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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 민음사

(2012.06.24.)


  “한스 기벤라트!” 그는 콘 소리로 한스를 불렀다.

한스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선생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기벤라트! 넌 이번 주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단다”

축제 분위기에 싸인 적막감이 감돌았다. 문이 열리더니 교장선생이 들어왔다.

  “축하한다. 그래, 이젠 무슨 말 좀 해보려무나?”

소년은 놀라움과 기쁨에 넘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니?”

  “제가 그걸 미리 알기만 했다면, 정말이지 1등도 가능했을 거예요”

이 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p. 44)



  손바닥 크기만한 눈부신 구름 조각 여럿이 <무크베르크> 위에 떠 있었다. 무더운 날씨였다. 푸른 하늘 한가운데 조용히 떠도는 하이얀 구름 조각이 한여름날의 무더위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자그마한 구름 조각들은 오래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햇빛을 담뿍 머금고, 햇빛에 흠뻑 젖어 있었다. 구름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종종 날씨가 얼마나 무더운지 모를 수도 있다. 푸른 하늘이나 반짝이는 수면에서가ㅓ 아니라, 한낮의 범선인 구름 조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사람들은 갑자기 찌는 듯한 태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늘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땀으로 얼룩진 이마를 손으로 닦아내는 것이다.

(p. 52)



  예술이라고 불리울 만한 신학이 있고, 학문이라고 불리울 만한 신학이 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말이다.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과학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오래된 포도주를 언제나 새로운 술 포대에 담는다. 새로운 술 포대에 담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치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술가들은 얼핏 보기에 그릇된 주장들을 태연스럽게 고집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비평과 창조, 학문과 예술 사이의 불평등한 오랜 투쟁이다.

(p. 62)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무질서의 요소가 숨어있다. 먼저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은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다. 먼저 그것을 밟아 꺼버려야 한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예측 불허의, 불투명한, 위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업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 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승인한 기본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잠재된 개성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병영에서의 주도면밀한 군기를 통하여 극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p. 72)



  “그렇다면 난 정말이지 짐작할 수 없네. 어딘가에 문제가 있긴 있을 텐데 말야. 자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주겠나?”

  한스는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얹어놓았다. 교장 선생은 그를 엄숙하면서도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 보았다.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p. 146)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비치는 당혹스러운 미소 뒤로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과 절망에 싸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p. 172-3)



  이미 죽음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한스는 얼마 동안이나마 마음의 편안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먼 여행길을 떠나기 전에 기거이 그러하듯이, 이 마지막 날들의 아름다운 햇빛과 고독한 몽상을 마음것 맛보려고 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예전부터 낯익은 주위 환경에 여전히 머물면서 자신의 위험천만한 결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남다른 쓰라린 쾌감을 주었다.

(p. 182)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삭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p. 187)


  이 향기야말로 한 해를 통틀어 가장 멋들어진, 성장과 결실의 정수인 것이다. 다가오는 겨울에 앞서 이런 향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쁘고, 멋진 일들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포근한 5월의 비, 쏴 하는 소리를 니며 쏟아지는 여름 비, 신선한 가을 아침 이슬, 부드러운 봄날의 햇살,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의 뙤약볕, 하얗게 또는 새빨갛게 빛나는 꽃망울, 수확하기 전의 잘 익은 과일나무가 보여주는 적갈색의 윤기, 계절과 함께 찾아오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즐거운 것들. 그것은 누구에게나 빛나는 나날이었다.

(p. 202)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이 순간에 그의 내면에서는 무엇인가가 끊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푸른 해안을 따라 자신을 유혹하는 새롭고 낯선 땅이 그의 영혼 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저 어렴풋이 예감할 뿐이었다. 그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안과 달콤한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뇌와 환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하지만 그의 쾌락은 참신한 사랑의 힘, 그리고 생동감이 넘치는 생명에 대한 최초의 예감을 의미했다. 그의 고통은 아침의 평화가 깨어지고, 자신의 영혼이 두 번 다시 찾기 못할 어린 시절의 세계를 이미 떠나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난파를 간신히 벗어난 한스의 가벼운 조각배는 이제 새로은 폭풍과 입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심연, 그리고 극도로 위험한 암초에 점점 가까이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올바른 지도를 받아온 젊은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안내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p. 212)


  한스의 가슴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굳건한 감정과 처음 느껴보는 눈부신 희망의 파도가 세차게, 불안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굽이쳤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단지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겁에 질린 절망적인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희미하게 솟구치는 샘물이 되어 있었다. 몹시도 강렬한 그 무엇이 한스의 가슴 깊숙이 묶여진 사슬을 끊고, 자유를 만끽하려는 듯했다. 그것은 아마도 흐느낌이거나 노래거나 부르짖음이거나, 아니면 뜨들썩한 웃음이었을 것이다. 이 흥분된 감정은 겨우 집에 돌아와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p. 213)


  한스는 자신이 하일브론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남성다운 혈기가 그저 낯설고, 초조하고 피곤하기만 한 상태로 어렴풋이 이해될 뿐이었다.

  저녁 식사 때, 한스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익숙해져 있는 환경 한가운데 자신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버지와 늙은 하녀, 식탁, 그리고 방 안에 있는 모든 세간들이 갑자기 낡아빠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마치 긴 여행에서 방금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놀랍고, 서먹하면서도 다정스러운 느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죽음을 부르는 나뭇가지에 추파를 던질 때만해도 한스는 작별을 고하는 자의 얘절한 우월감을 가지고, 지금과 다름없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금 과거로 되돌아와 놀라움에 미소지으며 잃었던 현실을 되찾은 것이다.

(p. 215)


  이렇게 한스는 자신 속에 숨겨져 있던 사람의 비밀을 너무나도 빨리 알고 말았다. 그것은 달콤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쓰디쓴 맛이었다. 부질없는 탄식과 그리운 추억, 그리고 암울한 사색으로 물든 나날들, 숨가쁜 심장의 고독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무서운 꿈결로 빠져드는 밤의 연속. 꿈 속에서는 피가 이상하리만치 격렬하게 끓어올라 끔찍스러운 거대한 괴물이 되기도 하고, 목을 휘감아 죽음을 부르는 팔이 되기도 하고, 불타는 눈빛을 지닌 환상의 짐승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심연이 되기도 하고, 이글거리는 커다란 눈이 되기도 했다.

  한스는 잠에서 깨어 홀로 싸늘한 가을밤의 고독에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엠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치다가 눈물로 뒤범벅이 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p. 233)


  한스는 아름다운 햇살을 받으며 골목길을 거닐었다. 몇 달만에 처음으로 일용일이 주는 기쁨을 실컷 맛보았다. 평일에 손이 시꺼매지고, 팔다리가 피곤해지도록 일을 하고 난 뒤라야 일요일의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들뜨고, 태양은 더욱 밝게 빛나고, 모든 것이 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버이었다. 햇볕이 드는 집 앞의 벤치에 앉아 마치 제왕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육점 주인이나 피혁공, 빵집 주인이나 대장간 주인을 한스는 이제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을 속물 같은 인간이라고 경멸하지 않게 되었다.

(p. 243)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는 무척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어요. 그리고 일도 모두 잘 풀려나갔지요. 학교며 시험이며 그러다 갑자기 한꺼번에 불행이 닥쳐온 겁니다!”

  구둣방아 아저씨는 묘지 문을 나서는 프록코드의 신사들을 손으로 가르켰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 양반들 말입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뭐라구요?” 기벤라트 씨는 흥분한 나머지 펄쩍 뛰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원, 세상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진정하세요, 기벤라트 씨. 전 그저 학교 선생들을 말한것뿐이에요”

  “어째서요? 도대체 왜 그렇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나 나,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세요?”

  마을 위로 드넓은 푸른 하늘이 한가로이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에는 강물이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잣나무가 우거진 산들은 그리움에 가득 찬 듯이 부드럽고 짙푸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p. 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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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1,2)

존 스타인벡 / 민음사

(2012. 02. 11.)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건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인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바로 성령인지도 몰라.

바로 인간의 정신. 사람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말이지.

어쩌면 모든 사람이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갖고 있어서 모두가 그 영혼의 일부인지도 몰라.

(p. 1-52)



어머니는 햇빛이 비치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통통한 얼굴 표정은 부드럽다기보다 온화하게 잘 절제되어 있었다.

개암 빛깔의 눈은 온갖 고생을 다 겪고, 계단을 오르듯 고통을 극복해서

대단히 차분하고 초인간적인 이해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그것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족의 요새며, 그 요새는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고통과 두려움을 인정하면 톰 영감과 자식들도 고통과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런 감정을 부정하는 법을 연습해 왔다.

또한 즐거운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족들이 먼저 살폈기 때문에,

어머니는 별로 웃기지 않은 일에도 웃음을 터드리는 습관을 익혔다.

그러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것은 차분함이었다.

어머니가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아야만 가족들이 어머니에게 의지할 수 있으니까.

위대하면서도 하찮아 보이는 가족 내의 그 위치에서 어머니는 깨끗하고 차분한 아름다움과 위엄을 얻었다. 

(p. 1-153)



아냐. 그렇지 않아 너도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면 안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지치기만 할 뿐이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수많은 가능성이 있지마, 실제로 우리가 살게 되는 삶은 하나뿐이야. 만약 내가 그 가능성들을 다 생각해 본다면 견디기 어려울 거다. 넌 아직 어려서 앞날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마, 난 그냥 지금 이 길만 생각해.

(p. 1-256)



대지주들, 소요가 일어나면 땅을 잃을 수밖에 없는 대지주들은 역사를 살펴보고 굉장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재물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 재물을 뺏앗아 간다는 것. 그리고 이와 더불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 보면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기 위해 무력을 동원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역사를 통틀어 작은 소리로 비명을 질러 대고 있는 또 다른 사실 하나. 억압은 억압다는 자들을 강하게 만들고 단결시킬 뿐이라는 것.

(p. 2-22)



“저놈들이 모두 없어지더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거야. 살아남을 사람은 바로 우리야. 놈들은 우리를 쓸어 버러지 못한다. 그럼 우리가 살아남을 거야. 계속.“

“우린 항상 얻어맞기만 하잖아요.”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강해진 건지도 몰라. 부자들은 조금 있으면 죽어 버리고, 그 자식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게다가 그놈들도 그냥 죽어 버리지. 하지만 말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계속 새로 나타나. 절대로 불안해하지 마라, 다른 시대가 오고 있어.”

(p. 2-114)



기업들, 은행들도 스스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어지만.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농사는 잘되었지만 굶주린 사람들은 도로로 나섰다. 곡식 창고는 가득 차 있어도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렸고 펠라그라병 때문에 옆구리에서는 종기가 솟아올랐다. 대기업들은 굶주림과 분노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어쩌면 품삯으로 지불할 수도 있었을 돈을 독가스와 총을 사들이는 데, 공작원과 첩자를 고용하는데,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사람들을 훈련하는 데 썼다. 고속도로에서 사람들은 개미처럼 움직이며 일자리와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p. 2-120)



남자들은 단계별로 인생을 살아요. 아이가 태어나고 사람이 죽는 것. 그게 또 한 단계예요. 하지만 여자들에게 삶은 전부 하나의 흐름이에요. 개울처럼, 소용돌이처럼, 폭포처럼. 강처럼 그냥 계속 흐르죠. 여자들이 보는 인생은 그래요. 우린 그냥 죽어서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간다고요. 조금 변하기야 하겠지만, 삶은 계속되는 거예요.

(p. 2-410)



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땅을 갈고 풀을 벨 때 말을 이용하지. 하지만 말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녀석들을 굶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건 말 얘기지. 우린 사람이쟎아.

여자들은 남자들을 지켜보았다. 결국 파국이 왔는지 보려고. 여자들은 말없이 서서 지켜보았다. 모여 있는 남자들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지고 대신 분노가 나타났다. 여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아직 파국은 오지 않았다. 두려움이 분노로 변할 수 있는 한, 파국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작은 새싹들이 땅을 뚫고 솟아나왔다. 며칠이 지나자 산들은 연한 초록색으로 물들어 또 한 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p. 2-43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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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 돌베개


국가의 본질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철학과 이론은 몇 가지 큰 흐름으로 갈래를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국가주의 국가론이다. 이것을 신봉하는 사라들을 가리켜 전체주의 성향을 지녔다고 한다. 국가주의 국가론의 논리체계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세운 인물은 영국 철학자 토마스 홉스였다.

둘째는 자유주의 국가론이다. 존 로크에서 애덤 스미스를 거쳐 하이에크까지 소위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신자유주의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이론을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문명국가의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보수적 국가론이다. 셋째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창안한 이 이론은 150여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보주의자들을 끌어당겼다. 넷째는 목적론적 국가론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펼쳤던 가장 오랜된 이론이다.

(p23-24)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현대적 국가이론의 출발점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홉스의 대답은 명확하다. 국가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이다. 그는 국가의 합법적 폭력에 무제한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p. 25)



전제군주제 국가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던 국가주의 국가론이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국가를 꿈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한 것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사태였다. 이 사상적 도전을 현실의 승리로 전환하는 데 기여한 철학자와 정치가는 숱하게 많지만, 대표적인 철학자로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이다.

(p.48)



장 자크 루소는 정치색이 한층 농후하고 급진적인 자유주의 국가론을 펼쳤다. 루소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빼앗을 경우 사회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해체 또는 혁명의 가능성을 사회계약론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에게 자유는 단순한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있다.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릴 권리와 의무를 모두 버리는 것이다. 자유를 빼앗기면 행위의 도덕성도 제거된다. 루소에 따르면 공동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의 자격을 유지하려면 자유를 지켜야 하며, 자유로운 개인 없이는 국가주권도 성립하지 못한다.

(p. 57-58)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이 근원이 경제적 불평등에 있으며 수천 년에 걸쳐 고착화된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p. 60)


자유주의 국가론에 가장 넓고 깊은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은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자유론』을 통해서 밀은 자유주의 국가이론을 철학적으로 완성했다. 밀도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받아들여 공동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유를 제약할 때는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아 성립한 정당한 권력이 자의적이고 즉흥적인 명령이 아니라 널리 알려지고 확정된 법률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로크와 루소의 법치주의 원리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당한 권력이 법률을 통해서 하는 경우에도 공동사회 또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구혹하고 제약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밀은 어떤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p. 62-63)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정치적 냉소주의와 의도된 무관심의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날카로운 신념의 충돌을 동반하는 국가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보수정파와 자유주의 정파의 정치적 대결에 대해 냉정하고 관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중요한 싸움이 아니다.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누가 승리하든 세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 89)



복지국가의 주요 기능은 세 가지이다. 첫째, 국가의 규제를 통해 일정한 수준에서 시민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둘째, 조세징수와 보조금 지급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일이다. 셋째, 시장가격 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와 공동장비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복지국가는 조직화된 권력으로 시장법칙을 세 방향에서 수정하는 것이다. 첫째 개인 또는 가족에게 노동의 시장가치나 재산 수준과 관계없이 최저소득을 보장하고, 둘째 질병과 노령, 실업 등 개인과 가족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에 대한 불아을 감소시키며, 셋째 계급적 귀속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이다.

(p. 209)



칸트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법을 세웠다. 반면 막스 베버는 직업정치인에게 신념윤리와 아울러 투철한 책임윤리를 요구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맞닿아 있다. 직업정치인도 인간인 만큼 당연히 칸트의 도덕법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는 특수한 윤리가 요구된다. 베버는 이것을 책임윤리라고 불렀다.

(p. 248)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이다. 인간의 완전성과 선을 전제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때 얻게 될 “예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결과”를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껴안는, 그리고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결과로 책임지려는 태도이다.

(p.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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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세대

우석훈 / 레디앙


88만원 세대란?

지금의 20대는 상위 5% 정도만이 한전과 삼성전자 그리고 5급 사무관과 같은 ‘단단한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는 이미 인구의 800만을 넘어선 비정규직의 사람을 살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 74%를 곱하면 88만원 정도가 된다. 세전 소득이다. 88만원에서 119만원 사이를 평생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88만원 세대’는 우리나라 여러 세대 중 처음으로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인 세대들이다. 탈출구는 없다. 이 20대가 조승희처럼 권총을 들것인가, 아니면 전 세대인 386이 그랬던 것처럼 바리케이드와 짱돌을 들 것인가,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p. 21)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선진국들이 어느 정도 풀어낸 젊은이딜의 주거권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개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누군가 여기에 들어갈 돈을 가져가버렸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자들이 Y라고 표현하는 수치는 수확이라고 부를 수 있는 yield의 약자이다. 즉, ‘국민경제’라고 부른 하나의 시스템에서 당연히 젊은 사람들 몫으로 들어갔어야 할 돈이 그곳으로 가지 않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p. 44)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출발선을 같게 하자”라는 ‘형평성’의 관점에서사회적 합의를 찾고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큰 복병을 만나게 되었고,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 셈인데,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 준 것 ‘형평성’이라는 것이다. 국민들의 입장으로서는 ‘평등’을 포기하는 대신 형평성이라는 보다 완화된 가치에 동의를 해준 셈이다. 그리고 그 형평성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바로 교육이다. 최소한 안정적 시장경제를 운용하고 있는 선진국 정부와 극민들이 합의한 내용은 고등교육, 즉 대학교육에까지 형평성을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나라마다 제도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p. 46)


지금 10대를 기다리고 있는 진짜 불행은 그들이 20대가 되고 30대가 되었을 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경제 시스템은 전세계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때로 신자유주의라 불리기도 하고, 혹은 ‘한국형 승자 독식’ 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한미 FTA 체제’라 불리기도 한다. 이름이야 어떻게 불리든, 지금부터 펼쳐질 시스템은 특별한 외부의 간섭이나 내부에서의 변화가 없다면 완벽한 승자 독식의 세계이다. 이 시스템이 가혹한 것은 경쟁이 반드시 또래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 간에도 벌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앞 세대, 즉 기성세대가 너무 많이 가지고 가면 뒷 세대는 가질 것이 별로 없는 일방적인 게임이 되고 마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펼치지는 상황이 바로 이런 세대 게임과 비슷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자연만이 아니라 10대들에게 가야할 것들을 너무 많이 당겨쓰고 있는 일종의 세대 착취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10대들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기회를 기성세대가 독점하고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p. 62-63)


기성세대는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민주주의 타령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의 기본적인 흐름을 만드는 것은 정치가 아니므로 몇 년이 더 지나더라도 현재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성장하면 잘 산다”는 기계적인 구호나 ‘분배와 성장’ 같은 담론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지금 가지고 있는 일종의 세대 착취 현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10대를 희생시키면서 장기적으로 약화됨에 따라 지금의 세대 착취 현상은 오히려 더 강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10대들은 가장 착취하기 편하고 유혹하기 쉬운 경제적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p. 71)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 즉 한국경제의 ‘영광의 30년’을 많은 사람들이 좋았던 시절이라고 추억하고 회상하는 것은 그 시절에 국민소득이 높아서만이 아니다. 그 시절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성실하게 경제생활에 임한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기회와 다양한 패자부활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입체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했다.

(p. 140)


지금 한국의 우파와 좌파가 공히 동의하는 한 가지 원칙은 10대들에게 ‘독서’, 그것도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권하고 있다는 점이다. 20대를 기다리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포드주의 해체의 전면화와 탈 포드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여기에 맞춰 준비된 소위 ‘지식경제 1세대’가 등장하는 경우이다. 탈 포드주의 시대에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은 사회가 시켜주는 표준화된 공부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찾아가는 독서인 셈이다. 그리고 지금의 기성세대가 10대에게 다양하고 수준 높은 독서를 강조하는 것은 10년간의 경험 속에서 이런 새로은 경쟁체제에서의 ‘사회적 자본’이무엇인지 조금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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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읽은 책들)

 

 

(1) 부동산 시장 흐름 읽는 법 (김광수경제연구소 / 더팩트)

 

(2) 1Q84(1)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3) 1Q84(2)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4) 1Q84(3)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5) 역정 (리영희 / 창비)

 

 

(6)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박경철 / 리더스북)

 

 

 

(7)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1) (뿔)

 

 

(8)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 (뿔)

 

 

(9)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10) 부모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쓴소리 (문용린 / 갤리온)

 

 

(11)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 민음사)


(12)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넬레 노이하우스 / 북로드)


(13) 본 아이덴티티 (1) (문학동네)

 

 

(14) 본 아이덴티티 (2) (문학동네)


(15) 시계태엽 오렌지 (앤서니 버지스 / 민음사)


(16) 문재인의 운명 (문재인 / 가교)


(17) 진보의 미래 (노무현 / 동녘)

 

(18) 참 쉬운 마음 글쓰기 (이임숙 / 부키)


(19) 호밀밭의 파수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 민음사)


(20) 자기혁명 (박경철 / 리더스북)


(21) 뿌리깊은 나무 (1) (이정명 / 밀리언하우스)

 

(22) 뿌리깊은 나무 (2) (이정명 / 밀리언하우스)

 


(23) 아이의 10년 후는 다중지능이 결정한다 (정효경 / 밀리언하우스)


(24) 나는 꼼수다 (김용민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25)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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