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입문
로버트 L. 윅스 / 김효섭 / 서광사 / 268쪽
(2019. 8. 10.)
1814년부터 1818년까지, 쇼펜하우어는 드레스덴에서 거주했는데, 그는 이곳에셔 4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집필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가 26세였던 1814년 말엽에 이미 거의 모든 중심적 생각들을 형성하였으며, 이후 3년에 걸쳐 그의 통찰들을 발전시켰고 정교화 했다. 주도적인 질문들 중 하나는 플라톤의 형상이나 칸트의 불가지의 "물자체" 중 어떤 것이 그의 이론의 기반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중국에 후자 쪽으로 이끌렸으나, 그는 물자체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의지"(will)라 부르며 칸트와 대조를 이루었다.
세계가 궁극적으로 선하며 그것이 (심지어 전쟁 중에도) 저절로 점진적으로 좋아지고 있다는 낙관론을 무너뜨리고자,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일상적 세계가 근본적으로 악한 장면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은 희망없이 좌절을 불러일으키고,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기만적이며, 허무하고, 고통스럽다. 그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단어들 중 하나는 hupoulos인데, 이 고대 그리스어는 붕대를 걷어내서 고름과 썩은 살로 가득한 채 곪아가는 상처를 보여 주는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는 그가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표면 아래에서 본 것이다.
(P.21)
서문과 칸트주의 철학 비판의 개요
쇼펜하우어는 "단일한 사유"를 표현하는, (관념적으로 보았을 때)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서 그의 책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그것을 두 번 읽기를 권한다. 이렇게게 유기적으로 통합된 구성은 이전 철학들의 구성방식과 다른데, 그것들의 대부분은 확실하다고 가정되는 토대를 놓으면서 시작하고, 준기계적인 방식으로 그 근원적 기초로부터 그 이상의 철학적 내용들을 뽑아내거나 발전시키거나 쌓아올리면서 진행해 나간다.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며, 쇼펜하우어는 그의 전임자들에 비해 더욱 생동감 있는 철학을 제시하기를 희망한다.
칸트의 철학이 보여주는 객관(대상)-지향적인, 과학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칸트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칸트의 주장들에 의해 특히 매료되었다. 칸트가 보기에,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망므으로부터 독립한 실재가 아니고, 오히려 인간 정신의 해석적인 양상들이다. 우리가 지각할 때 우리는 항상 해석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지각에 영향을 미칠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성하는 일상적 경험의 세계는 사물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나타내지 않는다. 극서은 다만 실재가 인간의 시-공간적인 렌즈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쇼펜하우어는 일상적 삶이 꿈과 같은 허상이라 믿는다. 쇼펜하우어의 이와 같은 믿음은, 일상적 세계를 단순한 외양들의 세계라고 칭한 칸트로부터 유래한다.
(P.27)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문
우리의 직접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첫 번째 서문이 가장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서문은 그의 독자들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요구되는 준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우선적이고 진정어린 충고는 "이 책을 두 번 읽어라." 이다. 이유인 즉, 이 책은 "단일한 사유"로 이루어졌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은 시작을, 시작은 마지막을 전제로 한다. 쇼펜하우어가 그 자신의 저서에 대해 생각하기에, 어떤 주어진 부분도 다른 모든 부분들을 전제로 한다.
두 번째로, 1818년 판의 서문에서 쇼펜하우어는, 1813년 출판된 그의 박사학위 논문,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의 적당한 입문서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그는 만약 독자들이 그 논문의 내용을 소화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잘 이해될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세 번째로,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칸트의 주된 통찰들의 보다 정합적인 표현이며 발전이기 때문에, 그는 칸트의 비판 철학의 주된 논점들과 쇼펜하우어의 박사학위 논문을 이해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두 번 읽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덧붙이기를, 만약 상황이 이상적이라면, 그래서 더 나아가 플라톤 철학을 좀 알고 있다면, 독자들은 그의 메시지를 잡아낼 준비가 잘 된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일 베다와 우파니샤드까지 이미 읽은 상태라면, 가장 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겠다.
(P.40)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집필하던 시기에, 프러시아와 바바리아의 정치적 지배에도 불구하고, 수백에 달하는 왕자들의 국가들이 독일어권 세계를 혼란스런 직조물의 양상으로 분열시켰다. 당시 영향력 있던 칸트 철학은 이에 더해 외양과 실재, 마음과 몸, 감각경험과 개념화(개념적 사유), 과학과 도덕, 지식과 신앙, 결정론과 자유론 사이의 좁히기 어려운 간극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세계에 대한 보다 생명-지향적이고 통합된 관점에 의해서 이러한 분열들을 재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을 자극하였다.
이렇게 모인 요구들은 철학하기에 사용된 주요 개념들과 모델들에서의 변화를 만들어 냈고,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면서, 기계론적인 사유는 유기적 관계에 초점을 두는, 통합체 지향의 상상과 이론화에 의해 점차적으로 대체되었다. 앞서 언급한 헤겔의 철학 체계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체계는, 변증법적인 이론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견고한 정초를 추구하면 이전의 토대주의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씨앗으로부터 자라나는 식물이라는 주된 이미지를 그것의 주요한 영감이요 모델로서 도입함으로써, 그러한 이론적 확장에 유기적 통합의 측면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 초에는, "생명"의 개념이 철학 이론들에서 더욱 눈에 띄게 등장하게되며, "유기적 통일체"의 개념은 기계론적 사유에 대한 반동의 일차적인 표현들 중 하나로서 나타난다. 이 두 개념들, 즉 "생명'과 "유기적 통일체"는 다양한 해석을 거치면서, 19세기 철학의 경향을 상당 부분 확정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유기적인 구조, 그리고 그 책을 두 번 읽으라는 쇼펜하우어의 권유도 이러한 역사적인 분위기의 산물이다.
(P.44)
충족이유율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설명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마다, 몇 가지 조건들이 반드시 만족되어야 한다는 것을 관찰한다. 첫째, 주관 혹은 설명을 구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둘째, 그 사람이 설명하길 원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셋쩨, 만약 설명이 타당하다면, 그 설명은 자의적이거나 단지 잠정적인 것일 수 없고 필연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충죽이유율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고, 그것들에 의해서, 쇼펜하우어는 가장 궁극적인 설명의수준에서 그 원칙의 근간에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전제해야한다고 믿는다.
(1) 주-객관 구분(그것은 주관과 객관 양자가 항상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남을 함축한다.)
(2) 설명의 요소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왜냐하면 그런 연결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진정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설명을 구하는 주관이 없다면 설명될 인식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들이 있을 때, 이러한 인식 대상들은 "표상들"(representations)이거나 심상들이다. 역으라, 만약 대상 혹은 표상이 존재한다면, 그 표상이 등장하게 되는 주관이 존재해야 한다.
(P.49)
쇼펜하우어의 칸트 인식론 비판
쇼펜하우어는 "칸트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부록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첨가하는데, 그는 칸트로부터 비롯한 자신의 철학 이면에 있는 이론적인 모티브들에 친숙해질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이 부록을 권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관점에 전반적으로
공감적이면서도, 칸트의 입장 안에서 몇 가지 오류를 식별해 낸댜. 쇼펜하우어에 다르면, 이 오류들은, 수정을 거쳤을 때, 그 자신이 칸트를 대신해서 제공하는 형이상학을 함축한다. 칸트의 착오들은 주로, 우리의 감각경험을 초래한다고 가정되는 형이상학적 존재자, 즉 칸트 자신의 용어로는 "물자체'에 대한 칸트의 이행과 규정 방식에 관련된다. 칸트에 다르면, 우리가 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상상할 때처럼, 물자체는 절대적이며 정신과 독립한, 다시 말해 우리가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간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재이다. 칸트는 이 물자체는 "그 자체로서는"알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영구적으로, 우리는 기껏해야 이 실재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이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P.52)
쇼펜하우어는 §2에서, 주관은 세계의 지지자이며 나타나는 모든 것의 보편적인 조건이라 말하고, 주관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고 덧붙이는데, 이로써 그는 위와 같이 다양한 생각 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존재임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주관이 누구에도 알려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이 이상한 문구는 "안다"라는 단어를 쇼펜하우어가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즉, 그는 “안다" 라는 말로써 "지각 속에서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서 의식에 드러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 개념적으로 동결된 대상은 그러한 상상을 하는 능동적이고 넘쳐흐르는 의식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감정, 감각, 관념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며 우리들 자신을 주관으로서 인식한다. 우리가 이러한 느낌들을 “사물들”로 객관화해 버릴 때, 기만이 일어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주관과 객관은 그래서, 서로 보충적이지만, 이질적인 형이상학적 유형들이다. 그는 자주 “종류 면에서 완전히 다른” (toto genere different)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여 양자 간의 대조를 표현한다. 자기-인식은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의식 속에서 의식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객관적 대상도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주관에 대한 이미지는, 마치 손가락 끝이 다른 것들을 만질 수 있지만 그것 자체는 만질 수 없듯, 다른 것들은 볼 수 있지만 그것 자신을 보기 위해 그것 자신으로 향할 수 없는 눈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손가락 끝은 그것 자체를 만질 수는 없지만, 손가락 끝의 내부는 어떤 것을 만지지 않고서도 느껴질 수 있다. 자기-의식은 바로 후자와 같은 것이다.
(P.62)
쇼펜하우어는 지금, 직접적 지각이 제공하는 지식으로부터 그가 그 지각으로부터 '빌려온 빛”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주의를 돌린다. 이 빌려옴은 “반성"과 “추상화"의 과정들인데, 그 과정들로부터 우리는 직접적 지각으로부터 추상적 개념을 형성한다. 예컨대, 우리는 빨간 것들의 집합을 보고, 그 예들로부터, 즉 그것들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눈에 띄는 시각적인 특질을 고립시킴으로써 "빨강"이라는 일반적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모든 추상적 개념들은 지각 경험으로부터 추출되고, 어떤 것도 선험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가 “개념”이라는 단어(쇼펜하우어에 있어서 “추상적 개념"과 동의어)를 그의 저술에서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적인 개념” 이라는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우리의 반성 능력을 “이성”이라고 칭하며, 이성은 오직 하나의 기능이 있는데,그것은 추상개념들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성의 산물들은 직접적 지각의 무매개성 (immediacy)에 비해 덜 신뢰할만하고, (몇 세기에 걸쳐 우리와 함께 남아 있을수 있는)큰실수의 잠재적 원천이 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쇼펜하우어는 이성이 실천적 심사숙고와 정서적 통제의 능력과 함께 계획과 원칙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다른 동물들과 구별시켜 준다는 점을 확인한다. 이성은 결국 양면성을 띤다. 이성은 우리가 직접적인, 지각적인 지식으로부터 불확실한 발걸음을 떼도록 하는 반면. 이성의 추상적 지식의 생산은, 우리의 의식적인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킴으로서, 우리를 동물 이상의 존재로 고양시킨다
(P.76)
쇼펜하우어는 지각의 장 내의 모든 표상들 중에 그의 몸이 하나의 표상으로서 전혀 특별하거나 지각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그 (유아론적) 입장을 그럴듯하지 않은 것으로서 거부 한다. 그의 몸(의 표상)은 다른 표상들과 공간적으로 근접해 있고 이는 다른 것들이 또 다른 것들과 그러한 관계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그의 몸은 다른 표상들과 정확히 같은 하나의 표상이고, 그래서 모든 표상들이 내적인 실재를 지닌다는 생각에 어떤 예외가 있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없다. 만약 예외가 있다면, 그 지각의 장은 부조리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 지각의 장에서는, 동일하게 충분히 발달되어 있고 깨어 있는 상태의 표상들 중에서 어떤 것은 내적인 실재를 지니지 않고 어떤 것은 지니게 될 것일 데고 이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반성의 결과로, 쇼펜하우어는 그의 몸-표상이 내적인 실재를 갖는 것처럼, 그의 시각의 장 안에 있는 모든 표상들은 내적인 실재를 지닌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쇼펜하우어는 전체적인 표상들의 장 이면에 단일한 내적인 실재가 있고, 자신과 다른 모든 이의 의식은 이 단일한 실재의 표현이라는 입장에 접근하게 된다.
(P.102)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가 쇼펜하우어의 미학과 철학에 영감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관점은 쇼펜하우어의 그것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플라톤은 예술가들을 시 공간적인 세계 내 항목들의 모사자들인 동시에 우리를 더욱 무지 쪽으로 이끄는 사람들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일상적 세계의 항목들에 대한 예술적인 모사를 그림자의 그림자로 보며, 이는 그 항목들을 무시간적인 진리로부터 두 배 멀리 떨어진 형이상학적인 거리에 위치 시킨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예술작품이 일상생활의 형상들을 완전하며 이상적으로 만들고, 플라톤적인 이데아들을 일상의 사물들보다 더 직접적이고 명료하게 드러낸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과학 및 충족이유율에 반대하며,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우월한 지식의 형식이라 보는데, 이는 예술이 드러내는 대상들은 변덕스런 우리의 일상적 세계의 고정된 원형들로서 기능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P.143)
쇼펜하우어는 음악의 본질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함께. 제3부와 미학 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논의를 마무리한다. 음악은 이전의 그의 논의에 들어맞지 않는 예술장르로서, 3부에서 4부로 넘어갈 때, 중요한 전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음악은 플라톤적 이데아를 드러내지 않는 대신, 의지의 "모사"(a copy of Will)로서 의지 그 자체를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무기물질로부터 인간까지 포괄하는) 플라톤적 이데아들의 총기에 대한 전제적인 시각을 회상하고, 아울러 이 이데아들이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화라는것을 덧붙인다면, 음악의 고유성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관찰들의 일부를 이해하는것이 더 쉬을것이다. 의지가 그것 자신을 플라톤적 이데아들의 위계질서로 객관화한다면, 음악의 기본적인 구조는 그 객관화의 활동과 결과적인 위계질서를 상징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1) 음악은 낮은 음에서 중간 음 그리고 고음에 이르는 범위에 따라 구조화된다. (2)음악은 박자, 화성. 그리고 선율이라는 삼부(三部)(tripartite)의 차원들에 따라 구조화 된다. (3) 우리가 어떤 현 악기에서 한 음을 내면, 그 음은 낮은 음으로부터 높은 음까지의 일련의 배음(倍音)들(overtones)과 공명한다. 우리는 그래서,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화들, 즉 플라톤적 이데아들의 위계와 상징적으로 일치하는, 음악적 구조상의 일련의 상호 관련된 수준들을 지니는 것이다. 이런 유사성들과 음악이 지니는 인간의 감정 표현 능력 을 이유로, 쇼펜하우어는 이데아들의 위계질서로 자신을 객관화하는 의지의 “모사”로서 음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P.163)
우리의 몸은 의지의 객관화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본질인 “가지적인 성격”의 객관화, 즉 의지의 무시간적 활동의 하나이다. 이런 이유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긍정”과 “몸의 긍정”이라는 문구들을 호환하여 사용한다. 몸의 자연적인 목적은 건강과 그 종의 재생산이고, 이런 동기들로부터 성적인 충동은 인간의 몸의 긍정에 대한 핵심적인 표현이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기들은 항상 완전한 만족감을 줄 것처럼 약속하고 그것에 따라 우리를 몰아가지만, 그런 목적들이 달성되면 그 만족감이란 일시적일 뿐이고, 결국 새로운 욕망들이 등장해서 완전한 만족감을 약속하는 또 다른 허상을 향하도록 우리를 내몬다. 그래서 몸의 긍정의 차원에서 가장 깊은 동기면서 가장 깊은 허상의 창조자는 성적인 만족감과 함께한다. 모든 사람들은 성적으로 추동되고, 성적 욕구의 충족에 따르는 “영원한 행복"의 허황된 확신에 의해 계속 이끌리게 된다.
(P.183)
쇼펜하우어는 완전한 살려는의지의 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의식상의 변화에 대한 기술을 발전시키면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맺는다. 의지로 가득 채워진 채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살려는 의지의 완전한 부정과 연결된 그 사유 방식은 큰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 욕구의 그러한 관점에서는, 완전한 의지의 부정은 죽음과도 같은 허무를 약속하고, 그래서 그것은 부조리하게 보인다. 이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pessimistic) 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고. 이런 반응 안에서 염세주의의 정서가(情緖價)는 비난적이고, 평가절하거나, 거부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절대적인 무”와 “상대적인 무"를 구분함으로써 그의 관점을 방어한다. 그는 무가 존재 혹은 어떤 존재의 상태와의 대조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무는 생각조 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적는다. 이는 그가, 의지의 부정이 무(즉. 욕구의 관점에서는 죽음)로 이끄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무라는 것이 상대적인(relativistic)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종류의 인식, 다시 말해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를 지시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P.212)
톨스토이(1828-1910)는 1869년에 쇼펜하우어를 꽤 오랜 시간 읽었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러시아어로 번역되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역시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를 집필하는 동안(1873-1877)에도 쇼펜하우어를 읽었는데, 이 소설은 쇼펜하우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톨스토리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ch)(188)은, 심지어는 가족 중 한 명이 죽는 맥락 속에서 (쇼펜하우어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던 방식대로) 죽음을 소소한 것으로 보는 관점을 표현한다. 톨스토이의 더 개인적이며 자전적인 작품인 『고객』(A Confession)도, 6, 7, 8, 9, 10장 그리고12장에서 쇼펜하우어에 대해 이야기 한다.
1899년에, 톨스토이는『예술이란 무엇인가?』(what is Art?)리는 짧은 책을 발행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감정의 소통으로서의 예술 이론을 발전시킨다. 쇼펜하우어와와 톨스토이 양지에 따르면, 예술가는 모종의 실재를 파악하고, 그 실재를 예술작품 속에서 구현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정확히 타자에게 전달한다(전자에 의하면 이 모종의 실재는 플라톤적 이데아이고, 후자에 의하면 이는 어던 종류의 감정이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의 예술론은 쇼펜하우어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