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평점 :
에리크 뷔야르는 1968년 프랑스 리옹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데, 웃긴 건 아니고 우리 동양인 인식으로 보면 약간 이상한 집안이다. 에리크가 10대에 접어든 어느 시점에 의사 아버지는 만사를 때려치우고 알프스의 벽촌으로 이사를 해버렸단다.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아 그럼 에리크는 엄마하고 같이 지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이틴 시절의 이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돌아와 통과하기 쉽지 않은 바칼로레아에 덜컥 합격해버리고 대학에서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한다. 이어 1999년에 첫 번째 책을 출간하고 시나리오, 소설 등을 쓰는 등 현재까지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데, 이 책 <그날의 비밀>로 2017년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하니 잘 나가는 작가인 건 맞는 거 같다.
근데 다른 건 몰라도 소설에 관해서는 주로 역사를 바탕으로 전환기가 되는 시점을 다시 조명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을 다룬 <7월 14일>, 벨기에가 현 콩고 민주공화국 지역에서 자행한 악랄한 제국주의적 만행을 그린 <콩고>, 미국 백인이 인디언들을 학살한 내용의 <대지의 슬픔> 같은 것들이 있단다. 물론 뷔야르의 이런 저작들을 더 읽어볼 마음은 없지만 <그날의 비밀>을 위시한 그의 모색이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도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소설이지만 개전과 확전, 종전에 이르는 격렬한 전투 장면 같은 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140쪽의 짧은 분량을 통해 공쿠르 상을 받을 정도라면 전쟁의 단면을 직접 포착하여 날렵하게 처리하는 능숙한 외과의사의 메스 사용법을 익혀야 했을 터. 뷔야르는 첫 장면에서 독일의 경제인 스물네 명이 국회의장 헤르만 괴링의 초청으로 의장 궁전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때는 1933년 2월 20일.
뷔야르는 스물네 명의 경제인 가운데 빌헬름 폰 오펠을 예로 들어 그가 영위하는 활동을 설명한다. 브라흐바흐 지역에서 소농으로 시작해 결혼을 통해 땅을 늘리고 자산을 축적한 가문으로 몇 대 선조 아담이 사용하고 있던 재봉틀을 대폭 개선해서 발전된 기계를 고안했고, 마침 지참금을 제법 가져온 조피 셸러와의 결혼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자전거 공장까지 지어 소위 사업다각화를 이루어 아담의 계승자인 빌헬름의 대에 와서는 종업원이 1천5백 명이 넘는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회사라는 이름의 ‘법인’은 사람보다 생명이 길어 ‘법인 오펠’은 레바논, 독일,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들, 신들이 머무는 장소라고 일컫는 부탄보다도 더 오래된 회사로 자리 잡았다.
이런 경제인 스물네 명을 모아놓은 제3제국의 항공부 장관, 르프트바페 총사령관, 산림 및 수렵 담당 장관이자 게슈타포를 창설한 내무부 장관을 겸직하는, 그러나 무장폭동을 선동한 이력이 있고 과시적 제복 취향이며 모르핀 중독이란 세평을 듣는, 스웨덴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있고 폭력성이 강한 헤르만 괴링이,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3월에 있을 선거에서 나치당이 180석 이상을 차지한다면 앞으로 10년, 혹은 영원히 투표 행위가 없을 것이라 주장한다. 경제활동을 위해 견고하고 안정된 체제가 요구된다는 파시스트의 세계 공통의 연설을 한 후 등장하는 히틀러.
그는 자신이 허약한 정치체제를 끝내고 공산주의의 위협을 멀리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을 박멸하겠다고 자신 있지만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 기업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상냥하고 심지어 친절하게 연설을 한 후,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는 돌아간다. 이어지는 순서는 선거를 위한 모금 시간. 이것이 경영자들이 나치와 타협한 역사상 유일한 순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업인 스물네 명이 소유한 회사는 앞으로 경영인의 이름 대신 특정한 레이블, 즉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오펠, IG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켄이라고 불리면서 오늘에 이른다. 법인은 쉽게 죽는 것이 아니라서.
뷔야르는 이런 장면에 이어 특정한 스토리를 엮어내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에서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점령일 것인데, 그것을 위하여 영국의 핼리팩스 경과 괴링이 쇼르프하이데에서 함께 한 사냥, 오스트리아의 작은 독재자 쿠르프 폰 슈슈니크가 히틀러에게 당한 모욕 등과, 슈슈니크가 히틀러의 지시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국민투표 운운하니 침공해버린 바로 그날,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알베르 르브룅이 1938년 3월 11일에 서명한 ‘보졸레 와인의 원산지 증명 호칭에 관한 법령’ 같은 것을 아프게 꼬집어버린다.
지금에야 정설이 됐지만, 애초에 히틀러로 하여금 2차 세계대전을 발발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이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과 체코 일부분의 흡수를 방기해, 내국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국외로 돌릴 틈새를 마련해준 일과, 독일로 하여금 소비에트의 서진西進의 경계로 삼아 군비 축적을 알고도 모른 척했던 일, 그리하여 히틀러의 허파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것을 꼽고는 한다. 그러니까 초장부터 독일과 나치의 허풍에 지레 겁을 먹은, 또는 먹은 것처럼 보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미온적인 대처, 오스트리아에서의 지배권 인정과 뮌헨 협정이란 이름의 체코 일부 수용을 인정한 순간, 거대한 전쟁이, 히틀러가 원했건 그렇게까지 크게 발전하기는 원하지 않았건 간에 터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주인공도 없고, 별 스토리도 없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예상외로 섬세한 문장이 곳곳에 박혀있으며 2차 세계대전 개전의 배경과, 그것이 나중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의 광경과 재미있게 연결되기도 한다. 공쿠르 상을 받을 만한 특색 있는 구성도 좋기는 하나,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