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 민음사
(2012.06.24.)
“한스 기벤라트!” 그는 콘 소리로 한스를 불렀다.
한스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선생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기벤라트! 넌 이번 주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단다”
축제 분위기에 싸인 적막감이 감돌았다. 문이 열리더니 교장선생이 들어왔다.
“축하한다. 그래, 이젠 무슨 말 좀 해보려무나?”
소년은 놀라움과 기쁨에 넘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니?”
“제가 그걸 미리 알기만 했다면, 정말이지 1등도 가능했을 거예요”
이 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p. 44)
손바닥 크기만한 눈부신 구름 조각 여럿이 <무크베르크> 위에 떠 있었다. 무더운 날씨였다. 푸른 하늘 한가운데 조용히 떠도는 하이얀 구름 조각이 한여름날의 무더위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자그마한 구름 조각들은 오래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햇빛을 담뿍 머금고, 햇빛에 흠뻑 젖어 있었다. 구름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종종 날씨가 얼마나 무더운지 모를 수도 있다. 푸른 하늘이나 반짝이는 수면에서가ㅓ 아니라, 한낮의 범선인 구름 조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사람들은 갑자기 찌는 듯한 태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늘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땀으로 얼룩진 이마를 손으로 닦아내는 것이다.
(p. 52)
예술이라고 불리울 만한 신학이 있고, 학문이라고 불리울 만한 신학이 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말이다.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과학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오래된 포도주를 언제나 새로운 술 포대에 담는다. 새로운 술 포대에 담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치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술가들은 얼핏 보기에 그릇된 주장들을 태연스럽게 고집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비평과 창조, 학문과 예술 사이의 불평등한 오랜 투쟁이다.
(p. 62)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무질서의 요소가 숨어있다. 먼저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은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다. 먼저 그것을 밟아 꺼버려야 한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예측 불허의, 불투명한, 위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업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 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승인한 기본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잠재된 개성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병영에서의 주도면밀한 군기를 통하여 극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p. 72)
“그렇다면 난 정말이지 짐작할 수 없네. 어딘가에 문제가 있긴 있을 텐데 말야. 자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주겠나?”
한스는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얹어놓았다. 교장 선생은 그를 엄숙하면서도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 보았다.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p. 146)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비치는 당혹스러운 미소 뒤로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과 절망에 싸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p. 172-3)
이미 죽음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한스는 얼마 동안이나마 마음의 편안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먼 여행길을 떠나기 전에 기거이 그러하듯이, 이 마지막 날들의 아름다운 햇빛과 고독한 몽상을 마음것 맛보려고 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예전부터 낯익은 주위 환경에 여전히 머물면서 자신의 위험천만한 결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남다른 쓰라린 쾌감을 주었다.
(p. 182)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삭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p. 187)
이 향기야말로 한 해를 통틀어 가장 멋들어진, 성장과 결실의 정수인 것이다. 다가오는 겨울에 앞서 이런 향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쁘고, 멋진 일들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포근한 5월의 비, 쏴 하는 소리를 니며 쏟아지는 여름 비, 신선한 가을 아침 이슬, 부드러운 봄날의 햇살,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의 뙤약볕, 하얗게 또는 새빨갛게 빛나는 꽃망울, 수확하기 전의 잘 익은 과일나무가 보여주는 적갈색의 윤기, 계절과 함께 찾아오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즐거운 것들. 그것은 누구에게나 빛나는 나날이었다.
(p. 202)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이 순간에 그의 내면에서는 무엇인가가 끊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푸른 해안을 따라 자신을 유혹하는 새롭고 낯선 땅이 그의 영혼 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저 어렴풋이 예감할 뿐이었다. 그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안과 달콤한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뇌와 환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하지만 그의 쾌락은 참신한 사랑의 힘, 그리고 생동감이 넘치는 생명에 대한 최초의 예감을 의미했다. 그의 고통은 아침의 평화가 깨어지고, 자신의 영혼이 두 번 다시 찾기 못할 어린 시절의 세계를 이미 떠나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난파를 간신히 벗어난 한스의 가벼운 조각배는 이제 새로은 폭풍과 입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심연, 그리고 극도로 위험한 암초에 점점 가까이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올바른 지도를 받아온 젊은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안내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p. 212)
한스의 가슴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굳건한 감정과 처음 느껴보는 눈부신 희망의 파도가 세차게, 불안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굽이쳤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단지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겁에 질린 절망적인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희미하게 솟구치는 샘물이 되어 있었다. 몹시도 강렬한 그 무엇이 한스의 가슴 깊숙이 묶여진 사슬을 끊고, 자유를 만끽하려는 듯했다. 그것은 아마도 흐느낌이거나 노래거나 부르짖음이거나, 아니면 뜨들썩한 웃음이었을 것이다. 이 흥분된 감정은 겨우 집에 돌아와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p. 213)
한스는 자신이 하일브론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남성다운 혈기가 그저 낯설고, 초조하고 피곤하기만 한 상태로 어렴풋이 이해될 뿐이었다.
저녁 식사 때, 한스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익숙해져 있는 환경 한가운데 자신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버지와 늙은 하녀, 식탁, 그리고 방 안에 있는 모든 세간들이 갑자기 낡아빠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마치 긴 여행에서 방금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놀랍고, 서먹하면서도 다정스러운 느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죽음을 부르는 나뭇가지에 추파를 던질 때만해도 한스는 작별을 고하는 자의 얘절한 우월감을 가지고, 지금과 다름없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금 과거로 되돌아와 놀라움에 미소지으며 잃었던 현실을 되찾은 것이다.
(p. 215)
이렇게 한스는 자신 속에 숨겨져 있던 사람의 비밀을 너무나도 빨리 알고 말았다. 그것은 달콤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쓰디쓴 맛이었다. 부질없는 탄식과 그리운 추억, 그리고 암울한 사색으로 물든 나날들, 숨가쁜 심장의 고독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무서운 꿈결로 빠져드는 밤의 연속. 꿈 속에서는 피가 이상하리만치 격렬하게 끓어올라 끔찍스러운 거대한 괴물이 되기도 하고, 목을 휘감아 죽음을 부르는 팔이 되기도 하고, 불타는 눈빛을 지닌 환상의 짐승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심연이 되기도 하고, 이글거리는 커다란 눈이 되기도 했다.
한스는 잠에서 깨어 홀로 싸늘한 가을밤의 고독에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엠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치다가 눈물로 뒤범벅이 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p. 233)
한스는 아름다운 햇살을 받으며 골목길을 거닐었다. 몇 달만에 처음으로 일용일이 주는 기쁨을 실컷 맛보았다. 평일에 손이 시꺼매지고, 팔다리가 피곤해지도록 일을 하고 난 뒤라야 일요일의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들뜨고, 태양은 더욱 밝게 빛나고, 모든 것이 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버이었다. 햇볕이 드는 집 앞의 벤치에 앉아 마치 제왕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육점 주인이나 피혁공, 빵집 주인이나 대장간 주인을 한스는 이제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을 속물 같은 인간이라고 경멸하지 않게 되었다.
(p. 243)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는 무척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어요. 그리고 일도 모두 잘 풀려나갔지요. 학교며 시험이며 그러다 갑자기 한꺼번에 불행이 닥쳐온 겁니다!”
구둣방아 아저씨는 묘지 문을 나서는 프록코드의 신사들을 손으로 가르켰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 양반들 말입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뭐라구요?” 기벤라트 씨는 흥분한 나머지 펄쩍 뛰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원, 세상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진정하세요, 기벤라트 씨. 전 그저 학교 선생들을 말한것뿐이에요”
“어째서요? 도대체 왜 그렇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나 나,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세요?”
마을 위로 드넓은 푸른 하늘이 한가로이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에는 강물이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잣나무가 우거진 산들은 그리움에 가득 찬 듯이 부드럽고 짙푸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p. 2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