제 텍사스 댈러스 근방에 자리 잡은 리 오즈월드 부부. 리는 이곳의 교과서 창고 6층에서 1963년 11월 22일 링컨 컨티넨털 무개차에 분홍색 투피스를 입은 아내 재클린과 코넬리 텍사스 주지사 부부와 함께 타고 신나게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JFK에게 세 방의 총알을 발사하게 된다. 첫발은 케네디의 어깨와 목 부근에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라고 판단해, 두 번째 총알을 날리는데 그건 엉뚱하게 코넬리 주지사를 정통으로 맞혀버리고, 세 번째 총알은 완전히 빗나간다. 그럼 한 순간 대통령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가 싶다가 뭔가가 퍽 물결치며 흩날리게 하는 총알은 누가 쐈을까? 이리하여 케네디 암살 사건을 둔 음모론은 여태까지 사라지지 않은 채 숱한 작가, 역사가들이 픽션 또는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돈 드릴로도 <리브라>를 통해 음모론의 하나를 만들어낸 것. ‘리브라Libra'는 천칭자리라는 뜻으로 리 하비 오즈월드라는 이름의 인간, 바로 천칭자리, 암살자를 상징한다.
  무엇이 리 오즈월드로 하여금 대통령을 암살하게 만들었을까. 이게 이 책이 재미있는 핵심인데 내가 맨입으로 가르쳐드릴 수야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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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노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5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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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모리슨의 세 번째 작품이며 앞으로 상복이 터질 그녀에게 처음으로 큰 상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안겨준 장편소설. 토니 모리슨은 1993년에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라서 이이의 일생에 대해서 말을 보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내가 읽어본 모리슨 가운데 특히 <재즈>와 <러브> 같은 비교적 후기 작품의 경우에, 그저 흑인이나 젠더, 아니면 합해서 흑인 젠더 문제를 다룬 것이겠거니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 심각하게는 아니지만 혼쭐이 난 적이 있어서 <솔로몬의 노래>도 혹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되지는 않을까 약간 조심스럽기는 했다. 읽어보니 초기작이라 그런지 읽는 대로 진도가 잘 나갔다. 후속 작인 <빌러비드Beloved>와 비슷한 정도라고 하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듯.


  이야기는 1931년 2월 18일 수요일 오후 세 시에 시작한다. 주로 흑인들을 위한 보험회사인 노스캐롤라이나 상호생명보험사 직원 로버트 스미스 씨가 시의회가 있는 메인스 애비뉴의 북쪽 끝에 자리한 머시종합병원의 돔 지붕 꼭대기에 모습을 나타내 대중의 눈을 끈다. 사람들 속에는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 이이의 언니 커린디언스(신약성서의 ‘고린도전서’ 할 때의 ‘고린도’의 영어식 발음)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려 이들이 하는 유일한 작업/노동인 붉은 벨벳으로 만든 인조 장미꽃잎이 사방에 날렸고, 파일러트Pilate(사도신경에 “본시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할 때 ‘빌라도’의 영어 발음) 라는 이름의 다부진 체격을 한 여인은 흑인 특유의 깊은 공명이 담긴 콘트랄토 목소리로 “오 슈거맨 날아가 버렸네 / 슈거맨 사라져버렸네 / 슈거맨 하늘을 가로질러 / 슈거맨 고향으로 돌아갔네.”라고 노래했으며, ‘기타’라는 꼬마가 스미스 씨를 가리키며 저 남자가 누구냐고 묻자 두 주에 한 번씩 보험금을 걷어가는 바보천치 중에서도 바보천치라고 답변을 했는데, 드디어 로버트 스미스 씨는 커다랗고 푸른 날개처럼 생긴 옷을 입은 채 돔 지붕에서 하늘을 향해 크게 날아올랐으나, 그건 스미스 씨의 몇 초 안 되는 상상 속에서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스미스 씨의 영혼은 모르겠고, 육신은 칼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의 시멘트 바닥으로 거꾸로 처박혀, 철퍼덕, 그러나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은 채 생명이 있는 인체라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자세로 엎어져 있었던 거였다.
  바로 이 순간,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 커린디언스의 엄마이며 십 수 년 만에 산기가 있던 루스 데드 여사, 이 거리 최초의 니그로 의사 포스터 박사의 딸이 갑자기 진통을 시작해 머시종합병원에 입원을 했고, 흑인 여자로는 최초로 병원의 계단이 아니라 병동에서의 출산이 허용되었으니, 다음날 이 기념비적인 출산 끝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자 우리의 주인공인 메이컨 포스터 데드 3세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외할아버지 포스터 박사, 니그로 출신 최초의 의사를 기념하고자 처음엔 흑인들이, 나중에 대충 많은 시민들이 박사의 병원이 있는 거리를 ‘닥터 스트리트’로 불렀고, 이를 고깝게 여긴 시의회는 ‘메인스 애비뉴’라는 호칭을 의사봉 3회를 두드림으로써 확정하는데, 다시 이를 고깝게 여긴 유색인들이 ‘닥터 스트리트’라고 하지 말라고 했으니 ‘낫 닥터 스트리트’로 불렀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정작 박사를 알고 보면 같은 흑인이라도 피부색이 얼마나 덜 까만색인지를 환자의 등급을 정하는데 가장 유효한 척도로 삼았으며, 자신의 과도한 노동을 달래기 위해 프로로폴이 아닌 에테르에 거의 중독된, 일반적 기준으로 그냥 속물이었던 거다. 주인공의 외가 이야기는 이 정도면 넘친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의 엄마 루스에게 쾌감을 주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이가 이가 나고, 걷기 시작하고, 기저귀를 벗고도 아이와 함께 작은 방에 들어가, 벌써 유치가 다 난 커다란 아이에게 이젠 더 이상 영양소도 없고 들척지근하고 밍밍하기만 한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저택의 하숙인 겸 일꾼이며 수위이기도 한 수다꾼 프레디 씨가 창문 너머로 보고는 온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렸는데,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이니 뭐라 하지는 못했음은 물론이고 루스는 몇 달간 바깥출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창피해 했으며, 우리의 주인공 아이에게는 뭔가 깨끗하지 못한 이름, 더럽고, 내밀하고, 뜨겁고, 어쩐지 혐오감이 드는 “밀크맨”이란 별명으로 책이 끝날 때까지 불리게 된다. 며칠 전에 애너 번스가 쓴 <밀크맨>을 읽어서인지 이 호칭이 나올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좀 헛갈리는 기분을 느낀 건 뭐 개인적인 일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밀크맨과 바로 위의 누나 리나라고 불리는 막달렌과의 나이차이가 열두 살. 어찌하여 이런 터울이 났느냐 하면, 아버지 메이컨 데드 2세가 장인인 포스터 박사가 죽은 다음부터, 그때 아내 루스의 나이가 스무 살이었음에도 그 후로 한 번도 아내와 동침을 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따로 특별하게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다. 물론 이 커플이 왜 섹스리스가 됐는지는 안 알려드린다.
  메이컨에게도 슬픈 과거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 메이컨 1세와 인디언 출신 어머니 싱이 버지니아 주의 깡촌 샬리마(어쩐지 발음이 ‘솔로몬’하고 비슷하지?)에서 해방노예들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는 마차를 타고 미주리 주에 정착해 힘든 노동을 한 끝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 싱은 메이컨이 어려서 아이를 낳다가 산고를 이기지 못해 아기를 배속에 넣은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태중의 아이가 자기 혼자 힘으로 산도를 헤치고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저 위에서 깊은 공명의 콘트랄토 음성으로 노래하던 파일러트다. 태어나면서부터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지 하느님은 파일러트에게 포유류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배꼽을 선물하지 않아 이것 때문에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리바’라는 사생아 딸과, 딸이 낳은 또 다른 사생아 딸 ‘헤이가’를 키우며, 약초, 밀주제조 및 판매를 생업으로 삼는다.
  이 남매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파일러트가 한 열두 살 정도 됐을까 할 때, 약 15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며 이 가운데 50에이커는 훌륭한 경작지, 80에이커는 사슴과 야생 칠면조가 많이 사는 아름드리가 숲, 기타 양돈장 등의 빼어난 농장을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시의 가장 부유한 백인 가문의 대농장 한 가운데 탁 박혀 있고, 거기까지는 좀 봐주겠다 하더라도 흑인, 검둥이가 소유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땅이라 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백인들에 맞서 무려 닷새를 울타리에 앉아 망을 보며 밤을 새우던 아버지가 하필이면 아이들이 보고 있던 어느 날 새벽에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뒤통수를 맞아 울타리 5피트 위로 날아가더니, 영혼은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버렸을지언정 육신은 그냥 땅바닥에 고꾸라져버렸다. 백인들이 이제 실소유권이 넘어간 남매를 죽일지도 몰라 그길로 숲을 향해 달려가 일단 몸을 숨기고, 아들 메이컨이 밤을 이용해 아버지의 시신을 시냇가로 끌고 가 묻어준 후, 여기저기를 전전한 끝에 서로 헤어진다. 이런 과거가 있어서 그랬는지 메이컨은 도시에서 여러 집을 소유하고 이를 가난한 흑인에게 세를 주어 악착같이 돈을 벌어 나름대로 성공한, 백인처럼 사는 흑인이 된다.
  이런 환경과 부모 하에서 성장한 밀크맨. 공부를 더 시켜 의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엄마의 뜻과 달리 아빠 메이컨은 대학을 가느니 어려서부터 자기 밑에서 돈 버는 일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임대주택의 임대료 수금부터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게 이르는데, 나면서부터 가난의 고통을 모르는 우리의 밀크맨은 아버지처럼 배타적 이익추구의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하여 폭넓은 인간관계, 특히 저 앞에서 소개한 ‘기타’라는 인물과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성장한다.
  밀크맨의 나이 열두 살 때 자기보다 다섯 살이 많아 고등학교에 다니는 기타를 만난다. 기타의 손에 이끌려 밀주를 만들어 동네에 싼 값으로 알코올을 공급하는 집에 들어선 밀크맨. 여기서 당연히 고모 파일러트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의 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첫 방문에서 만난 고모의 손녀, 밀크맨보다 역시 다섯 살을 더 먹은 헤이가를 본 순간 자신이 여태까지 본 여자들 가운데 가장 예쁜 여자라고 단정을 하고, 여태까지의 삶 속에서 온전히 행복감을 느낀 적은 이 때가 처음인 것을 알게 된다. 근데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건가? 파일러트가 고모니까 고모의 딸 리바와는 사촌. 그러면 다섯 살 위의 헤이가는 오촌조카. 그러나 이건 우리나라, 소위 동방예의지국의 족보일 뿐, 미국에선 혼인도 가능한 사촌보다 더 먼 친척일 뿐. 그렇지? 맞다. 결국 둘의 교통사고는 피할 수 없다. 첫 만남이 이렇게 인상적인데 어찌 젊은 피를 참을 수 있을까. 근데 그건 하여튼 나중 일이다.
  내가 할 이야기는 다 했다. 여기에 흑백 갈등, 주로 백인에 의한 처벌받지 않는 흑인에 대한 범죄가 나오고, 흑인에 의한 상호 호혜의 원칙에 의하여 폭력을 행사했지만 법원에 의하여 처벌받지 않는 백인의 범죄에 동가同價를 이룰 ‘아무나 백인’을 향한 폭력 결사 ‘7일’, 밀크맨의 아버지와 고모가 도피생활을 할 때의 범죄와 당시 발견했던 황금을 둘러싸고 시작했다가 결국 밀크맨의 부계 족보에 대한 길고 긴 탐색과정과 작품의 시작에서 보험사 직원 로버트 스미스 씨가 시연했던 하늘로 솟구침, 혹은 고향으로 향하는 비상의 은유 또는 상징 같은 것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에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이 토니 모리슨의 필력을 보여주고, 여기에 상상 가능한 것을 독자 제각각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을 펼칠 기회까지 마련해주니 어찌 일독을 권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번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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