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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읽은 책들)

 

(1) 파인만 (짐 오타비아니 / 서해문집)


(2) 88만원세대 (우석훈 / 레디앙)


(3) 한국의 글쟁이들 (구본준 / 한겨레출판사)


(4) 한번은 (빔 벤더스 / 이봄)


(5) 아깝다 학원비 (사교육걱정없는 세상 / 비아북)


(6)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 돌베개)


(7) 분노의 포도 (1) (존 스타인벡 / 민음사)


(8) 분노의 포도 (2) (존 스타인벡 / 민음사)


(9) 때론 길을 잃어도 좋다 (윤세영 / 사진예술사)


(10)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년 (1) (스티그 라르손 / 문학에디션 뿔)


(11)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년 (2) (스티그 라르손 / 문학에디션 뿔)


(12) 프리라이더 (선대인 / 더팩트)


(13) 벌집을 발로 찬 소녀 (1) (스티그 라르손 / 문학에디션 뿔)


(14) 벌집을 발로 찬 소녀 (2) (스티그 라르손 / 문학에디션 뿔)


(15) 경제학 3.0 (김광수 / 더난)


(16)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 민음사)


(17) 암흑의 핵심 (조셉콘래드 / 민음사)


(18) 섬 (장 그르니에 / 민음사)


(19)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 여름언덕)


(20)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카포티 / 아침나라)


(21) 강남몽 (황석영 / 창비)


(22)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 책벌레)


(23)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 / 김영사)


(24)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 문학사상사)


(25)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 사회평론)


(26) 카모메식당(무레 요코 / 푸른숲)


(27) 이상호기자 X파일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이상호 / 동아시아)


(28)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 꾸리에)


(29)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 행복한 마음)


(30) 허수아비춤 (조정래 / 문학의 문학)


(31) 비숍 살인사건 (반 다인 / 동서문화사)


(32) Y의 비극 (앨러리 퀸 / 해문출판사)


(33) 고백 (告白) (미나토 가나에 / 비채)


(34) 햄릿 (세익스피어 / 김재남 / 하서)


(35) 동물농장 (조지 오웰 / 도정일 / 민음사)


(36) 달과 6펜스 (서미싯 몸 / 송무 / 민음사)


(37) 사랑하지 말자 (김용옥 / 통나무)


(38) 모털엔진(MORTAL ENGINES) (견인 도시 연대기 1) (필립 리브 / 부키)

 


(39) 사냥꾼의 현상금 (견인 도시 연대기 2) (필립리브 / 부키)


(40) 악마의 무기 (견인 도시 연대기 3) (필립리브 / 부키)


(41) 황혼의 들판 (견인 도시 연대기 4) (필립리브 / 부키)


(42) 의자놀이(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 휴머니스트)


(43) 내 아이가 살아갈 행복한 사회 (이상이, 김윤태 / 한권의 책)


(44) BBK의 배신 (김경준 / 비비케이북스)


(45)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이윤기 / 열린책들)


(46) 하악하악 (이외수 / 해냄)


(47) 내가 알고 있는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칼 필레머 / 토네이도)


(48)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 최인자 / 현대문학)


(49) 거울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 최인자 / 현대문학)


(50)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파이돈·향연) (플라톤 / 황문수 /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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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7-2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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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파이돈·향연)
플라톤 / 황문수 / 문예출판사

(2012. 12. 29.)

 


<변명>

 

  그들은 나를 고발한 자들이므로 나는 소장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악행을 하는 자이며 괴상한 사람이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하고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와 같은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친다.’ 이것이 고발의 내용입니다.
(p. 13)

 

 

  내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신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일까? 오랫동안 숙고한 끝에 이 문제를 푸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만일 나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나는 반증을 갖고 신에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가장 현명하다고 말했습니다.”하고 나는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인이라는 세평을 듣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를 – 그는 내가 시험해 보기로 한 정치가였습니다. -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그와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도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는 현명하지 않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다움이나 선을 사실상 모르고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현명하다고.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보다 우월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갔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와 그 이외의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p. 17-18)

 

 

  싸움터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추격자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도 무슨 말이든 또 무슨 짓이든 다 하기만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나의 친구여, 죽의의 회피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의(不義)를 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정은 죽음보다도 빨리 달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늙고 행동이 둔하기 때문에 느리게 뛰는 자에게 붙잡혔지만 예리하고 기민한 나의 고발자들은 빨리 달리는 자, 곧 불의에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러분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받기 위해 떠나지만, 그들도 진리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고 흉악과 부정에 대한 처벌을 받기 위해 떠나갑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내린 판결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내린 판결을 감수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은 숙명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는 이것으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합니다.
(p. 51)

 

 

  재판관 여러분, 죽음을 흔쾌히 여기고 착한 사람에게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나쁜 일은 생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착한 사람과 그가 한 일은 신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나의 다가오는 최후도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나는 죽어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좋은 때가 왔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신탁은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유죄 판결을 한 자와 고발한 자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좋은 일을 해줄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해를 깨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들은 마땅히 비난을 받을 만합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각기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뿐입니다.
(p. 55)

 

 

<파이돈>

 

  사람들이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묘한 일인가, 그리고 쾌락의 반대라고 여겨지는 고통과의 관계도 또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쾌락과 고통은 동시에 같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은 없으면서도 그 중 하나를 추구해서 얻은 사람은 대체로 다른 하나도 어쩔 수 없이 얻게 마련이기 때문이야. 그 몸뚱이는 둘이지만, 머리 하나에 붙어 있는 셈이야. 그리고 이솝이 이러한 점을 알았더라면 그는 신이 쾌락과 고통 간의 싸움을 화해시키려다가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고 양자의 머리를 하나로 만들어버렸고 그래서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가 뒤따르게 마련이라는 우화를 지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p. 88)

 

 

  진정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육체와 더불어 있는 동안은, 그리고 영혼이 육체의 악에 감염되는 동안은 우리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우리와 우리의 논의를 이끌어가는 사유의 길을 우리는 찾아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욕구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육체는 양식을 요구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끝없는 번거로움이 생기고 게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우리의 참된 존재에 대한 추구를 압도하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육체는 우리의 마음속을 애욕과 욕망과 공포와 모든 종ㄹㅍ의 환상과 끝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사실상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유의 힘을 전적으로 빼앗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p. 99)

 

 

  내가 나의 여행을 마치고 지금 가려고 하는 곳에 다다르면 평생 동안 추구하던 것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네. 그러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나의 길을 가려고 하며, 나만이 아니라 마음에 결심이 서 있고 순수한 태도를 가졌다고 믿는 모든 사람이 그럴 거야.
(p. 101)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 모든 사물의 절대적 본질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방금 알게 된 이러한 본질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비교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있었고 선천적인 소유물임을 발견하고서 이 본질과 우리들의 모든 감각을 비교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논의는 무력한 것이 아니겠나? 우리의 영혼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념들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일세. 만일 관념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p. 119)

 

 

  “독이 심장에 까지 미치면 마지막이네.” 하반신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얼굴을 가린 것을 들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빚을 갚아주겠나?”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p. 192)

 

 

<향연>

 

  이러한 사람을 비난하는 곳에서는 그 비난의 배후에 사람들의 열등한 성격, 지배자들의 권력에 탐욕, 그리고 신민들의 비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무조건 좋다고 하는 곳에서는 입법자의정신적 나태 대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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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이윤기 / 열린책들

(2012. 12. 08.)

 

 

★ 대지의 배꼽에서 탯줄을 잘라내지 않은 사나이

철학이 담겨져 있지 않은 소설은 고전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
(p. 13)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p. 22)

 

 

  조르바는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시답잖은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확실히 그에게 전신 기술, 증기선, 엔진, 당대의 도덕과 종교는 녹슨 고물 총과 다름없었다. 그의 정신은 세상을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p. 27)

 

 

  나는 그제야 그의 왼손 집게손가락이 반 이상 잘려 나간걸 알았다. 나는 그쪽으로 갔지만 속이 역겨웠다.
  “손가락은 어떻게 된 겁니까. 조르바”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도”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계 만지다 잘렸어요?”
  “뭘 안다고 기계 어쩌고 하시오? 내 손으로 잘랐소”
  “당신 손으로, 왜요?”
  “안 해본 짓이 없다고 했지요? 한때 도자기를 만들었지요. 그 놀음에 미쳤더랬어요. 흙덩이를 가지고 만들어 싶은 거 아무거나 만든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오? 프르르! 녹로를 돌리면 진흙 덩이가 동그랗게 되는 겁니다. 흡사 당신의 이런 말을 알아들은 듯이 말입니다. <항아리를 만들어야지, 접시를 만들어야지. 아니 램프를 만들까, 귀신도 모를 물건을 만들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름지기 이런 게 아닐까요, 자유 말이오.”
  “그래서요?” “손가락은 어떻게 되었느냐니까?”
  “참, 그게 녹로 돌리는 데 자꾸 거치적거리더란 말입니다. 이게 끼어들어 글쎄 내가 만들려던 걸 뭉개어 놓지 뭡니까> 그래서 어느 날 손도끼를 들어……>
  “아프지 않던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쓰러진 나무 그루터기는 아니오. 나도 사람입니다. 물론 아팠지요. 하지만 이게 자꾸 거치적거리며 신경을 돋우었어요. 그래서 잘라 버렸지요.”
(p. 28-29)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은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 버리다니……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p. 38-39)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p. 98)

 

 

  “두목 나를 신용하십니까요?”
  “물론 하지요, 조르바. 조르바라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그르칠 턱이 없어요. 그르치려고 해봐야 그렇게는 안 될 겝니다. 당신은 사자나 이리 같다고나 할까. 그런 맹수에게 양이나 나귀 같은 처신을 해봐야 안 됩니다. 천성이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은 머리끝에서 손톱 끝까지 조르바라는 겁니다.”
(p. 103)

 

 

  그는 갑자기 자연의 법칙을 정복하고 날아가려는 듯이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늙은 육신 속에 그 몸을 들어다 어둠 속에 유성처럼 던져 버리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영혼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오래는 공중에 머물 수 없어서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의 몸은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몸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더 높이 뛰어올랐다. 뛰어올랐지만 그의 불쌍한 육신은 쉴 새 없이 다시 땅에 떨어졌다.
(p. 104)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은 채 깡그리 낭비하고 만 내 인생을 생각했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별빛으로 조르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밤새처럼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부러웠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조르바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p. 111)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물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으로 까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p. 174)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 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p. 178)

 

 

  나는 한동안 화살에 꿰뚫린 심장이 그려진, 향긋한 편지를 쥔 채, 그와 함께 보냈던, 그의 존재감으로 가득 찼던 나날들을 생각했다. 시간은 조르바와의 만남에 새로운 흥취를 더했다. 조르바와의 만남은 외부 사건의 수학적인 연속도, 내부의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결이 고운, 따뜻한 모래 같은 것이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모래를 감촉할 수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조르바에게 복이 있을진저. 조르바는 내 내부에서 떨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육체를 부여했다. 조르바가 없으면 나는 다시 떨게 되리라.”
(p. 226)

 

 

  세계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 한순간의 목숨이 어떻게 하여 세상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을 높여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염원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짧디짧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는 데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까?
(p. 389)

 

 

  꺼져 가는 불가에 홀로 앉아 나는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p. 400)

 

 

  행복이란 의무를 행하는 것. 의무가 무거운면 무거울수록 행복은 그만큼 더 큰법
(p. 420)

 

 

  재수 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에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면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p.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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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서미싯 몸 / 송무 / 민음사
(2012. 10. 21.)

 


  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러한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 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그 비밀은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않는 수수께끼 같다.
(p. 8)
 

 

  인간은 신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타고난다. 그래서 보통 사람과 조금이라도 다른 인간이 있으면 그들의 생애에서 놀랍고 신기한 사건들을 열심히 찾아내서 전설을 지어낸 다음, 그것을 광적으로 믿어버린다. 범상한 삶에 대한 낭만적 정신의 저항이라고나 할까. 전설적인 사건들은 주인공을 불멸의 세계로 들여 보내는 가장 확실한 입장권이 되어준다.
(p. 10)
 

 

  말하는 당사자에게는 자못 새롭게 여겨지는 용감한 말도 알고 보면 그 이전에 똑같은 어조로 백 번도 되풀이되었던 말이다. 추는 항상 좌우로 흔들리고, 사람들은 같은 원을 늘 새롭게 돈다.
(p. 17)
 

 

  나는 남들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에서 오는 허세이다. 그것은 남들이 자신의 조그만 잘못들을 비난할 때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들은 아무도 그 잘못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p. 76)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이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p. 77)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p. 85)

 

  습관이 오래되면 감각도 무뎌지게 마련이지만 그러기 전까지 작가는 자신의 작가적 본능이 인간성의 기이한 특성들에 너무 몰두하는 나머지 때로 도덕의식까지 마비됨을 깨닫고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악을 관조하면서 예술적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작가는 논리를 갖춘 철저한 악한을 창조해 놓고 그 악한에게 매혹당한다. 비록 그것이 법과 질서를 능력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렇다. 작가는 악당을 만들어내면서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본능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에 살과 뼈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다른 식으로는 방출될 수 없는 자신의 본능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만족이란 하나의 해방감인 것이다.
(p. 197)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 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 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 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p. 207)
 

 

  이래서 소설은 비현실적이 된다. 남자에게 사랑이란 일상적인 여러 일의 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데도 소설에서 그것을 강조하다보니 실제와는 다른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남자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그런 남자들은 별 재미가 없다. 사랑을 지상(至上)의 관심사로 삼는 여자들도 그런 남자를 경멸한다. 하기야 그런 남자들 덕분에 여자들은 기분이 우쭐해지고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이 좀 덜 떨어진 인간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짧은 기간에도 남자는 다른 일들을 하며 그 일들에 신경을 쓴다. 남녀가 똑같이 사랑에 빠져 있다하더라도 다른 점은, 여자가 하루 온종일 사랑할 수 있는 데 비해 남자는 이따금씩 밖에 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p. 219-220)
 

 

  나는 예술이란 성적 본능이 구현된 것이라고 본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나 밝은 달빛을 받은 나폴리 항구, 티티언이 그런 <매장(埋葬)>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다 한가지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스트릭랜드가 보통 방식으로 성욕을 방출하기 싫어했던 것은 예술적 창조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에 비해 그것이 야비하게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 220)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p.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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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조지 오웰 / 도정일 / 민음사
(2012. 10. 12.)
 


과거는 현재를 반영한다. 1940년에 쓰여진 이 소설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여진다. 1943년에 쓰여지고 1945 출판된 이 소설은 소비에트를 풍자하기 위한 소설 이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역사적 실체가 소멸하고 없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동물농장』이 강한 적절성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정치사회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오웰이 그린 동물농장은 지금의 세계에도 있고 미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계속 이 비참한 조건 속에 살아야 하는 겁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들이 몽땅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동무들, 우리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거기 있소.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오. 인간은 우리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을 몰아내기만 하면 우리의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근본 원인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오.
  인간은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동물의 주인입니다. 그는 동물들을 부려먹고는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먹이만 주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가 챙깁니다.
(p. 11)

 

 

  동무 여러분, 우리 삶의 이 모든 불행이 인간의 횡포 때문이라는 게 너무도 명백하지 않소? 인간을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의 노동 생산물은 모두 우리 것이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부자가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온 신명을 바쳐 인간이라는 종자를 뒤집어엎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p. 12)

 

 

  동무들, 여러분의 결의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하시오. 헛된 얘기에 솔깃해서 길 읽고 헤매면 안 됩니다. 인간과 동물은 다같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한쪽의 번영이 곧 다른쪽의 번영이기도 하다 따위의 말을 인간들이 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마시오. 그건 모두 거짓말이오. 인간은 인간말고는 그 어떤 동물의 이익에도 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물들에게 완벽한 단결과 투쟁을 통한 완벽한 동지애가 필요하오. 모든 인간은 우리의 적이며 모든 동물은 우리의 동지입니다.
(p. 13)

 

 

  <동물주의 원리 일곱 계명>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p. 26)

 

 

  그 여름 내내 농장 일은 시계처럼 돌아갔다. 동물들은 일찍이 상상도 못했을 만큼 행복했다. 입에 넣는 먹거리는 그지없이 달콤했다. 그것은 과거 인색한 주인이 마지못해 동냥주듯 던져 주던 그런 먹이가 아니라 동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위해 생산한 먹이, 진정한 그들 자신의 먹이였기 때문이다.
(p. 29)

 

 

  그해 내내 동물들은 노예처럼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이 행복했다. 그들은 노동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그들 자신의, 그리고 다음에 올 후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게으른 도둑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p. 56)

 


  일은 더 많이 하면서도 먹는 것은 존즈 시절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일요일 아침이면 스퀄러가 길다란 두루마리 통계 숫자 목록을 펴놓고 그간 농장의 각종 식량 생산량이 200퍼센트, 300퍼센트, 혹은 500퍼센트식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동물들로선 <반란> 이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스퀄러의 발표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동물들은 통계 숫자보다는 먹을 것이나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때가 자주 있었다.
(p. 82)

 

 

  4월이 되자 동물농장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대통령 선출이 필요해졌다. 후보는 오로지 나폴레용 하나뿐이었고 그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같은 날, 스노볼과 존즈 사이의 공모 내용을 더 자세히 밝혀주는 새로운 문서들이 도 발견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p. 102)

 

 

  그들의 삶이 고되고 모든 희망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동물들은 자기네가 여타 농장의 동물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배를 주린다면 그건 인간 독재자들을 먹여살리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고달프게 일한다 해도 그 노동은 최소한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 중에 아무도 두 발로 걷는 동물은 없었다. 어느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했다.
(p. 115)
 

 

  일곱 계명은 오간 데 없고 단 하나의 계명만이 거기 적혀 있었다. 그 계명은 이러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p. 117)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 맞고함질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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