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 살인 사건

카멜 다우드 / 조현실 / 문예춮판사 / 208쪽

(2019. 8. 3.)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지만, 해줄 수 있는 얘기가 많을 걸세. 반대로 난 같은 얘기를 너무 많이 곱씹은 탓인지 이젠 기억나는 것도 별로 없군.

그 일이 있은 지 반세기도 더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 사건은 분명히 일어났었고 그에 관한 얘기도 많았어. 아직까 지도 사람들은 그 얘기를 하고 있지만, 단 한 명의 망자(亡者) 만을 떠올린다네. 뻔뻔하지 않나. 죽은 사람은 엄연히 둘이었 는데 말이야. 그래, 둘이라니까. 한 명을 빼먹은 이유가 뭐냐 고? 그야, 첫 번째 사람은 얘기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지. 그 것도 얼마나 잘했던지, 자기의 죄를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네. 반대로 두 번째 사람은 가난한 무식쟁이였지. 신이 그를 만든 것되 단지 총알받이가 되어 한낱 먼지로 되돌아가게 하 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니까. 이름 하나 가질 여유조차 없었던 익명의 존재였던 거야.

한마디로 말해주지. 두 번째 망자, 피살당한 그자가 바로 내 형이라네. 형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어. 형을 대 신해 여기 이 바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나 말고는. 결코 아무도 베풀어주지 않을 조의를 기다리며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내 꼴 좀 보게. 자네가 들으면 웃겠지만, 이건 어느 정도 내 사 명이기도 하다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 말일세. 내가 이 언어를 배워 서 말하고 쓸 줄 알게 된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지. 그러니까, 죽은 자를 대신해서 얘기를 하려는 거야. 형이 하려던 얘기 를 어느 정도라도 계속해보려는 거지. 살인자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얘기는 너무 잘 써져서 나로선 감히 흉내 낼 엄 두도 못 내겠더군. 그건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언어였 던 거야. 이제 나도, 이 나라가 독립한 이후로 흔히 볼 수 있었 던 짓을 한번 저질러 볼까 하네. 내 동포들이 프랑스인이 살던 옛집의 돌들을 하나하나 가져다 자기만의 집을 새로 지었듯 이, 나도 살인자가 썼던 단어들과 표현들을 가져다

(P.7)

자네를 비롯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의 책을 읽은 것처럼, 나도 그가 그 사건을 어떻게 얘기하는지 보고 싶어 읽어 봤네. 앞부분만 읽고도 금방 알겠더군. 그는 남자의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내 형은사건의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었어. 어 떤 이가 자기가 부리는 흑인을 '금요일 '이라고 부른 것처럼 (영 국 작가 다니엘 디포의 소설《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혹인 '프라이데 이(Friday)'* 일컬음) 그도 형을 '오후 2시'라고 부를 수도 있었을 거야. 한 주의 요일 대신 하루 중의 한순간을 선택言는 거지. 오후 2시, 좋지. 아랍어로는주드. 들, 쌍, 형과 나, 쌍둥이. 이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이들이 볼 땐 형과 나는 어떤 면에 서 의심할 바 없는 쌍등이라고도 할수 있다네. 내 형 '아랍인' 은 두 시간밖에 못 살고 스러져버린 덧없는 존재였지만, 장례 를 치르고 나서도 70년 동안 계속해서 죽어야 했지. 내 형 주 드는 유리관 속에 들어 있는 셈이야. 살해당하고 난 뒤에도 사 람들은 줄곧 형에게 바람과 시곗바늘 두 개로 이름을 붙여췄 고, 형은 자신의 죽음을 끊임없이 재연해야 했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던 한 프랑스 남자, 자기 등에 짊어진 나머지 세상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던 그 작자가 쏜 총 알을 맞고 죽는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줘야만 했어.

(P.11)

예전에 나는, 자네나 자네 나라 사람들은 절대로 제기하지 않았던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있다네. 그거야말로 수수께끼를 푸는 첫 번째 열쇠인 건 사실이니까. 그건 바로 뫼르소의 어머니가 묻힌 무덤은 어디 있을까, 하는 거지. 그래, 하주트의 어던가에 있겠지, 그가 말한 것처럼. 그런데 정확히 어디냐고. 거기 가본 사람이 있긴 한 건가? 책에 나오는 양로원에 가본 사람이 있을까? 묘비에 새겨진 비문을 집게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본 사람이 있을 까? 내가 볼 땐 아무도 없어. 나도 그 무덤을 찾아봤지만 끝내 발견할 수가 없었다네. 마을에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무덤이 상당히 많았는데도, 살인자 어머니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어. 그래, 물론 설명이 가능하긴 해. 해방이 되면서 우리는 프랑스인의 묘지들을 노렸고, 아이들이 땅에서 파낸 해골을 공처럼 갖고 노는 것도 자주 봤었지. 우리에게는 마치 전통처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프랑스인 들은 도망칠 때 우리에게 세 가지를 남겨놓는다는 거였어. 뼈, 도로, 그리고 단어들-또는 죽은 자들〔'단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mot(모)와 '죽은 자'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mort(모르)는 철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그런데도 그의 어머니 무덤은 찾지 못했어. 뫼르소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 거짓말을 한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해. 그렇게 본다면 그의 전설적인 무관심과 냉혹함도 이해가 되지. 그건 태양과 무화과나무로 덮인 이 나라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그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믿는 그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지껄이느냐고 하겠지만, 내 의심엔 근거가 있다네. 뫼르소가 어머니 장례식을 그토록 세세하게 묘사한 걸 보면, 단순히 기록하는 게 아니라 우화를 지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 않나? 고백이 아니라 심혈을 기울여 이뤼낸 재구성이라고나 할까. 기억이 아니라 너무도 완벽한 알리바이야. 내가 지금 얘기 하는 건 중명해낸 수만 있다면, 다시 말해 뫼르소가 자기 어머 니 장례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자네도 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한 텐데. 몇 년 지난 후에 하주트의 토박이들에게 불어보고 나서 짐작하게 된 건데, 그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도 없거니와 양로원에서 세상을 뜬 노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땡볕 아래에서 기독교도들의 장례 행렬이 지나기는 걸 본 사람도 없더라고. 이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줄 유일한 어머니는 바로 내 엄 마야. 지금도 엄마는 우리 집의 레몬나무 주변을 비로 쓸고 있는중이지.

(P.50)

한 프랑스 남자가 황당한 바닷가에 누워 있던 아랍 남자 한 명을 죽여. 1942년 여름, 오후 2시의 일이야. 총알 이 다섯 발 발사되지. 연이어 재판이 열리고 살인자는 자기 어머니 장례를 제대로 제대로 기르지도 않고 어머니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게 얘기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져. 단순히 보자면 살인이 일어난 건 태양 때문이거나 아니면 순전한 한가함 때문이지. 뫼르소는 어떤 창녀에게 양심을 품은 레몽이라는 포주의 부탁으로 협박 편지를 한 통 써주게 되는데, 그 일이 점차 꼬이면서 결국 살인으로 끝난 거야. 아랍인이 창녀를 위해 복수하려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름 죽인 거지, 아니 어쩌면 그가 감히 건방지게 낮잠을 자려 했다는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자네 책을 이렇게 요약하는 게 거슬리지는 않나? 하지만 이게 바로 진실인 결 어쩌겠나, 나머지는 다 작가의 재주로 덧붙인 장식인 뿐인걸, 그 사건이 난 이래로, 죽은 아랍인을, 그의 가족을, 그의 동포들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살인자는 출감하면서 책을 한 권 쓰는데 그게 아주 유명해 지지. 그는 책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사제에 대해, 그리고 부조리에 대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얘기했어, 그 책 내용은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 해봐도 말이 안 돼, 그건 법죄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작 아랍인은 살해되있다고도 불 수가 없는 게 손가락 끝으로 하루살이 죽이듯 그렇게 하찮게 죽여버렸거든. 아랍인이야말로 두 번째로 중요한 등장인물인데도 이름도, 얼굴도, 말도 없어. 이쯤 되면 대학생 양반, 자네도 감이 오지? 이 이야기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말일세! 이건 새빨간 거짓이야. 한 잔 더 들게. 내가 사지. 이 책에서 뫼르소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을 그리고 있다네. 소유라는 것도 부질없고, 결혼도 사실상 필요 없고, 결혼식도 건성으로 치르고, 취향이랄 것도 별 거 없는 그런 세상이지. 사람들은 껍데기만 남은 채 텅 빈 가방 위에 앉아 병들어 썩어가는 개들에게나 집착하고, 두 문장 이상을 말할 능력도 없고, 네 단어 이상을 동시에 발음하지도 못하지. 자동인형들! 그래, 그거야. 이제야 그 단어가 생각나는군. 작은 프랑스 여인도 생각나네. 살인자 작가가 어느 날 레스토랑 홀에서 관찰하며 아주 잘 묘사해놓은 여자 말일세. 기계적인 동작, 빛나는 눈, 강박적인 행동, 덧셈의 고역, 지동인형 같은 몸짓. 하주트 번화가에 있는 시계도 또 생 각나는군. 추시계와 프랑스 여인은 꼭 쌍등이 같아. 시계의 기계장치도 독립하기 몇 년 전부터 이미 고장이 나 있었던 것 같던데.

(P.79)

당연히 그날 저녁 당장, 나는 그 망할 놈의 책을 펴 들었네. 천천히 읽어갔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달려 들어가 게 되더군. 모욕당하는 느낌과 동시에 그 안에 내 모습이 드러나 있다는 느낌도 받았지. 난 신의 책을 읽듯 밤을 꼬박 새서 읽었네. 가슴이 뛰면서 숨이 막힐 듯했어. 그건 진정한 충격 이었어. 거기엔 모든 게 다 있더라고, 핵심적인 것만 빼고. 무 싸의 이름! 그건 어디에도 없었어. 나는 '아랍인'이라는 단어 를 세고 또 세어봤어. 그 말은 스물다섯 번이나 나왔지만 이름 은 찾아볼 수 없었어. 전혀 없었어. 소금, 눈부심, 거룩한 사명 을 짊어진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만이 있었을 뿐이야. 뫼르 소의 책은 무싸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에겐 이름이 없 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말해주는 게 없었어. 반대로 살인 자의 영혼에 대해선, 마치 내가 그의 천사이기라도 한 듯 상세 하게 보여주더라고. 그 책에선 기억들이 괴상하게 왜곡돼 있 있어. 해변에 대한 묘사에서부터, 살인이 일어난 순간에 예사 롭지 않게 밝았던 햇빛, 다시는 볼 수 없었던 낡은 방갈로, 재 판 날들과 감방에서 지낸 날들 따위까지도. 엄마와 내가 무싸의 시체를 찾아 알제의 길거리를 해매고 다니는 동안 그는 그러고 있었다니. 그 작자, 자네가 우러르는 그 작가는 내게서 내 쌍둥이 주드, 내 초상, 그리고 내 삶의 세세한 단편들뿐 아 니라 내가 받은 심문의 기억까지도 훔쳐간 것 같더군. 나는 밤 을 거의 꼬박 새며 한 낱말, 한 낱말, 꼼꼼하게 읽어나갔지. 그 건 완벽한 헛소리였어. 내가 그 책에서 찾으려 한건 형의 적이었는데, 정작 발견한 건 내 반영이었지. 내가 살인자와 똑 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마침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어. “(......) 내 처형 날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중오의 함성으로 날 맞아주기를 바리는 일만 남았다.” 맙소사, 이거 야말로 내가 얼마나 바랐던 일이었는지 아나! 분명히 구경꾼은 많았었지만 그건 그의 죄 때문이었지 재판을 구경하려는 건 아니었어. 게다가 구경꾼들이란 게 어떤 자들이었나! 열성 팬들, 우상숭배자들! 그 숭배지들의 무리 속에선 중오의 함성 따위는 전혀 없었지. 이 마지막 문장은 나를 뒤흔들어놓았어. 걸작은 걸작이지.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가 알라(이슬람교의 유일신)와 권태 사이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거울을 들이대고 보여주는 것 같았어.

​(P.179)

나보고 신을 믿느냐고 묻는 건가? 나 참, 기가 막히는군!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사람들은 왜 신의 존재에 관해 의문이 들 때마다 인간을 향해 돌아서서 대답을 기다리는지 모르겠어. 신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직접! 종종 나는 내가 정말로 그 미나레트에 올라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네. 사람들은 꼭꼭 잠가놓은 문을 부술 듯 두들기며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쳐대지. 그들은 문 바로 뒤에서 분노에 떨고 있어. 그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나? 말해봐, 들리느냐고, 난 들리는데, 곧 문이 열린 거야, 그럼 나는? 그럼 난 뭐라 고 부르짖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이 한마디만 하겠지. "여기엔 아무도 없어!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어! 모스크는 비어 있어. 미나레트도 비어 있어. 여긴 빈 곳이야!” 분명해. 내가 처형당하는 날엔 구경꾼들이 많을 테고, 그들은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 거야. 뫼르소.는 처음부터 옳았던 건지도 몰 라. 정말로 이 에기에는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거든. 모두가 단번에, 한 방에, 죽어버린 거지.

(P.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쉽게읽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수잔네 뫼부스 / 공병혜 / 이학사 / 286쪽

(2019. 8. 3.)

여러 이유에서 철학을 하게 된다. 계속 이어나갈 만큼 매력적인 사고, 해겨되어야 하는 문제, 다양한 이론 사이에 드러나서 해결되어야 필요에 의해서 철학을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선구자들이 지닌 사유의 체계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 체계를 강렬히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과의 논쟁에 그의 철학적 창의성의 고유한 모티브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유와 저술은 그 자신의 고유한 감수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일종의 강제력과 같은 피할 수 없는 내적 필연성으로 작용한다. 언젠가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엇이 철학자를 만드는가? 바로 가슴속에 어떠한 질문도 품고 있지 않는 용기이다.”

(P.14)

쇼펜하우어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1판 서문에서 “이 책의 이해를 위한 독해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아주 난해한 저술을 이해하기 위한 지침은 다음과 같은 그의 글에서 발견할수 있다.

독자들은 이 책에 앞서 이 책의 서문을 읽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5년 전에 출판된『충족근거율의 4가지 뿌리에 대해서』라는 표제의 철학적인 저술이다.(p. 9)

실제로 모든 사유의 전개를『충족근거을의 4가지 뿌리에 대해서』라는 비교적 짧은 텍스트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 없이 그의 “사유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는 몇 가 지 고유한 사유가 자기 저작의 모든 장에서 근본적인 전제 조건으로서 다양하게 형태화되어 전개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일 종의 “건축술적인 연관성”으로 되풀이하지 않고도 자신의 근본 사유들 로부터 모든 결론들이 추론되어 나오는 방식으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성했다. 그래서 그는 독자들이 이러한 근본적 사유에 익숙하다고 전제하고 자신의 작품을 기술하였다.

(P.52)

​ 쇼펜하우어가 근거율에 대한 저술에서 발전시킨 근본적 사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 어쩌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객체는 주체 없이 절대로 표상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전체적인 체계는 이 주장에 근거한다. 객체는 항상 인식되거나 사고될 수 있다. 반면 주체는 인식하고 사유하는 인간이다. 개별적인 인간은 자신의 객체로서의 세계의 주체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계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이 “충족근거을”에 감춰져 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근거율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논문을통해서 완전히 이해한다면 (......) 주체가 인식하는 개별자인 한, 주체에 의해 규정 된 객체가 어떤 성격을 지니든 항상 어디서든지 이해되는 형식이 바로 근거율이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까지의 철학함에서 완전히 벗어난 방법에 의해서 추구될 때 기능하다.(p. 10)

​(P.52)

​ 쇼펜하우어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저술로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발을 내딛었으며, 그 내용뿐만 아니라 서술하는 방식에서도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그의 새로운 표상 방식은 바로 근거 관계, 즉 만약 객체가 있다면, 주체도 있다(또한 그 역으로도 성립이 가능함)라는 것이 그의 전체 논증의 기반이며,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타당성의 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관계를 “근거율"이라는 명칭을 통해서 절대적으로 타당한 진리-근거로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P.53)

우리의 사고는 어떤 특정한 것의 생성을 위해 항상 근거 있는 관찰들을 일반화시키고, 이러한 관찰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예들에 적용시켜 가능한 법칙으로 표현한다. 어떤 것은 그 이전에 어떤 다른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것은 주어진 것의 현존으로부터 그 이전의 것이 추론되며 그 이후의 것이 형성되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다. 인간의 사고는 이러한 연쇄적인 과정에 따른다-존재하는 것들과 이들 각각의 특성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인간 사고의 근본적인 욕구라고 쇼편하우어는 확신한다.

(P.56)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유일한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이념을 향해 있음을 강조한다, 개별적인 현상들의 무한한 다양성과 비교해서 이념은 당연히 일종의 통일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분리될 수 없는 의지 물자체의 통일성과 비교하여 이념은 이미 의지의 객관화의 한 단계로서의 다양성을 현시한다-그래서 개별적인 것과 다 양한 것은 같은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이념을 정관하면서 개별적안표상의 그림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뭍에, 예술에 있어서 개별적안 것 은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은 자신의 현상들의 변화로부터 고립되어 나와서 결방해받지 않는 고찰을 위해서 보존되어야 한다. 학문들은 표상 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그 표상들이 근거하고 있는 이념에 대한 인식 을 향하여 상승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학문이 오로지 시간과 공간의 조건하에 있는 인식에 기여하는 학문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다” 예 술은 이러한 학문의 단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관조적인 인식을 시작한 다 따라서 예술의 목적은 항상 이미 현전하는 것이다.

(P.147)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의 인식론, 의지의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을 포괄하는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친 것만큼 쉽게 다가서서 그의 사고와 깊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쇼펜하우어 스스로가 말했듯이 이 책을 두 번 이상 끝까지 읽는 엄청난 인내력과 지적 정열을 지닐 때, 그리고 그의 문학적인 문체에 익숙해져 그의 언어가 지닌 내적 감수성의 깊이에 도달했을 때, 이 책에 대한 이해의 길이 열린다. 그리고 이 책은 서구의 전통적인 이성 형이상학과의 투쟁 과정과 비판, 그리고 플라톤, 칸트, 인도 철학, 다원의 생물학적 인간 이해라는 다양한 사상적 전통에 대한 수용을 통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떠한 철학적 사상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창적인 철학적 체계와 사상, 문학적인 문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 일관적으로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오로지 하나, 궁극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인간 삶의 본질인 고통의 근원에 대한 탐구이다. 인간의 고통의 근원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그의 궁극적 목적은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인 의지에 대한 자기 통찰을 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육체성에 얽매인 이기적 성향으로부터 해방되어 연민에 의한 타자와의 연대적 감정을 통해 도덕적 삶에로 나아가는 데에 있다.

​(P.282)

이 책의 저자는 먼저『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제1권인 표상으 로서의 세계에 대한 인식론, 즉 학문 이론을 소개한다. 저자는 텍스트 의 주요 구절들을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는 방식을 통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 조건, 인식하는 오성의 역할, 지식의 가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제2권에서는 그의 저서의 가장 핵심적 부분인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진다. 거기서 저자는 표상의 세계의 근거를 이루고 있 는 삶의 맹목적 충동으로서의 무의식적인 의지와 의지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인 신체에 대한 이론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른 의지의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적 체계를 기본 텍스트에 근거하여 면밀히 파고들고 있다. 저자는 특히 자연에서 의지가 표현되는 최고의 단계에서 출현하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본질이 왜 고통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인간 본성의 필연성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사색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3권에서는 이러한 의지의 세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서의 이념론과 이를 기초로 한 예술론이 전개된다. 예술은 의지의 현상으로서의 세계의 본원인 이념을 인식하는 수단이며. 이 인식은 삶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거기서 저자는 예술 작품, 예술가. 자연미와 숭고미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의 입장올 미스트의 주요 문구의 인용을 통해 세밀하게 전개시기고 있다.

제4권에서는 쇼펜하우어의 고유한 윤리적 입장을 인간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육체가 생존하는한 절대적인 자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 자유는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육체에 얽매인 의지의 현상에 집중함으로써 생기는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다. 이러한 이기주의로부터의 해방은 바로 자아와 타자가 똑같은 의지의 현상이라는 통찰로부터 일어나는 감응, 즉 연민에 의해 가능하며, 이것이 덕의 본질 을 이루는 기초가 된다. 따라서 인간이 자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개별적인 자아의 거부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타인, 더 나아가 우주의 근원인 보편적 의지에로 확장시키는 것이며, 이때 일어나는 자아에 대한 통찰과 타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감응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 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P.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자의 책장

이정모, 이은희, 이강영, 이명현 / 북바이북 / 320쪽

(2019. 7. 24.)

아무리 길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낯선 도시에서 헤매지 않고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도시라고 하더라도 원래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도가 필요 없습니다. 서서히 적응해왔기 때문이죠. 책의 지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문학의 세계에 살던 분들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해도 그 작가를 쉽게 자리매김할수 있을 겁니다. 어디에 꽂아야 하는지 보이니까요 과학책의 세계는 어떨까요? 과학책이 몇 가지 없을 때부터 즐겨 읽었던 사람들은 새로운 과학책이 나오면 새 책을 이전 책들과 어떤 방식으로 씨줄과 날줄을 엮어야 할지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 회과학이나 인문학에 도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이리는 낯선 세계에 들어오면 복잡해 보이지요 길을 잃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도입니다. 과학책으로 엮은 지도 말입니다.

(P.6)

흔히 '과학자의 글쓰기'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지목되는 것이 있다. 명료성, 정확성, 객관성, 간결성이다. 아무래도 과학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다루기에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 이 가능하고, 꿈과 상상이 아닌 사실과 정보를 전달하는 데 치우쳐 지기에 가능하면 이를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선행된다. 또한 감각적 수사나 은유보다는 오해를 피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먼저이니, 이를 풀어 쓰는 방식이 간결해야 함은 당연하다. 대 부분의 과학자가 글을 쓰는 목적이 타인과 교감하고 공감하기 위해 서가 아니라, 정보를 교류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니까 말이다. 이런 글쓰기에 익숙한 과학자들이 써낸 책들은 많은 경우 양념하지 않는 닭가슴살과 같은 느낌을 준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지식의 근육을 만드는 데 필요한 영양가는 꽉 차 있지만, 그냥 먹기에는 심심하고 퍽퍽해서 쉬이 손이 가지 않는, 막상 큰맘을 먹고 먹 기 시작하다가도 얼마 못 가 십중팔구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한 숨을 쉬게 만드는 그런 것. 그렇기에 과학책을 읽을 때는 한 번에 처 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기보다는 조금씩 나눠 천천히 씹어 삼켜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을, 하나의 문단을 읽다가도 지식의 소화 불량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같은 책을, 같은 구절을 천천 히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반추동물이 급하게 씹어 삼킨 질긴 섬유질 음식들을 다시 게워내어 꼭꼭 씹어 삼키듯이. 과학책은 그렇게 읽 었다

(P.119)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더욱 큰울림과 반향을 지니는 건 바다 건너 저 멀리에 사는 타자화된 누군가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혹은 살아갔던 우리 의 가족, 친구, 이웃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가 아프게 한 개인들을 어떻게 사회가 치유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픔을 하소연할 데 없어 스스로를 파괴하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제도의 빈틈을 파고든 탐욕에 희생자가 된 세월호의 아이들, 사회적 차별로 늘 숨죽여 지내는 성 소수자와성 전환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이야기, 우리가 듣기는 했었지만 굳이 확인해보려 하지 않고 지나쳤던 이야기들, 어쩌다들 여다보기는 했었지만 굳이 읽어내려 하지 않았던 행간의 이야기들 을 담담하고 정확하게, 명확하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분명 이 책은 과학자가 쓴 책답게 정확하고 명료하면서고 객관적이고 간결하다. 하지만 전혀 건조하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명료하기에 더 이상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들괴 정확하기에 반론을 하기 어렵게 만들며, 당사자의 슬픔과 아픔을 선명하게 짚어낼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이다. 이에 더해 간결하기에 그 울림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개인의 행복과 불행뿐 아니라, 개인의 몸이 앓는 병과 몸에 남는 선명한 상처가 실상 그 사회가, 그 사회적 관계가 얼마든 지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 허탈하기까지 했기에, 책을 읽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의 문장은 술술 읽히지만, 한편으로는 술술 읽을 수가 없다. 한 페이지에 가슴 이 먹먹해서 한숨 한번 쉬고, 또 다른 페이지에 눈물이 치올라 잠시 하늘 한번 보국 그다음 문장에서 견디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가 한 참을 진정하고서야 다시 책장을 열게 만들었다.

(P.126)

유전자의 특징과 개념을 잡아주는 책으로 떠오르는 것은 『게놈 익스프레스』(조진호 지음, 위즈덤히우스, 2016) 이 책은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그래픽노불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유전체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을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처리한 흐름도 매우 돋보인다. 하지만 그래픽노블의 장점은 그대로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컷에 글과 그림이 직관적으로 다가가기 쉽지만, 줄글보다 행간의 넓이가 커지므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는 느낌보다는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겅중겅중 넘어간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픽 노블 과학책은 두 번 읽기를 권장 한다. 먼저 커다란 줄기를 잡기 위한 입문용으로 한 번, 해당 분야의 지식을 쌓고 난 뒤 숨겨진 이스터 에그를 찾기 위해 또 한 번. 행간을 읽어내는 건 독자의 배경지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P.135)

물리학자들은 양성자의 구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파이온, 케이온 등을 비롯 한 여러 가지 새로운 입자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가속기는 물질의 구조를 탐색하는 데 매우 강력한 도구임이 밝혀졌다. 1950년대부터 대형 가속기가 건설되고 가속기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더욱 더 많은 새로운 입자들이 발견되었고, 물질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 섰다.

우리가 입자물리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는 이때쯤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구체적인 의미로 입자물리학을 원자핵 이하의 세계를 연구하는 분야라고 하면 거의 맞다. 입지들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에 더욱 크게 진전을 보였다. 다시 쿼크라는 새로운 종류의 입자가 양성자와 중성자를 비롯한, 그동안 발견된 수 많은 입자들을 구성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으로는 원자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개발된 양자 이론을 전자기 상호작용에 적용하는 양자전기 역학이 수립되어 체계적으로 기본입자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길이 열렸다. 이런 실험적, 이론적인 발전의 결과로 중력을 제외한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을 모두 게이지 양자 장이론이라는 형식으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이론인 표준모형이 1970년대 초에 수립되었고 실험적으로 검증되기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표준모형의 모든 세부가 철저하게 검증되었다. 표준모형에 나오는 입자는2012년 힉스 보손이 발견됨으로써 모두 발견되었고 표준모형의 구조도 거의 전부 확인되었다.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은 힉스 보손의 자체 상호작용의 효과뿐이며, 표준모형과 어긋나는 실험 결과는 중성미자의 질량뿐이다. 표준모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현상의 거의 전부를 놀랍게도 정확히 설명해주는 이론으로서, 현대 물리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다.

(P.178)

세상은 무한한수수께끼와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빛과 어둠,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열기가 번갈아 찾아오고, 나무와 풀, 짐승과 새들과 벌레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 곳. 그 안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두렵지만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 차츰차츰 세상의 모습을 밝혀왔다. 17세기경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는 매우 강력한 도구를 개발해 냈다. 지금 우리는 이 도구를 과학이라고 부른다. 과학을 손에 든 후 인간은 세상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괴 자연을 '정복'한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쯤 되자, 인간은 더 이상 세상에는 수수께끼란 없다고, 이제 인간이, 혹은 인간의 이성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수 있게 되었고, 남은 일은 그 안에서 잘 살아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세상의 이면을 느끼고 세상 저 깊은 곳에는 여전히 수수께끼와 신비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의 겉모습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개념은 원자였다. 물질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원지를 진짜로 이해하려고 하자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지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과학을 건 설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금 원자를 이해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 새로운 과학의 중요한 부분을 우리는 양자역학이 라고 부른다.

20세기 과학에서 양자역학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양자역학을 통해서 우리는 원지를 이해하고, 물질을 이해하고, 이전에 가지고 있던 피상적인 지식을 체 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P.209)

우리가 여러 가지 과목을 배우는 목적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지구라는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각 과목들은 그 분야의 지식을 제공하는 한편, 다른 분야와 서로 얽혀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사고 체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어준다. 수학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법과 추상적인 사고를 배우는 과목이다, 학생들이 수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바로 이 부분,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일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이고 쉬운 예를 이용해서 수학을 가르치려는 시도가 많이 있다. 하지만 결국 수학의 목적이 추상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회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 미분과 적분이 써먹을 데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미분과 적분을 그저 복잡한 계산법으로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생각한다 해도, 나중에 과학이나 공학에 관한 일을 하게 될 사람이면 미적분을 필요로 할 기능성이 높으니, 사실 미적분이란 꽤 실용성이 큰 지식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저 복잡한 계산법일 뿐이라팀 굳이 모든 사람이 배을 필요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미적분은 배우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적분을 배우는 목적 혹은 의미는 계산법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미분과 적분은 인간이 구축한 가장 추상적인 개념이자, 가장 심오한 개념을 배우는 분야다. 그 개념 이란 바로 '무한이다.

무한이라는 개념은 누구나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이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사유는 무한을 다뤄왔다. 한편으로는 무한에 의해 사유를 제한빋아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을 생각하며 엄청난 지극을 받았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는 무한을 경험 할수 있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면, 내가 보고 있는 이 공간이 무한하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내가 무한을 보고 있는가? 무한은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P.2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의 차이를 만드는 독서법, 본깨적

박상배 / 위즈덤하우스 / 300쪽

(2019. 6. 4.)

본깨적 책 읽기란 저자의 핵심을 제대로 보과(본 것). 그것을 나의 언어로 확대 재생산하여 깨닫고(깨달은 것), 내 삶에 적용하는(적용할 것) 책 읽기를 의미한다. 책을 읽었는데도 삶에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은 책올 제대로 읽지 못 했거나 읽었어도 읽은 것으로만 끝냈기 때문이라는 걸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목적은 조금씩 다르다. 재미를 위해 읽는 사람도 있고,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읽는 사람도 있고, 위로와 용기가 필요해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삶에서 직면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에서 답을 찾는사람도 있다. 어떤 목적이든 책을 읽고 만족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보람은 충분하다. 어떤 방법으로 책을 읽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책을 읽고 적극적으로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책 읽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특히 그동안 책을 읽었는데도 변화가 없어 답답했다면 이전에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를 돌아보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책 읽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P.68)

저자의 관점에서 보라

본깨적 책 읽기는 제대로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제대로 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보는 경향이 있다. 고정관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심하다. 책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책을 읽고 기억나는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대답을 한다. 물론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과 관심 분야가 다르고, 책을 이해할수 있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책을 제대로 보려면 내가 아닌 저자의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좋은 책 좀 추천해달라고 해서 고심 끝에 추천해주면 다 읽지도 않고 “다 아는 내용이다” 혹은 “별로 흥미로운 내용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런 내용이면 나도 쓰겠다”, “내용은 많은데 핵심이 없다” 등 험악한평가가 뒤따른다.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삶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기계발서인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심지어는 그런 류의 책은 저자가잘난 척하는 데다,사람만 다르지 내용이 다 비슷비슷하다며 평가절하한다.

책을 읽고 평가할수 있다.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때론 저자의 이야기를 비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제대로 읽고 핵심을 파악한 후의 일이다. 저자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의도도 파악하지 못하고 비판만 한다면사고가 확장되기는 커녕 고정관념의 뿌리만 깊어진다.

저자의 관점에서 책을 읽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책 내용을 왜곡하기 쉽다. 왜곡은 애써 책을 쓴 저지를 모독하는 것은 물론 책 읽기의 효괴를 반감한다. 설령 저자가 하는 이야기가 자신의 가치관이나 평소 알고 있던 내용과 다르더라도 평가의 잣대를 휘두르기 전에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들이 사고를 확장 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P.70)

골라 읽기도 당당한 독서법 중 하나!

책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모든 책을 교과서처럼 읽을 필요는 없다. 책을 읽는 목적, 책 읽는사람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읽는 방법을 달리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목적과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책을 읽으면 더 효과적으로 읽을수 있다.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는 것도 당당한 독서법 중의 하나다. 책 읽기 고수들 중에도 골라 읽는 분들이 많다. 책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책 읽기 고수 이어령 교수도 골라 읽는다. 이어령 교수는 책을 볼 때 전체적으로 한 번 죽 훑어보고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읽는다고 밝혔다.

​(P.77)

책을 읽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난감해하는 분이 많다. 왜 준비를 해야 하는지 공감해도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준비는 책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사전 평가, 예측,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첫 작업이 다음 세 가지 질문을스스로에게 던지고 답하는 것이다.

첫째, 이 책과 나의 연관성은?

​둘째, 책의 예상 핵심 키워드는?

셋째, 이 책에서 얻고자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만으로도 책 읽기의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질문에 답을 할 때는 머릿속으로만 하는 것보다 손으로 써서 정리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손으로 쓰는 순간 생각은 보다 명료해지고,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양식을 만들어보았다. 이 준비양식을 'Before Reading'이라 하는데, 이 양식지를 이용하면 보다 쉽게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P.128)

깨달은 것과 적용할 것은 사유를 바탕으로 적어야 한다 본 것을 적는 데도 기본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중요한 문장을 그대로 베껴 쓴다고 해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왜 그 문장이 중요한지를 생각해야 어떤 문장을 베껴 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단순히 중요한 문장을 옮겨 적는 수준을 넘어 본 것의 핵심 내용을 요약정리하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이처럼 본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잘 적지 못하는데 깨달은 것과 적용 할 것을 적을 때는 더욱 더 깊이 있는 사유가 필요하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고 적용할 것이 생각나는 경우도 많지만 그것만으로는 사고를 확장하기도 어렵고, 삶을 변화시키는 데도 한계가 있다.

(P.166)

직장인의 하루는 짧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싣고 시간에 맞춰 출근하기도 버겁다. 퇴근 시간 '땡하기' 전까지는 회사에 얽매인 몸이다. 잠깐 쉬는 시간에 책을 보는 것은 어찌 보면 사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현대인은 모두 바쁘다. 그렇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책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책은 어려운 순간에 괴력을 발휘한다. 때론 어려움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때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때론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위로를 건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 주기도 한다.

물론 삶의 큰 웅덩이를 만나 질척일 때 책에서 금방 해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책은 모래사막에 있는 낙타와 같다. 낙타는 뜨거운 태양을 막아주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걸어가는 길에 함께 해주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도와준다. 마찬가지로 책은 역경을 직접 해결해주지 못한다. 힘든 길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우직한 낙타처럼 함께 해준다.​

​(P.2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홍성광 / 을유문화사 / 836쪽

(2019. 8. 2.)

서술된 사상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이 책을 두 번 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 저절로 밝혀진다. 그것도 처음에는 시작이 끝을 전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시작을 전제로 하고, 또 모든 뒷부분이 앞부분을 전제로 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모든 앞부분이 뒷부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강한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한다. 그런 인내심은 자발적으로 주어진 신념으로만 얻을 수 있다.

(P.10)

나는 철학이 한편으론 정치적 수단으로, 다른 한편으론 생계의 수단으로 창피하게 잘못 쓰이고 있는 이 시대처럼 철학에 불리한 시대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또는 가령 그렇게 노력하고 법석을 떨다 보면 아무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진리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진리란 자신을 갈망하지 않는 자에게 치근대는 창녀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해도 그녀의 호의를 확신할수 없는 쌀쌀맞은 미녀와 같다.

(P.22)

철학에 이끌림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저서라는 고요한 성소聖所에서 그 자신의 불멸의 교사를 찾아야 한다. 이들 모든 진정한 철학자의 주된 장에 서술된 학설에는 범속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내놓는 답답하고 왜곡된 보고문보다 백 배 이상의 통찰이 담겨 있다.​

​(P.31)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그렇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으며, 인간이 실제로 이를 의식할 때 인간의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겨난다. 그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세계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어떤 진리를 선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 진리는 온갖 다른 형식인 시간, 공간 및 인과성보다 더 보편적인 경험,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가능한 경험의 형식을 말하고 있고, 이 형식들은 이미 바로 이 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충분근거율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인식한 이 모든 형식은 각각 표상들의 특수한 부류로 간주되는 반면,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는 것은 그러한 모든 부류의 공통된 형식이고, 그러한 형식 아래에서만 어떤 종류의 표상이든, 추상적이든 직각直覺적이든, 순수하든 경험 적이든 어떤 표상이 가능하고 있을 수 있다.

​ 그러므로 이 진리(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보다 더 확실하고, 다른 모든 진리와 무관하며 증명을 덜 필요로 하는 것은 없다. 인식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전체 세계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객관에 지나지 않으며, 직관하는 자의 직관, 한마디로 말해 표상인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아주 먼 것과 가까운 것에도 적용된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그 속에서만 구별되는 시간과 공간 자체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세계에 속하고 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불가피하게 이처럼 주관에 의해 조 건 지어진 상태에 있으며, 주관을 위해서만 한한다. 세계는 표상이다.

(P.41)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는 관점에서만 보자면,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불가분의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 한 측면은 객관으로, 그것의 형식은 공간과 시간이며, 이로 인해 다수성 이 생겨난다. 그런데 다른 측면인 주관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은 표상하는 모든 존재에 나누어지지 않은 채 온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중단 한 사람이라도 현존하는 수백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객관과 더불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완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사라져 버리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측면은 사상에 있어서조차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두 가지의 어느 쪽도 다른 한쪽으로 인해서만, 또 다른 한쪽에 대해서만 의미와 현존을 지니며, 그것과 더불어 현존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직접 경계를 접하고 있기에 객관이 시작되는 곳에서 곧 주관이 끝난다. 이 경계가 서로 접한다는 사실은, 모든 객관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형식들인 시간, 공간 및 인과성은 객관 그 자체를 인식하지 않고도 주관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고 완벽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데서, 즉 칸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의식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것을 발견한 것이 칸트의 주된 공적이자 매우 위대한 공적이다.

(P.45)

)

피히테의 철학이 주관에서 출발했듯이, 유물론은 철저히 객관에서 출발했다. 아무리 단순한 객관이라도 그것을 설정하자마자 동시에 주관도 설정된다는 것을 유물론이 간과했듯이, 객관 없이는 주관도 생각할 수 없으므로 피히테는 주관과-그가 이것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이-아울러 객관도 설정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선험적 추론, 그러니까 모든 논증은 무릇 어떤 필연성에 근거하고 있지만 모든 필연성은 오로지 근거율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필연적이라는 것과 주어진 근거에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상관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거율은 객관 그 자체의 보편적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미 객관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객관에 앞서 그리고 객관의 밖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으면서 최초에 객관을 데리고 나오거나 근거율의 입법에 따라 객관을 생기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개괄하면 주관에서 출발하는 것도 앞서 말했듯이 객관에서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니까 최초에 도출하려고 내세우는 것, 즉 그 출발점의 필연적 상관개념을 미리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방법은 이 두 가지 상반된 오류와는 전적으로 상이하다. 즉, 우리는 객관에서도 주관에서도 출발하지 않고, 의식의 제1사실인 표상으로부터 출발한다. 표상첫째가는 가장 본질적인 근본 형식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짐이고, 객관의 형식은 다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근거율이다. 이들 형태는 제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부류의 표상을 지배하므로, 이미 언급했듯이 그 형태를 인식하면 모든 부류의 표상의 본질도 인식되는 것이다. 즉, 이 부류(표상으로서)는 바로 그 형태 자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 자체는 시간 속에서의 존재의 근거, 즉 연속과 다름없고, 공간은 공간 속에서의 근거율, 즉 위치와 다름없다. 물질은 인과성과 다름없고, 개념은-곧 나타나게 되겠지만-인식 근거에 대한 관계와 다름없다. 이처럼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것의 가장 보편적 형식(주관과 객관)에서 보거나 이 형식에 종속된 형식(근거율에서 보더라도 전적으로 일반적인 상대성을 띠고 있다. 그런 사실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표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측면에서 찾도록 하며, 그러한 측면은 제2권에서 모든 생물 에게서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확실한 사실로 증명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또한 인간에게만 속하는 표상의 부류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고찰한 표상의 주관적 상관개님이 모든 동물 에게도 주어진 지성과 감성이듯이, 그 표상의 재료는 개념이고, 그 주관적 상관개념은 이성이다.

(P.89)

개념은 지금까지 고찰해 온 표상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부문을 형성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개념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이고 자명한 인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고, 단지 추상적이고 논변적인 인식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직관적 표상인 실재하는 외부세계가 이 경험으로 이해되는 한, 개념이 경험에 의해 증명되거나, 또는 직관적 객관처럼 눈앞이나 상상 속에 떠오르게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리라. 개념이란 사유될 뿐 직관될 수 없으며, 개념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결과만이 본래적인 경험의 대상이다. 그러한 결과들이 곧 언어이고, 숙고를 거친 계획적인 행동이며, 학문이며, 그런 연후에 이 모든 것에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P.98)

수학에서는 모든 경험에 앞서 공간과 시간의 직관적으로 의식된 관계에서 내용이 얻어지고, 순수자연과학, 즉 우리가 모든 경험에 앞서 자연의 경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는 학문의 내용이 순수한 지성, 즉 인과율의 선험적 인식에서, 또 공간 및 시간이라는 저 순수 직관과 그 법칙의 결합에서 생긴다. 다른 모든 학문에서는 방금 언급한 것에서 차용하지 않은 모든 것은 경험에서 얻어진다.

지식이란 대체로 그런 판단을 자신의 정신력으로 마음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 판단은 그 외의 어느 것에서 충분한 인식 근거를 갖는다. 즉, 참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인식만이 지식이다. 그 때문에 지식은 이성의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동물에게 직관적 인식이 있고, 이를 위해 기억도 하며, 바로 그 때문에 상상력을 지님으로써 게다가 꿈을 꾸는 것을 증명 할 수 있지만, 동물이 무언가를 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인 정한다. 의식이란 단어가 지식이란 단어에서 나온 것이므로, 의식이란 개념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대체로 표상의 개념과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식물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되 의식이 있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식이란 무릇 다른 방식으로 인식된 것을 이성이란 개념 속에 고정시켜 놓은 추상적 의식이다.

(P.115)

지식의 정반대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감정에 대해 상세히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개념은 전적으로 소극적인 내용, 즉 의식 속에 현존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고, 이성의 추상적 인식도 아니라는 내용을 갖고 있을 뿐이다. 덧붙여 말하면 추상적 인식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 감정이란 개념에 속하고, 그 때문에 감정이란 개념의 지나치게 넓은 권역은 무척 이질적인 사물 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이질적인 사물들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는 소극적인 점에서만 일치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그것들이 어떻게 만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매우 상이하고, 그러니까 적대적 요소까지 감정이란 개념 속에서는 서로 조용히 공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교적 감정, 관능적 감정, 도덕적 감정, 촉감이나 고통이 주는 구체적 감정, 색채감, 음향과 그것의 조화와 부조화에 대한 감정, 증오, 혐오, 자기반족, 명예, 수치, 정당함 및 부당함의 감정, 진리의 감정, 미적 감정, 힘과 약함, 건강과 우정 및 사랑의 감정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것들 사이에는 추상적 이성 인식이 아니라는 소극적 공통점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경우는, 심지어 공간적 관계의 직관적인 선험적 인식과 순수 지성의 선험적 인식이 완전히 감정이란 개념으로 표시되는 때이며, 또 우리가 먼저 직각적으로 의식하지만, 아직 추상적 개념으로 정리하지 못한 모든 인식과 진리를 느낀다고 표현하는 때다

(P.116)

진리란 어떤 판단의 그 인식 근거에 대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물론 그것은 판단하는 사람이 그와 같은 근거를 갖고 있다고 실제로 믿을 수 있는데도 어떻게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않는지의 문제, 다시 말해 오류, 즉 이성의 기만이 어떻게 가능한지의 문제이다. 나는 이 가능성을 앞에서 설명한 가상, 또는 지성의 기만의 가능성과 매우 유사하게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의 견해는-바로 여기서 말하면 그것이 설명되는 것이지만-모든 오류는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리에서 발생하며, 그 귀결이 해당 근거에서 생긴 것이지 결코 다른 근거에서 생긴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타당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타당하지 않은 추리라는 것이다. 오류를 범하는 사람은 어떤 귀결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하나의 근거를 그 귀결에 설정한다. 이 경우 그는 지성의 실제적인 부족, 즉 원인과 결과 간의 관계를 직접 인식하는 능력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는 더 자주 일어나는 경우지만, 그는 그 귀결에 사실 하나의 가능한 근거를 규정하지만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신의 추리의 대전제에다, 해당 귀결은 언제나 자신이 진술한 근거에서만 생긴다고 또 덧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귀납만이 그에게 그럴 권리를 부여하지만, 그는 귀납을 하지 않고 전제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언제나 라는 말은 너무 광범위한 개념이므로, 대신 가끔이나 대체로라고 하면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결론은 문제가 있어도, 그 자체로는 잘못이 아니리라. 그런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앞서 말한 방식으로 추리 하는 것은 성급한 탓이거나, 또는 가능성에 대한 지식이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그 때문에 해야 할 귀납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오류는 가상과 매우 유사하다. 두 가지 다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리인데, 가상은 항시 인과율에 따래 또 단순한 지성에 의해, 즉 직접 직관 그 자체 속에서 행해지고, 오류는 근거율의 모든 형식에 따라 이성에 의해, 즉 본래적 사유 속에서 행해진다.​

(P.156)

역사는 사건들의 실마리를 따라간다 역사가 동기화의 법칙에 따라 사건들을 이끌어 내고, 의지가 인식에 의해 조명되는 경우 그 법칙이 현 상으로 나타나는 의지를 규정하는 한 역사는 실용적이다. 의지가 아직 인식 없이 작용하는 의지의 객관화의 보다 낮은 단계에서 자연과학은 의지 현상들의 변화 법칙을 원인학이라 고찰하고, 현상에서 영속적인 것 을 형태학이라 고찰한다. 형태학은 개념들의 도움으로 자연과학의 거의 무한한 주제를 가볍게 해주고, 보편적인 것을 총괄하여 거기서 특수한 것을 도출해 낸다. 마지막으로 개체로서 주관의 인식을 위해, 이념이 갈 라져 다수성으로 현상하는 단순한 형식, 즉 시간과 공간을 고찰하는 것 이 수학이다. 그러므로 과학을 공통의 이름으로 갖는 이 모든 것은 다양 한 형태를 취하는 근거-을을 따르며, 이들 과학의 주제는 현상이고 그 현 상의 법칙이며, 연관이며 거기서 생기는 관계들이다. 그런데 모든 관계들 밖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홀로 원래 세계의 본질적인 것, 세계 현상의 참된 내용, 어떠한 변전에도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동일한 진리 로 인식되는 것, 한마디로 말해, 사물 자체, 즉 의지의 직접적이고 적절 한 사물 자체인 이념을 고찰하는 것은 어떤 인식 방식일까? 그것은 예술 이며 천재의 작업이다.

​(P.308)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788~1860)는 근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 된 이성주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상가다. 무엇보다도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한 인물로 중요하 다. 그의 글은 나중에 생의 철학,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및 융의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쇼펜하우어는 17세 때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 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18세의 청년 쇼펜하우어는 일기에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천만에, 이 세상은 악마가 만들었어”라고 적기도 했다 20대 초반에는 “삶은 어렵고 불쾌한 것”이며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한다.

(P.777)

출판했는데, 나중에 그 자신에 의해 방대한 작품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새벽별'로서 '유령들'을 몰아내고 낮을 알리고자 했던 쇼펜하우어의 염원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철학은 기존의 학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헤겔 철학이 지배하던 철학계에서 그의 철학은 비주류였다. 사업상으로 볼 때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작품의 정신사적인 중요성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이 책의 기본 사상은 포괄적인 두 계열의 성찰로 이루어진 4 권의 책 속에 전개되어 있는데, 이 성찰에는 인식론, 자연철학, 미학, 윤리학이 차례로 포함되어 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 사상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그의 철학에는 4 더 이상 별다른 발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떠한 내적 고투나 변화도 없 었고 기본 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재검토도 없었다. 이 책 이후의 저술들 은 그저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명료하게 하며, 확인하는 수준을 넘지 않고 있다.

​(P.784)

​ 칸트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의 현실, 즉 실질적이고 가능한 현상의 세계를 현상이라 하고,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을 실재라고 했다. 그러므로 실재는 정신의 산물이 아니며, 우리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정말로 존재하지만 경험으로 포착되지 않는 실재의 영역이 있으며, 거기서는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으며 거기에는 물질적 대상이나 시간이나 공간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실재가 존재한다는데 대해서는 거의 확신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것이 존재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을 절대로 알 수도 인식할 수도 없고, 직접 인지할 수 없으며 어떤 종류의 이미지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신이나 영혼 같은 것이 존재하는지도 절대로 확실하게 알 수 없고, 그것들이 존재하더라도 직접 인식하거나 결정적인 지식을 얻을 방법이 없다. 칸트 자신은 경건파 집안에서 성장했고, 스스로 죽는 날까지 기독교인이라고 선언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 경험의 영역을 벗어난 무언가를 사실적으로 알 수 있다는 주장을 뒤엎어 버렸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경험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깨우쳐준 칸트를 어느 누구보다 존경했지만, 우선 경험 세계의 바깥에 다수의 사물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한 점에서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시간이나 공간 속에 있을 때만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서 모든 것은 단일하고 차별이 없다고 주장했다. 따로 구별되는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은 경험 세계뿐이다. 칸트는 실재와 현상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쇼펜하우어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고, 이 점에서는 칸트 이후의 다른 모든 철학자들이 마찬가지였다. 칸트의 말에 따를 때 인과법칙이란 오로지 현상 영역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현상계를 벗어나면 어떤 것도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으므로, 쇼펜하우어는 초월계와 현상계란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는 동일한실재라고 본다. 이에 따라 쇼펜하우어는 독특한 윤리적 입장을 가지게 된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고문자와 희생자, 사냥꾼과 도망자가 결국 동일한 존재로 드러나면서 자비와 연민이 생기는데, 쇼펜하우어는 바로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통합하는 주된 열쇠가 이성이며, 윤리의 기초는 합리성이라는 칸트 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이든 아니든 존재의 궁극적인 단일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방법과 자신이 따르는 방법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칸트가 간접적이고 반성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반면 자기는 직접적이고 직각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는 탑의 높이를 그 그림자로 재는 사람에, 그러나 자신은 탑 자체에 직접 자를 갖다 대는 사람에 비유한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철학이 개념으로 이루어진 학문이고, 자신에게는 철학이 개념 속의 학문 모든 명증의 유일한 원천인 직관적 인식으로 끄집어낸, 그리고 보편적 개념으로 파악되고 고정된 학문이라고 말한다.

(P.793)

쇼펜하우어는 주저『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헤겔로 대표되 는 이성 철학을 거부하고 세계를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파악하려고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성은 두뇌 현상일 뿐이고, 의지의 제약을 받으며, 의지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다가가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인식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 즉 지성이 제한적인 것이며 의지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성 또는 지성의 배후에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점은 칸트로서는 쉽게 인정 할 수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사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객관화되는데, 이렇게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를 쇼펜하우어는 표상의 세계라고 규정한다.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의지의 세계의 존재를 우리는 신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세계를 의지로서 경험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의 구분에서 출발하는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이나 관조를 통해 가능하다.​

반면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지성을 통해 파악되는 세계는 의지의 세 계가 아니라 표상의 세계일뿐이다. 이러한 표상의 세계는 마야의 베일이며 충분근거율에 의해 조건 지어진 세계이다. 의지에 기여하는 지성을 통해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는 표상일 뿐이며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여러 특성들은 세계의 본래적인 특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한계들을 올바르게 인식할 때 본래적인 세계, 즉 의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

(P.797)

제1권은 쇼펜하우어의 학문 이론으로서 그의 박사 논문인「충분근 거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에서 전개된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실은 보이는 대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뇌가 계산해 낸 결과물이다. 이런 전제에서 쇼펜하우어 철학은 현대 뇌 과학과도 연결된다. 고양이는 컬러를 보지 못하므로 흑백으로 세상을 보고, 박쥐는 세상을 초음파로 본다. 세계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표상의 세계인데,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의지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책의 골자는 인간 인식의 조건상 주관과 객관이 구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표상으로서의 세계만을 인식하지만, 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의지라는 것이다.

​(P.804)

제2권에서는 표상된 개념들의 본질을 고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인 간은 외적으로 몸 또는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 내적으로는 만 물의 첫째가는 본질의 일부, 즉 의지가 바로 자신임을 알고 있다. 의지는 사물 자체다. 즉 그것은 단일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변화할 수 없고 시간 과 공간을 넘어서 있으며 원인도 목적도 없다. 현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현실화의 상승 계열 속에 반영되어 있다. 무기적 자연의 힘 속에 있는 맹 목적인 충동에서 시작해서 유기적 자연(식물과 동물)을 거쳐 합리성에 따르는 인간 행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욕망, 의욕, 충돌의 거대한 사 슬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사슬은 높은 형태가 낮은 형태를 상대로 벌이 는 계속적인 싸움, 목표도 없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영원한 열망, 참상 및 불행과 떼래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슬의 끝에는 죽음 이 있다. 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비난으로서, 각 개인에 게 '이제 충분하냐'는 물음을 던진다. 의지가 개별적 대상을 통해 다양 화되는 조건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체화의 원리다.

이러한 개별적 대상의 생성과 변화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주관에 의 한 인과법칙 아래에서 가능하다. 하나의 통일적인 의지가 표현되는 가시 성과 판명성의 정도에 따라서 가장 적합하게 의지가 객관화되는 다양한 단계가 있으며, 그 단계는 다시 개체화의 원리에 따라 무수한 개별자 속 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는 낮은 단계의 돌이나 식물로부터 높은 단계의 동물이나 인간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등급을 지닌다. 의지가 객관화되는 각 단계마다 사물의 영원한 형식들이 있으며, 이러한 사물의 영원한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체화의 원리와 인과율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사물의 영원한 형식은 플라본적인 의미 에서의 바로 이데아들이며, 의지의 가장 적합한 객관화다. 이러한 이데 아들은 사물 자체로서의 의지와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의 세계에 속한 개별자들 사이를 매개한다. 이데아들은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로서 플 라본적인 의미에서의 원상들이며, 개별자들은 이러한 원상들에 대한 일 종의 모상들인 것이다.

​(P.807)

제3권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술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1권, 제2권은 난해하고, 제4권의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데 비해 제3권은 지금도 충분히 읽을 만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에 대해 '충분근거율과 무관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모든 행위에는 동기가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 세계의 모든 현상은 많은 점에서 다른 현상과 맞물려 있어서, 이 세상 산물은 서로 안에 그 것의 존재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P.811)

제4권에서 쇼펜하우어는 맹목적인 의지의 단념에 대해 상세히 고찰 쇼펜하우어는 부정과 단념에 과한 동양의 종교적, 철학적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생식 행위가 삶에의 의지의 단적 인 표현이라는 이론을 전개한다. 그의 이론은 리비도가 인간의 보편적 충동이라고 설명하는 프로이트를 연상시킨다 현상계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지각하는 개별자들은 스스로를 위해 모든 것을 욕구하는데, 쇼 펜하우어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기심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세계의 원인이 되는 맹목적인 삶에 대한 의지에서 출발하여 인과적 연쇄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 는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욕구의 계속이며, 따라서 삶은 고통일 수밖 에 없으므로, 이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욕구의 상태, 즉 이 의 지가 부정되고 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이렇게 하여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인도 철학에서 말하는 해탈과 정적의 획득 을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 제시하는 쇼펜하우어는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 나면서부터 시작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최고의 덕이자 근본윤 리로 본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말하는 의지의 부정이 허무나 공허함 에 지나지 않는 무無로 보일 것을 알고 있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오히려 의지가 완전히 없어진 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의지로 충만한 모든 사람에게는 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의지가 방향을 돌려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그토록 실재적인 이 세계는 모든 태양이나 은하수와 더불어 - 무無인 것이다.”

(P.815)

쇼펜하우어가 주된 관심을 가지는 의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자연의 세계이다. 생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번식하는 생명 현상의 본질을 그는 의지로 파악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의지를 우리 자신의 자연인 몸을 통해 직접 경험한다. 우리가 몸 안에서 느끼는 온갖 충동과 본능, 욕망, 정동 및 성 욕동 통은 바로 봄이라는 인간적 자연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루는 적나라한 요소들이다. “그 때문에 신체의 부분들은 의지를 발현시키는 주된 욕구와 완전히 상응해야 하며, 그러한 욕구의 가시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즉 치아, 목구멍, 장기는 객관화된 배고픔이고, 생식기는 객관화된 성 욕동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의지란 성을 매개로 특정한 개체 속에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개체화의 의지다.

이처럼 신체와 성에 주목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은 당대 생물학 연구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은 당대의 자연과학적 발전에 대한 철학적 응답이었고, 자연과 학 및 실증주의 시대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리고 그의 의지 철학은 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신체와 성이 본격적인 철 학적 담론의 주제로 떠오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며, 이후 니체와 삶 철학을 거쳐 하이데거, 가다머로 이어지는 반합리주의의 노선의 출 발점이 된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현대의 문화적 • 예술적 담 론에서 주요 범주로 다루어지는 욕망의 범주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P.8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