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책장

이정모, 이은희, 이강영, 이명현 / 북바이북 / 320쪽

(2019. 7. 24.)

아무리 길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낯선 도시에서 헤매지 않고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도시라고 하더라도 원래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도가 필요 없습니다. 서서히 적응해왔기 때문이죠. 책의 지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문학의 세계에 살던 분들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해도 그 작가를 쉽게 자리매김할수 있을 겁니다. 어디에 꽂아야 하는지 보이니까요 과학책의 세계는 어떨까요? 과학책이 몇 가지 없을 때부터 즐겨 읽었던 사람들은 새로운 과학책이 나오면 새 책을 이전 책들과 어떤 방식으로 씨줄과 날줄을 엮어야 할지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 회과학이나 인문학에 도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이리는 낯선 세계에 들어오면 복잡해 보이지요 길을 잃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도입니다. 과학책으로 엮은 지도 말입니다.

(P.6)

흔히 '과학자의 글쓰기'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지목되는 것이 있다. 명료성, 정확성, 객관성, 간결성이다. 아무래도 과학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다루기에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 이 가능하고, 꿈과 상상이 아닌 사실과 정보를 전달하는 데 치우쳐 지기에 가능하면 이를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선행된다. 또한 감각적 수사나 은유보다는 오해를 피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먼저이니, 이를 풀어 쓰는 방식이 간결해야 함은 당연하다. 대 부분의 과학자가 글을 쓰는 목적이 타인과 교감하고 공감하기 위해 서가 아니라, 정보를 교류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니까 말이다. 이런 글쓰기에 익숙한 과학자들이 써낸 책들은 많은 경우 양념하지 않는 닭가슴살과 같은 느낌을 준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지식의 근육을 만드는 데 필요한 영양가는 꽉 차 있지만, 그냥 먹기에는 심심하고 퍽퍽해서 쉬이 손이 가지 않는, 막상 큰맘을 먹고 먹 기 시작하다가도 얼마 못 가 십중팔구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한 숨을 쉬게 만드는 그런 것. 그렇기에 과학책을 읽을 때는 한 번에 처 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기보다는 조금씩 나눠 천천히 씹어 삼켜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을, 하나의 문단을 읽다가도 지식의 소화 불량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같은 책을, 같은 구절을 천천 히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반추동물이 급하게 씹어 삼킨 질긴 섬유질 음식들을 다시 게워내어 꼭꼭 씹어 삼키듯이. 과학책은 그렇게 읽 었다

(P.119)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더욱 큰울림과 반향을 지니는 건 바다 건너 저 멀리에 사는 타자화된 누군가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혹은 살아갔던 우리 의 가족, 친구, 이웃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가 아프게 한 개인들을 어떻게 사회가 치유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픔을 하소연할 데 없어 스스로를 파괴하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제도의 빈틈을 파고든 탐욕에 희생자가 된 세월호의 아이들, 사회적 차별로 늘 숨죽여 지내는 성 소수자와성 전환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이야기, 우리가 듣기는 했었지만 굳이 확인해보려 하지 않고 지나쳤던 이야기들, 어쩌다들 여다보기는 했었지만 굳이 읽어내려 하지 않았던 행간의 이야기들 을 담담하고 정확하게, 명확하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분명 이 책은 과학자가 쓴 책답게 정확하고 명료하면서고 객관적이고 간결하다. 하지만 전혀 건조하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명료하기에 더 이상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들괴 정확하기에 반론을 하기 어렵게 만들며, 당사자의 슬픔과 아픔을 선명하게 짚어낼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이다. 이에 더해 간결하기에 그 울림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개인의 행복과 불행뿐 아니라, 개인의 몸이 앓는 병과 몸에 남는 선명한 상처가 실상 그 사회가, 그 사회적 관계가 얼마든 지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 허탈하기까지 했기에, 책을 읽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의 문장은 술술 읽히지만, 한편으로는 술술 읽을 수가 없다. 한 페이지에 가슴 이 먹먹해서 한숨 한번 쉬고, 또 다른 페이지에 눈물이 치올라 잠시 하늘 한번 보국 그다음 문장에서 견디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가 한 참을 진정하고서야 다시 책장을 열게 만들었다.

(P.126)

유전자의 특징과 개념을 잡아주는 책으로 떠오르는 것은 『게놈 익스프레스』(조진호 지음, 위즈덤히우스, 2016) 이 책은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그래픽노불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유전체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을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처리한 흐름도 매우 돋보인다. 하지만 그래픽노블의 장점은 그대로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컷에 글과 그림이 직관적으로 다가가기 쉽지만, 줄글보다 행간의 넓이가 커지므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는 느낌보다는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겅중겅중 넘어간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픽 노블 과학책은 두 번 읽기를 권장 한다. 먼저 커다란 줄기를 잡기 위한 입문용으로 한 번, 해당 분야의 지식을 쌓고 난 뒤 숨겨진 이스터 에그를 찾기 위해 또 한 번. 행간을 읽어내는 건 독자의 배경지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P.135)

물리학자들은 양성자의 구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파이온, 케이온 등을 비롯 한 여러 가지 새로운 입자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가속기는 물질의 구조를 탐색하는 데 매우 강력한 도구임이 밝혀졌다. 1950년대부터 대형 가속기가 건설되고 가속기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더욱 더 많은 새로운 입자들이 발견되었고, 물질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 섰다.

우리가 입자물리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는 이때쯤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구체적인 의미로 입자물리학을 원자핵 이하의 세계를 연구하는 분야라고 하면 거의 맞다. 입지들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에 더욱 크게 진전을 보였다. 다시 쿼크라는 새로운 종류의 입자가 양성자와 중성자를 비롯한, 그동안 발견된 수 많은 입자들을 구성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으로는 원자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개발된 양자 이론을 전자기 상호작용에 적용하는 양자전기 역학이 수립되어 체계적으로 기본입자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길이 열렸다. 이런 실험적, 이론적인 발전의 결과로 중력을 제외한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을 모두 게이지 양자 장이론이라는 형식으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이론인 표준모형이 1970년대 초에 수립되었고 실험적으로 검증되기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표준모형의 모든 세부가 철저하게 검증되었다. 표준모형에 나오는 입자는2012년 힉스 보손이 발견됨으로써 모두 발견되었고 표준모형의 구조도 거의 전부 확인되었다.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은 힉스 보손의 자체 상호작용의 효과뿐이며, 표준모형과 어긋나는 실험 결과는 중성미자의 질량뿐이다. 표준모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현상의 거의 전부를 놀랍게도 정확히 설명해주는 이론으로서, 현대 물리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다.

(P.178)

세상은 무한한수수께끼와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빛과 어둠,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열기가 번갈아 찾아오고, 나무와 풀, 짐승과 새들과 벌레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 곳. 그 안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두렵지만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 차츰차츰 세상의 모습을 밝혀왔다. 17세기경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는 매우 강력한 도구를 개발해 냈다. 지금 우리는 이 도구를 과학이라고 부른다. 과학을 손에 든 후 인간은 세상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괴 자연을 '정복'한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쯤 되자, 인간은 더 이상 세상에는 수수께끼란 없다고, 이제 인간이, 혹은 인간의 이성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수 있게 되었고, 남은 일은 그 안에서 잘 살아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세상의 이면을 느끼고 세상 저 깊은 곳에는 여전히 수수께끼와 신비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의 겉모습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개념은 원자였다. 물질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원지를 진짜로 이해하려고 하자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지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과학을 건 설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금 원자를 이해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 새로운 과학의 중요한 부분을 우리는 양자역학이 라고 부른다.

20세기 과학에서 양자역학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양자역학을 통해서 우리는 원지를 이해하고, 물질을 이해하고, 이전에 가지고 있던 피상적인 지식을 체 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P.209)

우리가 여러 가지 과목을 배우는 목적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지구라는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각 과목들은 그 분야의 지식을 제공하는 한편, 다른 분야와 서로 얽혀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사고 체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어준다. 수학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법과 추상적인 사고를 배우는 과목이다, 학생들이 수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바로 이 부분,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일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이고 쉬운 예를 이용해서 수학을 가르치려는 시도가 많이 있다. 하지만 결국 수학의 목적이 추상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회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 미분과 적분이 써먹을 데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미분과 적분을 그저 복잡한 계산법으로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생각한다 해도, 나중에 과학이나 공학에 관한 일을 하게 될 사람이면 미적분을 필요로 할 기능성이 높으니, 사실 미적분이란 꽤 실용성이 큰 지식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저 복잡한 계산법일 뿐이라팀 굳이 모든 사람이 배을 필요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미적분은 배우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적분을 배우는 목적 혹은 의미는 계산법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미분과 적분은 인간이 구축한 가장 추상적인 개념이자, 가장 심오한 개념을 배우는 분야다. 그 개념 이란 바로 '무한이다.

무한이라는 개념은 누구나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이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사유는 무한을 다뤄왔다. 한편으로는 무한에 의해 사유를 제한빋아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을 생각하며 엄청난 지극을 받았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는 무한을 경험 할수 있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면, 내가 보고 있는 이 공간이 무한하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내가 무한을 보고 있는가? 무한은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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