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크리스토 백작 3

알렉상드르 뒤마 / 오증자 / 민음사 / 474쪽

(2019.12.20.)

마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 사나이는 거의 실례가 될 정도로 집의 모습이며 정원이며 그곳을 왔다갔다하는 하인들의 제복을 뚫어져라 바라다보고 있었다. 사나이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재기에 찬 눈이 아니라 교활한 눈이었다. 입술은 하도 얇아서, 입 밖으로 나와 있는 게 아니라 입 안으로 말려 들어간 것만 같았다. 게다가 넓게 툭 튀어 나은 광대뼈는 영락없이 교활한 성품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마는 움푹 들어갔고 상스러운 큰 귀를 훨씬 지나서 뒤통수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거창한 머리 모양이며 셔츠에 달려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라든가, 저고리 단추 구멍과 구멍 사이로 늘인 약장 때문에 속인들의 눈엔 신분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인상학자들이 본다면 누구든지 어딘지 불쾌하기 짝이 없어질 그런 얼굴이었다.

(P.86)

「알겠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뛰어난 사람이라고 떠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당신은 매사를, 인간에게서 시작해서 인간에게로 귀의한다는, 사회에 있어서 물질적이고 비속한 면만 보시는군요. 말하자면, 당신은 인간의 지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보다 좁고 보다 국한된 견지에서만 사물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설명을 좀 해주실까요?」빌포르는 점점 더 놀라서 말했다.「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분명히 모르겠는데요」

「제 얘기는 이런 겁니다. 당신은 각국 사회의 조직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계의 움직임만 보고 계신 것이지, 그 기계를 움직이는 귀한 직공은 보지 못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당신은 자신의 눈앞이나 주위에, 대신이나 왕이 서명한 사령장을 가진 지위 있는 사람들만 보고 계십니다. 그러한 높은 지위의 사람이나 대신이나 왕 위에 하느님이 그런 지위 대신 어떤 사명을 내려주신 사람들이 있어되 당신의 근시안으로는 그런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약하고 불완전한 기관밖 엔 갖지 못한 인간에게는 그것도 당연한 결과겠지요. 토비(장님이 된 후에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다시 광명을 찾았다는 유태인 -옮긴이)는 시력을 돌려주러 온 천사를 그냥 예사 청년인 줄로 알았지요.

아티라(5세기경의 유명한 정복자-옮긴이)를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전멸시킬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그 냥 예사 다른 정복자 중의 하나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입으로 하늘의 사명을 띠고 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그 사실을 몰랐더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토비는〈나는 하늘의 천사다〉하고, 아티라는〈나는 하느님이 만드신 망치〉라는 말을 해야만 했던 겁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신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까요」

「그럼」하고 점점 정신이 얼떨떨해진 빌포르는 지금 자기와 얘기하는 사람이 마치 하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거나 혹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물었다.「당신은 자신이, 지금 인용한 그 이상한 인간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물론이죠」하고 백작은 냉담하게 말했다.

「실례했습니다」빌포르는 아연해서 말을 이었다.「실은, 제가 이렇게 지식이라든가 지혜가 상식을 훨씬 넘어선 위대한 학자의 집에 오게 된 줄은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희처럼 현대 문명에 묻혀버린 불쌍한 인간들에게는, 당신처럼 거대한 재산을 가진 분이, 이건 소문입니다만, 세상의 상식으로 보아, 그렇게 부유한 분이 사회에 관한 고찰이라든가 철학적인 공상에 몰두해서 시간을 닝비한다는 것은, 확실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일은 이 세상의 부귀에서 밀려난 인간들이 그저 기분이나 가라앉히려고 하는 걸로만 알고 있었으니 까요」

「그래요?」 하고 백작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의 그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될 때까지는, 그러한 특수한 예를 본 일조차도 없으셨단 말입니까? 정밀하고 명확한 것을 필요로 하는 직업을 가지고 계시면서, 지금 눈 앞에 있는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를 대번에 알아볼 만한 안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셨던 가요? 사법관이란, 법률의 정확한 적용자라든가 복잡한 소송의 교원한 해석자이기 전에, 우선 인성을 잴 줄 아는 하나의 저울이나 또는 다소간에 늘 화합물이 생기는 것을 면치 못하는 개개인의 영혼을 다룰 줄 아는 시금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잠깐」하고 빌포르는 말했다.「놀랐는데요. 그런 얘기를 제게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그건 당신이 밤낮 상식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갇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듯한, 또는 예외적인 인물이 무수히 모인 고도의 사회로 뛰어오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P.133)

「그렇습니다. 제가 그러한 특별한 인간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지금의 나 같은 지위에서 그들을 본 일은 없었습니다. 왕들의 영토는 산이나 강으로, 또는 다양 한 관습으로 인해서, 혹은 언어의 변화에 의해 각각 그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제 왕국은 이 세계만큼이나 넓지요. 왜냐하면 저는 이탈리아 사람도 아니요, 프랑스 사람도 아니요, 인도 사람도 아니요, 스페인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의 세계인입니다. 어느 나라도 제가 태어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제가 어느 나라에서 죽게 될 지 아십니다. 저는 모든 나라의 풍습을 받아들이고, 모든 나라의 언어를 씁니다. 당신은 제가 완벽한 프랑스어를 말하고 있으니, 제가 프랑스 사람인 줄 아실 겁니다. 그런데 제가 데리고 있는 누비아인 알리는, 제가 아라비아 사람인 줄 알고 있거 든요. 제 집사인 베르투치오는 저를 로마 사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제 노예인 하이데는 저를 그리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시겠지요? 그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며, 그 어느 나라 정부의 보호도 요구하지 않고, 제 동포라는 인간은 하나도 갖지 않은 제게, 저 권력 있는 사람들이 갖지 않으면 안 될 거리낌이라든가, 또는 약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장애 같은 것들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겁니다 제겐 적이라곤 단지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저를 정복한다는 얘긴 아닙니다. 그 적이란 <거리>와 <시간>이죠. 그런데 제삼의 적이, 그놈이 가장 무서운데, 그것은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 될 인간의 숙명이 있스니다. 제가 걸어가는 도정에, 제가 지향하는 목표를 채 달성하기도 전에 제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죠. 그 외의 모든 것은 예견할 수 있었지요. 인간이 운명이라 부르는 것, 이를테면 파멸이라든가 변화라든가, 우연한 사건 같은 것들을 저는 전부 예측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것이 저한테도 일어난다 하더라도, 저를 거꾸러 뜨리진 못하지요. 제가 죽 지 않는 한은, 저는 늘 지금의 저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당신이 아직 왕한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얘기들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왜냐하면 왕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밖의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두려워하니까요. 이렇게 가소로운 사회 조직에서야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언제 내가 검사한테 걸려들게 될지도 므르지 않나?>하고 말입니다.

​(P.135)

「빨간 요람 속에 태어나서(왕자를 뜻함) 바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하고 엠마뉘엘이 말했다.

「산다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모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나운 바다에 떠도는 배에 목숨을 내맡겨보지 못한 사람은, 맑은 하늘의 진가를 모릅니다」

백작은 일어섰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내면 그 떨림 때문에 지금 자기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감정의 동요가 드러날까 봐, 아무 대답도 않고 방안을 뚜벅뚜벅 걸었다.

「저희들이 너무 열을 내서 얘기하는게 우습지요?」하고 막 시밀리앙은 백작을 눈으로 지켜보며 말했다.

「아닙니다」백작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한 손으로는 두근 거리는 가슴을 꾹 누르괴 또 한 손으로는 청년에게 수정으로 만든 구형(球型) 덮개를 가리켰다. 그 밑에는 비단 지갑 하나가 검은 비로드 쿠션에 소중하게 놓여 있었다.

「사실은, 저 지갑이 웬 걸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편지 같은 것하고, 훌륭한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는데요」 막시밀리양은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저희 집 가보 중에서 제일 귀중한 겁니다」

「과연 굉장히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로군요」 하고 백작은 대답했다.

「오빠는 그게 10만 프랑의 값이 나가는데도, 저 다이아몬드의 값에 대해선 얘기를 하지 않는답니다. 저 지갑 속에 있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그 천사의 유물이라고만 말씀드리고 싶은거지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그러나 부인, 그렇다고 여쭈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백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무례한 말씀을 드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만」

「무례하시다뇨? 원,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드릴 기회를 주셔서 기분이 좋습니다. 만약 저 지갑이 회상을 일으켜주는 그 훌륭한 일을 비밀로 한다면 그걸 저렇게 남의 눈에 뜨이게 놓아두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저 지갑을 세상에 광고를 해서 누군지 모를 그 친절한 분이 우리 앞에 나타나 주셨으면 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백작은 목멘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것은」하고 막시밀리양은 수정 케이스를 들어, 정중하게 비단 지갑에 키스하며 말했다.「이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고, 우리를 파멸에서 구해 내신 분의 손에 닿았던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가난과 비탄에 싸여 있던 비참한 우리들이 오늘날 사람들로부터 행복하다는 소리를 듣진 못했 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막시밀리앙은 그 지갑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백작에게 보이며 말했다.「이 편지는 바로 제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절망적인 결심을 하시던 날, 그 분이 써 보내신 편지입니다. 그리고 이 다이아몬드도 그 친절 한 분이 제 누이의 지참금으로 쓰라고 보내준 겁니다」

(P.161)

「인간의 사고의 나쁜 면은, 저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역설 속에 잘 요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오천 리 밖에 있는 중국 관리 같으면, 손가락 끝으 로도 죽여버릴 수 있다〉(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쯤은 인정에 구애될 것도 없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버릴 수 있다는 뜻-옮긴이)는 말입니다. 사람의 일생이 바로 그런 짓을 하느라 소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란 것도 그러한 것을 생각 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동족의 가슴에 별안간 칼을 꽂으러 간다든가, 또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방금 얘기한 것같이 비소를 먹이는 놈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은 머리가 돌았거나, 바보일 것 입니다. 그런 짓을 하려면, 피가 36도가 되고, 맥박은 90으로 뛰고, 정신이 정상 상태를 떠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언어학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언어를 완화시킨 동의어로 바꾸어서, 비열한 살인을 하는 대신에 단지 한 개의 장해물만 제거한다고 해봅시다. 말하자면 순수하게 부인의 앞길의 방해물을 제거한다고 해요.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의 충격을 받거나 폭력을 쓰지 않고, 또 상대방에게 어떤 괴로움도 연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광경을 보고 자기가 도살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지도 않게 될 경우라면 어떻겠습니까. 피도 흘리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별로 괴롭히지도 않고, 곧 일이 일어나리라는 두려움이나 위험도 없이, 대번에 일을 당한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사회의 안녕을 흐려놓지 말라>고 하는 인간 사회의 법의 제재에서 피할 수 있게 되는 셈이죠. 동양인들은 이렇게 해서 척척 일을 해내는 겁니다. 신중하고 냉정한사 람들이니까요. 중대한 계획일 경우에는 시간의 문제 같은 건 거의 염두에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양심이라는 게 남아 있지 않습니까」하고 부인은 목소리를 떨며 억지로 참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렇습니다」하고 백작은 말했다.「다행히 거기엔 양심이라는 게 있지요. 그게 없으면 퍽 불행합니다. 좀 거친 일을 하고 난 후에는 늘 그 양심이라는 것이 손을 뻗칩니다. 즉 양심이란 놈이 나타나서, 여러 가지 그를 듯한 구실을 찾아내지요. 그러나 그것을 그럴 듯하다고 정의내리는 것도 우리 자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론이 아무리 그럴 듯해서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는 하지만, 그저 그 정도일 뿐이고 목숨까지 보장하기에는 좀 불충분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 맥베스 부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무어라고 하든 간에, 자기 남편 대신에 아들에게 왕위를 주려고 한 그 부인도 양심이라는 게 있었으리라 봅니다. 아! 모성애란 확실히 하나의 커다란 미덕입니다. 실로 강력한 동기 입니다. 따라서 많은 경우, 단지 그것 때문만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덩컨을 죽인 후, 만약 맥베스 부인에게 양심이 없었다면, 그녀는 퍽 불행했었을 겁니다」빌포르 부인은 백작이 그 독특하고도 노골적인 아이러니로 이야기하는 이 무서운 교훈과 무시무시한 역설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P.207)

「당신은 자신의 결벽성 때문에 일을 너무 과장되게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하고 당글라르 부인이 말했다. 부인의 그 아름다운 눈에 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말씀하신 그 과거의 흔적이란 정열적인 젊은이들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정열의 밑바닥이라고 할까, 쾌락 후에는 으레 후회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불행한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의 샘인 복음서에는 우리 불쌍한 여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지은 여자나 간음한 여자에게 이런 고마운 비유를 일러주 는 거예요. 그래서 전 젊었을 때 맛본 쾌락을 회상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용서해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전 그 값에 마땅한 고통을 충분히 맛보았으니까요. 하물며 당신이야 남자인데, 뭘 그렇게 두려워하세요? 남자들은 여자들의 경우 와는 달라서 세상이 다 용서를 하고, 풍문이 훈장이 되기도 하잖아요?」

「부인,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소. 난 위선자는 아니오. 난 적어도 아무 이유 없이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 사람이오. 내 이마가 엄격해 보인다면, 그건 수많은 불행 때문에 구름이 낀 탓이오. 내 가슴이 돌처럼 굳어버린 것도 수 없이 받는 타격을 견뎌내기 위한 거요. 나도 젊었을 땐 지금 같지 않았소. 마르세유의 쿠르가에서 모두 모여 앉아 약혼 피로연을 하던 밤의 나는 결코 이렇진 않았소. 그러나 그뒤로는 나 자신이나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소. 여러 가지 어려운 사건들의 뒤를 쫓는 데 내 삶을 모두 소비해 버렸던 거요. 그리고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 상대방이 의식적으로 그런 것인지, 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휩쓸려 들었는지, 또 그것이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인지, 또는 우연에 의한 것인기를 알아볼 생각도 못했소. 오직 내 앞길에 방해가 될 만한 사람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데 내 생활을 소비했던 거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는 것은 대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싸우는 법이오. 그래서 지금까지 사람들이 저지른 나쁜 짓의 대부분은 필연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을 쓰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또 흥분했다든가 공포심에서였다든가, 또는 무의식중에 나쁜 짓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나중에 생각해 보면 살짝 피할 수도 있었을 일들이오. 다시 말하면, 당시에는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고, 간단한 방법이 생각나서, 도대체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 하고 후회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여자들은 후회로 괴로워하는 예가 거의 없지요. 여자들이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여자들의 불행이란 대체로 남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여자들의 과실이란 것도 실상은 타인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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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

한자경 / 서광사 / 368쪽

(2018.12.10.)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각각의 인간 안에서 주체로서 활동하는 정신이 사적이고 주관적인 개체의식에서 어떻게 점차 공적이고 객관적인 보편정신으로 깨어나게 되는지 그 과정을 밝혀 놓은 책이다. 정신은 우선 사물세계를 대상적으로 바라보는 의식으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그렇게 대상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자기의식이 된다. 그리고 다시 이 자기의식은 자연의 생명적 활동성 안에서 생명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여 이성이 되고, 사회적 공동체와 역사 안에서 인륜적 주체 내지 역사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면서 정신이 된다. 이처럼 정신의 자각과정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정신의 자기이행을 뜻하며, 이것은 곧 인간의 자기성장의 과정이고 인류의 자기발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P.5)

내가 놀라는 것은 칸트『순수이성비판』 편에서 헤겔『정신현상학』에 이르는 기간이 30년도 채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가 철학이 있고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로 새롭게 각성하고 부흥하는 것이 30년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 그것이 놀라운 것이다.

의식있는 몇몇의 지성을 통해 한 나라가 통꿰로 각성하고 부흥하는 것이 30년만으로도 가능한데. 우리의 정신은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30년 이상 철학을 하면서 살아온 우리들의 잘못이고 우리들의 책임이 아닐까? 30년, 60년 동안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정신을 부흥시키기는커녕 우리는 오히려 우리 역사 속에 살아 있던 정신까지도 망각하고 우리 스스로를 변방이라 자처하며 정신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칸트의『순수이성비판』을 공부하고 헤겔의『정신현상학』을 읽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나와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계에 부딪혀 좌절하되 다시 그 경계를 딛고 일어나는 정신 만이 깨어있는 정신이듯이, 칸트와 헤겔을 딛고 오늘의 나, 오늘의 우리를 발견하는 정신만이 살아 있는 정신이고, 그 정신을 통해서만 우리 전부가 함께 각성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P.7)

하나의 경계가 성립하면 그 경계 안의 규정이 곧 그 경계 바깥의 부정으로 바뀌며, 이로써 그 경계는 소멸하지만 그 소멸은 곧 그 다음 단계의 새로운 경계의 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사유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긍정과 부정을 거친 합은 또 다른 긍정으로서 그 다음의 부정으로 이어져 경계의 이동은 무한히 진행된다. 이처럼 정에서 반을 거쳐 합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규정된 특수로부터 그 규정 너머의 보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긍정판단에서 부정판단과 무한판단으로 나아가는 추론, 그중에서도 제한된 결론에서 그 제한 너머의 전제에로 나아가는 역삼단논법적 추론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추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결국 사물을 규정된 경계 너머에서, 무한과 영원의 시점에서. 개별을 포괄하는 전체의 관점에서 직관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경계에서 무경계로 나아가는 논리가 변증법적 논리이다.​

그런데 규정성의 인식(경계에 따른 유한의 인식)과 그 규정을 포괄하는 무규정적 부정성의 인식 (무경계적인 무한의 인식)은 같은 차원의 인식이 아니다. 하나는 일정한 전제와 주어진 지평 안에서 행해지는 인식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주어진 전제를 캐물음으로써 보다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는 인식이다. 하나는 현상세계에 대한 경험적 내지 과학적 인식이라면, 다른 하나는 현상세계의 경계와 그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이라고 할수 있다.

(P.18)

전통 형이상학이 이들 무제약자에 대한 인식으로서 합리적 심리학. 합리적 우주론 그리고 합리적 신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건립하여 왔다면. 칸트는 이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확립하기 이전에 과연 인간 이성이 그러한 무제약지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성적 비판이 우선해야 하는 것을 논한다. 진리를 탐구하는 구체적인 인식활동을 하기 이전에 인간이 과연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 이성이 과연 절대적 무제약자를 포착하는데 적합한 인식도구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먼저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의『순수이성비판 』은 바로 이러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성의 비판 작업이다. 그 중「분석론」은 이성의 인식능력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며.「변증론」은 그러한「분석론」의 결과에 입각해서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식대상에 대한 인식체계의 확립 이전에 인식능력 자체를 반성적으로 검토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비판철학을 반성철학이라고 한다.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인간과 세계와 절대자를 논하는 철학은 언제나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진지한 철학적 사유 안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더 이상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 칸트 이후 비판철학의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심화시킨 피히테의 철학이 나왔으며, 다시 그 정신을 자연과 존재 일반으로 확대시킨 셸링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반성철학과 그에 기반 둔 피히테의 철학 그리고 셸링의 동일철학을 종합적으로 절충한 철학이다.

(P.20)

​ 칸트는 자아와 세계 자체와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대상을 직접 탐구하기에 앞서 인간 이성이 과연 그런 형이상학적 무제약지를 인식 할 능력이 있는지를 검토한다. 인간 이성이 그런 절대자를 포착하는 데 적합한 인식도구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 이다. 또한 인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므로, 형이상학의 체계 확립 이전에 과연 어떤 인식능력이 그러한 형이상학적 인식이라는 목적에 적합한지를 알기 위해서도 인식능력 자체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인간 인식의 본성이나 인식의 한계 등이 분명해져야. 인간이 과연 절대자를 알 수 있는지 아닌지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P.21)

이러한 이성비판의 결과로 칸트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자아나 세계 자체 또는 신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이성은 무제약적 절대자를 인식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칸트에 따르면 인간 이성이 어떤 것을 인식할 때에는 그 이성 자체가 가지는 인식형식을 따라 인식하게 된다. 인식은 주어진 대상을 지각(직관)하는 감성능력과 지각된 대상에 대해 사유하는 오성능력의 결합으로 성립하는데, 감성적 직관형식이 시간과 공간이고 오성적 사유형식이 법주이다.

​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주관적 인식형식인 범주와 시간형식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형식을 따라 인식된 대상세계는 따라서 인간의 주관적 인식형식에 의해 제약된 대상. 즉 현상(Erscheinung)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인식형식에 의해 제약된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칸트의 이성비판의 결론은 인간은 인간 자신의 인식조건에 의해 제약된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인식 불가능하다고 간주되는 물자체는 전통 형이상학이 인식대상으로 삼았던 무제약적 절대자이다. 인간 이성의 이념에 상응하는 자아 자체나 세계 자체나 신은 제약된 현상 너머의 것으로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인식주체인 자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감성적 직관을 갖지 못하므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현상을 인식하는 주체로서 활동하는 한. 그런 활동 주체인 초월적 자아에 대해 '나는 나다' 자기의식을 갖는다. 그렇지만 이 자아는 감각에 주어지는 구체적 내용을 가지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단지 보편적 의식일반, 초월적 자아, 순수 자아일 뿐이다. 초월적 자아는 그 자체 경험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현상이 아니다.

(P.21)​

​​

차별성과 동일성. 현상지와 절대지를 모두 포팔하여 그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정신현상학」은 자연적 인식방식인 현상지에서 출발하여 점차 그 궁극지점인 절대지로 나아가는 길을 서술하려고 한다. 이는 곧 자연적 의식이 절대지의 차원으로 진행해 가는 길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의식에서 자기의식을 거치고 이성을 거쳐 정신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자기형성 및 자기도야의 길이기도 하다.

(P.32)

의식은 스스로 대상 자체(진리)와 대상의 의식(인식)을 구분해 놓고. 그 둘이 일치하는가를 비교해 보지만 결국 그 둘 간의 불일치를 발견하며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그 좌절을 자각하는 의식은 이미 앞서의 구분을 스스로 넘어선 의식이며. 이렇게 해서 의식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의식에 상응하여 다시 그 다음 단계의 대상이 주어지게 된다. 이처럼 새롭게 생성되는 의식이 곧 새로운 인식방식이 되고 다시 이에 상응해서 새로운 대상이 정립 된다

대타존재 ←─→ 즉자존재

(인식1) (대상1)

└───────┘

<의식1>

= 대타존재 ←─→ 즉자존재

(인식2) (대상2)

└───────┘

<의식2>

이상과 같이 의식은 스스로 경계를 긋고 다시 그 경계를 넘어서는 활동을 한다. 이것이 의식이 인식과 대상 사이에서 펼쳐 나가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새로 생성되는 의식에는 다시 새로운 대상이 생성되어 주어진다. 의식의 변경 의식의 자기전회 및 자기부정을 통해 새롭게 생성된 것으로서 새로운 대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롭게 생성되어 주어지는 대상의 발견을 우리는 '경험' (Erfahrung)이라고 칭한다.​

​ 의식의 변화에 따라 대상이 새롭게 생성되므로 각 단계의 의식은 곧 새로운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 성립한다. 이와 같이 의식의 이행과정을 추적해가는『정신현상학』은 고정된 하나의 대상을 미리 설정 해놓고 의식의 인식방식만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의식에 따라 새롭게 생성되는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경험을 변증법적 운동과정으로 밝혀 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정신현상학』의 각각의 과정은 '의식의 경험'의 과정들이며, 따라서『정신 현상학』은 “의식의 경험의 학문” (74/129)이리는 부제를 갖고 있다.

'새롭게 발생한 것이 [그 다음 단계의〕의식에 대해서는 단지 대상으로서 존재할 뿐이지만. 이것이 우리[반성하는 철학자〕에게는 동시에 운동과 생성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필연성에 따라 학문으로 나아가는 이 길 자체가 이미 학문이며. 그 내용에 따라 말하자면 의식의 경험의 학문이 된다.(74/129)'

​ 이처럼 의식이 계속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각 단계마다의 인식에서 인식의 실패와 좌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스스로 경계를 그어 인식과 대상을 구분하면. 경계 안의 인식은 경계 너머의 대상의 인식에 실패한다. 그러나 그러한 좌절을 자각한 의식은 이미 경계 안의 좌절한 의식이 아니라 경계 너머로 나아간 새로운 의식이다. 이와 같이 의식은 스스로 경계를 긋고 그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경계 안의 의식에서 다시 경계 너머의 의식으로 나아간다. 경계 너머로 나아간 의식은 다시 스스로 그 다음의 경계를 그음으로써 새로운 대상을 생성시키며 그 대상을 인식하고자 한다. 현상지에서 절대지로 나아가는『정신현상학』의 인식의 전개과정은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으로서. 의식이 더 이상 자체 내에 경계를 긋지 않는 무경계에 이르렀을 때 절대지가 완성되게 된다. 이는 곧 의식이 더 이상 자신 안에서 구별을 짓지 않는 것. 의식이 의식 자신에게 타자로 등장하는 가상을 떨쳐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의식은 스스로 지신의 본질을 경험함으로써 절대지 자체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75/130)

(P.37)

의식은 현상지의 출발점이 되는 감각적확신으로부터 그 다음 단계인 자각으로 그리고 다시 오성으로 나아간다.

​(P.40)

1. 감각적 확신

1) 현상세계에 대한 인식(현상지)에 있어 우리는 일단 세계 사물들을 이것 또는 저것이라는 개별적 사물로 인식한다고 여긴다. 감각적 확신의 방식으로 개별적 사물 자체 내지 즉자존재를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2) 그러나 실제 감각적 확신이 도달하는 인식을 검토해 보면. 감각적 확신에서 실제 얻게 되는 인식인식하고자 하는 대상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즉 진리인식에 실패한다. 왜냐하면 감각적 확신은 자신이 '이것' 으로써 구체적 개별자를 인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이것' 이라는 언어로 지칭되는 것은 모든 사물 또는 모든 주체에 적용될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보편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개별자는 단지 사념된 것, 그렇게 생각된 것일 뿐이고, 감각적 확신은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3) 대상을 '이것' 의 지칭물로서가 아니라 보편자로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감각적 확신의 의식이 아니라 지각의 의식이다. 이렇게 해서 의식은 보편자의 의식인 지각이 된다.

(P.42)

2. 지각

1) 우리는 현상세계 사물들을 감각적 확신이 생각하듯 '이것' 의 지청물인 개별자 자체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 갖고 있는 이런 저런 보편적 성질들을 통해서 안다.지각의 방식으로 안다.

2) 그러나 지각의 의식 안에도 상호 모순적인 두 계기가 섞이 있다 지각의 의식은 사물을 이런저런 상호 무관심적인 보편적 속성들의 합(역시/Auch)으로 지각하기도 하고 또 그린 속성들 탐지하는 개체적인 배타적 일자(Eins)로 지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각의 의식은 서로 모순되는 그 둘 중 하나를 실제 사물로 여기고 다른 하나를 의식의 기만 또는 착각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지각의 의식을 반성해 보면 일자와 역시는 대상 자체가 가지는 운동성이며, 따라서 대상은 일자에서 역시로 자기 전개하여 의식에 대한 대타성을 띠기도 하고, 다시 역시에서 일자로 자기복귀하는 대자성을 가지기도 한다.

3) 지각대상의 운동성은 곧 지각하는 의식의 운동성이다. 그러나 지각의 의식 자체는 지각의식의 운동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식(주)과 대상(객)으로 이원화한다. 이 이원화하는 운동성을 의식 자신의 운동성으로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지각이 아니라 오성이다. 이렇게 해서 의식은 운동성과 힘의 의식오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P.42)

3. 오성

1) 오성은 사물을 일자(대자성)와 속성(대타성) 간의 상호이행이라는 운동성으로 파악한다. 사물의 본래적인 내적 힘과 그 힘의 외화인 현상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성은 사물을 고정적인 내적 힘의 법칙과 그 힘의 법칙에 따라 외적으로 전개된 현상으로 이원화해서 파악한다. 초감각적인 오성적 법칙세계와 감각적인 현상세계로 이원화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오성법칙은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법칙이며, 이 때 설명은 사물에 대해 구분을 만들고 다시 그 구분을 지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그러한 설명의 논리와 구조는 바로 그렇게 설명하는 오성 자신의 논리와 구조인 것이다. 사물의 내면을 설명하는 물리적•수학적 법칙은 그런 방식으로 사물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오성 자신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실제 구분과 구분의 지양으로써 운동하는 것은 오성이지 현상이 아니다. 사물 자체의 본질로 간주된 사물의 법칙 또는 사물의 내면은 처음에는 운동하는 현상세계와 달리 고요한 정지의 세계 또는 고요한 법칙의 왕국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현상세계와의 관계가 전도되어, 구별화와 동일화로서 운동하는 변화의 세계, 오성(주관) 운동의 활동세계로 간주된다. 이렇게 해서 사물은 더 이상 내면과 외면, 정지와 운동이 이원화 되지 않고 그러한 대립을 자체 안에 지닌 '무한성' 또는 자기 구분과 자기관계를 유지하는 '생명' 으로 간주된다.

3) 이러한 생명을 의식대상으로 파악하는 의식은 더 이상 고요한 법칙을 자신의 의식대상으로 여기는 오성이 아니라, 그 법칙이 오성 자신의 법칙이며 현상세계의 운동 또한 오성 자신의 운동임을 자각한 의식이다. 다시 말해 의식대상이 바로 의식 자신임을 자각한 의식, 곧 자기의식이다. 이렇게 해서 감각, 지각, 사유의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던 대상의식은 의식 자신을 자각하는 자기 의식으로 나아간다.

(P.42)

1. 감각적 확신의 단계

​ 우리 인식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직접적 인식' 이라고 여겨지는 감각적 확신이다. 이 의식단계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에 대해 아무런 매개도 거치지 않은 직접적 인식을 가진다고 여긴다. 의식 주관이 자신과는 아무 연관 없이 존재하는 사물 자체를 아무 매개 없이 그 자체로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의 방식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정말로 감각적 확신의 의식이 생각하듯 그렇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 자체일까? 감각적 확신의 인식이 그것이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와 정말 일치하는 것일까? 직접적인 감각적 확신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정말로 대상 자체가 가장 풍부하고 참된 인식으로 주어지는 것일까?

​(P.45)

2. 감각적 확신의 실상: 추상성과 매개성

감각적 확신의 단계에서 우리는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가장 풍부하고 충실하게 안다고 여기지만, 실제 감각적 확신의 방식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감각적 확신은 실제로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빈곤한 진리로 드러난다.

감각적 확신이 가장 추상적이며 빈곤한 인식에 지나지 않는 것은 그것을 통해 도달되는 인식이 단지 “그것이 있다”라는 극히 추상적인 인식에 그칠 뿐. 그 대상의 성질이나 관계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상에 대해서는 단지 '이것' 이라고만 말할 수 있고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그 이상을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이런 단순성과 추상성은 대상에 대해서뿐 아니라 인식자 지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감각적 확신으로 주어지는 인식자 또한 “단순한 이것”으로서의 자아에 지나지 않는다.

​ 자아와 대상은 서로 구분되며 서로의 매개를 거친 인식이다. 즉 “자아는 타자인 사태를 통해 확실성을 갖게 되고, 사태는 마찬가지로 타자인 나를 통해 확실성을 갖게 된다.” (80/135) 그런데 이러한 자아와 대상의 구분은 반성자로서의 우리가 만드는 구분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 자체가 담고 있는 구분이다. 자아와 사물. 그 둘 중 어느 것도 직접적으로 감각적 확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매개로 하여서만 확신에 이를 수 있다. 감각적 대상은 감각적 확신자인 자아 없이 인식되지 못하며, 감각적 확신의 자아는 감각적 대상 없이 감각적 확신의 의식을 갖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P.46)

보편자

감각적 확신이 감각적 확신의 의식 자체가 생각하듯 풍부하고 직 접적인 인식이 아니라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빈곤한 인식이며 매개된 인식이라고 할 때, 그 인식의 본질 내지 진리는 무엇인가? 이 인식의 진리를 찾기 위해 헤겔은 인식의 주관과 객관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구분하여 논한다.

감각적 확신의 의식에서 자아와 대상은 서로를 매개하면서 감각적 확신의 양면이 되는데, 그 둘 중 어느 것에 감각적 확신의 본질과 진리가 놓여 있다고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선 자아보다는 대상을 염두에 두게 된다.

따라서 감각적 확신에서 본질과 진리는 대상 자체에 놓여 있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대상 안에서 우리는 감각적 확신의 진리로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감각적 확신은 스스로 인식한다고 생각하는 본질을 정말 인식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헤겔은 감각적 확신이 대상을 '이것' 으로 인식한다고 여길 때, 이 '이것' 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분석한다. '이것' 이라는 것은 대상의 어떤 성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질들과 상관없이 또는 그런 성질들과 구분되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물 자체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내 눈 앞에 있는 빨갛고 달고 향기로운 사과 하나를 내가 '이것' 이라고 칭한다면. 그 때 '이것' 은 사과의 색이나 향기나 맛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속성들을 가지되 속성과는 구분되는 그 사과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그럼 그 사과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특징이나 성질로 규정될 수 없고.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개별 사물을 지칭하고자 하는 '이것' 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 '지금'과 '여기'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여가가 감각적 확신이 생각하는 그런 구체성과 직접성을 과연 담고 있는가? 우리가 과연 '지금과 '여기' 로써 특정한 구체적 개별자를 지시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만 으로써 그 의미와 실재를 파악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항상 '지금이 아닌 것' 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며, 그것 아닌 것과의 관계 안에서 그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서만 '지금' 의 의미를 유지할 뿐이다. 즉 지금은 낮일 경우 밤이 아닌 낮으로서, 밤일 경우 낮이 아닌 밤으로서 존 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은 부정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만큼 매개된 것이다.

여기서 매개는 자신 아닌 것의 부정을 통한 매개를 뜻한다. 그것이 그것 아닌 것의 부정으로만 존재하고 그 부정으로만 의미가 알려 진다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그 자체만으로 인식되는 그런 특수한 개별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포괄하는 보다 너른 지평 안에서 다시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경계를 따라서만 그것의 존재가 확보되고 그 의미가 규정된디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존재를 헤겔은 '보편자' 라고 칭한다.​

​(P.50)

​​

<제2장 자기의식>

(ㅇ)

대상의식에서 인식되는 대상이 그렇게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 자신의 활동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대상의식은 이제 자기의식이 된다. 자기의식은 실천적 자기의식으로서의 욕구에서 주인과 노예의 의식을 거쳐 금욕주의와 회의주의 의식 그리고 다시 불행한 의식으로 나아간다.

(P.100)

1. 욕구의 의식

1) 단순한 동어반복적 동일성에 머무르는 이론적 자기의식과 달리 실천적 자기의식으로서의 욕구는 대상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하려는 의식이다. 자신에로 복귀하기 위해 대상을 부정하고 지양하면서 자신의 자립성을 확인하려는 의식이 바로 욕구이다.

2) 그러나 대상을 부정하는 과정 및 그 결과에서 욕구의 의식이 확인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자립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대상의존성이며 자신이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대상을 따라 생의 원환성으로 말려들고 있 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욕구는 진정한 자기의식의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3) 우주의 실패를 자각한 자기의식은 더 이상 욕구의 의식이 아니다. 참된 자기의식은 완전히 부정되고 지양될 수 있는 욕구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의 또 다른 자기 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2. 주인과 노예의 의식

l) 참된 자기의식에 이르기 위해 자기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다른 자기의식으로부터의 인정이다. 자신을 생의 원환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립적 존재로 인정받는 것이다. 자신의 자립성을 인정받기 위해 두 자기의식은 생사를 건 투쟁을 하며, 그 중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는자는 살아남을 경우 주인이 되고, 반대로 죽음을 겁내 패배하여도 목숨만은 유지하고자 하는 자는 살아남아 노예가 된다. 주인은 자신의 자립성을 지키며 자기의식으로 인정받고, 노예는 자립성을 상실하여 자신은 인정받지 못한 채 주인을 인정할 뿐이다.

2) 그러나 주인과 노예는 자립성에 있어 그 관계가 역전된다. 주인이 비자립적 노예로부터 받는 일방적인 인정 자체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주인의 사물에의 향락은 오직 노예의 노동에 의존한 것이기에 오히려 노예보다 더 의존적 존재가 될 뿐이다. 노예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노예가 되긴 하였지만, 바로 그 죽음의 공포가 스스로의 절대적 부정성, 즉 순수한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기의식을 유지하게 해 주며 삶의 무상성을 자각하게 해 준다. 나아가 노예가 행하는 저지된 욕구로서의 노동은 자연을 변형하는 활동으로서, 자신의 대자성을 즉자적 현실로 옮겨 놓는 의미를 갖는다.

3) 그러나 노예의식의 의미를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노예의 의식이 아니다. 실제 노예는 단지 타성화된 노동을 행할 뿐이어서 부정성의 자각이나 노동의 의미에 대한 자각이 없다. 죽음의 공포와 노동을 통해 절대적 부정성, 자립성과 자유를 자신의 본질로 자각한 의식은 주종의 대립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화해시킨 새로운 자기 의식이다.

​3-1. 금욕주의의 의식

1) 노예의식의 본질을 자각한 의식, 즉 사물의 형식과 사유일반의 형식이 동일하다는 것을 자각한 의식은 금욕주의적 의식이다. 이는 주인적 자기의식의 자유를 자신의 본질로 삼는 의식이다.

2) 그러나 금욕주의의 자유는 단지 사유 안에 머무르는 추상적 자유, 의식 안에서 선취된 자유일 뿐, 구체적으로 실현된 자유가 아니다. 자신의 사유 속 자유에만 머무르는 금욕주의의 의식은 권태에 빠질 만큼 현실성과 구체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3) 금욕주의의 추상적 자유의 한계를 자각하며. 그 자유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려는 의식은 더 이상 금욕주의의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회의주의의 의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3-2. 회의주의의 의식

1) 금욕주의적 자유의 추상성을 자각하면서 그 자유를 구체적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고자 노예적 노동을 실행하는 의식이 회의주의의 의식이다. 이는 세계와 의식 간의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 세계에 형식을 부여하면서 세계를 의식의 형식대로 무화시기는 노동의 작업을 수행한다.

2) 그러나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 세계를 형상화하는 노동은 그 자체 자기모순적이다. 회의주의의 노동은 타자를 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자유의 확실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결국 부정되어 사라질 것을 향한 노동이며, 이는 곧 스스로 부정하기 위해 부정될 생의 방식을 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생의 다양성과 분주함을 부정하고 벗어 나기 위해 거기 휘말려드는 셈이다. 이처럼 회의주의의 의식은 자유와 비자유, 본질과 비본질, 순수의식과 경험적 의식 사이를 오가는 자기모순적 의식이다.

3) 이 모순을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회의주의의 의식이 아니라 불행한 의식이다.

3-3. 불행한 의식

1) 개체적인 경험적 의식의 다양성과 보편적인 순수의식의 단일성 사이에서 그 양극단을 오가는 불행을 자신의 실상으로 자각한 의식이 불행한 의식이다. 불행한 의식은 ①보편자(본질)와 특수자(비본질)를 대립으로 느끼다가, ②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보편자와 특수자가 화해되는 것을 느끼지만, 그것이 역사적 우연성을 벗이나지 못함을 의식한다. ③ 다음 단계에서 불행한 의식은 보편성을 개체의 내면에서 느낌으로 느끼며 동경하기도 하고, 내적 본질로 느끼며 감사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는 개체가 체념이나 소외를 통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 안에서 보편을 실현하여 보편과 개체성의 화해를 시도한다.

2) 불행한 의식은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통해 보편 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자신의 본질을 불변자 자신의 보편의지로 자각하며, 결국 '나 즉 우리' 로 나아가고자 한다.

3) 그러나 실제로 불행한 의식이 극복되고 개별의지와 보편의지, 특수와 보편이 하나로 합일되기 위해서는 모든 실재성이 정신과 다름 아니라는 것이 자각되어야 한다. 자신이 모든 실재성임을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불행한 의식이 아니라 이성이다. 이렇게 해서 불행한 의식은 그 다음 단계인 이성으로 이행해 간다.

(P.100)

감각적 확신에서는 사념(思念)된 개별존재자가, 지각에서는 속성을 수반하는 구체적 사물이, 오성에서는 사물내면의 힘의 법칙성이 각각 의식의 대상 내지 의식의 타자로 등장한다. 의식은 그처럼 의식 자신과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 자체의 출현과 더불어 의식으로 성립하지만. 각 의식 단계에서 대상의 의식과 대상 자체의 구분, 인식과 대상의 불일치로 인해 의식은 다시 그 다음 단계의 의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P.105)

의식을 성립시키고 다시 그 의식을 지양하게 만드는 대상 자체와 대상의 의식의 구분은 실제로 의식 자체의 무한한 활동성, 생 또는 영혼의 운동의 표현이다. 즉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의 모든 분별 및 분별의 극복은 스스로 자신을 분화하고 구분하며 다시 그것을 넘어서는 영혼 내지 생의 활동성의 산물인 것이다. 의식의 마지막 단계인 오성적 대상의식에 이르면. 의식은 대상과 대상의식으로 스스로를 분화하는 활동적 생자체를 개념으로 포착하여 자신의 의식대상으로 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성을 자기 자신으로 자각하지 못한 채 법칙으로 대상화하여 인식할 뿐이다.

의식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생의 활동성이 바로 자기 자신의 활동성임을 자각한 의식은 더 이상 대상의식인 오성이 아니라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는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은 일체 대상의식의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는 의식 지신의 활동성을 자기 자진으로 자각 하는 의식이다. 대상이 자기 자신임을 자각함으로써. 자기의식에 있어서는 대상과 대상의 의식과의 구분이 지양된다.

대상과 의식의 구분이 지양됨으로써 지금까지 의식 바깥의 대상으로 간주되던 것들이 이제 모두 의식 자신의 계기들로 보존된다. 대상의식에서 의식 바깥의 실재로 간주되던 대상들이 자기의식의 단계에 오면 자기의식의 계기로서 자기의식 안에 포섭되는 것이다.

(P.105)

​​

<제3장 이성>

'나 즉 우리'는 나의 자기의식과 또 다른 자기의식이 결국은 하나 라는 것, 특수와 보편은 개체 안에서 화해된디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이성은 모든 실재성을 이성 자신이라고 확신하게 되며. 이로써 관념론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의 확신이 아직 진리로서 확인되지 않은 한, 그 관념론은 불완전한 관념론이다. 즉 이성이 모든 실재라고 주장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대상세계 자체를 이성 너머의 실재로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의식세계와 실재세계를 이원화하는 오류를 범하며 절대적 경험론이 되는 것이다. 불완전한 관념론의 문제를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여 완전한 관념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모든 실재성이라는 것이 진리로 확인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성은 관찰하는 이성으로 작용하다가 다시 행위하는 이성으로 그리고 다시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으로 나아간다.

​(P.162)

1. 관찰하는 이성

1) 이성은 즉자적 대상세계인 자연에서 자기 자신을 직접 발견함으로써 이성이 모든 실재성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1-1) 이성은 우선 개별 사물인 무기물의 관찰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기물의 관찰을 통한 징표나 법칙 안에서 이성이 발견하는 것은 이성 자신의 활동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활동성이 고정화되고 화석화된 결과물일 뿐이다.

1-2) 고정화되지 않은 대자적 유기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성은 '외면은 내면의 표현' 이라는 법칙에 따라 유기체를 관찰한다. 그러나 해부학적 외면과 유기체적 내면이 서로 대응하지 않기에 이 법칙도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2) 대상세계의 구체적 개별사물에서 이성 자신을 발견하기에 실패한 이성은 이제 자기의식의 일반 구조 내지 법식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자 한다.

​ 2-1) 이성은 우선 실재를 파악하는 인간의 논리법칙을 관찰하지만. 형식논리가 사유의 형식만을 다를 뿐 내용을 배제함으로써 이성 자신이 아니라 이성의 활동결과로서의 형식만 제시할 뿐임을 알게 된다. 이는 외면이 배제된 내면의 논리일 뿐이다.

2-2) 이성은 다시 외면을 포섭하기 위해 자연환경으로부터 자기의식의 심리법칙이 어떻게 형성 되는가를 밝히는 경험심리학적 법칙에서 이성 자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자기의식을 자연필연성으로 규정하는 불합리성을 보인다.

3) 이성은 자기의식의 일반 구조를 추상화해서 고찰하는 대신 의식 스스로 자기구조화한 인간 신체 안에서 이성 자신을 발견하고자 한다.

3-1) 그래서 이성은 보이지 않는 정신이 얼굴표정에 드러난다고 여겨 관상학에 몰두한다. 그러나 마음과 표정의 연결은 필연적이 아니고 거짓가능성도 남아 있으며, 또한 신체적 모습은 이성 활동의 흔적일 뿐 이성 자체가 아니다.

3-2) 이에 이성은 개인의 의도나 거짓가능성이 배제된 두개골의 모습에서 이성 자신을 관찰하는 골상학에 몰두한다. 그러나 활동성의 이성은 이미 굳어 버린 뼈와 동일 시될 수 없다. 이처럼 자연이나 인간의 의식구조나 외적 표현에서 이성 자체를 발견하기에 실패한 이성은 이제 자신을 관찰하는 이성으로가 아니라 행위하는 이성으로 자각하게 된다.

2. 행위하는 이성

1) 쾌락적 자기의식: 행위하는 활동 주체로서 이성은 자기 자신을 개별적인 쾌락을 지향하는 육구주체로 의식한다. 여기서 타자를 자기 쾌락의 수단으로 여기는 한, 쾌락적 자기의식은 스스로 욕망의 필연성에 굴복하며 좌절하게 된다. 이를 넘어서서 타자를 자기를 비추는 거울로 자각하면, 이성은 욕망에서 마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2) 심정적 자기의식: 이성은 개인적 쾌락이 아닌 보편적 쾌락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작용하여 보편적인 마음의 법칙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법칙이 마음의 법칙에 대립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은 갈등과 모순 속에서 광란과 자만의 망상에 빠지게 된다.

3) 도덕적 자기 의식: 개체적인 마음의 법칙과 보편적인 현실의 법칙과의 갈등을 덕성으로 종합해 가는 단계이다. 그런데 보편적 덕성을 받아들일 경우, 덕성은 다시 개체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세계행로와 모순으로 비춰지게 된다. 이를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체성의 운동이 곧 보편자의 실현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3.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의 이성

1) 개체성의 진리로서의 작품: 이제 이성은 세계를 개체성을 통해 보편성이 실현된 작품 내지 사태 자체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작품은 결국 그 이외의 것(다른 작품이나 다른 주제)들과 대립된다는 점에서 보편성 자체는 아니다. 개체성과 보편성의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륜적 실체성이 확보되어야 하며, 보편성의 사태 자체가 더 이상 작업결과의 술어로서가 아니라 주어 내지 주체로서 간주 될 수 있어야 한다.

2) 법칙 제정자로서의 이성: 주어화된 사태 자체가 인륜적 실체인 인륜적 법칙이다. 이성은 자신을 인륜적 법칙의 제정자로서 의식한다. 그렇지만 이성이 제시하는 도덕은 단지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계율일 뿐, 정신의 보편성에 입각한 인륜적 법칙이 아니

다.

3) 법칙 검증자로서의 이성: 법칙 제정에 실패한 이성은 자신을 법칙 검증자로서 확인하려 하지만, 그 검증기준인 보편화가능성은 단지 추상적이고 형식적일 뿐이며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어, 이성을 보편적 인륜성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결국 보편적 인륜성은 단순한 이성의 형식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신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로써 '나 즉 우리'의 진리를 향한 의식은 이성에서 정신으로 나아가게 된다.

(P.162)

<제4장 정신>

감각적 확신이나 지각이나 오성의 의식에 있어서는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의 계기만이 고수되었고, 그 현실의 대자적 존재성은 간과되었다. 반면 의식의 대상이 대자적인 의식 자신의 계기라는 것이 포착되면, 이 때 의식은 곧 자기의식이 된다. 이렇게 해서 의식과 자기의식, 즉자와 대자, 객체와 주체의 통일로서의 이성이 등장 하게 되는데, 이 때 이성은 모든 실재성이 곧 이성 자신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그 통일체를 대상적으로만 표상 할 뿐, 그 통일체를 직접 자기 자신으로 자각하지는 못한다.

이성이 단지 추상적 형식에서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모든 실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이성은 곧 정신이 된다. 정신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는 다음처럼 정리될 수 있다.

의식 -> 세계: 정신의 즉지존재성(대상)의 의식 = 의식

의식 <- 세계: 정신의 대지존재성(자신)의 의식 = 자기의식

의식 = 세계: 정신과 세계의 형식적 동일성의 의식 = 이성

의식 = 세계: 정신과 세계의 내용적 동일성의 의식 = 정신

정신은 개인과 보편의 직접적 통일성인 인륜성에서 다시 그들의 분열 이후 조회를 찾아 나가는 교양을 거쳐 그 통일을 내적으로 확립해 가는 도덕성의 단계로 나아간다

(P.232)

1 참다운 정신: 인륜성

정신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본질 내지 진리로 등장하면, 정신은 민중의 인륜적 생활 안에서 스스로를 실현한다.

1) 인륜적 세계에서는 정신이 그 스스로의 진리에 이른다. 이러한 인륜적 공동체가 고대 폴리스적 국가이며, 여기서 지배적인 법은 국가의 법이고 인간의 법이다. 이에 대립해서 자연의 법이고 신의 법인 가정의 법이 등장하게 된다. 인간의 법을 수호하는 자가 남성이고, 신의 법을 수호하는 자가 여성이다.

2) 이상 두 법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그 중 어느 하나를 따르는 것은 죄가 되며, 결국은 그 둘이 함께 몰락하는 운명이 전개된다.

3) 그리스에서 이미 소피스트들은 개인과 사회의 분리를 자각하였고, 소크라테스 또한 자연(physis)과 관습(ethos)의 분리, 개인과 사회의 분리를 알고 있었다. 헬레니즘과 로마사회를 거쳐 그들 간의 직접적 통일성이 붕괴되고 고대의 인륜적 실체성은 잊혀지며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법이 지배하게 된다.

2. 자기소외된 정신: 교양

1) 인륜적 실체성이 사라지고 나면, 개체가 외적 보편의 질서에 맞춰 가는 교양과 문화가 등장하게 되고 다시 이에 대립하는 신앙의 세계가 생겨나서 정신은 이원적으로 양분된다. 교양과 신앙의 이원성은 곧 차안과 피안의 이원성을 의미한다.

2) 교양과 신앙, 차안과 피안 사이의 갈등과 대립 위에서 이들을 이성적 통찰에 입각하여 종합하고자 하는 계몽사상이 전개된다. 3) 계몽주의와 더불어 자각된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 의식은 그 자유의 실현으로서 혁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절대적 자유가 함축하는 절대적 부정성은 곧 죽음의 공포이기도 하다.

3.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정신: 도덕성

계몽으로 인한 혼란과 혁명을 거쳐 정신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여 자신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려는 도덕성으로 나아간다.

1) 도덕적 의무와 자연적 충동 간의 갈등은 도덕적 세계관 안에서 최고선과 영혼불멸과 신을 요청하게 한다.

2) 그러나 그 요청 안에 담긴 모순이 도덕적 의식에서 사유의 뒤바뀜을 일으킨다.

3) 요청적 의식의 뒤바뀜을 자각한 의식은 이제 자기 내면에서의 도덕성을 양심으로 깨닫게 된다. 이 양심이 처음에는 선을 고수하는 비평하는 의식으로 작용 하지만, 다시금 일체의 악과 죄를 포용하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깨어나게 된다.

인륜성: 인륜세계 : 개인과 보편의 조화

↙ ↘​

​ 교양 : 교양 ↔ 신앙 : 분열과 소외

계몽 : 자유와 혁명

↘ ↙

도덕성: 도덕 / 양심 : 내면의 신성화

(P.232)

<제5장 종교>

종교는 현실 가운데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절대자. 신의 형상의 추구이다.” 정신의 자기의지 생성과정, 즉 정신이 정신임을 자각해 가는 과정이 종교의 변증법을 이룬다. 정신이 어느 것 안에서 절대자 내지 신을 발견하는가가 단계적으로 달라지면서 정신의 자기 자신에의 점진적인 계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P.335)​

1. 자연종교

정신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한다. 여기서 신은 추상적 즉 자태이다. 정신은 실체로서, 존재의 형식으로 스스로에게 현현한다.

1) 빛의 종교: 자연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태양을 절대자로 숭배하는 단계이다.

2) 동식물의 종교: 살아 있는 생명적 힘을 절대적 근원으로 신격화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물적 생명성을 넘어서는 정신의 자기 자각성이 결여되어 있다.

3) 공작인의 종교: 거대하고 신성한 작품을 산출해 내는 공작인의 의식에도 종교성이 보이지만, 이 또한 자기반성을 결여한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작업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2. 예술종교

정신은 자기 자신을 지양된 자연성 내지 자기의 형태에서 인식한다. 정신이 예술작품을 통해 자신을 대자적 형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1) 추상적 예술작품: 신들의 형상의 조각이나 신들에 대한 찬송이나 찬가 등의 순수서정시도 종교성을 반영한다.

2) 생동적 예술작품: 조각이나 찬가에서의 추상성이 지양되고 구체화된 생동적인 제사나 제의가 종교적 예술이다.

3) 정신적 예술작품: 제의에 남아 있는 유한과 무한의 분리를 극복하고 그 둘을 통합하는 예술작품인 서사시와 비극 또는 희극은 정신적 예술종교에 속한다.

3. 계시종교

자연종교에서의 즉자성이나 예술종교에서의 대자성을 통합하여 정신은 자기 자신을 즉자대자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정신이 스스로에게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현현되는 단계가 계시종교의 단계이다. 여기에서는 신의 육화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해 신과 인간, 무한과 유한의 진정한 통일이 성취된다.

자연종교 : 정신(신)이 즉자적 존재 형식으로 현시됨(의식의 단계)

예술종교 : 정신이 대자적 형식으로 현시됨(자기의식의 단계)

계시종교 : 정신이 ㅈ그자대자적 형식으로 현시됨(이성의 단계)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는 정신이 정신 자신을 아직 표상의 형식으로 떠올린다. 따라서 종교는 아직 정신의 자기지인 절대지가 아니고, 다만 그러한 절대지인 자기지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신에 대한 직관이지 아직 개념적 파악은 아니다. 신 내지 절대자에 대한 개념적 파악은 절대지로서의 철학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P.338)

​​

보편적 정신인 절대정신은 정신적 실체이며 절대자로서 절대적 자기동일성을 지닌 비시간적 존재이다. 그러나 전체『정신현상학』의 과정이 보여 주듯 정신이 자기 자신을 정신으로 알기까지, 즉 실체가 주체가 되기까지 정신은 자기 자신을 외화하고 그 외화된 것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대상을 지양하여 자기복귀하는 기나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정신의 자기외화의 활동이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전개 되는 것이다.

정신이 시간 형식으로 전개된 것이 인류의 역사를 형성하고. 정신이 공간의 형식으로 전개된 것이 자연이다.

이렇게 해서 절대정신은 기나긴 시간과정을 거쳐 역사를 형성하고 또 자연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기를 전개하고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긴 정신의 자기 전개와 자기부귀의 과정은 결국 정신이 자기 자신을 정신으로 알아 가기까지의 과정. 즉 절대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며. 이 절대지에 이르는 것이 곧 역사의 완성이며 철학의 완성이다.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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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크리스토 백작 2

알렉상드르 뒤마 / 오증자 / 민음사 / 453쪽

(2018.12.5.)

「여기」신부는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의미심장한 법률상의 자명한 이치가 있어. 그건 아까 내가 한 말하고 꼭 들어맞는 것인데, 날 때부터 아주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닌 한 인간의 본성은 원래 죄를 싫어한다는 것일세. 하지만 문명은 우리 인간에게 욕망을 주고, 죄악을 주고, 후천적 욕심을 주며, 그 결과 종종 우리의 선량한 본능을 짓누르과 우리를 악의 길로 이끌어가는 거야. 그래서 이런 격언이 나은 거지 〈범인을 찾으려거든 우선 그 범죄로 이득을 볼 사람을 찾으라〉는 말이 그거야. 자네가 없으면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지?

(P.294)

「저것 좀 보십시오」백작은 두 청년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저걸 좀 보세요. 저 인간의 모습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 저 사나이는 운명을 체념하고 단두대를 향해 걸어가서 비겁한 놈처럼 그대로 아무런 저항도 항변도 못하고 죽어갈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에게 다소나마 힘을 불어넣어 주 었는지 아십니까? 무엇이 그 사나이에게 위안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무엇이 그 사나이에게 체념하고 형벌을 받을 수 있게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그 고통을 함께 당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자기와 함께 자기처럼 죽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앞서 죽을 테니까 말입니다. 양 두 마리를 도살장으로 끌고 가보십시오. 소 두 마리를 끌고 가보십시오. 그래 가지고는 그 두 마 리 중 한 놈에게 같이 온 한 마리는 죽이지 않게 되었다고 알려줘 보십시오. 그러면 양은 좋아서 매에 하고 올 것입니다 소도 너무나 기뻐서 음매하고 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신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었다는 인간, 신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으뜸의 법으로 정해 주신 그 인간, 그리고 신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주신 그 인간은 친구가 살아나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외치는 소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저주올시다. 인간에게 영광이 있으라! 자연이 창조해 낸 걸작, 창조물 중의 왕인 인간이여, 영광이 있으라!」 이렇게 말하고 백작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이 가슴이 섬뜩해지는 웃음 속에는, 이렇게 웃게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경험했는지 능히 짐작게 하는 것이 있었다.

​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격투는 계속되어 보기에도 끔찍스러울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사나이가 안드레아를 단두대 위로 끌어올렸다. 구경꾼들은 모두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2만여 명의 목소리가 일제히「죽여라! 죽여라,」하고 소리쳤다.

프란츠는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나 백작은 그의 팔을 잡아 다시 창문 앞에 앉혔다.

「왜 그러십니까?」백작이 프란츠에게 물었다.「불쌍해져서 그러세요? 좋습니다. 생각해 보십쇼. 만일 미친 개가 으르렁거 리는 소리를 들으면 당신은 총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그 불쌍한 짐승을 용서없이 죽이실 겁니다. 그러나 개 입장에서 본다면, 결국 자기도 다른 개한테 물렸기 때문에 그 개한테 당한 일을 그대로 보복하는 것밖엔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한 인간에게 동정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 인간이란, 아무 한데도 물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은인을 죽인 사람인데. 게다가 지금은 또 손이 묶여서 더는 사람을 죽일 수가 없기 때문에, 이번엔 기어이 자기와 같이 감방에 있던 불쌍한 친구가 죽는 꼴을 보겠다는 겁니다. 자, 안 됩니다. 안돼, 저 걸 좀 보세요」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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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크리스토 백작 1

알렉상드르 뒤마 / 오증자 / 민음사 / 430쪽

​(2019.11.29.)

「용서해 주겠네.. 빌포르 군. 실은, 보나파르트 당 사람들은 우리 같은 신념도 없거니와 또 우리와 같은 감격도 헌신도 없다고 했다네」

「아, 그러셨군요, 부인. 하지만 그 사라들은 그런 모든 것을 대신할 만한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요. 열광적이라는 점 말입니다. 나폴레옹은 서양의 마호메트죠. 신분이 낮지만 야심이 대단한 사람들에게는, 나폴레옹은 입법자나 군주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전형, 다시 말하면 평화의 전형입니다.」

「평화?」 후작 부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나폴레옹이 평화의 전형이라? 그럼, 로베스피에르는 뭔가? 마치 자네는 로베스피에르의 자리를 뺏어다가 그 코르시카 녀석(나폴레옹)에게 주기라도 할 듯이 뵈는구려. 왕위를 빼앗은 녀석, 이렇게 말하는 걸로 그 인간에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말일세」

「아닙니다. 부인」 빌포르가 말했다. 「저는 사람들을 각기 자기 발판 위에 올려놓아 본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이15세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라갔고, 나폴레옹은 방동 광장에서 자기 기념비 위에 올라간 겁니다. 한쪽이 평등을 낮추어놓았는」가 하편, 한쪽에선 평등을 높여놓은 셈이지요. 한쪽에서 왕을 단두대에까지 끌고 간 데 반해서, 또 한쪽에서는 평민을 왕과 똑같은 위치로 끌어올린 겁니다. 그건 말하자면」빌포르는 웃으면서 덧붙였다.「둘 다 욕된 혁명가들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또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흔히〈테르미도르 반동〉이라 불리는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날-옮긴이)과 1814년 4월 4일(나폴레옹이 퇴위하고 은퇴를 승낙한 날- 옮긴 이)이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좋지 않은 날이며, 왕당(王黨)과 질서의 친구들에겐 축복할 수 없는 날임에 틀림없단 말씀입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이젠 영원히 다시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그런데도 그를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을 설명해 주는 겁니다. 부인, 모든 점에서 나폴레옹의 절반밖에 안 되는 크롬웰도 자기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P.98)

그녀의 그 상냥한 눈길과 애원하는 듯한 태도가 거북스러워서, 그는 메르세데스를 밀치고, 마치 자기에게 닥쳐 온 그 고통을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려는 듯이 문을 광 닫아버렸다.

그러나 고통이란 그렇게 해서 몰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베르길리우스가 말하는 치명상과 마찬가지뢰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자기 몸에 달고 다니게 마련이다. 빌포르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응접실에 들어서자, 이번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는 흐느낌과 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의 병든 가슴속에서는 치명적인 상처의 첫 싹이 돋아났다. 그가 자기의 야심 때문에 회생시킨 청년, 죄 지은 자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죄를 뒤집어씌운 그 죄 없는 청년이, 지금 창백한 얼굴로 위협하는 듯이 역시 창백한 그의 약혼자의 손을 잡고 지금, 빌포르의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 청년의 뒤로는 양심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의 운명적인 비극에 나오는, 미친 듯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그의 마음속의 병자를 펄펄 뛰게 하는 그런 것은 아 니었다. 그것은 둔하면서도 괴로운 울림으로 때때로 가슴을 두드려 지난날의 행위를 생각나게 하며, 그 회상으로 마음을 멍들게 하고 살을 째는 듯한 아픔을 점점 더 심하게 하여, 결국은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듯한 그러한 괴로움이었다.

이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다소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이미, 그는 여러 번 재판관 대 피고 사이의 격투라는 기분만으로 많은 피고들에게 사형을 구형해 왔다. 그리고 그가 그 무서운 웅변으로 법관들이나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죄수들을 처형했건만, 그 피고들은 그의 얼굴에 아무런 그늘 하나 남기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 피고들은 사실상 죄가 있었기 때문이고, 아니면 적으나마 빌포르에게는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전혀 경우가 달랐다. 그는 이제부터 행복 해지려는 한 죄 없는 사람에게 종신 금고형을 내려, 그의 자유를 끝장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복까지도 박탈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재판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이러한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은 둔한 울림이, 여태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 울림이, 가슴속에서 울려나와, 무엇인가 막연한 불안으로 가슴이 꽉차 왔다. 이와 같이 상처를 입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심한 고통이 닥쳐오면, 상처가 다시 아물기도 전에 입을 벌리고, 피가 맺힌 상처 위에 손가락만 대도 손이 떨리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빌포르가 입은 상처란 절대로 아물 수 없는 상처였다. 설사 아문다 하더라되 그것은 먼저보다도 더 피를 홀리고 더 고통스럽게 다시 벌어져야만 할 상처였다.

(P.156)

왕은 지극히 철학적인 사람이어서 정치 세계에는 살인 같은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치 세계에선. 너도 나만큼 알고 있겠지만,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문제가 되는 거야. 감정이 아니라 이해 관계야. 정치 세계에선 사람은 죽이지 않아. 다만 장해물만을 제거하지. 그뿐이야.

(P.195)

그러나 오늘날의 왕 들은, 가능한 일에만 줄을 긋고 그 경계선 안에서만 매사를 유지할 생각으로 대담한 의지 따위는 이미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기가 내리는 명령을 듣는 귀와 자기의 행동을 살펴보는 눈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신성(神性)에 의한 우월함도 느끼고 있지 않다. 왕관을 쓴 인간, 이것이 전부일 뿐이다. 옛날에 그들은 스스로를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믿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위엄 있는 천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비판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왕들이 인간들의 손이 쉽사리 미치는 곳에까지 밀려 내려온 것이다. 전제 정부는 감옥이나 고문의 결과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일을 꺼려왔다. 그래서 심문의 희생자로서, 뼈가 부러지고 상처도 피투성이가 되어 감옥을 나오는 이는 그 예가 거의 없었다. 광기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적인 고문 끝에 감옥 안의 진흙 구령 속에서 생겨난 광기라는 이 상처도 거의 언제나 처음 발생했던 장소에 그대로 묻혀버리고 마는 것 이었다. 설혹 밖으로 나오게 된다 하더라도 어던가 컴컴한 병원 속에 묻혀버려 의사들조차 지쳐 있는 간수의 손에서 넘겨진 그 이상한 잔해 속에서 그 본래의 인간이나 생각은 알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P.235)

그는 자기가 이렇게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은 신의 복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들의 증오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는 누군지 모를 그러한 인간들에게 불타오르는 상상 속에 떠오르는 모든 형벌을 가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아무리 무서운 형벌이라 할지라도 그런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고통 뒤에는 죽음이 온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는 안식은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안식과 비슷한 무감각한 상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에게 죽음을 준다는 것은, 평안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잔인하게 벌을 주려면 죽음 이외의 다른 수단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에 이르는 동안 그는 저 침울하고 움직일 줄 모르는 자살이라는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불행의 내리막길에서 이러한 암담한 생각에 발을 멈추는 사람은 진실로 불행한 사람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저 죽음의 바다인 것이다. 맑은 물결이 마치 창공과도 같이 활짝 펼쳐져 있으나, 그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은 점점 발이 끈끈한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어, 결국은 그리로 빨려 들어가다가, 마지막엔 아예 삼켜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붙들리고 나면 신의 구원이 없는 한 만사는 끝장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죽음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P.244)

「여기」 신부는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의미심장한 법률상의 자명한 이치가 있어. 그건 아까 내가 한 말하고 꼭 들어맞는 것인데, 날 때부터 아주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닌 한 인간의 본성은 원래 죄를 싫어한다는 것일세. 하지만 문명은 우리 인간에게 욕망을 주고, 죄악을 주고, 후천적 욕심을 주며, 그 결과 종종 우리의 선량한 본능을 짓누르고, 우리를 악의 길로 이끌어가는 거야. 그래서 이런 격언이 나은 거지. <범인을 찾으려거든 우선 그 범죄로 이득을 볼 사람을 찾으라>는말이 그거야. 자네가 없으면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지?」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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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취임 연설문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서정혁 / 책세상 / 164쪽

(2018. 11. 16.)

통상적으로 '교수취임 연설' 또는 '교수 취임사' 라고 하면 대부분 형식적인 문구로 채워지기 쉽지만, 독일에서는 어떤 학자가 교수에 취임하면서 연설을 할 때에 연설문을 통해 자신이 속한 시대 상횡에 대한 나름의 전망과 입장 등을 자신의 학적 연구와 관련시켜 압축적이면서 심도 있게 피력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점에서 헤겔이 행한 두 편이 점에서 헤겔이 행한 두 편의 교수취임 연설 문도 예외는 아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은 철학사 강의의 첫 시간에 행해졌기 때문에, 헤겔은 이 글에서 현재 철학의 처한 입장을 우선 개진하면서, '철학의 역사'인 철학사를 '위대한 정신의 보고(寶庫)' 로 보며 단순한 우연적 사건들의 열거가 아니라 '정신의 필연적인 전개 과정' 으로 꿰뚫어 보고 있다. 철학사를 포함하히는 헤겔의 역사관을 논할 때 '역사의 종말'이라는 화두를 떠올리기가 쉬운데, 이 연설에서도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히는 세계 정신의 현현으로서 역시를 바라보고 있는 헤겔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

〈베를린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은 헤겔 철학의 체계적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엔치클로페디》 강의 초두에 한 연설문이다.《엔치클로페디》는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이 연설문은 아직 소개된 적이 없다.《엔치클로페디》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 학이라는 헤겔의 3단계 철학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저서이기 때문에, 헤겔은 이 연설문에서《엔치클로페디》의 전반적인 서술 내용과 철학 체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이 연설문은 분량은 비교적 짧지만 헤겔의 전체 사상을 개괄 하는 데는 무엇보다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이 두 글은 제각기 '철학사' 와《엔치클로페디》와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쓰였기 때문에 헤겔 철학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즉〈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으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통시적인 역사적 흐름의 관점에서 헤겔의 사상을 조망할 수 있고,〈베를린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으로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이라는 철학 체계의 공시적인 구조적 관점에서 헤겔 철학을 조망해볼 수 있다.

(P.7)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취임 연설문>

우선 일반적으로 철학사를 고찰하는 목적과 필연성, 관점이 있어야 하며, 철학 자체와의 관계가 고려되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철학이 역사를 지닌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철학사의 필연성과 쓸모에 대해 우리는 여러 다른 사림들의 견해를 주목하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둘째, 형식의 측면이 있습니다. 역사하는 것은 우연한 사견(私見)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역사는 작은 나룻배나 정기 항로 선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는 최초의 시작에서부터 성숙한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필연적인 연관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다양한 단계들이 있을 수 있고, 이 단계들마다 전체적인 세계 직관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세세한 일들은 그렇게 중요치 않습니다.

셋째, 이로부터 철학 자체에 대한 관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P.17)

<베를린 대학 교수취임 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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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현상적이며 시간적이고 우연적인 것만을 인식하고 공허한 것만을 인식하는 태도. 이러한 자만심이 바로 철학에서 넓게 확산되었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확산되고 있으며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철학이 등장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러한 상황이 이성적인 인식을 부인하고, 이러한 월권을 행하면서 확산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철학이라는 이 학문에게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고 사람들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전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으며 좀더 옹골찬 감정과 새로운 실제적 정신과 모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좀더 옹골찬 정신이 지닌 이 서광을 환영하고 간청하면서, 철학은 내용을 지녀야 하며 이 내용을 제가 여러분 면전에서 개진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을 때 제가 유일하게 중시한 것은 바로 이 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청년의 정신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청년은 아직까지 궁핍한 제한된 목적의 조직에 얽매이지도 않으면서. 사심 없이 학문적인 일에 전념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년은 자만이라는 부정적인 정신에도 아직 얽매이지 않고, 단지 비판만 하려는 악착 같은 노력이 지닌 몰내용성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건강한 가슴은 진리를 열망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이 머무르면서 철학이 세운 것은 바로 진리의 왕국입니다.

우리는 철학 연구를 통해 이 진리의 왕국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삶에서 진실하며 위대하고 신적인 것, 바로 그것은 이념을 통해 존립합니다. 철학의 목표는 이 이념을 진실한 형태와 보편성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이성을 필연성에 의해서만 완성시켜야 하는 제한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의 왕국은 자유의 왕국입니다. 인간적인 삶이 아울러 간직하고 있으며 가치 있고 중요한 모든 것은 정신적인 본성 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의 왕국은 오직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만, 그리고 이념의 파악을 통해서만 실존합니다..

(P.26)​

철학적인 삼라만상의 모습은 오직 사유된 것뿐이고, 이것은 스스로에게서 사상을 자유롭게 그리고 자립적으로 산출해냅니다. 철학은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므로, 철학의 내용은 피안(彼岸)에 있지 않으며, 신이나 세계나 인간의 사명에 대한 감각이나 내외적 느낌에 드러나는 바와 상이하지도 않으며, 오성이 파악하고 규정한 바와도 상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참인가 하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오직 사유히는 이성에게만 드러납니다. 존재하는 것은 즉자적으로 이성적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나 의식에게도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사유의 활동과 운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성적인 것은 인간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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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철학, 역사와 체계사이>

​​

철학과 역사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는 말인지를 생각 해보아야 한다. 헤겔도《철학사 강의》에서 이것을 우선적으로 의문시하고 있다.

철학사를 대하면서 우선 떠오른 생각은. 이 대상 자체〔철학사 자체〕가 어떤 내적 모순을 안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철학은 불변적이고 영원하며 또한 즉자대자적인 것의 인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절대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철학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는 존재했다가도 또 다른 시대에는 사라져버리면서 다른 사상에 의해 대체되곤 한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하다는 기조 위에서 본다면 결코 진리란 한시적인 영역에 속할 수는 없으니. 결국 이런 점에서 진리는 역사와 함께할 수 없다

​ 역사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사건의 연속이고, 이에 비해 철학은 시공적 한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다. 철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철학적 사상들도 사건이나 사실들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단순히 지나가버린 사상적 편린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철학의 역사가 아주 다양한 사상적 편린의 연속일 뿐이라면, 철학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진리' 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의 역사를 철학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진리를 향한 객관적 학문이자 진리의 필연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며, 동시에 개념적 인식을 위한 학문”인 철학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P.69)​

​​

철학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전의 철학자들이 말한 바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언명들이 지닌 근원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언명에 담겨 있는 역사적으로 선행한 문제들을 비판적이면서 도 생산적으로 함께 더욱더 생각해보는 사람들만이 이 근원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동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헤겔은 '전통' 을 중시한다. 과거로서의 역시는 어찌 보면 우리의 현실과 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인 바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우리가 역사적으로 존재한디는 사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초역사적인 불변적 진리' 가 현재 우리의 모습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학문이나 철학의 현재 또한 전통에 힘입은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전통' 은 '유한하며 과거지사가 되어 버린 것들을 성스러운 사슬로 휘감아서 이전의 세계가 이루어 냈던 것을 현재의 우리에게 보존시켜주고 또 전승되도록 하는 힘' 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충실하게 보존되어 후대에게 원래 그대로 넘겨지는 '부동의 조각품' 이 아니라 '거센 물 줄기' 와 같은 것으로서, 전통의 내용을 형성하는 보편적 정신 이 이 물줄기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헤겔은 전통 속에 생동하는 이 '보편적 정신' 이 철학사에서 다루어야 할 중심적인 것이라고 한다.

또한 헤겔에게 있어서 철학사는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어온 과정을 다양한 사상의 형식들의 발전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철학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철학 체계들의 상이성은 철학 자체에 결코 해로운 것이 아니라 꼭 필요 한 것이다. 그리고 상이하게 등장하는 여러 철학적 입장들에 그대로 머물지 않고, 발전적으로 그것과 대결을 벌이면서 진행되어나기는 것, 이것이 곧 철학사인 것이다. 상이한 철학적 입장들은 다양하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는 단 하나의 이념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이 점을 헤겔은 이해를 돕기 위해 종종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비유하기도 한다.

철학적 이념의 발전적 전개는 어떤 타자로의 변화나 이행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의 몰입이며, 또한 자기 내면으로의 심화이다. 철학의 형성은 이 이념의 발전 자체를 통하여 가다듬어지거니와. 마치 생동하는 개체 속에서 하나의 생명. 한 줄기 맥박이 모든 부분 마디마디에 고동치듯이 하나의 이념이 체계 전체와. 또한 그 모든 부분에 깃들어 있다. 그 속에 생명력을 지닌 모든 부분과 이 부분의 체계화는 곧 하나의 이념에서 발단된 것이므로. 그 밖의 어떤 특수한 부분도 모두가 다만 이념의 활력에서 비쳐지는 반영이며 모사일 뿐이다.

​ 헤겔에 따르면 엄밀한 의미에서 시간 속에서 발생한 개별 사건으로서의 철학 체계나 사상 간의 발전적이며 필연적인 연관 관계에 주목할 때, 비로소 철학사의 의미가 개념 파악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모든 사상적 편린을 집합적으로 한데 묶어놓은 정보 전달의 자료가 아니라. 그것들 간의 필연적 연관성을 통해서 철학의 전체적 이념과 개별 철학 사상들 간의 자리매김이 개념적으로 명확해질 때 그것을 철학사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P.73)

​​​

헤겔은《엔치클로페디》초판(1817)의 '서문'에서 '내용과 일치하며 유일하게 진실하다고 인정될 수 있는 방법에 의해 철학을 새롭게 개조하는 것' 을 자신의 '엔치클로페디적 서술' 이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재판(1827) 서문에서는 비록《엔치클로페디》전체가 논리학은 아니지만,《엔치클로페디》에서도 사태의 본성상 '논리적 연관을 '기초로 삼을 수밖에 없음을 밝히면서, '학문적 인식의 기초는 '내적으로 옹골찬 알맹이' 이며 '내재적인 이념' 이자 이 이념이 '정신 속에서 요동치는 생명성' 이라고 한다. 헤겔은《엔치클로페디》의 서문에서 '철학'과 '철학사'를 비교함으로써 '학문의 이념' 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헤겔은 철학사를 “철학의 대상인 절대자에 관한 사상을 발견해온 역사" 라고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사의 전개는 외적인 역사의 형태로 표상되지만, 외적인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절대자로서 '단 하나의 생동하는 정신' 이다. 그러므로 철학사는 사실상 유일한 절대자가 발전 단계들을 달리하여 나타난 모습 일 뿐이며, 이러한 사정은 '역사적인 외면성' 만 벗겨낸다면 철학 그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절대자인 이념에 대한 학문' , 즉 철학은 '체계' 로서만 성립 가능하며, '학적 이념' 의 전개 과정이 전체 철학 체계를 이루는 토대가 된 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각 부분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전체이며, 스스로를 자기 자신 속에서 완결 짓는 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보자면 철학적 이념은 특수한 규정이나 계기로 나타나 있다. 개별적인 원은 그것이 그 자체로 총체성이기 때문에 개별자로서의 자신의 계기가 처한 제한을 분쇄하고 더 넓은 영역을 정초한다. 따라서 전체는 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원으로 서술되며. 원 각각은 하나의 필연적인 계기가 됨으로써. 이 원이 지닌 고유한 계기의 체계가 전체적인 이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체적인 이념은 각각의 개별적인 계기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상하게 된다.

학문의 체계를 추동하는 것이 이념이라면, 이념에 의해 전개된 '학적 체계의 요소 전체' 도 사실상 '학문의 이념' 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학적 체계의 구체적인 형태인 '철학적 엔치클로페디' 는 지식의 단순한 집적에 불과한 개별적 학문의 집합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박식이 학문은 아니다." 절대적 이념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을 포괄하는 '단 하나의 학문' 인 철학, 즉 '학문의 전체' 만이 '이념의 서술' 이기 때문에, 철학의 구분도 '단 하나의 학문의 이념' 으로부터 개념 파악되어야 한다.

(P.89)

두 연설문을 통해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헤겔의 강조점은 '깨어 있음' 이라는 단어이다. 철학사가 철학사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 자신이 과거의 것을 '맑은 정신' 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철학이 체계로서 가능한 원동력도 유한자인 인간이 자신의 자연성을 부단히 지양하여 무한의 지평으로 고양되려는 의지가 있을 때에만 발현되는 것이다.

역사와 체계의 중심에는 '철학하는 인간', 다시 말해 '사유하며 의지하는 인간'이 서 있다. 역시를 이끌어가는 것도 인간이며 체계를 건립하는 것도 인간이다. 신도 아니고 절대자 도 아닌 인간이 역사를 짊어지고 체계를 축조한다. 이러한 역학에 걸맞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깨어 있음의 태도이다. '깨어 있음'은 보다 보편화된 헤겔적 용어로 '이성' 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P.112)

지금 헤겔이 맞이했던 시대적 전환기가 우리 시대에 다시 한번 찾아오는 듯하다. 어느 누구도 '나' 를 '참된 나'로 인정 해주길 꺼리는 시대, 나 자신마저도 '참된 나' 찾기를 포기한 시대. 한 시대를 마감하며 또 다른 한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이 전환점에서, 철학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며, 지금 여기 사는 우리가 서 있을 곳은 어디인가? 저물어가는 하루가 끝이 아니고 내일의 여명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라면, 현재의 반성이 미래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기 되돌아봄의 순간에 나는 나와 끊임없이 마주하지만. 한시라도 자기 반성적 물음에 소홀할 때. 나는 나를 상실하고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다.

깨어 있자! 새날을 맞기 위해 깨어 있자! 이렇게 외치는 헤겔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결국 헤겔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은, '나'는 헤겔 철학이 아니라 '나 자신' 속에서만, '자기' 속에서만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이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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