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장 폴 사르트르 / 정명환 / 민음사 / 308쪽
(2019. 1. 18.)
아버지의 죽음은 내 생애의 큰 사건이었다. 그것은 어머니를 사슬로 묶고 내게는 자유를 주었다. 세상에 훌륭한 아버지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일반 법칙이다. 남자들이 나쁜 탓이 아니라 부자 간의 관계란 원래 고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뭐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이를 소유하겠다니 그런 당치 않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만일 나의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내 위에 벌령 누워서 나를 짓누르고 말았으리라.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었다. 안키세스를 업은 아이네아스들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 강을 건넌다. 일생 동안 자식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을 미워하면서. 젊어서 죽어 미처 내 아버지 노 릇을 할 기회가 없었던 한 사나이, 지금 같으면 내 자식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될 그 사나이를 나는 내 뒤에 멀리 버려 놓았다. 그것이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초자아(超自我)가 없다는 어떤 유명한 정신 분석가의 판단에 나는 기꺼이 동의하겠다.
사람은 그냥 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알맞게 죽어야 한다. 만일 아버지가 더 늦게 세상을 떠났더라면 나는 죄의식을 느꼈으리라. 철이 든 고아(孤兒)는 부모의 죽음을 제 잘못으로 돌려 스스로를 탓하는 법이다. 자기가 보기 싫어서 부모가 일찌감치 천국의 아파트로 물러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척 기뻤다. 남들이 나의 처지가 불쌍하다면서 나를 존중하고 떠받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실을 나의 한 가지 이득으로 여겼다. 아버지는 고맙게도 자신의 잘못으로 죽었다. 할머니는 그가 자신의 의무를 기피했다고 되뇌었고, 슈바이체르 집안의 장수를 자랑으로 삼는 할아버지는 나이 서른에 죽어 버리다니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아무래도 그런 죽음을 납득할 수가 없어, 그 사위가 이 세상에 산 일이 있다는 사실마저 의심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로 말하자면, 내게는 아예 잊어버릴 구실조차 없었다. 장바티스트는 나와 인사를 나누는 기쁨마저 베풀지 않고 살그머니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P.21)
어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나는 교양이라는 물 속에 함빡 젖어 들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성스러운 것을 새로 섭취했
다. 하기야 가끔은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때도 있기는 했다. 그저 넙적 엎드리고 책장을 넘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친구들의 작품이 회전 기도기(回轉祈禱器)' 구실을 해 주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진짜로 공포와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때로는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다름 아닌 세계라는 이름의 미친 고래 등에 실려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일도 있었다. 그 결과는 상상에 맡기기로 하자. 여하튼 내 눈은 낱말들과 씨름을 했다. 그 말들을 실험해 보고 그 뜻을 결정해야만 했으니까. 그리하여 교양의 연극이 마침내는 나를 교화하게 되었다.
(P.80)
나의 진실, 나의 성격 그리고 나의 이름도 어른들의 손아귀에 쥐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웠다. 나는 어린애였지만 또한 어른들이 그들의 회한으로 빚어 놓은 괴물이었다. 내 곁에 없을 때도 그들은 햇빛 속에 뒤섞인 그들의 시선을 남겨 놓았다. 내가 모범적인 손자로서의 성격을 잃지 않게 해주며 내게 장난감과 세계를 줄곧 베풀어 주는 그 시선을 담뿍 받아 가면서 나는 달리기도 하고 뛰어놀기도 했다. 내 정신이라는 예쁜 어항 속에서는 갖가지 생각들이 뱅글뱅글 돌았고, 누구나 그 움직임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어느 한 모퉁이에도 그늘진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말도 없고 형체도 없고 밀도도 없이, 그 천진한 투명성 속에 녹아 들어 있는 투명한 확신 하나가 만사를 잡쳐 놓았다. 그것은 내가 사기꾼이라는 확신이었다. 자기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의식 없이 어떻게 연극을 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밝고 맑은 겉모양들의 정체가 저절로 폭로되었다. 그것은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느끼기를 멈출 수 없는 존재의 결핍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내 능력을 보장해 주기를 바랐는데, 그럼으로써 영락없이 속임수로 빠져 든 것이었다. 남의 환심을 사야만 했던 나는 아양을 떨었지만 그런 아양은 당장에 빛이 바래 버렸다. 나는 아무 데서나 거짓된 순진성을 내보이고 빈둥빈둥 거드름을 피우면서 새로운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생겼다 싶으면 니는 황급히 어떤 태도를 꾸며 보았으나 그런 짓을 하면서 다시 마주친 것은 피하고 싶었던 허망함뿐이었다.
남들이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언어로 변모해서 그 모든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수백 만의 시선을 위해서 나 자신을 장래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나는 가장 깊숙한 불안을 준다. 그러나 내게 손을 대려고 하면 나는 살짝 사라져 버린다. 나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인간의 기생충인 나는 나의 선심을 통해서 인간을 파 먹고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나의 부재를 되살리게 한다.
이러한 요술은 과연 성공했다. 죽음을, 영광이라는 이름의 수의에 싸서 묻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광만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은 깨끗이 잊어버리게 되었다.
(P.209)
나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죽음이 야만스러운 짓을 못 하도록 미리 죽음을 나의 목적으로 삼았고, 삶은 죽음을 위한 단 하나의 분명한 수단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나는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만큼의 희망과 욕망만을 지니고서 내 종말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내 심장의 마지막 고동이 내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장에 새겨질 것이며, 죽음은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을 끌고 가는 데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단단히 믿으면서, 니장은 벌써 스물 살 때 여자와 자동차를,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재물을 절망적인 초조감에 싸여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지금 모든 것을 체험하고 모든 것을 당장에 가져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사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탐내서가 아니라 열심히 관찰하겠다는 뜻에서였다. 나는 향유(享有)가 아니라 결산(決算)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은 너무도 안이한 것이었다. 지나치게 얌전한 어린애였던 나는 소심하고 비겁해서, 개방되고 자유롭고 은총이 보장되지 않은 생존의 위험 앞에서 물러섰던 것이다. 나는 만사가 미리 작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만사가 다 끝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P.212)
처음에는 나는 아주 건전한 아이였다. 속임수를 써도 적시에 멈출 수 있었다. 그러자 나는 모든 일에 열중했다. 거짓말을 꾸미는 데도 악착스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어릿광 대짓은 일종의 정신 훈련이었고, 나의 불성실성은 항상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완전한 성실성의 희화(戱畵)였다. 나는 내 천직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떠안긴 것이다. 사실 무슨 특별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한 노파가 던진 실없는 말들과 할아버지의 마키아벨리즘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믿어 버렸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른들이 내 별을 가리켜 보인 것이다. 하기야 내 눈에 보인 것은 별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손가락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어른들을 나는 믿었다.
(P.222)
흔히들 과거가 우리를 앞으로 밀어 준다고 말했지만, 나는 미래가 나를 이끌어 간다고 확신했다. 나는 내 속에서 힘이 서서히 작용하고 내 소질이 완만하게 발휘하는 것을 느끼기 싫었다. 나는 내 영혼에 부르주아들의 끊임 없는 진보를 가득 쓸어 넣고, 그것으로 폭발 장치를 만들었다. 나는 과거를 현재 앞에, 현재를 미래 앞에 무릎 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조용한 진화 과정을 혁명적이며 불연속적인 돌발 사태로 바꾸어 놓았다. 몇 해 전 누가 나에게, 나의 희곡이나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결단을 갑작스럽게, 그리고 발작적으로 내린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령 『파리 떼』의 주인공 오레스테스가 순식간에 변신하고 말았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사실 이 그렇다. 그것은 내가 그 등장인물들을 나와 닮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필경 현실적인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따른 것이겠지만.
(P.253)
물론 나는 제 꾀에 속아 넘어갈 위인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반복할 따름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터득한 그런 인식이 지난날의 확신을 잠식한 것은 사실 이지만, 그 확신을 완전히 쓸어 내지는 못했다. 내 생애에는 나를 조금도 봐주지 않는 까다로운 몇몇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전철을 밟는 현장을 자주 목격한다. 그러고는 나에게 그 점을 지적한다. 나도 그들의 말이 옳다고 느끼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다행으로 생각한다. 어제까지는 맹목적이었지만 오늘은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진보했으니 말이다. 때로는 나 자신이 나에게 불리한 증인이 된다. 가령, 지금 소용이 될 만한 글을 2년 전에 한 장 썼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그러면 그 원고를 찾아보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전화위복이다. 나는 자칫 나태한 생각에 빠져서 새 작품 속에 낡아 빠진 글을 끼워 넣을 뻔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한결 더 잘 쓰게 되었으니, 새로 스기로 한다. 그런데 작업을 끝냈을 때, 간 곳 없던 그 옛 원고가 우연히 나타난다. 기가 막힌 일이다. 구두점 몇 개를 제외하고는 똑같은 생각이 똑같은 말로 적혀 있으니 말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쓸모없게 된 그 묵은 원고를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새로 쓴 것을 간직한다. 그것은 어쩐지 전의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요컨대 내 멋대로 속 편하게 생각 하는 것이다. 철이 들었고, 게다가 늙어서 기력이 없는데도, 여전히 젊은 등산가의 도취를 맛보기 위하여 자신을 속여 넘기려는 것이다.
(P.257)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나는 '교회'의 인간이었다. 투사로서의 나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구출하기를 바랐고, 신비주의자로서의 나는 투덜대며 수군거리는 말들을 통해 존재의 침묵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사물들과 그 명칭들을 혼동했다. 그것이 곧 믿음이다. 나는 착각을 했던 것이다. 그 착각이 계속되는 동안은 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
(P.267)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 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P.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