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
한자경 / 서광사 / 368쪽
(2018.12.10.)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각각의 인간 안에서 주체로서 활동하는 정신이 사적이고 주관적인 개체의식에서 어떻게 점차 공적이고 객관적인 보편정신으로 깨어나게 되는지 그 과정을 밝혀 놓은 책이다. 정신은 우선 사물세계를 대상적으로 바라보는 의식으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그렇게 대상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자기의식이 된다. 그리고 다시 이 자기의식은 자연의 생명적 활동성 안에서 생명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여 이성이 되고, 사회적 공동체와 역사 안에서 인륜적 주체 내지 역사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면서 정신이 된다. 이처럼 정신의 자각과정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정신의 자기이행을 뜻하며, 이것은 곧 인간의 자기성장의 과정이고 인류의 자기발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P.5)
내가 놀라는 것은 칸트『순수이성비판』 편에서 헤겔『정신현상학』에 이르는 기간이 30년도 채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가 철학이 있고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로 새롭게 각성하고 부흥하는 것이 30년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 그것이 놀라운 것이다.
의식있는 몇몇의 지성을 통해 한 나라가 통꿰로 각성하고 부흥하는 것이 30년만으로도 가능한데. 우리의 정신은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30년 이상 철학을 하면서 살아온 우리들의 잘못이고 우리들의 책임이 아닐까? 30년, 60년 동안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정신을 부흥시키기는커녕 우리는 오히려 우리 역사 속에 살아 있던 정신까지도 망각하고 우리 스스로를 변방이라 자처하며 정신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칸트의『순수이성비판』을 공부하고 헤겔의『정신현상학』을 읽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나와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계에 부딪혀 좌절하되 다시 그 경계를 딛고 일어나는 정신 만이 깨어있는 정신이듯이, 칸트와 헤겔을 딛고 오늘의 나, 오늘의 우리를 발견하는 정신만이 살아 있는 정신이고, 그 정신을 통해서만 우리 전부가 함께 각성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P.7)
하나의 경계가 성립하면 그 경계 안의 규정이 곧 그 경계 바깥의 부정으로 바뀌며, 이로써 그 경계는 소멸하지만 그 소멸은 곧 그 다음 단계의 새로운 경계의 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사유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긍정과 부정을 거친 합은 또 다른 긍정으로서 그 다음의 부정으로 이어져 경계의 이동은 무한히 진행된다. 이처럼 정에서 반을 거쳐 합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규정된 특수로부터 그 규정 너머의 보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긍정판단에서 부정판단과 무한판단으로 나아가는 추론, 그중에서도 제한된 결론에서 그 제한 너머의 전제에로 나아가는 역삼단논법적 추론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추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결국 사물을 규정된 경계 너머에서, 무한과 영원의 시점에서. 개별을 포괄하는 전체의 관점에서 직관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경계에서 무경계로 나아가는 논리가 변증법적 논리이다.
그런데 규정성의 인식(경계에 따른 유한의 인식)과 그 규정을 포괄하는 무규정적 부정성의 인식 (무경계적인 무한의 인식)은 같은 차원의 인식이 아니다. 하나는 일정한 전제와 주어진 지평 안에서 행해지는 인식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주어진 전제를 캐물음으로써 보다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는 인식이다. 하나는 현상세계에 대한 경험적 내지 과학적 인식이라면, 다른 하나는 현상세계의 경계와 그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이라고 할수 있다.
(P.18)
전통 형이상학이 이들 무제약자에 대한 인식으로서 합리적 심리학. 합리적 우주론 그리고 합리적 신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건립하여 왔다면. 칸트는 이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확립하기 이전에 과연 인간 이성이 그러한 무제약지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성적 비판이 우선해야 하는 것을 논한다. 진리를 탐구하는 구체적인 인식활동을 하기 이전에 인간이 과연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 이성이 과연 절대적 무제약자를 포착하는데 적합한 인식도구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먼저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의『순수이성비판 』은 바로 이러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성의 비판 작업이다. 그 중「분석론」은 이성의 인식능력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며.「변증론」은 그러한「분석론」의 결과에 입각해서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식대상에 대한 인식체계의 확립 이전에 인식능력 자체를 반성적으로 검토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비판철학을 반성철학이라고 한다.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인간과 세계와 절대자를 논하는 철학은 언제나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진지한 철학적 사유 안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더 이상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칸트 이후 비판철학의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심화시킨 피히테의 철학이 나왔으며, 다시 그 정신을 자연과 존재 일반으로 확대시킨 셸링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반성철학과 그에 기반 둔 피히테의 철학 그리고 셸링의 동일철학을 종합적으로 절충한 철학이다.
(P.20)
칸트는 자아와 세계 자체와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대상을 직접 탐구하기에 앞서 인간 이성이 과연 그런 형이상학적 무제약지를 인식 할 능력이 있는지를 검토한다. 인간 이성이 그런 절대자를 포착하는 데 적합한 인식도구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 이다. 또한 인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므로, 형이상학의 체계 확립 이전에 과연 어떤 인식능력이 그러한 형이상학적 인식이라는 목적에 적합한지를 알기 위해서도 인식능력 자체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인간 인식의 본성이나 인식의 한계 등이 분명해져야. 인간이 과연 절대자를 알 수 있는지 아닌지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P.21)
이러한 이성비판의 결과로 칸트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자아나 세계 자체 또는 신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이성은 무제약적 절대자를 인식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칸트에 따르면 인간 이성이 어떤 것을 인식할 때에는 그 이성 자체가 가지는 인식형식을 따라 인식하게 된다. 인식은 주어진 대상을 지각(직관)하는 감성능력과 지각된 대상에 대해 사유하는 오성능력의 결합으로 성립하는데, 감성적 직관형식이 시간과 공간이고 오성적 사유형식이 법주이다.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주관적 인식형식인 범주와 시간형식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형식을 따라 인식된 대상세계는 따라서 인간의 주관적 인식형식에 의해 제약된 대상. 즉 현상(Erscheinung)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인식형식에 의해 제약된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칸트의 이성비판의 결론은 인간은 인간 자신의 인식조건에 의해 제약된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인식 불가능하다고 간주되는 물자체는 전통 형이상학이 인식대상으로 삼았던 무제약적 절대자이다. 인간 이성의 이념에 상응하는 자아 자체나 세계 자체나 신은 제약된 현상 너머의 것으로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인식주체인 자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감성적 직관을 갖지 못하므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현상을 인식하는 주체로서 활동하는 한. 그런 활동 주체인 초월적 자아에 대해 '나는 나다' 자기의식을 갖는다. 그렇지만 이 자아는 감각에 주어지는 구체적 내용을 가지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단지 보편적 의식일반, 초월적 자아, 순수 자아일 뿐이다. 초월적 자아는 그 자체 경험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현상이 아니다.
(P.21)
차별성과 동일성. 현상지와 절대지를 모두 포팔하여 그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정신현상학」은 자연적 인식방식인 현상지에서 출발하여 점차 그 궁극지점인 절대지로 나아가는 길을 서술하려고 한다. 이는 곧 자연적 의식이 절대지의 차원으로 진행해 가는 길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의식에서 자기의식을 거치고 이성을 거쳐 정신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자기형성 및 자기도야의 길이기도 하다.
(P.32)
의식은 스스로 대상 자체(진리)와 대상의 의식(인식)을 구분해 놓고. 그 둘이 일치하는가를 비교해 보지만 결국 그 둘 간의 불일치를 발견하며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그 좌절을 자각하는 의식은 이미 앞서의 구분을 스스로 넘어선 의식이며. 이렇게 해서 의식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의식에 상응하여 다시 그 다음 단계의 대상이 주어지게 된다. 이처럼 새롭게 생성되는 의식이 곧 새로운 인식방식이 되고 다시 이에 상응해서 새로운 대상이 정립 된다
대타존재 ←─→ 즉자존재
(인식1) (대상1)
└───────┘
<의식1>
= 대타존재 ←─→ 즉자존재
(인식2) (대상2)
└───────┘
<의식2>
이상과 같이 의식은 스스로 경계를 긋고 다시 그 경계를 넘어서는 활동을 한다. 이것이 의식이 인식과 대상 사이에서 펼쳐 나가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새로 생성되는 의식에는 다시 새로운 대상이 생성되어 주어진다. 의식의 변경 의식의 자기전회 및 자기부정을 통해 새롭게 생성된 것으로서 새로운 대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롭게 생성되어 주어지는 대상의 발견을 우리는 '경험' (Erfahrung)이라고 칭한다.
의식의 변화에 따라 대상이 새롭게 생성되므로 각 단계의 의식은 곧 새로운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 성립한다. 이와 같이 의식의 이행과정을 추적해가는『정신현상학』은 고정된 하나의 대상을 미리 설정 해놓고 의식의 인식방식만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의식에 따라 새롭게 생성되는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경험을 변증법적 운동과정으로 밝혀 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정신현상학』의 각각의 과정은 '의식의 경험'의 과정들이며, 따라서『정신 현상학』은 “의식의 경험의 학문” (74/129)이리는 부제를 갖고 있다.
'새롭게 발생한 것이 [그 다음 단계의〕의식에 대해서는 단지 대상으로서 존재할 뿐이지만. 이것이 우리[반성하는 철학자〕에게는 동시에 운동과 생성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필연성에 따라 학문으로 나아가는 이 길 자체가 이미 학문이며. 그 내용에 따라 말하자면 의식의 경험의 학문이 된다.(74/129)'
이처럼 의식이 계속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각 단계마다의 인식에서 인식의 실패와 좌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스스로 경계를 그어 인식과 대상을 구분하면. 경계 안의 인식은 경계 너머의 대상의 인식에 실패한다. 그러나 그러한 좌절을 자각한 의식은 이미 경계 안의 좌절한 의식이 아니라 경계 너머로 나아간 새로운 의식이다. 이와 같이 의식은 스스로 경계를 긋고 그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경계 안의 의식에서 다시 경계 너머의 의식으로 나아간다. 경계 너머로 나아간 의식은 다시 스스로 그 다음의 경계를 그음으로써 새로운 대상을 생성시키며 그 대상을 인식하고자 한다. 현상지에서 절대지로 나아가는『정신현상학』의 인식의 전개과정은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으로서. 의식이 더 이상 자체 내에 경계를 긋지 않는 무경계에 이르렀을 때 절대지가 완성되게 된다. 이는 곧 의식이 더 이상 자신 안에서 구별을 짓지 않는 것. 의식이 의식 자신에게 타자로 등장하는 가상을 떨쳐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의식은 스스로 지신의 본질을 경험함으로써 절대지 자체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75/130)
(P.37)
의식은 현상지의 출발점이 되는 감각적확신으로부터 그 다음 단계인 자각으로 그리고 다시 오성으로 나아간다.
(P.40)
1. 감각적 확신
1) 현상세계에 대한 인식(현상지)에 있어 우리는 일단 세계 사물들을 이것 또는 저것이라는 개별적 사물로 인식한다고 여긴다. 감각적 확신의 방식으로 개별적 사물 자체 내지 즉자존재를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2) 그러나 실제 감각적 확신이 도달하는 인식을 검토해 보면. 감각적 확신에서 실제 얻게 되는 인식과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즉 진리인식에 실패한다. 왜냐하면 감각적 확신은 자신이 '이것' 으로써 구체적 개별자를 인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이것' 이라는 언어로 지칭되는 것은 모든 사물 또는 모든 주체에 적용될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보편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개별자는 단지 사념된 것, 그렇게 생각된 것일 뿐이고, 감각적 확신은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3) 대상을 '이것' 의 지칭물로서가 아니라 보편자로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감각적 확신의 의식이 아니라 지각의 의식이다. 이렇게 해서 의식은 보편자의 의식인 지각이 된다.
(P.42)
2. 지각
1) 우리는 현상세계 사물들을 감각적 확신이 생각하듯 '이것' 의 지청물인 개별자 자체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 갖고 있는 이런 저런 보편적 성질들을 통해서 안다. 즉 지각의 방식으로 안다.
2) 그러나 지각의 의식 안에도 상호 모순적인 두 계기가 섞이 있다 지각의 의식은 사물을 이런저런 상호 무관심적인 보편적 속성들의 합(역시/Auch)으로 지각하기도 하고 또 그린 속성들 탐지하는 개체적인 배타적 일자(Eins)로 지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각의 의식은 서로 모순되는 그 둘 중 하나를 실제 사물로 여기고 다른 하나를 의식의 기만 또는 착각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지각의 의식을 반성해 보면 일자와 역시는 대상 자체가 가지는 운동성이며, 따라서 대상은 일자에서 역시로 자기 전개하여 의식에 대한 대타성을 띠기도 하고, 다시 역시에서 일자로 자기복귀하는 대자성을 가지기도 한다.
3) 지각대상의 운동성은 곧 지각하는 의식의 운동성이다. 그러나 지각의 의식 자체는 지각의식의 운동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식(주)과 대상(객)으로 이원화한다. 이 이원화하는 운동성을 의식 자신의 운동성으로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지각이 아니라 오성이다. 이렇게 해서 의식은 운동성과 힘의 의식인 오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P.42)
3. 오성
1) 오성은 사물을 일자(대자성)와 속성(대타성) 간의 상호이행이라는 운동성으로 파악한다. 사물의 본래적인 내적 힘과 그 힘의 외화인 현상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성은 사물을 고정적인 내적 힘의 법칙과 그 힘의 법칙에 따라 외적으로 전개된 현상으로 이원화해서 파악한다. 초감각적인 오성적 법칙세계와 감각적인 현상세계로 이원화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오성법칙은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법칙이며, 이 때 설명은 사물에 대해 구분을 만들고 다시 그 구분을 지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그러한 설명의 논리와 구조는 바로 그렇게 설명하는 오성 자신의 논리와 구조인 것이다. 사물의 내면을 설명하는 물리적•수학적 법칙은 그런 방식으로 사물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오성 자신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실제 구분과 구분의 지양으로써 운동하는 것은 오성이지 현상이 아니다. 사물 자체의 본질로 간주된 사물의 법칙 또는 사물의 내면은 처음에는 운동하는 현상세계와 달리 고요한 정지의 세계 또는 고요한 법칙의 왕국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현상세계와의 관계가 전도되어, 구별화와 동일화로서 운동하는 변화의 세계, 오성(주관) 운동의 활동세계로 간주된다. 이렇게 해서 사물은 더 이상 내면과 외면, 정지와 운동이 이원화 되지 않고 그러한 대립을 자체 안에 지닌 '무한성' 또는 자기 구분과 자기관계를 유지하는 '생명' 으로 간주된다.
3) 이러한 생명을 의식대상으로 파악하는 의식은 더 이상 고요한 법칙을 자신의 의식대상으로 여기는 오성이 아니라, 그 법칙이 오성 자신의 법칙이며 현상세계의 운동 또한 오성 자신의 운동임을 자각한 의식이다. 다시 말해 의식대상이 바로 의식 자신임을 자각한 의식, 곧 자기의식이다. 이렇게 해서 감각, 지각, 사유의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던 대상의식은 의식 자신을 자각하는 자기 의식으로 나아간다.
(P.42)
1. 감각적 확신의 단계
우리 인식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직접적 인식' 이라고 여겨지는 감각적 확신이다. 이 의식단계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에 대해 아무런 매개도 거치지 않은 직접적 인식을 가진다고 여긴다. 의식 주관이 자신과는 아무 연관 없이 존재하는 사물 자체를 아무 매개 없이 그 자체로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의 방식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정말로 감각적 확신의 의식이 생각하듯 그렇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 자체일까? 감각적 확신의 인식이 그것이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와 정말 일치하는 것일까? 직접적인 감각적 확신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정말로 대상 자체가 가장 풍부하고 참된 인식으로 주어지는 것일까?
(P.45)
2. 감각적 확신의 실상: 추상성과 매개성
감각적 확신의 단계에서 우리는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가장 풍부하고 충실하게 안다고 여기지만, 실제 감각적 확신의 방식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감각적 확신은 실제로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빈곤한 진리로 드러난다.
감각적 확신이 가장 추상적이며 빈곤한 인식에 지나지 않는 것은 그것을 통해 도달되는 인식이 단지 “그것이 있다”라는 극히 추상적인 인식에 그칠 뿐. 그 대상의 성질이나 관계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상에 대해서는 단지 '이것' 이라고만 말할 수 있고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그 이상을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이런 단순성과 추상성은 대상에 대해서뿐 아니라 인식자 지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감각적 확신으로 주어지는 인식자 또한 “단순한 이것”으로서의 자아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와 대상은 서로 구분되며 서로의 매개를 거친 인식이다. 즉 “자아는 타자인 사태를 통해 확실성을 갖게 되고, 사태는 마찬가지로 타자인 나를 통해 확실성을 갖게 된다.” (80/135) 그런데 이러한 자아와 대상의 구분은 반성자로서의 우리가 만드는 구분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 자체가 담고 있는 구분이다. 자아와 사물. 그 둘 중 어느 것도 직접적으로 감각적 확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매개로 하여서만 확신에 이를 수 있다. 감각적 대상은 감각적 확신자인 자아 없이 인식되지 못하며, 감각적 확신의 자아는 감각적 대상 없이 감각적 확신의 의식을 갖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P.46)
보편자
감각적 확신이 감각적 확신의 의식 자체가 생각하듯 풍부하고 직 접적인 인식이 아니라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빈곤한 인식이며 매개된 인식이라고 할 때, 그 인식의 본질 내지 진리는 무엇인가? 이 인식의 진리를 찾기 위해 헤겔은 인식의 주관과 객관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구분하여 논한다.
감각적 확신의 의식에서 자아와 대상은 서로를 매개하면서 감각적 확신의 양면이 되는데, 그 둘 중 어느 것에 감각적 확신의 본질과 진리가 놓여 있다고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선 자아보다는 대상을 염두에 두게 된다.
따라서 감각적 확신에서 본질과 진리는 대상 자체에 놓여 있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대상 안에서 우리는 감각적 확신의 진리로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감각적 확신은 스스로 인식한다고 생각하는 본질을 정말 인식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헤겔은 감각적 확신이 대상을 '이것' 으로 인식한다고 여길 때, 이 '이것' 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분석한다. '이것' 이라는 것은 대상의 어떤 성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질들과 상관없이 또는 그런 성질들과 구분되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물 자체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내 눈 앞에 있는 빨갛고 달고 향기로운 사과 하나를 내가 '이것' 이라고 칭한다면. 그 때 '이것' 은 사과의 색이나 향기나 맛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속성들을 가지되 속성과는 구분되는 그 사과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그럼 그 사과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특징이나 성질로 규정될 수 없고.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개별 사물을 지칭하고자 하는 '이것' 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 '지금'과 '여기'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여가가 감각적 확신이 생각하는 그런 구체성과 직접성을 과연 담고 있는가? 우리가 과연 '지금과 '여기' 로써 특정한 구체적 개별자를 지시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만 으로써 그 의미와 실재를 파악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항상 '지금이 아닌 것' 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며, 그것 아닌 것과의 관계 안에서 그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서만 '지금' 의 의미를 유지할 뿐이다. 즉 지금은 낮일 경우 밤이 아닌 낮으로서, 밤일 경우 낮이 아닌 밤으로서 존 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은 부정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만큼 매개된 것이다.
여기서 매개는 자신 아닌 것의 부정을 통한 매개를 뜻한다. 그것이 그것 아닌 것의 부정으로만 존재하고 그 부정으로만 의미가 알려 진다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그 자체만으로 인식되는 그런 특수한 개별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포괄하는 보다 너른 지평 안에서 다시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경계를 따라서만 그것의 존재가 확보되고 그 의미가 규정된디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존재를 헤겔은 '보편자' 라고 칭한다.
(P.50)
<제2장 자기의식>
(ㅇ)
대상의식에서 인식되는 대상이 그렇게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 자신의 활동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대상의식은 이제 자기의식이 된다. 자기의식은 실천적 자기의식으로서의 욕구에서 주인과 노예의 의식을 거쳐 금욕주의와 회의주의 의식 그리고 다시 불행한 의식으로 나아간다.
(P.100)
1. 욕구의 의식
1) 단순한 동어반복적 동일성에 머무르는 이론적 자기의식과 달리 실천적 자기의식으로서의 욕구는 대상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하려는 의식이다. 자신에로 복귀하기 위해 대상을 부정하고 지양하면서 자신의 자립성을 확인하려는 의식이 바로 욕구이다.
2) 그러나 대상을 부정하는 과정 및 그 결과에서 욕구의 의식이 확인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자립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대상의존성이며 자신이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대상을 따라 생의 원환성으로 말려들고 있 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욕구는 진정한 자기의식의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3) 우주의 실패를 자각한 자기의식은 더 이상 욕구의 의식이 아니다. 참된 자기의식은 완전히 부정되고 지양될 수 있는 욕구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의 또 다른 자기 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2. 주인과 노예의 의식
l) 참된 자기의식에 이르기 위해 자기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다른 자기의식으로부터의 인정이다. 자신을 생의 원환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립적 존재로 인정받는 것이다. 자신의 자립성을 인정받기 위해 두 자기의식은 생사를 건 투쟁을 하며, 그 중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는자는 살아남을 경우 주인이 되고, 반대로 죽음을 겁내 패배하여도 목숨만은 유지하고자 하는 자는 살아남아 노예가 된다. 주인은 자신의 자립성을 지키며 자기의식으로 인정받고, 노예는 자립성을 상실하여 자신은 인정받지 못한 채 주인을 인정할 뿐이다.
2) 그러나 주인과 노예는 자립성에 있어 그 관계가 역전된다. 주인이 비자립적 노예로부터 받는 일방적인 인정 자체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주인의 사물에의 향락은 오직 노예의 노동에 의존한 것이기에 오히려 노예보다 더 의존적 존재가 될 뿐이다. 노예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노예가 되긴 하였지만, 바로 그 죽음의 공포가 스스로의 절대적 부정성, 즉 순수한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기의식을 유지하게 해 주며 삶의 무상성을 자각하게 해 준다. 나아가 노예가 행하는 저지된 욕구로서의 노동은 자연을 변형하는 활동으로서, 자신의 대자성을 즉자적 현실로 옮겨 놓는 의미를 갖는다.
3) 그러나 노예의식의 의미를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노예의 의식이 아니다. 실제 노예는 단지 타성화된 노동을 행할 뿐이어서 부정성의 자각이나 노동의 의미에 대한 자각이 없다. 죽음의 공포와 노동을 통해 절대적 부정성, 자립성과 자유를 자신의 본질로 자각한 의식은 주종의 대립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화해시킨 새로운 자기 의식이다.
3-1. 금욕주의의 의식
1) 노예의식의 본질을 자각한 의식, 즉 사물의 형식과 사유일반의 형식이 동일하다는 것을 자각한 의식은 금욕주의적 의식이다. 이는 주인적 자기의식의 자유를 자신의 본질로 삼는 의식이다.
2) 그러나 금욕주의의 자유는 단지 사유 안에 머무르는 추상적 자유, 의식 안에서 선취된 자유일 뿐, 구체적으로 실현된 자유가 아니다. 자신의 사유 속 자유에만 머무르는 금욕주의의 의식은 권태에 빠질 만큼 현실성과 구체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3) 금욕주의의 추상적 자유의 한계를 자각하며. 그 자유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려는 의식은 더 이상 금욕주의의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회의주의의 의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3-2. 회의주의의 의식
1) 금욕주의적 자유의 추상성을 자각하면서 그 자유를 구체적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고자 노예적 노동을 실행하는 의식이 회의주의의 의식이다. 이는 세계와 의식 간의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 세계에 형식을 부여하면서 세계를 의식의 형식대로 무화시기는 노동의 작업을 수행한다.
2) 그러나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 세계를 형상화하는 노동은 그 자체 자기모순적이다. 회의주의의 노동은 타자를 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자유의 확실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결국 부정되어 사라질 것을 향한 노동이며, 이는 곧 스스로 부정하기 위해 부정될 생의 방식을 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생의 다양성과 분주함을 부정하고 벗어 나기 위해 거기 휘말려드는 셈이다. 이처럼 회의주의의 의식은 자유와 비자유, 본질과 비본질, 순수의식과 경험적 의식 사이를 오가는 자기모순적 의식이다.
3) 이 모순을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회의주의의 의식이 아니라 불행한 의식이다.
3-3. 불행한 의식
1) 개체적인 경험적 의식의 다양성과 보편적인 순수의식의 단일성 사이에서 그 양극단을 오가는 불행을 자신의 실상으로 자각한 의식이 불행한 의식이다. 불행한 의식은 ①보편자(본질)와 특수자(비본질)를 대립으로 느끼다가, ②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보편자와 특수자가 화해되는 것을 느끼지만, 그것이 역사적 우연성을 벗이나지 못함을 의식한다. ③ 다음 단계에서 불행한 의식은 보편성을 개체의 내면에서 느낌으로 느끼며 동경하기도 하고, 내적 본질로 느끼며 감사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는 개체가 체념이나 소외를 통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 안에서 보편을 실현하여 보편과 개체성의 화해를 시도한다.
2) 불행한 의식은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통해 보편 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자신의 본질을 불변자 자신의 보편의지로 자각하며, 결국 '나 즉 우리' 로 나아가고자 한다.
3) 그러나 실제로 불행한 의식이 극복되고 개별의지와 보편의지, 특수와 보편이 하나로 합일되기 위해서는 모든 실재성이 정신과 다름 아니라는 것이 자각되어야 한다. 자신이 모든 실재성임을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불행한 의식이 아니라 이성이다. 이렇게 해서 불행한 의식은 그 다음 단계인 이성으로 이행해 간다.
(P.100)
감각적 확신에서는 사념(思念)된 개별존재자가, 지각에서는 속성을 수반하는 구체적 사물이, 오성에서는 사물내면의 힘의 법칙성이 각각 의식의 대상 내지 의식의 타자로 등장한다. 의식은 그처럼 의식 자신과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 자체의 출현과 더불어 의식으로 성립하지만. 각 의식 단계에서 대상의 의식과 대상 자체의 구분, 인식과 대상의 불일치로 인해 의식은 다시 그 다음 단계의 의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P.105)
의식을 성립시키고 다시 그 의식을 지양하게 만드는 대상 자체와 대상의 의식의 구분은 실제로 의식 자체의 무한한 활동성, 생 또는 영혼의 운동의 표현이다. 즉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의 모든 분별 및 분별의 극복은 스스로 자신을 분화하고 구분하며 다시 그것을 넘어서는 영혼 내지 생의 활동성의 산물인 것이다. 의식의 마지막 단계인 오성적 대상의식에 이르면. 의식은 대상과 대상의식으로 스스로를 분화하는 활동적 생자체를 개념으로 포착하여 자신의 의식대상으로 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성을 자기 자신으로 자각하지 못한 채 법칙으로 대상화하여 인식할 뿐이다.
의식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생의 활동성이 바로 자기 자신의 활동성임을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대상의식인 오성이 아니라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는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은 일체 대상의식의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는 의식 지신의 활동성을 자기 자진으로 자각 하는 의식이다. 대상이 자기 자신임을 자각함으로써. 자기의식에 있어서는 대상과 대상의 의식과의 구분이 지양된다.
대상과 의식의 구분이 지양됨으로써 지금까지 의식 바깥의 대상으로 간주되던 것들이 이제 모두 의식 자신의 계기들로 보존된다. 대상의식에서 의식 바깥의 실재로 간주되던 대상들이 자기의식의 단계에 오면 자기의식의 계기로서 자기의식 안에 포섭되는 것이다.
(P.105)
<제3장 이성>
'나 즉 우리'는 나의 자기의식과 또 다른 자기의식이 결국은 하나 라는 것, 특수와 보편은 개체 안에서 화해된디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이성은 모든 실재성을 이성 자신이라고 확신하게 되며. 이로써 관념론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의 확신이 아직 진리로서 확인되지 않은 한, 그 관념론은 불완전한 관념론이다. 즉 이성이 모든 실재라고 주장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대상세계 자체를 이성 너머의 실재로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의식세계와 실재세계를 이원화하는 오류를 범하며 절대적 경험론이 되는 것이다. 불완전한 관념론의 문제를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여 완전한 관념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모든 실재성이라는 것이 진리로 확인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성은 관찰하는 이성으로 작용하다가 다시 행위하는 이성으로 그리고 다시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으로 나아간다.
(P.162)
1. 관찰하는 이성
1) 이성은 즉자적 대상세계인 자연에서 자기 자신을 직접 발견함으로써 이성이 모든 실재성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1-1) 이성은 우선 개별 사물인 무기물의 관찰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기물의 관찰을 통한 징표나 법칙 안에서 이성이 발견하는 것은 이성 자신의 활동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활동성이 고정화되고 화석화된 결과물일 뿐이다.
1-2) 고정화되지 않은 대자적 유기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성은 '외면은 내면의 표현' 이라는 법칙에 따라 유기체를 관찰한다. 그러나 해부학적 외면과 유기체적 내면이 서로 대응하지 않기에 이 법칙도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2) 대상세계의 구체적 개별사물에서 이성 자신을 발견하기에 실패한 이성은 이제 자기의식의 일반 구조 내지 법식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자 한다.
2-1) 이성은 우선 실재를 파악하는 인간의 논리법칙을 관찰하지만. 형식논리가 사유의 형식만을 다를 뿐 내용을 배제함으로써 이성 자신이 아니라 이성의 활동결과로서의 형식만 제시할 뿐임을 알게 된다. 이는 외면이 배제된 내면의 논리일 뿐이다.
2-2) 이성은 다시 외면을 포섭하기 위해 자연환경으로부터 자기의식의 심리법칙이 어떻게 형성 되는가를 밝히는 경험심리학적 법칙에서 이성 자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자기의식을 자연필연성으로 규정하는 불합리성을 보인다.
3) 이성은 자기의식의 일반 구조를 추상화해서 고찰하는 대신 의식 스스로 자기구조화한 인간 신체 안에서 이성 자신을 발견하고자 한다.
3-1) 그래서 이성은 보이지 않는 정신이 얼굴표정에 드러난다고 여겨 관상학에 몰두한다. 그러나 마음과 표정의 연결은 필연적이 아니고 거짓가능성도 남아 있으며, 또한 신체적 모습은 이성 활동의 흔적일 뿐 이성 자체가 아니다.
3-2) 이에 이성은 개인의 의도나 거짓가능성이 배제된 두개골의 모습에서 이성 자신을 관찰하는 골상학에 몰두한다. 그러나 활동성의 이성은 이미 굳어 버린 뼈와 동일 시될 수 없다. 이처럼 자연이나 인간의 의식구조나 외적 표현에서 이성 자체를 발견하기에 실패한 이성은 이제 자신을 관찰하는 이성으로가 아니라 행위하는 이성으로 자각하게 된다.
2. 행위하는 이성
1) 쾌락적 자기의식: 행위하는 활동 주체로서 이성은 자기 자신을 개별적인 쾌락을 지향하는 육구주체로 의식한다. 여기서 타자를 자기 쾌락의 수단으로 여기는 한, 쾌락적 자기의식은 스스로 욕망의 필연성에 굴복하며 좌절하게 된다. 이를 넘어서서 타자를 자기를 비추는 거울로 자각하면, 이성은 욕망에서 마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2) 심정적 자기의식: 이성은 개인적 쾌락이 아닌 보편적 쾌락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작용하여 보편적인 마음의 법칙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법칙이 마음의 법칙에 대립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은 갈등과 모순 속에서 광란과 자만의 망상에 빠지게 된다.
3) 도덕적 자기 의식: 개체적인 마음의 법칙과 보편적인 현실의 법칙과의 갈등을 덕성으로 종합해 가는 단계이다. 그런데 보편적 덕성을 받아들일 경우, 덕성은 다시 개체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세계행로와 모순으로 비춰지게 된다. 이를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체성의 운동이 곧 보편자의 실현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3.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의 이성
1) 개체성의 진리로서의 작품: 이제 이성은 세계를 개체성을 통해 보편성이 실현된 작품 내지 사태 자체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작품은 결국 그 이외의 것(다른 작품이나 다른 주제)들과 대립된다는 점에서 보편성 자체는 아니다. 개체성과 보편성의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륜적 실체성이 확보되어야 하며, 보편성의 사태 자체가 더 이상 작업결과의 술어로서가 아니라 주어 내지 주체로서 간주 될 수 있어야 한다.
2) 법칙 제정자로서의 이성: 주어화된 사태 자체가 인륜적 실체인 인륜적 법칙이다. 이성은 자신을 인륜적 법칙의 제정자로서 의식한다. 그렇지만 이성이 제시하는 도덕은 단지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계율일 뿐, 정신의 보편성에 입각한 인륜적 법칙이 아니
다.
3) 법칙 검증자로서의 이성: 법칙 제정에 실패한 이성은 자신을 법칙 검증자로서 확인하려 하지만, 그 검증기준인 보편화가능성은 단지 추상적이고 형식적일 뿐이며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어, 이성을 보편적 인륜성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결국 보편적 인륜성은 단순한 이성의 형식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신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로써 '나 즉 우리'의 진리를 향한 의식은 이성에서 정신으로 나아가게 된다.
(P.162)
<제4장 정신>
감각적 확신이나 지각이나 오성의 의식에 있어서는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의 계기만이 고수되었고, 그 현실의 대자적 존재성은 간과되었다. 반면 의식의 대상이 대자적인 의식 자신의 계기라는 것이 포착되면, 이 때 의식은 곧 자기의식이 된다. 이렇게 해서 의식과 자기의식, 즉자와 대자, 객체와 주체의 통일로서의 이성이 등장 하게 되는데, 이 때 이성은 모든 실재성이 곧 이성 자신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그 통일체를 대상적으로만 표상 할 뿐, 그 통일체를 직접 자기 자신으로 자각하지는 못한다.
이성이 단지 추상적 형식에서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모든 실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이성은 곧 정신이 된다. 정신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는 다음처럼 정리될 수 있다.
의식 -> 세계: 정신의 즉지존재성(대상)의 의식 = 의식
의식 <- 세계: 정신의 대지존재성(자신)의 의식 = 자기의식
의식 = 세계: 정신과 세계의 형식적 동일성의 의식 = 이성
의식 = 세계: 정신과 세계의 내용적 동일성의 의식 = 정신
정신은 개인과 보편의 직접적 통일성인 인륜성에서 다시 그들의 분열 이후 조회를 찾아 나가는 교양을 거쳐 그 통일을 내적으로 확립해 가는 도덕성의 단계로 나아간다
(P.232)
1 참다운 정신: 인륜성
정신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본질 내지 진리로 등장하면, 정신은 민중의 인륜적 생활 안에서 스스로를 실현한다.
1) 인륜적 세계에서는 정신이 그 스스로의 진리에 이른다. 이러한 인륜적 공동체가 고대 폴리스적 국가이며, 여기서 지배적인 법은 국가의 법이고 인간의 법이다. 이에 대립해서 자연의 법이고 신의 법인 가정의 법이 등장하게 된다. 인간의 법을 수호하는 자가 남성이고, 신의 법을 수호하는 자가 여성이다.
2) 이상 두 법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그 중 어느 하나를 따르는 것은 죄가 되며, 결국은 그 둘이 함께 몰락하는 운명이 전개된다.
3) 그리스에서 이미 소피스트들은 개인과 사회의 분리를 자각하였고, 소크라테스 또한 자연(physis)과 관습(ethos)의 분리, 개인과 사회의 분리를 알고 있었다. 헬레니즘과 로마사회를 거쳐 그들 간의 직접적 통일성이 붕괴되고 고대의 인륜적 실체성은 잊혀지며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법이 지배하게 된다.
2. 자기소외된 정신: 교양
1) 인륜적 실체성이 사라지고 나면, 개체가 외적 보편의 질서에 맞춰 가는 교양과 문화가 등장하게 되고 다시 이에 대립하는 신앙의 세계가 생겨나서 정신은 이원적으로 양분된다. 교양과 신앙의 이원성은 곧 차안과 피안의 이원성을 의미한다.
2) 교양과 신앙, 차안과 피안 사이의 갈등과 대립 위에서 이들을 이성적 통찰에 입각하여 종합하고자 하는 계몽사상이 전개된다. 3) 계몽주의와 더불어 자각된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 의식은 그 자유의 실현으로서 혁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절대적 자유가 함축하는 절대적 부정성은 곧 죽음의 공포이기도 하다.
3.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정신: 도덕성
계몽으로 인한 혼란과 혁명을 거쳐 정신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여 자신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려는 도덕성으로 나아간다.
1) 도덕적 의무와 자연적 충동 간의 갈등은 도덕적 세계관 안에서 최고선과 영혼불멸과 신을 요청하게 한다.
2) 그러나 그 요청 안에 담긴 모순이 도덕적 의식에서 사유의 뒤바뀜을 일으킨다.
3) 요청적 의식의 뒤바뀜을 자각한 의식은 이제 자기 내면에서의 도덕성을 양심으로 깨닫게 된다. 이 양심이 처음에는 선을 고수하는 비평하는 의식으로 작용 하지만, 다시금 일체의 악과 죄를 포용하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깨어나게 된다.
인륜성: 인륜세계 : 개인과 보편의 조화
↙ ↘
교양 : 교양 ↔ 신앙 : 분열과 소외
계몽 : 자유와 혁명
↘ ↙
도덕성: 도덕 / 양심 : 내면의 신성화
(P.232)
<제5장 종교>
종교는 현실 가운데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절대자. 신의 형상의 추구이다.” 정신의 자기의지 생성과정, 즉 정신이 정신임을 자각해 가는 과정이 종교의 변증법을 이룬다. 정신이 어느 것 안에서 절대자 내지 신을 발견하는가가 단계적으로 달라지면서 정신의 자기 자신에의 점진적인 계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P.335)
1. 자연종교
정신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한다. 여기서 신은 추상적 즉 자태이다. 정신은 실체로서, 존재의 형식으로 스스로에게 현현한다.
1) 빛의 종교: 자연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태양을 절대자로 숭배하는 단계이다.
2) 동식물의 종교: 살아 있는 생명적 힘을 절대적 근원으로 신격화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물적 생명성을 넘어서는 정신의 자기 자각성이 결여되어 있다.
3) 공작인의 종교: 거대하고 신성한 작품을 산출해 내는 공작인의 의식에도 종교성이 보이지만, 이 또한 자기반성을 결여한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작업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2. 예술종교
정신은 자기 자신을 지양된 자연성 내지 자기의 형태에서 인식한다. 정신이 예술작품을 통해 자신을 대자적 형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1) 추상적 예술작품: 신들의 형상의 조각이나 신들에 대한 찬송이나 찬가 등의 순수서정시도 종교성을 반영한다.
2) 생동적 예술작품: 조각이나 찬가에서의 추상성이 지양되고 구체화된 생동적인 제사나 제의가 종교적 예술이다.
3) 정신적 예술작품: 제의에 남아 있는 유한과 무한의 분리를 극복하고 그 둘을 통합하는 예술작품인 서사시와 비극 또는 희극은 정신적 예술종교에 속한다.
3. 계시종교
자연종교에서의 즉자성이나 예술종교에서의 대자성을 통합하여 정신은 자기 자신을 즉자대자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정신이 스스로에게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현현되는 단계가 계시종교의 단계이다. 여기에서는 신의 육화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해 신과 인간, 무한과 유한의 진정한 통일이 성취된다.
자연종교 : 정신(신)이 즉자적 존재 형식으로 현시됨(의식의 단계)
예술종교 : 정신이 대자적 형식으로 현시됨(자기의식의 단계)
계시종교 : 정신이 ㅈ그자대자적 형식으로 현시됨(이성의 단계)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는 정신이 정신 자신을 아직 표상의 형식으로 떠올린다. 따라서 종교는 아직 정신의 자기지인 절대지가 아니고, 다만 그러한 절대지인 자기지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신에 대한 직관이지 아직 개념적 파악은 아니다. 신 내지 절대자에 대한 개념적 파악은 절대지로서의 철학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P.338)
보편적 정신인 절대정신은 정신적 실체이며 절대자로서 절대적 자기동일성을 지닌 비시간적 존재이다. 그러나 전체『정신현상학』의 과정이 보여 주듯 정신이 자기 자신을 정신으로 알기까지, 즉 실체가 주체가 되기까지 정신은 자기 자신을 외화하고 그 외화된 것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대상을 지양하여 자기복귀하는 기나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정신의 자기외화의 활동이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전개 되는 것이다.
정신이 시간 형식으로 전개된 것이 인류의 역사를 형성하고. 정신이 공간의 형식으로 전개된 것이 자연이다.
이렇게 해서 절대정신은 기나긴 시간과정을 거쳐 역사를 형성하고 또 자연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기를 전개하고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긴 정신의 자기 전개와 자기부귀의 과정은 결국 정신이 자기 자신을 정신으로 알아 가기까지의 과정. 즉 절대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며. 이 절대지에 이르는 것이 곧 역사의 완성이며 철학의 완성이다.
(P.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