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입문

로버트 L. 윅스 / 김효섭 / 서광사 / 268쪽

(2019. 8. 10.)

1814년부터 1818년까지, 쇼펜하우어는 드레스덴에서 거주했는데, 그는 이곳에셔 4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집필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가 26세였던 1814년 말엽에 이미 거의 모든 중심적 생각들을 형성하였으며, 이후 3년에 걸쳐 그의 통찰들을 발전시켰고 정교화 했다. 주도적인 질문들 중 하나는 플라톤의 형상이나 칸트의 불가지의 "물자체" 중 어떤 것이 그의 이론의 기반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중국에 후자 쪽으로 이끌렸으나, 그는 물자체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의지"(will)라 부르며 칸트와 대조를 이루었다.

세계가 궁극적으로 선하며 그것이 (심지어 전쟁 중에도) 저절로 점진적으로 좋아지고 있다는 낙관론을 무너뜨리고자,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일상적 세계가 근본적으로 악한 장면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은 희망없이 좌절을 불러일으키고,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기만적이며, 허무하고, 고통스럽다. 그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단어들 중 하나는 hupoulos인데, 이 고대 그리스어는 붕대를 걷어내서 고름과 썩은 살로 가득한 채 곪아가는 상처를 보여 주는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는 그가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표면 아래에서 본 것이다.

(P.21)

서문과 칸트주의 철학 비판의 개요

쇼펜하우어는 "단일한 사유"를 표현하는, (관념적으로 보았을 때)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서 그의 책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그것을 두 번 읽기를 권한다. 이렇게게 유기적으로 통합된 구성은 이전 철학들의 구성방식과 다른데, 그것들의 대부분은 확실하다고 가정되는 토대를 놓으면서 시작하고, 준기계적인 방식으로 그 근원적 기초로부터 그 이상의 철학적 내용들을 뽑아내거나 발전시키거나 쌓아올리면서 진행해 나간다.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며, 쇼펜하우어는 그의 전임자들에 비해 더욱 생동감 있는 철학을 제시하기를 희망한다.

칸트의 철학이 보여주는 객관(대상)-지향적인, 과학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칸트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칸트의 주장들에 의해 특히 매료되었다. 칸트가 보기에,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망므으로부터 독립한 실재가 아니고, 오히려 인간 정신의 해석적인 양상들이다. 우리가 지각할 때 우리는 항상 해석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지각에 영향을 미칠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성하는 일상적 경험의 세계는 사물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나타내지 않는다. 극서은 다만 실재가 인간의 시-공간적인 렌즈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쇼펜하우어는 일상적 삶이 꿈과 같은 허상이라 믿는다. 쇼펜하우어의 이와 같은 믿음은, 일상적 세계를 단순한 외양들의 세계라고 칭한 칸트로부터 유래한다.

(P.27)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문

우리의 직접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첫 번째 서문이 가장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서문은 그의 독자들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요구되는 준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우선적이고 진정어린 충고는 "이 책을 두 번 읽어라." 이다. 이유인 즉, 이 책은 "단일한 사유"로 이루어졌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은 시작을, 시작은 마지막을 전제로 한다. 쇼펜하우어가 그 자신의 저서에 대해 생각하기에, 어떤 주어진 부분도 다른 모든 부분들을 전제로 한다.

두 번째로, 1818년 판의 서문에서 쇼펜하우어는, 1813년 출판된 그의 박사학위 논문,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의 적당한 입문서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그는 만약 독자들이 그 논문의 내용을 소화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잘 이해될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세 번째로,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칸트의 주된 통찰들의 보다 정합적인 표현이며 발전이기 때문에, 그는 칸트의 비판 철학의 주된 논점들쇼펜하우어의 박사학위 논문이해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두 번 읽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덧붙이기를, 만약 상황이 이상적이라면, 그래서 더 나아가 플라톤 철학을 좀 알고 있다면, 독자들은 그의 메시지를 잡아낼 준비가 잘 된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일 베다와 우파니샤드까지 이미 읽은 상태라면, 가장 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겠다.

(P.40)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집필하던 시기에, 프러시아와 바바리아의 정치적 지배에도 불구하고, 수백에 달하는 왕자들의 국가들이 독일어권 세계를 혼란스런 직조물의 양상으로 분열시켰다. 당시 영향력 있던 칸트 철학은 이에 더해 외양과 실재, 마음과 몸, 감각경험과 개념화(개념적 사유), 과학과 도덕, 지식과 신앙, 결정론과 자유론 사이의 좁히기 어려운 간극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세계에 대한 보다 생명-지향적이고 통합된 관점에 의해서 이러한 분열들을 재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을 자극하였다.

이렇게 모인 요구들은 철학하기에 사용된 주요 개념들과 모델들에서의 변화를 만들어 냈고,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면서, 기계론적인 사유는 유기적 관계에 초점을 두는, 통합체 지향의 상상과 이론화에 의해 점차적으로 대체되었다. 앞서 언급한 헤겔의 철학 체계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체계는, 변증법적인 이론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견고한 정초를 추구하면 이전의 토대주의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씨앗으로부터 자라나는 식물이라는 주된 이미지를 그것의 주요한 영감이요 모델로서 도입함으로써, 그러한 이론적 확장에 유기적 통합의 측면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 초에는, "생명"의 개념이 철학 이론들에서 더욱 눈에 띄게 등장하게되며, "유기적 통일체"의 개념은 기계론적 사유에 대한 반동의 일차적인 표현들 중 하나로서 나타난다. 이 두 개념들, 즉 "생명'과 "유기적 통일체"는 다양한 해석을 거치면서, 19세기 철학의 경향을 상당 부분 확정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유기적인 구조, 그리고 그 책을 두 번 읽으라는 쇼펜하우어의 권유도 이러한 역사적인 분위기의 산물이다.

(P.44)

충족이유율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설명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마다, 몇 가지 조건들이 반드시 만족되어야 한다는 것을 관찰한다. 첫째, 주관 혹은 설명을 구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둘째, 그 사람이 설명하길 원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셋쩨, 만약 설명이 타당하다면, 그 설명은 자의적이거나 단지 잠정적인 것일 수 없고 필연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충죽이유율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고, 그것들에 의해서, 쇼펜하우어는 가장 궁극적인 설명의수준에서 그 원칙의 근간에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전제해야한다고 믿는다.

(1) 주-객관 구분(그것은 주관과 객관 양자가 항상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남을 함축한다.)

(2) 설명의 요소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왜냐하면 그런 연결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진정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설명을 구하는 주관이 없다면 설명될 인식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들이 있을 때, 이러한 인식 대상들은 "표상들"(representations)이거나 심상들이다. 역으라, 만약 대상 혹은 표상이 존재한다면, 그 표상이 등장하게 되는 주관이 존재해야 한다.

(P.49)

쇼펜하우어의 칸트 인식론 비판

쇼펜하우어는 "칸트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부록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첨가하는데, 그는 칸트로부터 비롯한 자신의 철학 이면에 있는 이론적인 모티브들에 친숙해질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이 부록을 권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관점에 전반적으로

공감적이면서도, 칸트의 입장 안에서 몇 가지 오류를 식별해 낸댜. 쇼펜하우어에 다르면, 이 오류들은, 수정을 거쳤을 때, 그 자신이 칸트를 대신해서 제공하는 형이상학을 함축한다. 칸트의 착오들은 주로, 우리의 감각경험을 초래한다고 가정되는 형이상학적 존재자, 즉 칸트 자신의 용어로는 "물자체'에 대한 칸트의 이행과 규정 방식에 관련된다. 칸트에 다르면, 우리가 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상상할 때처럼, 물자체는 절대적이며 정신과 독립한, 다시 말해 우리가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간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재이다. 칸트는 이 물자체는 "그 자체로서는"알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영구적으로, 우리는 기껏해야 이 실재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이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P.52)

쇼펜하우어는 §2에서, 주관세계의 지지자이며 나타나는 모든 것의 보편적인 조건이라 말하고, 주관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고 덧붙이는데, 이로써 그는 위와 같이 다양한 생각 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존재임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주관이 누구에도 알려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이 이상한 문구는 "안다"라는 단어를 쇼펜하우어가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즉, 그는 “안다" 라는 말로써 "지각 속에서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서 의식에 드러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 개념적으로 동결된 대상은 그러한 상상을 하는 능동적이고 넘쳐흐르는 의식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감정, 감각, 관념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며 우리들 자신주관으로서 인식한다. 우리가 이러한 느낌들을 “사물들”로 객관화해 버릴 때, 기만이 일어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주관과 객관은 그래서, 서로 보충적이지만, 이질적인 형이상학적 유형들이다. 그는 자주 “종류 면에서 완전히 다른” (toto genere different)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여 양자 간의 대조를 표현한다. 자기-인식은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의식 속에서 의식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객관적 대상도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주관에 대한 이미지는, 마치 손가락 끝이 다른 것들을 만질 수 있지만 그것 자체는 만질 수 없듯, 다른 것들은 볼 수 있지만 그것 자신을 보기 위해 그것 자신으로 향할 수 없는 눈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손가락 끝은 그것 자체를 만질 수는 없지만, 손가락 끝의 내부는 어떤 것을 만지지 않고서도 느껴질 수 있다. 자기-의식은 바로 후자와 같은 것이다.

(P.62)

쇼펜하우어는 지금, 직접적 지각이 제공하는 지식으로부터 그가 그 지각으로부터 '빌려온 빛”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주의를 돌린다. 이 빌려옴은 “반성"과 “추상화"의 과정들인데, 그 과정들로부터 우리는 직접적 지각으로부터 추상적 개념형성한다. 예컨대, 우리는 빨간 것들의 집합을 보고, 그 예들로부터, 즉 그것들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눈에 띄는 시각적인 특질을 고립시킴으로써 "빨강"이라는 일반적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모든 추상적 개념들은 지각 경험으로부터 추출되고, 어떤 것도 선험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가 “개념”이라는 단어(쇼펜하우어에 있어서 “추상적 개념"과 동의어)를 그의 저술에서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적인 개념” 이라는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우리의 반성 능력을 “이성”이라고 칭하며, 이성은 오직 하나의 기능이 있는데,그것은 추상개념들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성의 산물들은 직접적 지각의 무매개성 (immediacy)에 비해 덜 신뢰할만하고, (몇 세기에 걸쳐 우리와 함께 남아 있을수 있는)큰실수의 잠재적 원천이 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쇼펜하우어는 이성이 실천적 심사숙고와 정서적 통제의 능력과 함께 계획과 원칙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다른 동물들과 구별시켜 준다는 점을 확인한다. 이성은 결국 양면성을 띤다. 이성은 우리가 직접적인, 지각적인 지식으로부터 불확실한 발걸음을 떼도록 하는 반면. 이성의 추상적 지식의 생산은, 우리의 의식적인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킴으로서, 우리를 동물 이상의 존재로 고양시킨다

(P.76)

쇼펜하우어는 지각의 장 내의 모든 표상들 중에 그의 몸이 하나의 표상으로서 전혀 특별하거나 지각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그 (유아론적) 입장을 그럴듯하지 않은 것으로서 거부 한다. 그의 몸(의 표상)은 다른 표상들과 공간적으로 근접해 있고 이는 다른 것들이 또 다른 것들과 그러한 관계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그의 몸은 다른 표상들과 정확히 같은 하나의 표상이고, 그래서 모든 표상들이 내적인 실재를 지닌다는 생각에 어떤 예외가 있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없다. 만약 예외가 있다면, 그 지각의 장은 부조리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 지각의 장에서는, 동일하게 충분히 발달되어 있고 깨어 있는 상태의 표상들 중에서 어떤 것은 내적인 실재를 지니지 않고 어떤 것은 지니게 될 것일 데고 이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반성의 결과로, 쇼펜하우어는 그의 몸-표상이 내적인 실재를 갖는 것처럼, 그의 시각의 장 안에 있는 모든 표상들은 내적인 실재를 지닌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쇼펜하우어는 전체적인 표상들의 장 이면에 단일한 내적인 실재가 있고, 자신과 다른 모든 이의 의식은 이 단일한 실재의 표현이라는 입장에 접근하게 된다.

(P.102)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가 쇼펜하우어의 미학과 철학에 영감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관점은 쇼펜하우어의 그것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플라톤은 예술가들을 시 공간적인 세계 내 항목들의 모사자들인 동시에 우리를 더욱 무지 쪽으로 이끄는 사람들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일상적 세계의 항목들에 대한 예술적인 모사를 그림자의 그림자로 보며, 이는 그 항목들을 무시간적인 진리로부터 두 배 멀리 떨어진 형이상학적인 거리에 위치 시킨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예술작품이 일상생활의 형상들을 완전하며 이상적으로 만들고, 플라톤적인 이데아들을 일상의 사물들보다 더 직접적이고 명료하게 드러낸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과학 및 충족이유율에 반대하며,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우월한 지식의 형식이라 보는데, 이는 예술이 드러내는 대상들은 변덕스런 우리의 일상적 세계의 고정된 원형들로서 기능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P.143)

쇼펜하우어는 음악의 본질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함께. 제3부와 미학 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논의를 마무리한다. 음악은 이전의 그의 논의에 들어맞지 않는 예술장르로서, 3부에서 4부로 넘어갈 때, 중요한 전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음악은 플라톤적 이데아를 드러내지 않는 대신, 의지의 "모사"(a copy of Will)로서 의지 그 자체를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무기물질로부터 인간까지 포괄하는) 플라톤적 이데아들의 총기에 대한 전제적인 시각을 회상하고, 아울러 이 이데아들이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화라는것을 덧붙인다면, 음악의 고유성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관찰들의 일부를 이해하는것이 더 쉬을것이다. 의지가 그것 자신을 플라톤적 이데아들의 위계질서로 객관화한다면, 음악의 기본적인 구조는 그 객관화의 활동과 결과적인 위계질서를 상징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1) 음악은 낮은 음에서 중간 음 그리고 고음에 이르는 범위에 따라 구조화된다. (2)음악은 박자, 화성. 그리고 선율이라는 삼부(三部)(tripartite)의 차원들에 따라 구조화 된다. (3) 우리가 어떤 현 악기에서 한 음을 내면, 그 음은 낮은 음으로부터 높은 음까지의 일련의 배음(倍音)들(overtones)과 공명한다. 우리는 그래서,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화들, 즉 플라톤적 이데아들의 위계와 상징적으로 일치하는, 음악적 구조상의 일련의 상호 관련된 수준들을 지니는 것이다. 이런 유사성들과 음악이 지니는 인간의 감정 표현 능력 을 이유로, 쇼펜하우어는 이데아들의 위계질서로 자신을 객관화하는 의지의 “모사”로서 음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P.163)

우리의 몸은 의지의 객관화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본질인 “가지적인 성격”의 객관화, 즉 의지의 무시간적 활동의 하나이다. 이런 이유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긍정”과 “몸의 긍정”이라는 문구들을 호환하여 사용한다. 몸의 자연적인 목적은 건강과 그 종의 재생산이고, 이런 동기들로부터 성적인 충동은 인간의 몸의 긍정에 대한 핵심적인 표현이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기들은 항상 완전한 만족감을 줄 것처럼 약속하고 그것에 따라 우리를 몰아가지만, 그런 목적들이 달성되면 그 만족감이란 일시적일 뿐이고, 결국 새로운 욕망들이 등장해서 완전한 만족감을 약속하는 또 다른 허상을 향하도록 우리를 내몬다. 그래서 몸의 긍정의 차원에서 가장 깊은 동기면서 가장 깊은 허상의 창조자는 성적인 만족감과 함께한다. 모든 사람들은 성적으로 추동되고, 성적 욕구의 충족에 따르는 “영원한 행복"의 허황된 확신에 의해 계속 이끌리게 된다.

(P.183)

쇼펜하우어는 완전한 살려는의지의 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의식상의 변화에 대한 기술을 발전시키면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맺는다. 의지로 가득 채워진 채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살려는 의지의 완전한 부정과 연결된 그 사유 방식은 큰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 욕구의 그러한 관점에서는, 완전한 의지의 부정은 죽음과도 같은 허무를 약속하고, 그래서 그것은 부조리하게 보인다. 이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pessimistic) 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고. 이런 반응 안에서 염세주의의 정서가(情緖價)는 비난적이고, 평가절하거나, 거부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절대적인 무”와 “상대적인 무"를 구분함으로써 그의 관점을 방어한다. 그는 무가 존재 혹은 어떤 존재의 상태와의 대조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무는 생각조 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적는다. 이는 그가, 의지의 부정이 무(즉. 욕구의 관점에서는 죽음)로 이끄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무라는 것이 상대적인(relativistic)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종류의 인식, 다시 말해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를 지시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P.212)

톨스토이(1828-1910)는 1869년에 쇼펜하우어를 꽤 오랜 시간 읽었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러시아어로 번역되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역시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를 집필하는 동안(1873-1877)에도 쇼펜하우어를 읽었는데, 이 소설은 쇼펜하우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톨스토리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ch)(188)은, 심지어는 가족 중 한 명이 죽는 맥락 속에서 (쇼펜하우어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던 방식대로) 죽음을 소소한 것으로 보는 관점을 표현한다. 톨스토이의 더 개인적이며 자전적인 작품인 『고객』(A Confession)도, 6, 7, 8, 9, 10장 그리고12장에서 쇼펜하우어에 대해 이야기 한다.

1899년에, 톨스토이는『예술이란 무엇인가?』(what is Art?)리는 짧은 책을 발행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감정의 소통으로서의 예술 이론을 발전시킨다. 쇼펜하우어와와 톨스토이 양지에 따르면, 예술가는 모종의 실재를 파악하고, 그 실재를 예술작품 속에서 구현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정확히 타자에게 전달한다(전자에 의하면 이 모종의 실재는 플라톤적 이데아이고, 후자에 의하면 이는 어던 종류의 감정이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의 예술론은 쇼펜하우어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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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셀린 벨로크 / 류재화 / 자음과모음 / 260쪽

(2019. 5. 20.)

이 책은 여느 철학책과는 다르다. 철학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면서 우리의 삶을 개선하려는 야망 같은 것을 갖는다. 대부분의 철학서는 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이론적 근거를 끌어내는 데 전력을 다하느라 실제 응용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을 바꾸기 위해 한 위대한 철학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 우리의 실존이나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에 대해 시선을 던지듯 디테일한 우리 일상 하나하나에까지도 시선을 던지면서 말이다.

(P.7)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할 뿐 행복이 하나의 환상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행복하다고 믿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또 하나는 좋은 순간을 그저 누리는 것. 그런데 이 두 행복의 길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다. 휴식과 안녕은 애초에 불가능한 삶이다. 행복 찾기는 불안과 고통, 불만족이라는 멍에를 반드시 씌운다. 마지막에도 처음처럼 그렇게 좋을까? 우리 인생을 비춘 그 수많은 약속들은 우리 마음을 그토록 이끌었건만 약속들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P.35)

행복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때는 우리 뒤에 있다. 행복했는데도 그때는 모르고 항상 너무 늦게 아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이렇게 묘사했다. "햇볕 드는 평야 너머로 바람이 밀고 갈 작고 어두운 구름." 행복은 항상 지나갔거나 올 것이라는 것이다. 행복은 둘 사이에, 즉 현재에는 잡을 수 없는 연기처럼 나타난다고, 행복은 감각이라기보다는 생각인 것이다.

(P.44)

이성은 인간을 조금도 해명하지 못한다. 반대로 이성은 그것이 창조된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적절하게 사용된다. 본능적 충동만이 훨신 효과적일 것이다(이성의 조명 아래 본능이 구속된다!) 가끔은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생각을 깊이 하고 심사숙고를 하면 할수록 더 혼란스럽다. 길을 잃는다. 결정할 수가 없다. 결국 모든 심사숙고에서 나와 비이성적인 본능적 직감으로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나? 거기서 주목할 만한 발전이 나타나 놀라기도 하는데, 이성은 우리에게 빛을 가져다준다고 하지 않았나 하고 여전히 믿어서다. 사실상 이성은 혼돈과 속임수와 고통의 요소일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의지는 평균치를 벗어난 비합리성 속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그저 뿌리 깊고, 일관되며, 비논리적이고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터무니없이 부조리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호주의 개미-불독과 비유했다. 이 개미는 잘린 듯 둘로 나뉘 개미로 두 부분이 서로 다투는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는 꼬리를 물고, 고리는 자기 바늘로 용감하게 방어한다. 우리들 역시 이렇게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런 투쟁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우리는 늘 스스로에 대해 일정한 동요를 겪는다. 우리에게 부합하지 않는 이상에 부합하려고 애쓴다. 우리의 진짜 모습에 우리는 겁이나며, 우리 모습 그대로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회개라는 통렬하고 쓰리다 못 해 뼈아픈,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P.106)

결국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생에 고통스럽게 집착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를 심리학자처럼 말하고 있기도 하다. 무의미한 활동 속에서 우리를 잃어가며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 망쳤다는 느낌. 무언가 망쳤다는 느낌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원하게 만들고, 성공할 기회를 더 갖게 싶게 만든다. 다시 하면 더 잘할수 있을까? 그런데 어느 날 미 모든 것이 이미 늦었고 영영 다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도래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이 든다. 하지만 이런 중압감에서 벗어나 가벼워지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다른 경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오로지 영원만이 실재이고, 유한한 시간은 외양에 불과하다.

선전인 시간으로부터 구원된 세계를 보는 것, 그 세게에 모든 것이 여러 가능성 형태로 현존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시간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우리는 이제 '고통의 대가를 치를 만한 어떤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행해지지 않은 것, 빛을 보지 못한 보물들, 보지 못했거나 창조되지 못한 아름다움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현될 것ㅇ디ㅏ. 이 다른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변형일지 모른다.

(P.139)

자연이나 예술 작품을 관조하는 또 다른 암묵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세계라는 무대 속에 빨려 들어가 잠시 우리 자신을 잊는 것이다. 사실상 자신의 쾌락과 이익, 만족 증의 추구 속에 있는 이상 우리는 삶의 의지나 여러 요구사항과 그에 따른 실망과 좌절 속에 예속되어 있는 셈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놓여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세계의 중심에 더 이상 자신의 에고를 놓지 말고, 세계 그 자체를 중심에 놓는 것이다. 이것이 관조의 미덕 그 자체다. 이런 미덕 속에서, 우리는 관조되는 대상에, 가령 유일한 현실일 수도 있는 풍경에만 온통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해체되는 듯하고 나부기는 듯하다. 의식은 마치 풍경 속에 흡수된 시서일 뿐이며, 풍경과만 무엇을 할 분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런 순간들만큼은 우리의 에고에서 벗어난다.

이를 추구하는 목적은 '의지'에 습관적으로 예속된 우리의 앎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우리의 개인적인 나를 잊는 것이기도하다. 의지 없는 눈이 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세계는 하나의 무대 혹은 하나의 표상이 된다. 그것은 더이상 우리 삶의 의지가 작동되는 곳이 아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격력하게 동요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일몰을 관조하는 눈이 동굴에 있든, 왕궁에 있든, 그 무엇이 주요하겠는가. 이 눈이 위력을 지닌 왕의 것이든, 불쌍한 거지의 것이든 그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면 피로나 행동해야 할 필요 같은 끝없는 사슬에 더는 묶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가능한 한 관조를 해야 한다. 우리가 몰두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임을 깨달으면 평화의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P.154)

자애는 자아를 포기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떤 감정이나 욕망 따위도 포기하게 만든다. 자애는 범사랑을 만든다. 바로 그래서 해방을 향한 길인 것이다.

정의와 자애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을 하소연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 우리는 인생이 달콤하기를 더는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우린 더 이상 도망가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우리가 실존 속에서 겪는 전투가 거칠고, 옥죄고, 끝이 없다고 해서 우리 자신 안에 더는 숨지 않는다. 우리는 마침내 그런 고통이 어쩔 수 없으며,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고통 받는 것이 두렵지 않다. '단식'이나 '고행'을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힘과 새로운 평화가 주어진다.

쇼펜하우어는 구원의 두 길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자아와 의지로부터 초연해지는 두 가지 방법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 관조의 평온함(가령, 예술이나 자연을 통하여)

- 이른바 섬과, 이 말이 너무 막연하다 싶으면, 아주 잠시, 살고자 하는 의지의 부정이 솟구침.

(P.187)

인간은 더는 고통 받고 싶지 않으나 그 고통이 자기 고유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몸이 시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본능에 따라 하면 고통은 또 온다. 앞 장에서 부각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고통을 내밀하게 체험하고 나면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자기 본성에 반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삶을 부정하는 것... 그런데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현실 세계에서는 다소 말이 되지 않기에 사람들은 신화와 종교와 역사의 상상력을 동원해 이런 부정을 이해하려 했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로서 이런 부정의 필요성을 형이상학적 논리와 논점으로 깨닫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원시적이고 정화된 형태(신비 신학에 가까운)의 기독교 예를 들기도 하고, 이슬람의 신비주의나 수피주의, 특히 불교와 브라만교의 예를 들기도 한다.

그의 글에서 환기된 종교는 신앙 차원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그 어떤 종교의 윌원도 아니고, 새로운 종교의 일원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형이상학은 그저 삶과 생명에 대한 경험과 시선에서 나온 것으로, 이전 선조들의 메시지와도 맥이 닿는데, 직감을 통해 우주적 통찰을 하는 것이다.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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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

(나를 마주하는 당당한 철학,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읽기)​

이동용 / 동녘 / 464쪽

(2019. 5. 6.)

염세주의 철학,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일컫는 말이다. 염세주의는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고통에 대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고 체념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한편으로 맞는 말이지만, 결코 현재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이 있는 현재를 가치 있게 본다는 점에서는 오해가 되기도 한다. 유독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많은 오해에 시달렸다. 왜 그런 오해가 생겼을까? 편현합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끝까지 읽어 낸 자가 별로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부정에서 시작해 무로 마감한다. 고통에서 시작해 해탈로 끝난다. 자기 자신을 거부하면서도 끝까지 끌고 간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구원은 구원 이전의 존재 형식을 모두 거부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구원 이후의 자기 자신은 구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모두가 성불이 될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이 구원의 원인이 되는 셈이다.

(P.9)

세상이 힘들다는 것, 인생이 눈물로만 채워져 있다는 것,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염세주의 철학은 위대한 위로의 해결책으로 다가온다. 그 철학은 위기의 순간에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 자살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답답한 순간에 새로운 세상으로 확 트이는 탈출구를 발견하게 한다. 염세주의 철학은 모든 것을 부정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을 얻는 비결을 알려준다. 삶의 무게를 극복하면, 마치 육중한 돌이 별이 되어 은하수로 충만한 우주 공간의 한 일원이 되는 듯한 행복감을 얻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목소리는 간절할 때 포근한 위로의 소리로 들릴 것이다. "진리는 창부가 아니라서 갈망하지 않는 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는 그의 거침없는 주장이 여기에서 이해될 것이다.

​(P.28)

염세주의 철학은 일종의 비관주의 철학으로 부정의 힘을 길러준다. 쇼펜하우어 철학은 부정과 거부의 방법을 통해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삶에 대한 수많은 독설에도 불구하고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죽음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자는 삶에 대해서도 진지해질 수 있다. 단념에 대한 이론을 내는 사람은 궁극적인 획득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삼을 되돌아보게 하고, 맹목적인 본능으로 내몰린 도시 생활에 대해 비판의 거리를 갖게 한다. 그의 사상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욕망의 불꽃을 잠시 식히고 냉정한 인식으로 충만한 새로운 삶으로의 문을 열어 준다.

(P.66)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바로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이데아가 진실계이며 동시에 실재이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현상계는 오로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험적 현실세계는 비본래적이고 비본질적인 존재로 이해될 뿐이다. 그 배후에는 하지만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존재가 숨어 있다. 경험적 사물들은 다양한 현상에 의해 변화하며 무상한 반면 그 개념들인 이념은 불변하고 영원하다.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경험적 사물 셰계의 존재는 다만 가상일뿐이고,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존재는 이념의 존재이다. 즉 플라톤의 이념은 실재하는 것이며 또한 영원불변의 것에 해당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념들은 사물의 영원한 형식인 셈이다. 현상계의 모든 개별자들은 원상들에 대한 모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이념은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념에 대한 직시는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이념은 물자체로서의 의지에 가장 적합한 객체성으로 주관을 위한 직관적 표상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에게 이념은 주관이 관여하는 인식의 조건에 의해 다양하게 해체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이념이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상에 대한 인식 없이 이념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식 주관이 없으면 무라고 할 수 있다."0

(P.114)

플라톤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꿈을 헤매는 듯이 보였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에 눈이 멀어 있다고 생각했다. 보는 눈을 가졌음에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으로 말이다.

플라톤과 쇼펜하우어 철학의 논쟁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단정과 맞물린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논쟁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단정과 맞물린다. 쇼펜하우어의 의문점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해석이다. 정말 존재하지 않을까? 무슨 근거로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장관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란 말인가?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 존재에게 너무 치우친 나머지 외면적 존재를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은 판단이 아닐까? 어느 한 쪽을 거부하고 다른 한 쪽을 선택하는 이런 흑백논리 앞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위한 실마리를 찾아낸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염세주으 철학의 첫 출발점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바다한가운데서 나침반 없이 표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표상을 무시하면 시작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과 차이점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표상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인식은 그것에서 시작한다.

(P.118)

칸트의 비판철학은 경험론과 합리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방법론으로 대두된다. 그가 선택한 것은 비판이었다. 그가 말하는 비판은 인식을 위한 비판이다. 소위 말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질문을 하더라도 인식을 위한 질문인지는 들어 보면 안다. 질문이 질문다울 때 인식은 찾아오는 법이다. 특히 경험론과 합리론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해내는 대표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내용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 없는 생각은 공허하다'는 말은 경험을 무시한 사고를 비판한 말이다. 그리고 후반부에 해당하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라는 말은 생각 없이 경험적 직관만을 위주로 한 방법론을 비판한 말이다. 쉽게 ㅁ라하면, 전자는 '사상누각'의 의미처람 방안에 틀어박혀 공상만 하는 사람에게는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로, 그리고 후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 것이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P.124)

플라톤도 칸트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선사했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여기에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성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혁명적 사고에 해당한다. 쇼펜하우어가 바로 그렇게 생각했던 철학자이다. 그의 생각 속에서 이성이란 그저 이차적인 능력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의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성은 의지의 거울일 뿐이다. 이성은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 이성의 도구는 말, 즉 언어이다. 말은 의지의 지배를 받은 이성에 의해 합리성이라는 가면을 쓸 수도 있다.

(P.148)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이성을 읽어보자.

'이성은 여성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즉 이성은 받아들인 다음에만 줄 수 있을 뿐이다. 이성이 그 자체로 홀로 갖고 있는 것은 내용이 없는 조작의 형식뿐이다.'(제10장)

이성은 "내용이 없는 조작의 형식"이다. 그래서 이성의 힘은 일단 무엇인가가 내용으로 들어올 때에만 발휘한다. 먼저 받아들이고 나서야 작용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은 "여성적인 성질"로 해석된다. 소극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성은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에 선행하는 직관적 쇼팡들 다음에 비로소 생기는 것이며, 그 표상과의 관계가 개념의 전체 본질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개념은 이미 표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제10장)

"직관적인 표상"이 없다면 이성은 "내용이 없는 조작의 형식"일 뿐이다. 이성은 언제나 표상을 전제로 한다. 외부로부터 표상이 들어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적합한 개념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성은 직관적 표상으로 내용을 얻어 왔다"(제10장)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을 통해 의식으로 축적되는 것을 "지식"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성의 제약"(같은 곳)을 받는다.

(P.172)

이성은 언제나 자기 생각에 집착하고 얽매이게 한다. 그래서 이성의 또 다른 한계로 옹졸함이 거론될 수 있다. 다양성을 허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하기의 원리 속에서 아무리 큰 숫자를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더하기의 원리를 적용할 뿐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이성에 얽매인 사람은 옹졸하다. 옹졸한 사람은 이성의 격률만을 따른다. 그는 "이성이 오성으 후견을 맡도록" 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석에 의존하고 또한 설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것에는 한없이 즐거워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에는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초래한다. 법이 있으면 안심하고 법이 없으면 당황한다. 외적인 형식에 얽매이다 보니 내용에는 부실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정해 놓은 형식 속에는 정해진 것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옹졸함은 이미 결정되고 규정된 사고 형식에서 오는 "경직된 확실성"만을 고집하는 것과 관련한다. 옹졸함과 경직성은 언제나 함께 한다. 그것은 현재의 다양한 변화를 수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옹졸한 사람은 "현명치 모사고 몰취미하며 쓸모없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십상이다.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이성적 인간에게서 인류의 모범을 찾으려 했던 관념론자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렀다.

(P.177)

오성과 이성에 대한 문제가 도대체 왜 쇼펜하우어 철학에 중요할까?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펜하우어는 고통스러운 삶을 종식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비결을 알려주고자 한다. 인생은 오생과 이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생을 구원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성은 의지를 이념의 도움을 통해 드러나게 한다. 하지만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한계를 내포한다. 잘못된 논리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지못한다. '일방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성은 그래서 오성의 도움을 반드시 요구한다. 만병 통치약처럼 여겨지던 자유의지는 논리적 오류에 빠질 위험이 많다. 오성적 판단이 결여될 때 그렇다. 객관성이 배재된 주관성은 독단과 광기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렇게 독일 관념론이 주장하는 이성의 신앙에 맞서 과감하게 내민 도전장과 같다. 세상이 결코 이성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었고, 그 이유를 고통스러원 삶에서 찾았으며,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성의 통제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까지 동원이 되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사상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다.

(P.180)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는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한 초석이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 아무것도 주어질 수 없다. 첫 출발은 자기 자신이다. 좋은 지도 앞에서도 자기 위치를 모르면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음이 바로 이런 이치다. 여행을 하는 이유도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함이다. 그래서 끝까지 가 보면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 끝은 물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누구든 자신이 힘이 닿는 데까지 가면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고행의 묘미이다. 참고 견디면 주어지는 인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 했다. 산스크리트에서 참고 견디는 땅이라는 뜻이다. 참고 견뎌 나가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끝까지 견뎌야 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뜻이다.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이다. 연꽃의 뿌리가 진흙탕에 뿌리박으면서 수면 위에서 꽃을 피우듯이. 그 진흙탕을 버려서 안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해서 함부로 버려서 안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P.284)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 이것만이 염세주의가 윤리적 차원에서 도달하려는 최고의 목표이다. 쇼펜하우어의 정언명법은 다음과 같다.

'아무도 해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두를 도와주어라.'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이 닿는 데까지. 그러니까 끝까지 남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도움의 전제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다. 참으로 힘든 요구다. 오로지 타인을 향한 생각과 마음으로만 살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타이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모든 것은 타인이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어더한 경우라도 해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 타인을 해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이 안 된다. 오로지 도와주어야만 한다. 이것이 동정이다.

(P.323)

누가 악한 사람일까?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동기가 주어지고, 외부의 힘이 저지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부당한 일을 한 용의가 있는 사람을 우리는 악하다고 부른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간단하면서 단호하다. 동기가 주어지고 그것을 의지의 노력을 통해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자는 악하다고 한다. "외부의 힘이 저지하지 않는다면"이란 제약이 우리를 더욱 낯 뜨겁게 만든다. 누군가 더 강력한 사람이 나타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누구나 부당한 짓을 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괴롭히던 사람이 사라지면 그 다음으로 강한 자가또다시 그 약자를 괴롭힌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긍정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개인들에게서나타나는 의지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의지로 다른 개인의 의지를 꺾는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자신이 편하기 위해 다른 개인의 불편을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도모한다. 그는 타안이 자기 자신의 "의지에봉사하기를 요구"하고, 그들이 자신의 "의지의 노력에 방해가 될 경우"에는 가차 없이 "그들의 생존을 파괴하려"한다. 방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행동의 원천은 이기심이다. 이기적인 사람의 특성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그런 사람은 "삶에의 의지가 아주 격렬하고, 그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을 훨씬 넘어서는 삶에의 의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기 의지가 객관화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적대실할 뿐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의지만이 격렬하게 작용하고, 다른 모든 것은 그것에 봉사를 해야만 한다. 둘째, "전적으로 근거율에 헌신하고 개별화의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그의 인식이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를 통해 정해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간의 전적인 차이를 굳게 고수한다는 점"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아니다'라는 말부터 꺼내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일단 부정하고 본다. '나는 너와 다르게 생각한다.' 이런 차별성이 그를 존재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개별화의 원리만이 그를 굳건하게 세워 주고, 그것만이 타인과의 차별성을 가능하게 한다.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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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세계 ​

박은미 / 박태성 / 삼성출판사 / 109쪽​

(2019. 3. 26.)​

철학책을 읽다 보면 '나만 힘든 세상을 사는 건 아니네, 이 사람도 힘든 세상 나름대로 살아 보려고 애 많이 썼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꽤 했었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 철학자 역시 나처럼 이 험한 세상을 살아 보려고 머리깨나 아프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도대체 이건 뭘까, 왜 이런 걸까?'하는 의문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철학을 합니다. 그렇게 인간을 괴롭히는 의문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격력한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 '삶의 고통'입니다.

살다 보면 '도대체 이 모든 고통을 왜 겪어야만 하는 걸까? 하는 탄식에 가슴을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철학자들 중에서도 이 물음에 특히 집중했던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하면 바로 떠올리게 되는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지요. 그런데도 그 사람 개인의 삶은 나름대로 행복했습니다. 인간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이 질문, '도대체 이 모든 고통을 왜 겪어야만 하는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어떤 결론을 내렸기에 이 험난한 세상을 장수하며 잘 살았던 것일까요? 그 사람의 철학이 궁금해집니다.

(P.7)

쇼펜하우어가 모든 것에 대해 끝까지 회의하기만 했다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같은 대작을 남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저작을 남긴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와 소통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 연구장 중 한 사람은 그를 두고 "고독하지만 세상과 동떨어지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책을 제대로 읽어 줄 만한 독자를 만나기를 원했고 후대에라고 자신의 저작이 이해되기를 원했다. 그는 "후대의 독자는 이 책에서 비밀스러운 사실들을 읽어 낼 것이다. 내가 마치 달나라에 가 있는 남자처럼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방인으로 잰재했음을 읽어 낼 것이다."라고 썼다.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당시는 이성의 철학이 지배적인 시대였고 쇼펜하우어는 완전히 그 반대에 해당하는 의지의 철학을 주창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쇼펜하우어가 고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P.19)

쇼펜하우어는 이성의 철학이 유행하던 시기에 이성의 철학에 흥미를 느기는 독자들을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기 대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대로 글을 쓰지 않았고 자신의 지적인 정직성이 요구하는 대로 연구하고 저작 활동을 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가 옳고 당시의 독자들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때 사람들은 이성의 철학에 매력을 느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으며, 이성의 철학에서 문제점을 깨닫고 의지의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또 이성의 철학보다 의지의 철학이 나중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서 의지의 철학이 이성의 철학을 극복했다거나 의지의 철학이 이성의 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이성의 철학은 이성의 철학대로 의지의 철학은 의지의 철학대로 세상을 보는 철학 체계 중 하나인 것이다.

(P.21)

도대체 인간은 왜 고통을 겪게 되는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욕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욕망이 충족되는 즉시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욕망에 시달리게 되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채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다는 한계가 있지만 인간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망을 갖지 않으면 고통에 시달리지도 않게 될가? 흔히들 로또에 당첨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를 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충족해야 할 욕망이 있을 때 인간은 삶에 대해 의욕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아쉬움에 시달리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묙망이 즉시 채워진다면 인간은 욕망에 시달리는 고통은 겪지 않겠지만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욕망을 느끼고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며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P.25)

불행은 행복보다 더 인간에게 생생하게 느껴진다. 기쁨은 늘 기대한 것에못 미치게 되고 괴로움은 늘 예상보다 큰 아픔을 준다. 권태는 끝없고 지속적이지만 행복은 순간에 그치게 된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욕망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곧 또 다른 욕망이 생기고 지속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거들먹거리지만 그 만물의 영장이라는 게 결국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최고라는 것을 의미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싶다. 만물의 영장이기에 생각해야 할 것도 걱정해야 할 것도 그로 인한 고통까지도 최대치를 배당받은 것은 아닐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괴로운 일인 것이다. 그러면 이미 태어난 우리는 도댗 어찌 해야 하는가? 그렇게 삶의 고통에 몸서리쳤던 쇼펜하우어도 결국은 오래도록 살았고 늘그막에는 명성도 얻었으며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던 생각으로 이 세상의 어려움을 헤쳐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대표적인 저작인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살펴보자.

(P.29)

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본다는 것인가? 쇼펜하우어의 대답은 '보게 되는 대로 본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게 되는 대로 보고서는 그것이 세상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앞 거리도 친구가 알고 있는 학교 앞과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학교 앞의 모습은 다르다. 신발에 관심이 있는 친구는 신발 가게를 중심으로, 옷에 관심이 있는 나는 옷 가게를 중심으로 학교 앞 거리를 떠올리게 된다. 옷에 관심이 없는 친구가 학교 앞을 떠올릴 때 그 학교 앞 거리에는 옷 가게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떠올리는 것'이 바로 표상이다.

'친구와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학교 앞이 다르다'는 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학교 앞 거리에 대한 친구의 표상과 나의 표상이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다.

​(P.32)

인간은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쇼펜하우어가 <의지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인식되지는 않기 때문에 인간은 의지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의 작용을 알아 차리기 힘들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의 작용이 인간의 고통과 연관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고통으로인해 지나치게 힘들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P.34)

오래도록 서양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무엇이든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고 인간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해 왔다. 쇼펜하우어가 활동하던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철학자는 헤겔이었으며 헤겔은 이성 철학의 최고봉이자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성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쇼펜하우어는 헤겔과는 완전히 방향을 달리해서 의지가 이 세상을 좌우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의지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안정적이지 않고 변화무쌍하며 이유 없는 행위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서는 나중에 이성으로 정당화하는 악동이다. 세계의 근원은 이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의지이기 때문에 이성은 생생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현실에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적다. 인간의 현실은 항상 이성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 사실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시대, 헤겔로 인해 이성의 철학이 가장 꽃피었던 그시대에 쇼펜하우어는 이해받지 못하는 씁쓸함을 견디고 고독을 감수하면서 과감하게도 의지의 철학을 내놓았다. 의지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 이성이라는 것은 두뇌 현상에 불과하며 의지에 기여하는 이차적인 것이다. 이성은 의지가 저지른 행위를 사후적으로 앞뒤를 맞춰 설명할 때 사용되는 부수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P.39)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가 한편으로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의 세계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성으로는 삶과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고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 된것이며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라는 말은 세계는 의지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성을 통해서는 의지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그동안 철학은 의지를 '이성에 종속된 것'으로 보아 왔던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선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보고 지성의 상위에 두는 점에서 다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의 몸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의지를 느끼게 되는 마당이다. 치아는 먹고자 하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객관화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객관적으로 드러난다, 구현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쇼펜하우어가 몸을 의지의 발현으로 간주하는 것은 전통 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점이다.

이성과 의지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선다.

(P.40)

인간의 의식의 조건상 주관과 객관이 구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표상으로서의 세계만을 인식하지만, 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의지라는 것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주요 내용이다. 의지의 부정을 통해 개별화의 원리에 얽매이지 않게 되면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없는 그런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P.43)

충분근거율에 관해서는 우선 '그럴 만해서 그런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근거나 이유가 없이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서이다'는 의미이다. 충분근거율의 정확한 뜻을 말하자면 '인간이 그렇게 파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 원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P.46)

쇼펜하우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이유 내지는 근거가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이유가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존재는 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관해 의문을 갖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왜 존재하는지, 존재하는 것의 특성은 왜 그런한지에 대해 항상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 사고의 근본적인 욕구라고 쇼펜하우어는 확신한다. 인간이 이렇게 근거를 찾아 올라가는 사유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충분근거율이라는 인식의 원리에 따라 인식한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가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서 내리는 결론에 따르면 인간은 사유 방식의 특성상 근거를 찾아서 인식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충분근거율'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충분근거율이라는 이름 할 수 있는 네 가지 인식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의 문제를 말하면서 왜 갑자기 '충분근거율'을 거론하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뿌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그는 고통이 생기는 것과 인간 사유 방식의 특성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다고 본다.

(P.48)

인간의 인식은 왜 주체와 객체가 구분된 상태에서 주체가 객체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주체는 왜, 어떻게 객체를 인식할 수 있는지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해 오기는 했지만 인간 인식의 한계상 명료히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식을 하려고 할 때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인식을 하려면 인식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고 인식되는 객체가 있어야 함은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신의 인식 구조를 알 수가 없으니 인식이라는 것이 원래 주체와 객체가 구분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인간의 인식 구조의 문제 즉, 인간 인식의 한계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인식을 할 때 왜 주체와 객체의 구도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알겠는가? 다시 말해 인간이 이렇게 생기게 된 이유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주체가 없이 객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증명 불가능한 관계가 정립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 증명 불가능한 관계'충분근거율'이라는 표현으로 포착한 셈이다. 주관이 인식을 하려면 이 근거율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49)

충분근거율모든 표상들을 지배하는 법칙인데 객관과 관련되는 원리가 아니라 주관과 관련되는 원리이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인간이 표상을 할 때 존재의 근거율, 인식의 근거율, 생성의 근거율, 행위의 근거율이라는 충분근거율에 따라 표상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표상을 할 때 표상의 방식에 작용하는 어떤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충분근거율'이라고 명명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의 다양한 법칙들을 '충분근거율'이라는 용어로 기술한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려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그 의식에 부합하는 대상이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서 우리가 그렇게 파악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파악하게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파악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파악하게 되고 대상은 그렇게 파악된다는 말이다.

(P.51)

(ㅇ)

철학에서는 시간공간직관의 형식이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이 있어야 무언이든 지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을 직관의 형식이라고 한 것이다. 직관은 직접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만 파악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형식 안에 있는 사물만을 존재한다고 느끼고 파악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근거율은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을 배제하고는 무엇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표상들은 공간적인 위치와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만 파악된다. 공간적인 앞뒤의 구분이 없고 시간적인 선후의 구분이 없다면 표상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 시간과 공간을 배제하면 그 무언가를 떠올리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시간은 연속이라는 관계를 표현하고 공간은 위치라는 관계를 표현한다.

쇼펜하우어는 시간과 공간이 '개체와(개별화)의 원리'임을 전제하고 말한다. 시간과 공간을 개체화의 원리로 보는 것은 철학에서는 통상 인정되는 내용이다. 왜 시간과 공간이 개체화의 원리인가? 단순화해서 예를 들어 보겠다. 너와 나의 존재가 다른 것은 너와 내가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만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이 구분되지도 시간이 구분되지도 않는다면 너와 나는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구분되지 않고서 이 존재자와 저 존재자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P.56)

(ㅇ)

1차적 표상을 오성의 작용으로 생긴 직관이라고 말한다. 직관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본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어떤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지게 되는 상'을 직관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책에 대한 직관, 책상에 대한 직관, 스탠드에 대한 직관 등 무수히 많은 직관을 가지게 된다. 이 1차적 표상인 직관이 있기 때문 우리는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웃는 얼굴에 대한 직관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이라는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개념의 형성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이성은 인식의 근거율인 논리 규칙을 통해서 개념들과 판단들을 결합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성은 오성을 통한 직관이 제공되지 않는 한 개념들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인식의 근거율인 이성의 논리적 규칙에 따라 인식을 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가 인식의 근거율로 설명하고자 하는 바이다.

(P.60)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더 관심을 갖는다. 지금까지 쇼펜하우어의 대답은 인간은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길을 가다 전봇대에 부딪쳤다고 하자. 이 경우 나는 전봇대를 '나' 라는 존재에 가해진 제한으로 경험한다. 전봇대는 나에게 타자이다. 전봇대와의 부딪침은 나에게 자아에 대한 경험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경험을 제공한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타자의 집합체가 바로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하지만 세계를 있는 그대 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전봇대와 부딪쳤을 때 전봇대에 대해 갖게 되는 표상과, 전봇대에 기대어 친구랑 놀 때 전봇대에 대해 갖게 되는 표상과, 전봇대의 고압선을 다루는 전기 기사를 볼 때 전봇대에 대해 갖게 되는 표상은 각기 다르다. 전봇대의 모양에 대한 표상은 같을지 모르나 그에 대해 느끼는 심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세 가지 표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표상표상을 가지는 주체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세계의 문제는 그러한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주체, 즉 인간에 대한 물음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래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와 표상의 차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는〈충분근거을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근거율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계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선험적인 인식의 제약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 말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인식 능력의 범위 안에서 만(예를 들어, 시간과 공간 내에서만) 세계를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P.63)

주관'인식을 행하는 바로 그것' 이다. 주관 즉, 주체는 충분근거율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파악할 수 없다. 주체인 '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형성하는 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세계가 표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주관이 먼저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객관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나 객관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주관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주관과 객관의 결합을 통해서 존재한다. 주관도 객관이 있기에 주관일 수 있는 것이고 객관은 주관이 있기에 객관일 수 있으며 표상은 주관과 객관이 있기에 정립될 수 있다. 주관의 존재 없이 사물 자체를 생각할 수는 없다.

객관은 주관에 대해서만, 즉 주관의 표상으로서만 한한다.

(P.68)

쇼펜하우어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는 표상이며 이 세계라는 표상의지가 가능하게 한다.' 는 것이다. 그래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간략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인데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가 드러난 세계이다.' 는 것이다.

이 세계는 표상이며 인식하는 인간이 표상의 주체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다. 쇼펜하우어의 설명에 따르면 육체세계의 다른 측면인 의지가 행동으로 드러나게 해 주는 매개체가 된다.

​(P.73)

세상에서 노는 것에 가장 시큰둥해하는 사람은 백수다. 그 사람에게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일과 여가가 구분이 안 되고 그리하여 놀이가 놀이로서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삶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을 열심히 해야 노는 것도 재미있어진다는 것,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인내를 발휘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도 어느새 시큰둥해져 버린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라도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경우에도 그 하고 싶은 일이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일로만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

이제 행복의 비밀이 밝혀졌다. 행복은 불행을 그 이면으로 하고 있다. 충분히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물이 맛있고 충분히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맛있다. 그러니 행복이 있으려면 필연코 불행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비밀이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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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장 폴 사르트르 / 방곤 / 문예출판사 / 352쪽

(201. 3. 2.)

무릇 물체들, 그것들이 사람을 '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정리하고, 그 틈에서 살고 있다. 그것들은 유용하다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참 을 수가 없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짐승들인 것처럼 그 물체들과 접촉을 갖는 게 나는 두렵다. 이제 생각이 난다. 지난날 내가 바닷 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이제 잘 생각이 난다. 그것은 시큼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

(P.27)

“무엇을 드시겠어요. 앙투안 씨?”

그때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 둘레에 여러 가지 색채가 천천히 도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나는 토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때부터 '구토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나를 붙들고 있다.

(P.42)

나는 미래를 '본다'-미래는 거기에, 길 위에 놓여 있어, 현재보다 약간 희미할락 말락 할 뿐이다. 미래가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까? 실현되어보았자 무엇이 더 보태질 것인가? 노파는 약간 절름거 리면서, 또박또박 걸으면서 멀어진다. 그 노파는 선다. 목도리에서 삐쭉 솟은 흰 머리칼을 잡아당긴다. 노파는 걷는다. 그 노파는 저기 에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에 있다...... 나는 내가 현재에 있는지 미 래에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노파의 동작을 보고 있는 것일 까? 그 노파의 동작을 세간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미래와 현 재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계속된다. 조금씩 실현 되고 있다. 노파는 쓸쓸한 거리를 전진한다. 커다란 남자 신발을 옮 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란 것이다. 순수한 시간이다. 그것은 서서히 인간 존재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다려지고, 그리고 그것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답답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래전부터 거 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파는 길모퉁이에 가까이 간다. 그 노파는 이미 검고 작은 헝겊 뭉치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것은 새 로운 일이다. 조금 전에는 노파가 거기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하지 만 그것은 퇴색하고 케케묵은 새로운 것이어서 절대로 사람을 놀라 게 할 수는 없다. 노파는 길모퉁이를 돌려고 한다. 돈다-영원의 시 간 속을.

나는 창문 곁을 떠나서, 휘청거리면서, 방안을 걷는다. 나는 거울 에 바싹 끌려간다. 나를 본다. 내가 지긋지긋하다. 여기에도 영원이 또 하나 있다. 마침내 나는 영상(影像) 앞을 벗어난다. 그러고는 침 대까지 와서 그 위에 쓰러진다. 나는 천장을 바라본다. 잠이 온다.

정적, 정적. 이제 내겐 시간의 흐름이나 시간이 지나가는 희미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천장에 영상들이 보인다. 처음에는 둥근 빛이 보이고 다음에는 십자가 형상이 보인다. 그것이 나비처럼 날개를 친 다. 그러고는 다른 영상이 이루어진다. 이번의 영상은 내 눈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커다란 동물이다. 앞다리와 안장 이 보인다. 나머지는 희미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마라케크에서 본, 돌에 매놓은 낙타이다. 그 낙타는 계속해서 여섯 번이나 앉았다가 일어서곤 했다. 장난꾸러기들이 소리를 지르 고 웃으면서 낙타에게 집적거리는 것이었다.

(P.64)

산다는 것이 그런 거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 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변화이다. 그 증거로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정말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기고 우리는 그 것을 그 반대 방향으로 얘기 한다.

(P.80)

어디에 나의 과거를 간직해둘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둘 수 없다. 과거를 정돈해놓기 위한 집을 한 채 가 져야만 한다. 나는 나의 육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는 아주 고독한 사람은 추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추억은 육체를 거쳐서 지나가버린다. 나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유로웠으니 말이다.

(P.126)

'나는 존재한다는, 괴롭도록 되씹는 소리, 바로 내가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나다. 육체는 한 번 태어나면 혼자서 살아 간다. 그러나 생각은 바로 '내가' 계속하고, 내가 전개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오, 긴 뱀이며 , 존재한다는 그 감정-나는 그 감정을 고요히 전개한다...... 생각하는 것을 단념할 수 있다면! 나는 노력해본다. 나는 성공한다. 내 머릿속이 연기로 충만 되었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게 또 시작한다.

“연기...... 생각하지 않을것, ...... 나는생각하기 싫다...... 나는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하기 싫다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럼 영원히 끝이 없지 않은가?

나의 생각, 그것은 '나다. 그래서 나는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생각 하는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기를 단념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그것은 무서운 일이다-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내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갈망하고 있는 저 무(無)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나, '나'다. 존재하는데 대한 증오, 심증,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방법이며, 존재 속에 나를 밀어넣는 방법인 것이다. 생각은 현기증처럼 내 뒤에서 생겨나고, 나는 그것이 내 머리 뒤에서 생기는 것을 느낀다. 만약 내가 양보하면 그것은 앞으로, 내 두 눈 사이로 오려고 한다- 다만 나는 언제나 양보한다. 생각이 커지고 커진다. 그리하여 거기 나를 충만케 하고 나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무한한 것이 있다.

(P.186)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도 반대로 나는 압도되고 있다. 다만 나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나는 알고 싶었던 것을 알고 있다. 1월부터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구토'는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내게서 떠나리라 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어떤 병도 아니고 지나기는 발작도 아니다. 나 자신인 것이다.

(P.236)

희극적...... 아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 중에 희극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떤 신파극 장면과 유사 하다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부동하는 유사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주체하지 못하는 거북한 존재의 무리였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마로니에를 '헤아리고' 그것들을 라 벨레다와의 관계에 '배치'히여 플라타너스의 높이와 비교하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그것들은 제각기 내가 그 속에 가두어버리려던 관계 속에서 빠져나가버리는 것이었고, 고립하여 넘쳐나오곤 했다. 그 관계를(인간 세계의 붕괴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유지하려고 내가 고집을 부리던 그 척도와 양과 방향의 그 관계를) 나는 필연성 없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 관계들은 사물에게는 이미 들어맞지 않는 것이었다. 약간 왼편 쪽으로 나의 정면에 서 있는 마로 니에, 그것은 '여분의 것'이었다. 라벨레다도 '여분의 것'......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두렵다-나는 그것에 뒷덜미를 잡혀서, 높은 파도처럼 들어올려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 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호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P.240)

'부조리'라는 말이 지금 나의 펜 아래에서 태어난다. 조금 전에, 고원에 있었을 때 나는 그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말을 찾지도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나는 말없이 사물을 '가지고'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부조리, 그것은 나의 머릿속에서 생겨 난 하나의 관념도 아니고, 어렴풋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발밑에서 죽은 기다란 뱀, 저 나무의 뱀이었다. 뱀이랄까, 손톱이랄까, 또는 매의 발톱이랄까, 아무 상관은 없다. 그리고 전혀 정확한 정의를내리지 않고, 나는 '존재'의 열쇠를, 저 '구토'의 열쇠를, 그리고 나 자신의 생활의 열쇠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내가 이어서 파악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이 근본적인 부조리로 귀착한다.

부조리 역시 말이다. 나는 말과 싸운다. 거기서는 나는 사물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 부조리의 절대적인 성격을 정착시키고 싶었다. 인간들의 채색된 조그만 세계에 있어서의 한 동작, 한 사건은 상대적으로만 부조리하다. 즉 그 동작, 또는 사건에 수반하는 상황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러하다. 이를테면 미친 사람의 연설은, 미친 사람이 있는 상황과의 관계에서 부조리한 것이지 그의 헛소리와의 관계에서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에 절대의 경험을 했다. 절대, 또는 부조리의 경험이었다. 그 뿌리, 그것이 부조리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란 아무것도 없었다.

(P.241)

한 권의 책. 물론, 처음에는 그것이 지리하고 피곤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도, 또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도 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그것이 남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그 책의 조그마한 박명(薄命)이 나의 과거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아마도, 나는 그 책을 통해서, 나의 생활을 아무 형오감 없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아마도 그 어느 날, 등을 오그리고 내가 탈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 이 음울한 시간을 분명히 회상하면서, 나는 아마 가슴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그날, 그 시간이다"라고 말할 때가 오리라. 그리고 나는-과거에서, 과거에 있어서만-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밤이 된다. 프랭타니아 호텔 2층의 두 창문에 막 불이 들어왔다. 신역(新驛) 공사장에서 , 축축한 재목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내일 부빌에는 비가올 것이다.​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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