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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비록 두 권밖에 안 되지만 이이의 전작 <태고의 시간들>과 <방랑자들>을 읽고 나서 토카르추크의 문법은 짧은 에피소드들과 짧은 소묘들, 즉 수다한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독자로 하여금 조금씩 드러나는 파편들의 정체를 엮어 마치 픽토리얼 퍼즐을 완성하는 유희처럼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방법을 구사했다. 이렇게 같은 방식으로 쓴 두 권의 책을 읽은 경험으로, 이번에도 비슷한 플롯이겠거니 생각하고 새 작품이 출시되었는데도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기도 하지.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아홉시 방향보다 약간 위쪽 체코와의 접경지역인 고지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스릴러 소설이다. 물론 영국을 필두로 여성 스릴러 작가들이 대단한 작품을 많이 썼으나, 토카르추크의 이 스릴러는 매우 독창적이다. 그리고 정말로 읽으면, 당신은 함몰된다.
일인칭 시점의 주인공 ‘나’의 본명은 야니나 두셰이코. 시리아 등지에서 대규모 교량 건설에 투입된 적이 있는 엔지니어 출신. 귀국해서 영어교사를 하다가 지금은 일 년 중 반년 동안 추위가 점령하는 지역에서 온전히 겨울을 나는 고지대 세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겨우내 일곱 채의 집을 관리해주며 파트타임으로 근처 (‘나’가 트란실바니아라고 부르는) 읍내의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사는 늙은 여자. ‘나’는 ‘나’를 야니나, 라고 서류에 공식적으로 등록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래 자신 말고 산골에 남은 두 남자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자유스럽게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트란실바니아 사람들은 ‘나’를 ‘두셰이코 부인’이라 부르는 걸로 결론을 봤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두솁코 부인’으로 불러대고, 이럴 때 마다 ‘나’는 굳이 이를 두셰이코 부인으로 정정해서 불러달라고 요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원하지 않듯 ‘나’ 역시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아 고지대의 두 남자를 각각 ‘왕발’과 ‘괴짜’라고 부른다. 물론 그들도 안다. 자신을 그렇게 호칭하는지. 직접 대놓고 그렇게 부르지는 않아도.
이런 ‘나’는 비록 젊은 시절엔 폴란드 전국체전에서 투해머 종목에서 은메달을 받았을 정도로 건장한 체구의 건강체질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여러 질병에 시달린다. 특히 경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몸이 피곤하거나 많이 신경을 써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어깨부터 시작해 다리 끝까지 이어지는 이름이 없고 보이지도 않는 선을 따라 심한 떨림 현상이 생겨 여간 고생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심각하게 공부하게 된 것이 점성술. 천동설 시대의 대가 프톨레마이오스가 집대성하고 이이를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이 더욱 발전시켜온 유럽 전통의 점성술을 아주 심도 있게 공부하지만,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와 심지어 트란실바니아 읍내의 말단 경찰들, 성당의 복사 아이마저 점성술을 근거로 하는 충고를 백안시한다. 이 점성술에 관해 글을 쓰기 위해 토카르추크가 탐색하고 연구한 게 아까워서 그랬는지 분량이 조금 많이 할애한 듯. 이 방면에 관심이 없는 독자들은 지루하기가 십상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일종의 밀교나 믿음이란 측면에서 보면 토카르추크, 그래봐야 <태고의 시간>과 <방랑자들>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속에 점성술 또는 기타 미신, 전설, 신화, 유령 등과의 연관을 감안하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매정하게 추운 산골. 여기에 외따로 남은 세 명의 인간. ‘나’와 괴짜와 왕발.
괴짜는 세 명 중 유일하게 자식이 있다. 읍내 경찰서에 배속해 근무하는 형사 ‘검은 코트’. 건장한 체격에 무뚝뚝한 친절이 몸에 밴 산중 신사. 생각 외로 생긴 것과 달리 정리정돈에 관해 매우 까다로워 결벽증 증세가 의심스러울 정도. 버섯 관련 커뮤니티의 회계. 본명을 시비엥토페우크 시비에르시친스키. 이름을 어렵게 지은 것은 괴짜의 아버지가 독일인 어머니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는 사이는 아니고 그저 며칠에 한 번 만나 얼굴 보고 인사하는 정도이다. 전에 서커스 단의 회계사였는지 곡예사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워낙 과묵해 말을 걸기 힘든 수준이다. 이는 많은 남자들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겪는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이 아닌가하고 ‘나’는 의심하고 있다.
‘나’는 예의 경련에 따르는 열병을 다스릴 생각으로 초저녁에 홉을 우려낸 차와 수면유도 기능이 있는 발레리안 두 알을 복용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한밤중에 무례하고 불길하게 문을 두드리는 이웃 괴짜에 의하여 비몽사몽간에 잠이 깨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왕발이 죽었다고, 그래서 가봐야 한다면서. 왕발은 평소에 전기를 아끼기 위하여 일찍 밤을 먹고 얼른 전등을 끄고 지내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은 지나다 보니까 늦게까지 불이 켜 있는 것이 현관문틈으로 보여 문을 열어봤더니 죽어 넘어져 있더라는 것. 왕발은 ‘나’와 한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 악마와 같은 부류였다. 작지만 근육질이고 구사하는 언어는 주로 욕설에 고유명사를 갖다 붙인 형태였다. 숲에 관해 잘 알아 숲을 의지해 먹고 살지만 전혀 숲을 존중하지 않았다. 항상 숲에서 뭔가를 훔치거나 뒤로 빼돌려온 인간. 밀렵꾼이기도 해서 올가미를 써 숲을 약탈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나’와 괴짜가 왕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괴짜의 헤드랜턴에 야광 빛 연녹색 눈동자 두 쌍을 발견한다. 왕발의 집 바로 근처에서. 사슴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숲으로 돌아가라고 두 손을 휘둘러 소리쳐보았으나 거의 배 부근까지 눈에 파묻힌 채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이게 앞부분, 1장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장면. 처음으로 등장하는, 스릴러에서 독자를 현혹시키는 장치이다.
왕발의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 악마 같은 존재는 이미 숨을 거둔 채 뭔가 음습하고 게걸스러운 느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양손을 목에 대고 기괴한 자세로 누워 눈을 부릅뜬 채. 아무리 왕발이 인간 같지 않은 존재였어도 그래도 이웃으로 지낸 정리가 있으니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 입혀야 한다는 괴짜의 말에 따라 사후경직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나’와 괴짜는 옷을 다 벗긴 다음 거의 입은 적이 없어 보이는 커피색 정장을 골라 입힌다. 그리고 다시 보니 퉁퉁 부은 왕발의 혓바닥 아래 뭔가 감춰진 것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죽은 사람의 입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낸다. 날카로운 뼈 조각. 어느새 날이 새고 보드카 한 잔씩 마시면서 정신을 차린 ‘나’와 괴짜. 창틀의 알루미늄 쟁반에 사슴의 머리와 네 발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왕발이 덫으로 사슴을 포획하고 도살해 구워먹다가 뼈 조각이 목에 걸려 죽음을 맞는 처벌을 받은 것이었다. 괴짜가 시신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왕발의 별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생년월일이 있는 증명서를 찾다가 사진뭉치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고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며 귓가에 음울한 통곡소리를 듣게 된다.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는데, 이를 본 괴짜가 ‘나’에게 한 마디를 한다.
“당신이 울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죽임을 당한 사슴의 보복으로 죽음을 맞은 왕발. 그가 가지고 있던 사진 속 무엇을 보았기에 ‘나’는 사람 같지도 않은 왕발의 시신 앞에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못하는 걸까.
북동유럽의 고지대. 깊은 숲 속의 수많은 영령들과 이들을 태곳적부터 내려다보고 있던 별들 사이의 무슨 전설이 다시 21세기의 산골을 덮쳤을까. 왕발에 이어 왕발의 죽음을 수사했던 경찰서장과 숲 속의 가장 부유한 여우모피 장사꾼 브렝트샥 씨, 이어서 버섯채집협회장과 심지어 교구 신부까지 연쇄적으로 피살당하는 일견 초자연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명왕성과 토성 사이에 어떤 운명의 별이 지나간 것일까.
이 책을 기본적으로 얘기하자면 스릴러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잘 세공된 생명주의적 작품이라 하겠다. 자기의 생명주의적 주장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가장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인 스릴러의 외양을 채용했다고 해도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 인간이 파리나 개구리 같은 한 생명종일 뿐이라는 진실은 이제는 누구나 안다. 그러나 이 책을 잘못 읽으면, 혹시 토카르추크가 육식을 부정하는 극단적 비건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나도 일정부분 그렇게 읽었음을 인정한다. 인간이라고 자신을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말을 두셰이코 부인은 곳곳에서 크게 주장하니까.
나도 여흥을 위해 취미로 하는 낚시를 포함한 사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생존을 위해 근육이 아닌 뇌를 키우기 위해 육식을 선택한 진화과정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포함한 육식동물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다른 짐승을 먹이로 삼았을 뿐이고, 지능이 과도하게 발달해 스스로 불행해지기로 결심한 인간만이 그저 재미로 다른 종과 심지어 같은 종의 생명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먹기 위한 도살을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 재미있는 책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주인공 야니나 두셰이코 여사를 통해 토카르추크가 주장한 것이 모든 동물에 대한, 모든 형태로의 도살을 반대한 것인지, 아니면 재미를 위한 살해에만 반대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이야기해놓지 않았다.
확실히 나이 들었다. 오늘 새벽 두시 반에 깼다. 그 후, 다섯 시까지 이 책 생각했다. 위에 쓴 독후감은 거의 문학적 측면으로만 읽은 느낌이다. 그러나 알라딘 서재, 완전히 공개된 공간에서 "사회적 감상"을 배제할 수 있을까.
좋다.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사회적 관점에서 읽으면, 이 책은 한 사이코패스의 미친 행적 이상이 아니다. 딸처럼 키우던 개 두 마리를 쏴 죽였다는 이유로 지역사회의 중요한 인물 네 명을 차례로 때려죽이거나 불태워 죽이는 인간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나. 아무리 친자식 같이 애지중지하던 개를 향해 총을 쐈다고 하더라도. 동물권이 인권을 능가할 수는 없는 일.
이 사이코패스는 계획적으로 살인을 했고, 죽인 시신에 가짜 증거를 남기려 했으며, 세 번째 시신에게는 가혹행위라고 할 수도 있는 장난을 치기까지 한다.
문학의 힘은 이런 연쇄살인범까지 미화시킬 수 있다. 읽어보시라. 저절로 그렇게(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은 범인이 흉악한 살인자에 불과하다는 진실도 함께 보아야 할 터. 파렴치한 성폭력범이 한 가정의 따뜻한 아버지인 경우를 우리는 가끔 목격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