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 푸른 영혼을 위한 책읽기 교육 (2019-05)

푸른 영혼을 위한 책읽기 교육​

허병두 / 청어람미디어 / 304쪽​

​(201. 2. 10.)

기성세대가 이런 푸른 세대와 소통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래도 안간힘을 써 보는 기성세대들의 노력은 대개 부모를 위한 자녀교육 책들을 읽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부모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푸른 영혼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더러 발견된다. 가족과 함께 이슬람권을 여행하고 책을 펴낸 여고생이 있는가 하면. 세 살짜리 아들을 인도로 보내는 부모 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청소년들을 얽매는 온갖 굴레와 벽부터 없애는 것 아닐까. 최근에 번역되어 나 온 하이타니 겐지로의 교육소설『모래밭 아이들』(양철북)은 학생에 대한 학교의 억압이 얼마나 부당하고 심각한지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도대체 우리는 그들을 키우지는 것인가, 길들이자는 것인가?

어쩌면 세대 간의 단절은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바뀌는데 세대 간에 늘 소통이 잘 이루어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기성세대와 청소년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이 든 아이들' 이고 '나이 어린 어른들' 이다. 우리가 청소년들을 우리 생각대로 얽매려 들지 않고 그들과의 진정한 대화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자라나는 2세에게서 앞날에 대한 희망과 함께 멋지게 깊어가는 그들 나름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르줄라 하우케의『아빠. 찰리가 그러는데요』(해나무)에서 처럼 말이다.

좋은 책 읽기는 텔레파시를 제공한다. 그것은 저자와 독자, 개인과 개인 사이뿐 아니라 세대와 세대 사이의 소통까지 가능하게 해 준다. 요즘 아이들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그들과 함께 책을 읽을 일이다. 우리가 책을 권하며 또 함께 읽을 때. 바로 그 시간이 문자와 여백, 행간으로 수놓아지는 불꽃 같은 '생의 한가운데' 다. 그때야 비로소 삶이라는 우리들의 책 또한 그 소중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고......

(P.25)

적어도 중 • 고등학생 정도만 되면 어떤 것이 좋은 책인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갖고 있다. 기성세대가 할 일은 아이들 각자가 그런 능력을 스스로 찾아내고 키워 나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일방적이고 기계적이며 구태의연하게 만들어지고. 제시되는 추천도서목록은 아이들을 답답하게 만들 뿐이다.

가장 좋은 '추천도서목록' 은 아이들 스스로가 책을 책을 골라 읽으며 만들어 낸 자기 마음속의 목록이다. 왜냐고? 인생은 결국 삶을 살아 가는 자기 스스로가 인상 깊게 읽은 책들로 자기만의 무늬와 향기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P.49)

청소년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들이 답 이전에 문제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제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학생들에게 답보다 우선 문제에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답은 문제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계속해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문제를 정확히 파악할 것. 글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문제'는 곧 글의 '주제' 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과제',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의제(agenda)' 가 되겠지.” 이렇게 문제와 주제, 과제 또는 의제를 서로 연결하여 설명해 준다. 좀 더 깊이 있는 설명을 덧붙일 수도 있다.

“의도는 내용과 형식을 만든다.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글쓴이의 의도는 주제 의식이 되어 작품의 내용과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글의 이해와 해석에서 처음이자 마지 막이라고 할 수 있지. 의도를 파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무척 흥미 있는 일이란 걸 차차 알게 될 거다.

글쓴이의 의도가 반드시 글의 내용과 일치하는 건 아니다. 의도와 실제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지. 특히 문학작품을 포함한 예술작품의 경우에는 의도와 실제 사이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차이' 를 들여다보고 음미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아.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말자. 쉽게 생각하면 여러분이 늘 어렵다고 느끼는 주제 찾기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글의 주제를 찾을 때 '한마디로' 라는 말을 붙여 보면 의외로 쉬워지니까. 다시 말해. 글을 읽은 다음에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 글은 한마디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 글의 주제를 파악하라는 말은 결국 '한마디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 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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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 당나귀 귀 (2019-04) 

당나귀 귀

쎄르쥬 뻬리즈 / 문병성 / 박은영 / 문원 / 166쪽

(201. 2. 3.)

푸르쓰떼이 선생님은 물론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좀 심하게 과장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자기 잘못으로 내가 기절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아무 말없이 다시 수업을 계속하곤 했다. 난 조용히 필에 얼굴을 묻고 조그마한 내 팔만큼의 둥지에 피난했다.

그때 죠슬린 생각이 났다. 내 여동생 죠슬린은 시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 애는 머리가 좀 이상한데, 백치 같은 지경이어서 나 같은 일은 당하지 않으니 말이다. 나처럼 하루 종일 놀림을 당하고 꾸중듣는 일은 없다. 곱셈을 해야 하는 수학 문제도 없고, 사인 받아야 하는 편지도 없고, 억지로 팔아야 하는 복권 도 없다.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는 늘 정신 착란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 나는 바보로 태어났지만, 완전한 바보가 아닌 것이 정말 한스러웠다.

​(P.23)

내 책가방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안에 편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편지를 아빠한테 들이밀어야 하는 그 순간을 생각하기만 해도 어찌나 아찔한지 어깨가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다가 맨 마지막순간에 줘야지.' 하는사실 말이다.

(P.26)

빰을 맞을 때마다, 매질을 당할 때마다, 나는 열 번도 넘게 기도했다. 제발 엄마 아빠가 빨리 죽게 해달라고, 정말이지 제발 모든 불행들이 멈출 수 있도록 부모님을 죽게 해달라고 나는 기도를 했다.

'하느님, 하느님, 하늘에 계시는 나의 하느님, 저렇게 나쁜 우리 부모들을, 저렇게 악독한 우리엄마 아빠를 제발 벌해 주세

요. 가혹한 벌을 내려서 이젠 제발 저를 아프게 때리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그들이 죽어 버리도록 해주세요.'

매일 밤마다, 어떤 때는 잠도 안 자고, 열심히 기도했다. 제발, 제발, 나를 엄마 아빠의 매질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밤새워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에게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빌었다. 내 이야기도 들어 주지 않는 거지 같은 하느님 나를 얼간이 취급하는 줄 다 알고 있어요. 하느님도 나빠요......

​ 아빠와 엄마는 언제나 그렇게 내 가까이에 있었고, 아프지도 않았다. 어떤 꼬투리를 잡아 날 때릴까 궁리하는 사람처럼 나의 모든 행동을 감시했으며. 내가 하는 일은 하나도 눈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를 때리는 일은 그야말로 습관이 되어 버렸다.

아무런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늘상 얻어터졌기 때문에, 내 머리는 맨날 호박처럼 부어 있었다. 집을 가출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떠났어야 했다. 그랬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세상의 끝 어딘가를 향해서 막 달려가 버렸어야 했다. 나를 영원히 볼수 없도록, 엄마 아빠가 나를 결코 찾을 수 없도록 그렇게 도망가 버렸어야 했다. 달리는 용달차에서, 그때 그 숲속에서 그냥 뛰어 내렸어야 했다. 그래서 미친 놈처럼 고사리 숲속이든, 가시덩쿨이든 무서워하지 않고, 시냇물이 흐르는 도랑이든 뭐든 모든 장애물을 건너뛰고, 들판을 지나 산 속 깊은 곳까지 도망쳐야 했던 것이다. 달리다가 그냥 딱 2분만 멈추어서 뒤돌아보며, 아삐에게 이거나 먹어라, 하고 내 팔을 흔들며 욕해 주고, 다시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도망갔어야 했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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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 흐름을 꿰뚫어 보는 경제독해 (2019-03)

흐름을 꿰뚫어 보는 경제독해

세일러 / 위즈덤하우스 / 396쪽

(2019. 2. 10.)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경제관료와 경제학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 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거의 100%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생겨난 비극이자 코미디 같은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1998년에 외환부도를 맞은 이유 중에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는 발권국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배우는 경제학 내용 중에는 '외환관리'는 것이 없거나 소홀하게 다뤄집니다. 그 때문에 미국에서 유학을 한 우리 경제관료들과 경제 학자들의 머릿속에는 외환관리가 중요하다는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1998년 의환부도가 나기 직전까지도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은 문제없다'는 말만 강조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외환이 부족 해서 외환부도가 나게 생겼는데, 경제관료들의 머릿속에는 '외환관리'에 대한 생각이 별로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펀더멘털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미국 경제학자는 펀더멜털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로서는 외환부도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의 경제학자와 경제관료들이 우리 경제의 현실을 보지못하고 미국식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겠지요.​

물론 1998년의 외환부도가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부분도 분명 영향을 미친 한 가지 사유였습니다. 정말 비극이자 코미디 같은 상황이지요.

어떤 문제에서건 한쪽 방향으로의 지나친 쏠림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독창적인 주장과 성과를 내고 있는 장하준 (영국 유학), 우석훈(프랑스 유학) 등의 경제학자들이 미국 일변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P.77)

경제 혼란기에는 어떤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취하기가 참 어렵습 니다. 일단 예측은 신의 영역이고, 인간은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대처하려 노력할 뿐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섣부른 예측과 이를 바탕으로 한 행동은 금물입니다. 오히려 예측이 들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판단을 내리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럼 예측이 들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제가 일 전에 중요한 미팅 약속이 있어서 지하철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늦을 것 같아서 상당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미팅이라 늦으면 체면이 상당히 손상되고 향후 관계에도 타격이 옵니다.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가면 시간 내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의 하나 못 잡는 일이 생기면 조금 늦는 정도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늦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가 중간에 내려 택시를 못 잡게 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봤습니다. 한 10%나 될까요?

하지만 저는 결국 그냥 지하철로 가기로 했습니다. 가능성은 10% 밖에 안 되지만 만의 하나 그 일이 발생해서 결정적으로 늦어버린다면 그때는 체면 손상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 자체를 그르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10%의 가능성밖에 안 되는 일이 발생할까 두려워서 100% 확실하게 '작은 손해'를 감수히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건 일종의 보험과 같은 원리라고 봅니다.

(P.82)

경제위기 상황은 우리에게 스스로 판단하도록 요구합니다. '첨단' 전문가들이 '첨단' 상품, '첨단' 기술을 얘기하더라도 그대로 믿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첨단 전문가들과 대등한 지식 수준을 단시간 내에 쌓을 수는 없습니다. 또 그들과 대등한 지식 수준을 단시간 내에 쌓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하겠다고 들면 실수하기도 쉽습니다. 이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이치를 따져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P.87)

괴테의 희곡《파우스트》는 지폐가 등장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재정이 거덜나버려 걱정하는 황제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돈을 바닥에서 긁어모을 수는 없으나 지혜는 아주 깊이 묻혀 있는 재보도 파낼 수 있습니다. 재능 있는 사람의 본성과 정신의 힘은 이를 능히 캐낼 수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모든 원소가 폐하의 존엄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합니다. 앞으로 이 종이 한 장은 일천 크로네에 해당한다고 포고령을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에 그건 불법행위이고 얼토당토않은 사기극이 아니냐고 노발 대발하던 황제는, 사람들이 지폐에 익숙해지면 다른 것은 원치도 않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는 악마의 꾀임에 넘어가고 맙니다. 지폐가 발행되어 왕국에 뿌려지니 일순간에 텅 비어버렸던 국고가 채워지고 모든 영토에 보석과 황금, 지폐가 충만한 듯이 보였습니다.

(P.136)

애덤 스미스가 쓴 이 한 권의 책으로 전 세계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산업자본가 세력은 이제 자신들만의 대항논리와 사상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이는 중상주의 사상체계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상주의와 기득권세력을 아울러 '구체제'라고 몰아부칩니다.

이제 상업자본가들과 절대왕정, 교회가 주도하던 '중상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산업자본가들과 새로운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운 세상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교회조차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의 연관성을 말하면서 산업자본가들의 논리에 발을 맞추게 됩니다.

이제 사회에는 새로운 기득권세력이 굳건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애덤 스미스를 '스승' 이라 하고《국부론》을 금과옥조로 여겼지만 애써 한 가지 사실은 모른 체합니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 얘기합니다. 시장에만 맡겨놓으면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조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에서 시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완전경쟁'을 얘기하려면 출발선이 동일해야 한다. 출발선이 동일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국가의 배려가 필요하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다시는 동일한 출발선에 서지 못한다. 이들에 대한 국가의 배려도 필요하다."

애덤 스미스는《국부론》안에서 '시장의 실패'와 '국가개입의 필요성',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자본가 세력들은 이 부분은 애써 모른 체했습니다. 그 결괴는 어땠을까요? 그 결과 '약탈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P.209)

18세기에 산업자본가들이 역사의 전면에 새로이 등장한 신흥세력이던 시절, 그들은 중상주의를 배경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논리와 사상체계, 이를 기반으로 한 탄압에 대해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산업자본가들이 기득권세력이 된 것 입니다.

비합리적및가람은 자신에 맞추어 세상을 바꾸려들고, 합리적인 사 람은 세상에 맞추어 자신을 바꾼다고 합니다.

도저히 당시의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비합리적인 한 사내가 대영제국 도서관에서 필사적으로 집필 작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해서 책 한 권 살 돈도 없었고, 도서관에서 무료로 책을 볼 수 없었다면 집필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1867년,

《자본론》이 출간됩니다. 이제 노동자 그룹은 기득권세력에 맞설 수 있는 대항논리와 자신들만의 사상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이후 세상에는 '사회주의 체제'라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태어납니다. '자본주의 체제' 에 대립하는 새로운 경제체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P.211)

《벌거숭이 임금님》이리는 동화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동화 속의 어른들은 정말로 임금님이 '투명'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라고요. 병사들이 무서워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임금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갖는 어른들의 선입견이 눈을 가렸습니다. '정말 투명 옷을 입은 걸 거야.' '설마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이 눈을 가렸던 것입니다.

아이에게만 객관적인 실체가 있는 그대로 보였습니다.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아이에겐 임금님이란 존재가 그다지 선입견을 심어주지 못했으니까요.

혜안(慧眼)이라는 것은 결국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봐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이의 눈으로 보는 것, 맑은 눈으로 본다는 것,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하게 됩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 같습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 히는데, 손가락만 보기 쉽습니다. 자신의 희망이 관찰에 반영되어 시야를 흐립니다.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 눈을 가립니다.

전문가는 전문가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신의 전문지식을 내려놓기가 어렵습니다. 평상시에는 잘 작동하던 전문지식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비상시가 되면, 전문가는 일반인들보다 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가 쉽습니다(어떤 이유로 인해 사실을 알면서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섣불리 믿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근본원리를 익히고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이치에 근거해서 판단하시면 됩니다. 근본원리를 붙들고 자기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천변만화 (千變萬化)하는 혼란 속을 헤쳐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게 통념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통념(通念)이란 보 통 때의 생각입니다. 보통 때는 제대로 작동되던 생각입니다. 하지만 보통 때가 아닌 위기가 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통념을 근본원리이자 이치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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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책이다

(청소년,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허병두 / 청어람미디어 / 323쪽

(2019. 1. 30.)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책을 나지막이 읽어 보라. 천천히 읊조리듯, 거닐 듯, 숨쉬 듯 곱씹어 보라. 처음엔 선생의 시선과 발길이 느껴지고 어느새 우리 문화유산 깊숙이 빠져 들게 될 것이다. 경쾌하고 재기 어린 발랄함 대신. 가슴 가득히 밀물이 들어서는 듯한 즐거움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을 펴 보라. 소박하고도 유려한 문체로 다가오는 감동은 은근하면서도 길고 깊다.

대가의 글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뽐내는 태도를 멀리하며 언제나 평범한 듯하나 대단히 비범하다. 눈 밝고 가슴 따뜻한 대가의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 자답했다."

사물을 풍부하게 보며 적확히 표현하는 힘을 길러 주는 책으로도 강추 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문화유산에 눈을 뜨는 '광명'의 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P.25)

(세 가지 주문의 독서법)

'세 가지 주문의 독서법' 이란 마치 주문처럼 덧붙여 읽기가 편해서 붙여 본 이름. '왜냐하면''다시 말해' , '예를 들어' 가 바로 그 주문 내용들들인데, 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갈 때 의도적으로 덧붙이며 답하다 보면 글을 알차게 읽을 수 있다.

먼저 '왜냐하면' 주문 활용법을 알아보자.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 는 문장이라면 그 뒤에 '왜냐하면' 이라는 말을 덧붙여 답하며 읽는 것이다. 언뜻 쉬워 보이지만 해 보면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 것이니까.' 식의 답이 나오기 일쑤다. 반대로 국산품을 애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장으로 시도해도 마찬가지다.

당장 답을 내기는 어렵지만 늘 이렇게 답하려다 보면 나름의 관점에서 읽는 자세와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물론 '왜냐하면' 의 짝인 '그러므로, 따라서' 등을 넣어서 읽는 것도 좋다.)

'다시 말해' 주문 활용법도 마찬가지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전에 '다시 말해'를 주문처럼 덧붙여 읽으면 된다. 언뜻 '왜냐하면'에 비해 쉬울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 동어 반복에 그치지 않고 다른 차원이나, 분야, 기준, 관점 등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여서 다시 풀어낼 수 있 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평소 덧붙여 읽는 자세와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필수적인데, 처음에는 명언집이나 속담집에서 시작하면 무난하다. 차츰 익숙해지면 명상집이나 종교서 등을 읽으면서 곱씹어 보라.

'예를 들어' 주문 활용도 마찬가지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히 안 다면 그에 걸맞는 풍부한 사례들을 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잘 알려진 경우를 기억해 내는 것만이 아니라 관련되는 범위와 사례들 새롭게 발견해 내는 것을 뜻한다.

이쯤 되면 '세 가지 주문의 독서법' 의 정체를 눈치챘으리라. 즉 '왜냐 하면' 과 '다시 말해' . '예를 들어' 는 제각각〈논증〉,〈상술〉,〈예시〉의 내용을 이끌며 글을 구체화하는 세 가지 대표적 방법들이다. 이는 주제의 논리적 설득력. 내용적 확장성. 관련 범위 제시와 실제 사례 제시 등과 직접 연결되기도 한다. 독서 토론을 하거나 학습 내용을 점검할 때 역시 '세 가지 주문의 독서법'으로 점겸하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특히 실용문의 경우, 이들 세 가지 주문으로 시작하는 내용을 빼고 글을 쓰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글을 쓰다가 막히면 이들 '세 가지 주문의 독서법' 을 떠올리면서 생각을 풀어내면 대개 해결된다고 강조하는 작문 지도 방법도 있다.​

끝으로 주의할 점. '세 가지 주문의 독서법' 은 아무래도 시간이 많아 걸린다. 또한 효과가 있다고 섣불리 강요하면 오히려 책읽기가 지겹고 골치 아플 수도 있다. 그러니 재미있고 부담 없이 시도하여 그 자체를 즐기고 자연스럽게 효과를 경험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P.34)

아직도 본문만 읽는가?

보통 책을 읽을 때 본문만 읽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효율적인 책읽기라고 할 수 없다. 머리말. 차례 등을 반드시 먼저 훑어 보고책을 읽는 것이 제대로 읽는 지름길이다. 미리 예측하고 있는 것도 좋다. 색인을 빼서도 안 된다.

머리말에는 흔히 책을 펴낸 동기가 담겨 있고. 배경, 목적, 내용까지도 알차게 요약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도와준 이들에 대한 감사의 글도 나온다. 이런 머리말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차례는 그 책의 내용올 핵심적으로 보여 준다. 차례를 읽을 대는 이 책이 전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쓰고 있는가. 모두 몇 부. 몇 장. 몇 절로 이루어져 있나. 각 부분은 어떤 비중으로 서술되어 있는가. 이런 것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다.

결국 좋은 글이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야 할 만큼 있는 글이다. 이 책이 과연 어떤 내용을, 얼마나, 어느 자리에서 얘기하고 있는가를 먼저 따지면서 읽어 들어가면 책읽기의 효율을 훨씬 높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색인 또한 함께 읽어야 한다. 영어로 인덱스(index)라고 하는 색인은 책 뒤에 그 책에 나왔던 단어나 중요한 개념들을 한꺼번에 쭉 찾아 적어 놓은 것을 말한다. 색인을 잘 활용하면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 한 가지,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은 작가의 말이나 평론의 말을 먼저 읽는 것은 곤란하다.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작품 해석에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을 먼저 읽는 것이 좋겠다.

(P.150)​

독후감 쓰기, 어떻게 할까

분명히 독후감이란 '책을 읽고 쓰는 글' 인데, 일고 나서도 도무지 무슨 책을 읽고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아무 책에나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독후감을 쓸 때 감동적이라면 왜 그러한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서 써야 한다. 『노인과 바다』를 읽고 그저 감동적이라고만 되뇌는 독후감은 백 번 써도 소용없다. 그 작품이 왜 감동적인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실체를 찾기 힘든 공허한 글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독후감을 쓸 때는 작품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근거와 주장의 형태로 엮어서 쓰는 것이 좋다. 마음에 안 찰 때도 마찬가지다.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말만큼 불합리한 말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형식이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좋다.

하지만 독후감을 쓰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신경을 쓸 필요는 여전히 없다. 정말로 독후감을 쓰기 싫다면 쓰지 않아도 좋다. 대신 열심히 책을 읽고 머릿속에서 한마디 문장으로 정리해 보라. 한마디 문장 또한 독후감이니까!​

​(P.153)

삶의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구현하는 책을 읽으라!​(가치관)

좋은 책이라면 적어도 삶의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구현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책들은 어떤 책일까?​

먼저 구체적인 우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며 공동체적인 선을 지향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책들. 현실 도피 대신 밝은 내일을 꿈꾸며 그런 미래를 만들게 도와 주는 책들.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 얼을 보듬으며 발전사켜 나가게 힘을 주는 책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편적인 진실을 중시하는 책들을 고르면 좋을 듯하다.

거꾸로 읽지 밀이야 할 책들은 현실 도피적이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쾌락 위주의 책들과, 인종적이며 문화적인 편견, 성차별 등으로 왜곡된 책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나중에 제시한 '인종적, 문화적 편견, 성차별 등으로 왜곡 된 책들' 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는 골라내기가 쉽지 않으니 주의 바란다. '피이. 그런 책이 아직도 있나요?' 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직도 이런 책들은 꽤 많다. 요컨대. 좋지 않은 책들은 가능한 한 읽지 않아야 한다. 만일 그런 책을 읽었을 경우에는 왜 읽지 말아야 할 책인지에 대해 정리하는 것이 좋다.

이상으로 좋은 책을 고르는 소개했다. 좋은 책을 골라 읽는다면 어느 새 자신이 훌쩍 커져 거목들 사이를 거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한없이 왜소한 인간 존재의 삶은 비로소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바람직하게 변화시키고 있음을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는 나를 성장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모쪼록 좋은 책을 잘 골라서 많이 읽고 자신의 삶을 바람직하게 가꾸고 현실 을 의미 있게 바꾸어 나가기를 바란다.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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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 / 정명환 / 민음사 / 308쪽

(2019. 1. 18.)

아버지의 죽음은 내 생애의 큰 사건이었다. 그것은 어머니를 사슬로 묶고 내게는 자유를 주었다. 세상에 훌륭한 아버지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일반 법칙이다. 남자들이 나쁜 탓이 아니라 부자 간의 관계란 원래 고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뭐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이를 소유하겠다니 그런 당치 않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만일 나의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내 위에 벌령 누워서 나를 짓누르고 말았으리라.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었다. 안키세스를 업은 아이네아스들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 강을 건넌다. 일생 동안 자식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을 미워하면서. 젊어서 죽어 미처 내 아버지 노 릇을 할 기회가 없었던 한 사나이, 지금 같으면 내 자식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될 그 사나이를 나는 내 뒤에 멀리 버려 놓았다. 그것이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초자아(超自我)가 없다는 어떤 유명한 정신 분석가의 판단에 나는 기꺼이 동의하겠다.

사람은 그냥 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알맞게 죽어야 한다. 만일 아버지가 더 늦게 세상을 떠났더라면 나는 죄의식을 느꼈으리라. 철이 든 고아(孤兒)는 부모의 죽음을 제 잘못으로 돌려 스스로를 탓하는 법이다. 자기가 보기 싫어서 부모가 일찌감치 천국의 아파트로 물러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척 기뻤다. 남들이 나의 처지가 불쌍하다면서 나를 존중하고 떠받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실을 나의 한 가지 이득으로 여겼다. 아버지는 고맙게도 자신의 잘못으로 죽었다. 할머니는 그가 자신의 의무를 기피했다고 되뇌었고, 슈바이체르 집안의 장수를 자랑으로 삼는 할아버지는 나이 서른에 죽어 버리다니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아무래도 그런 죽음을 납득할 수가 없어, 그 사위가 이 세상에 산 일이 있다는 사실마저 의심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로 말하자면, 내게는 아예 잊어버릴 구실조차 없었다. 장바티스트는 나와 인사를 나누는 기쁨마저 베풀지 않고 살그머니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P.21)

어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나는 교양이라는 물 속에 함빡 젖어 들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성스러운 것을 새로 섭취했

다. 하기야 가끔은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때도 있기는 했다. 그저 넙적 엎드리고 책장을 넘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친구들의 작품이 회전 기도기(回轉祈禱器)' 구실을 해 주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진짜로 공포와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때로는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다름 아닌 세계라는 이름의 미친 고래 등에 실려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일도 있었다. 그 결과는 상상에 맡기기로 하자. 여하튼 내 눈은 낱말들과 씨름을 했다. 그 말들을 실험해 보고 그 뜻을 결정해야만 했으니까. 그리하여 교양의 연극이 마침내는 나를 교화하게 되었다.

(P.80)

나의 진실, 나의 성격 그리고 나의 이름도 어른들의 손아귀에 쥐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웠다. 나는 어린애였지만 또한 어른들이 그들의 회한으로 빚어 놓은 괴물이었다. 내 곁에 없을 때도 그들은 햇빛 속에 뒤섞인 그들의 시선을 남겨 놓았다. 내가 모범적인 손자로서의 성격을 잃지 않게 해주며 내게 장난감과 세계를 줄곧 베풀어 주는 그 시선을 담뿍 받아 가면서 나는 달리기도 하고 뛰어놀기도 했다. 내 정신이라는 예쁜 어항 속에서는 갖가지 생각들이 뱅글뱅글 돌았고, 누구나 그 움직임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어느 한 모퉁이에도 그늘진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말도 없고 형체도 없고 밀도도 없이, 그 천진한 투명성 속에 녹아 들어 있는 투명한 확신 하나가 만사를 잡쳐 놓았다. 그것은 내가 사기꾼이라는 확신이었다. 자기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의식 없이 어떻게 연극을 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밝고 맑은 겉모양들의 정체가 저절로 폭로되었다. 그것은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느끼기를 멈출 수 없는 존재의 결핍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내 능력을 보장해 주기를 바랐는데, 그럼으로써 영락없이 속임수로 빠져 든 것이었다. 남의 환심을 사야만 했던 나는 아양을 떨었지만 그런 아양은 당장에 빛이 바래 버렸다. 나는 아무 데서나 거짓된 순진성을 내보이고 빈둥빈둥 거드름을 피우면서 새로운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생겼다 싶으면 니는 황급히 어떤 태도를 꾸며 보았으나 그런 짓을 하면서 다시 마주친 것은 피하고 싶었던 허망함뿐이었다.

남들이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언어로 변모해서 그 모든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수백 만의 시선을 위해서 나 자신을 장래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나는 가장 깊숙한 불안을 준다. 그러나 내게 손을 대려고 하면 나는 살짝 사라져 버린다. 나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인간의 기생충인 나는 나의 선심을 통해서 인간을 파 먹고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나의 부재를 되살리게 한다.

​ 이러한 요술은 과연 성공했다. 죽음을, 영광이라는 이름의 수의에 싸서 묻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광만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은 깨끗이 잊어버리게 되었다.

(P.209)

나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죽음이 야만스러운 짓을 못 하도록 미리 죽음을 나의 목적으로 삼았고, 삶은 죽음을 위한 단 하나의 분명한 수단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나는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만큼의 희망과 욕망만을 지니고서 내 종말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내 심장의 마지막 고동이 내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장에 새겨질 것이며, 죽음은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을 끌고 가는 데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단단히 믿으면서, 니장은 벌써 스물 살 때 여자와 자동차를,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재물을 절망적인 초조감에 싸여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지금 모든 것을 체험하고 모든 것을 당장에 가져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사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탐내서가 아니라 열심히 관찰하겠다는 뜻에서였다. 나는 향유(享有)가 아니라 결산(決算)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은 너무도 안이한 것이었다. 지나치게 얌전한 어린애였던 나는 소심하고 비겁해서, 개방되고 자유롭고 은총이 보장되지 않은 생존의 위험 앞에서 물러섰던 것이다. 나는 만사가 미리 작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만사가 다 끝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P.212)

처음에는 나는 아주 건전한 아이였다. 속임수를 써도 적시에 멈출 수 있었다. 그러자 나는 모든 일에 열중했다. 거짓말을 꾸미는 데도 악착스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어릿광 대짓은 일종의 정신 훈련이었고, 나의 불성실성은 항상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완전한 성실성의 희화(戱畵)였다. 나는 내 천직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떠안긴 것이다. 사실 무슨 특별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한 노파가 던진 실없는 말들과 할아버지의 마키아벨리즘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믿어 버렸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른들이 내 별을 가리켜 보인 것이다. 하기야 내 눈에 보인 것은 별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손가락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어른들을 나는 믿었다.

(P.222)

흔히들 과거가 우리를 앞으로 밀어 준다고 말했지만, 나는 미래가 나를 이끌어 간다고 확신했다. 나는 내 속에서 힘이 서서히 작용하고 내 소질이 완만하게 발휘하는 것을 느끼기 싫었다. 나는 내 영혼에 부르주아들의 끊임 없는 진보를 가득 쓸어 넣고, 그것으로 폭발 장치를 만들었다. 나는 과거를 현재 앞에, 현재를 미래 앞에 무릎 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조용한 진화 과정을 혁명적이며 불연속적인 돌발 사태로 바꾸어 놓았다. 몇 해 전 누가 나에게, 나의 희곡이나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결단을 갑작스럽게, 그리고 발작적으로 내린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령 『파리 떼』의 주인공 오레스테스가 순식간에 변신하고 말았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사실 이 그렇다. 그것은 내가 그 등장인물들을 나와 닮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필경 현실적인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따른 것이겠지만.

(P.253)

물론 나는 제 꾀에 속아 넘어갈 위인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반복할 따름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터득한 그런 인식이 지난날의 확신을 잠식한 것은 사실 이지만, 그 확신을 완전히 쓸어 내지는 못했다. 내 생애에는 나를 조금도 봐주지 않는 까다로운 몇몇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전철을 밟는 현장을 자주 목격한다. 그러고는 나에게 그 점을 지적한다. 나도 그들의 말이 옳다고 느끼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다행으로 생각한다. 어제까지는 맹목적이었지만 오늘은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진보했으니 말이다. 때로는 나 자신이 나에게 불리한 증인이 된다. 가령, 지금 소용이 될 만한 글을 2년 전에 한 장 썼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그러면 그 원고를 찾아보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전화위복이다. 나는 자칫 나태한 생각에 빠져서 새 작품 속에 낡아 빠진 글을 끼워 넣을 뻔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한결 더 잘 쓰게 되었으니, 새로 스기로 한다. 그런데 작업을 끝냈을 때, 간 곳 없던 그 옛 원고가 우연히 나타난다. 기가 막힌 일이다. 구두점 몇 개를 제외하고는 똑같은 생각이 똑같은 말로 적혀 있으니 말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쓸모없게 된 그 묵은 원고를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새로 쓴 것을 간직한다. 그것은 어쩐지 전의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요컨대 내 멋대로 속 편하게 생각 하는 것이다. 철이 들었고, 게다가 늙어서 기력이 없는데도, 여전히 젊은 등산가의 도취를 맛보기 위하여 자신을 속여 넘기려는 것이다.

(P.257)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나는 '교회'의 인간이었다. 투사로서의 나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구출하기를 바랐고, 신비주의자로서의 나는 투덜대며 수군거리는 말들을 통해 존재의 침묵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사물들과 그 명칭들을 혼동했다. 그것이 곧 믿음이다. 나는 착각을 했던 것이다. 그 착각이 계속되는 동안은 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

(P.267)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 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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