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홍성광 / 을유문화사 / 836쪽

(2019. 8. 2.)

서술된 사상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이 책을 두 번 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 저절로 밝혀진다. 그것도 처음에는 시작이 끝을 전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시작을 전제로 하고, 또 모든 뒷부분이 앞부분을 전제로 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모든 앞부분이 뒷부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강한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한다. 그런 인내심은 자발적으로 주어진 신념으로만 얻을 수 있다.

(P.10)

나는 철학이 한편으론 정치적 수단으로, 다른 한편으론 생계의 수단으로 창피하게 잘못 쓰이고 있는 이 시대처럼 철학에 불리한 시대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또는 가령 그렇게 노력하고 법석을 떨다 보면 아무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진리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진리란 자신을 갈망하지 않는 자에게 치근대는 창녀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해도 그녀의 호의를 확신할수 없는 쌀쌀맞은 미녀와 같다.

(P.22)

철학에 이끌림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저서라는 고요한 성소聖所에서 그 자신의 불멸의 교사를 찾아야 한다. 이들 모든 진정한 철학자의 주된 장에 서술된 학설에는 범속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내놓는 답답하고 왜곡된 보고문보다 백 배 이상의 통찰이 담겨 있다.​

​(P.31)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그렇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으며, 인간이 실제로 이를 의식할 때 인간의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겨난다. 그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세계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어떤 진리를 선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 진리는 온갖 다른 형식인 시간, 공간 및 인과성보다 더 보편적인 경험,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가능한 경험의 형식을 말하고 있고, 이 형식들은 이미 바로 이 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충분근거율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인식한 이 모든 형식은 각각 표상들의 특수한 부류로 간주되는 반면,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는 것은 그러한 모든 부류의 공통된 형식이고, 그러한 형식 아래에서만 어떤 종류의 표상이든, 추상적이든 직각直覺적이든, 순수하든 경험 적이든 어떤 표상이 가능하고 있을 수 있다.

​ 그러므로 이 진리(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보다 더 확실하고, 다른 모든 진리와 무관하며 증명을 덜 필요로 하는 것은 없다. 인식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전체 세계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객관에 지나지 않으며, 직관하는 자의 직관, 한마디로 말해 표상인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아주 먼 것과 가까운 것에도 적용된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그 속에서만 구별되는 시간과 공간 자체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세계에 속하고 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불가피하게 이처럼 주관에 의해 조 건 지어진 상태에 있으며, 주관을 위해서만 한한다. 세계는 표상이다.

(P.41)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는 관점에서만 보자면,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불가분의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 한 측면은 객관으로, 그것의 형식은 공간과 시간이며, 이로 인해 다수성 이 생겨난다. 그런데 다른 측면인 주관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은 표상하는 모든 존재에 나누어지지 않은 채 온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중단 한 사람이라도 현존하는 수백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객관과 더불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완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사라져 버리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측면은 사상에 있어서조차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두 가지의 어느 쪽도 다른 한쪽으로 인해서만, 또 다른 한쪽에 대해서만 의미와 현존을 지니며, 그것과 더불어 현존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직접 경계를 접하고 있기에 객관이 시작되는 곳에서 곧 주관이 끝난다. 이 경계가 서로 접한다는 사실은, 모든 객관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형식들인 시간, 공간 및 인과성은 객관 그 자체를 인식하지 않고도 주관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고 완벽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데서, 즉 칸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의식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것을 발견한 것이 칸트의 주된 공적이자 매우 위대한 공적이다.

(P.45)

)

피히테의 철학이 주관에서 출발했듯이, 유물론은 철저히 객관에서 출발했다. 아무리 단순한 객관이라도 그것을 설정하자마자 동시에 주관도 설정된다는 것을 유물론이 간과했듯이, 객관 없이는 주관도 생각할 수 없으므로 피히테는 주관과-그가 이것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이-아울러 객관도 설정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선험적 추론, 그러니까 모든 논증은 무릇 어떤 필연성에 근거하고 있지만 모든 필연성은 오로지 근거율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필연적이라는 것과 주어진 근거에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상관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거율은 객관 그 자체의 보편적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미 객관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객관에 앞서 그리고 객관의 밖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으면서 최초에 객관을 데리고 나오거나 근거율의 입법에 따라 객관을 생기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개괄하면 주관에서 출발하는 것도 앞서 말했듯이 객관에서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니까 최초에 도출하려고 내세우는 것, 즉 그 출발점의 필연적 상관개념을 미리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방법은 이 두 가지 상반된 오류와는 전적으로 상이하다. 즉, 우리는 객관에서도 주관에서도 출발하지 않고, 의식의 제1사실인 표상으로부터 출발한다. 표상첫째가는 가장 본질적인 근본 형식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짐이고, 객관의 형식은 다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근거율이다. 이들 형태는 제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부류의 표상을 지배하므로, 이미 언급했듯이 그 형태를 인식하면 모든 부류의 표상의 본질도 인식되는 것이다. 즉, 이 부류(표상으로서)는 바로 그 형태 자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 자체는 시간 속에서의 존재의 근거, 즉 연속과 다름없고, 공간은 공간 속에서의 근거율, 즉 위치와 다름없다. 물질은 인과성과 다름없고, 개념은-곧 나타나게 되겠지만-인식 근거에 대한 관계와 다름없다. 이처럼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것의 가장 보편적 형식(주관과 객관)에서 보거나 이 형식에 종속된 형식(근거율에서 보더라도 전적으로 일반적인 상대성을 띠고 있다. 그런 사실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표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측면에서 찾도록 하며, 그러한 측면은 제2권에서 모든 생물 에게서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확실한 사실로 증명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또한 인간에게만 속하는 표상의 부류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고찰한 표상의 주관적 상관개님이 모든 동물 에게도 주어진 지성과 감성이듯이, 그 표상의 재료는 개념이고, 그 주관적 상관개념은 이성이다.

(P.89)

개념은 지금까지 고찰해 온 표상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부문을 형성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개념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이고 자명한 인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고, 단지 추상적이고 논변적인 인식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직관적 표상인 실재하는 외부세계가 이 경험으로 이해되는 한, 개념이 경험에 의해 증명되거나, 또는 직관적 객관처럼 눈앞이나 상상 속에 떠오르게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리라. 개념이란 사유될 뿐 직관될 수 없으며, 개념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결과만이 본래적인 경험의 대상이다. 그러한 결과들이 곧 언어이고, 숙고를 거친 계획적인 행동이며, 학문이며, 그런 연후에 이 모든 것에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P.98)

수학에서는 모든 경험에 앞서 공간과 시간의 직관적으로 의식된 관계에서 내용이 얻어지고, 순수자연과학, 즉 우리가 모든 경험에 앞서 자연의 경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는 학문의 내용이 순수한 지성, 즉 인과율의 선험적 인식에서, 또 공간 및 시간이라는 저 순수 직관과 그 법칙의 결합에서 생긴다. 다른 모든 학문에서는 방금 언급한 것에서 차용하지 않은 모든 것은 경험에서 얻어진다.

지식이란 대체로 그런 판단을 자신의 정신력으로 마음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 판단은 그 외의 어느 것에서 충분한 인식 근거를 갖는다. 즉, 참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인식만이 지식이다. 그 때문에 지식은 이성의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동물에게 직관적 인식이 있고, 이를 위해 기억도 하며, 바로 그 때문에 상상력을 지님으로써 게다가 꿈을 꾸는 것을 증명 할 수 있지만, 동물이 무언가를 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인 정한다. 의식이란 단어가 지식이란 단어에서 나온 것이므로, 의식이란 개념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대체로 표상의 개념과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식물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되 의식이 있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식이란 무릇 다른 방식으로 인식된 것을 이성이란 개념 속에 고정시켜 놓은 추상적 의식이다.

(P.115)

지식의 정반대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감정에 대해 상세히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개념은 전적으로 소극적인 내용, 즉 의식 속에 현존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고, 이성의 추상적 인식도 아니라는 내용을 갖고 있을 뿐이다. 덧붙여 말하면 추상적 인식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 감정이란 개념에 속하고, 그 때문에 감정이란 개념의 지나치게 넓은 권역은 무척 이질적인 사물 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이질적인 사물들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는 소극적인 점에서만 일치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그것들이 어떻게 만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매우 상이하고, 그러니까 적대적 요소까지 감정이란 개념 속에서는 서로 조용히 공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교적 감정, 관능적 감정, 도덕적 감정, 촉감이나 고통이 주는 구체적 감정, 색채감, 음향과 그것의 조화와 부조화에 대한 감정, 증오, 혐오, 자기반족, 명예, 수치, 정당함 및 부당함의 감정, 진리의 감정, 미적 감정, 힘과 약함, 건강과 우정 및 사랑의 감정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것들 사이에는 추상적 이성 인식이 아니라는 소극적 공통점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경우는, 심지어 공간적 관계의 직관적인 선험적 인식과 순수 지성의 선험적 인식이 완전히 감정이란 개념으로 표시되는 때이며, 또 우리가 먼저 직각적으로 의식하지만, 아직 추상적 개념으로 정리하지 못한 모든 인식과 진리를 느낀다고 표현하는 때다

(P.116)

진리란 어떤 판단의 그 인식 근거에 대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물론 그것은 판단하는 사람이 그와 같은 근거를 갖고 있다고 실제로 믿을 수 있는데도 어떻게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않는지의 문제, 다시 말해 오류, 즉 이성의 기만이 어떻게 가능한지의 문제이다. 나는 이 가능성을 앞에서 설명한 가상, 또는 지성의 기만의 가능성과 매우 유사하게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의 견해는-바로 여기서 말하면 그것이 설명되는 것이지만-모든 오류는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리에서 발생하며, 그 귀결이 해당 근거에서 생긴 것이지 결코 다른 근거에서 생긴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타당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타당하지 않은 추리라는 것이다. 오류를 범하는 사람은 어떤 귀결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하나의 근거를 그 귀결에 설정한다. 이 경우 그는 지성의 실제적인 부족, 즉 원인과 결과 간의 관계를 직접 인식하는 능력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는 더 자주 일어나는 경우지만, 그는 그 귀결에 사실 하나의 가능한 근거를 규정하지만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신의 추리의 대전제에다, 해당 귀결은 언제나 자신이 진술한 근거에서만 생긴다고 또 덧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귀납만이 그에게 그럴 권리를 부여하지만, 그는 귀납을 하지 않고 전제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언제나 라는 말은 너무 광범위한 개념이므로, 대신 가끔이나 대체로라고 하면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결론은 문제가 있어도, 그 자체로는 잘못이 아니리라. 그런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앞서 말한 방식으로 추리 하는 것은 성급한 탓이거나, 또는 가능성에 대한 지식이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그 때문에 해야 할 귀납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오류는 가상과 매우 유사하다. 두 가지 다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리인데, 가상은 항시 인과율에 따래 또 단순한 지성에 의해, 즉 직접 직관 그 자체 속에서 행해지고, 오류는 근거율의 모든 형식에 따라 이성에 의해, 즉 본래적 사유 속에서 행해진다.​

(P.156)

역사는 사건들의 실마리를 따라간다 역사가 동기화의 법칙에 따라 사건들을 이끌어 내고, 의지가 인식에 의해 조명되는 경우 그 법칙이 현 상으로 나타나는 의지를 규정하는 한 역사는 실용적이다. 의지가 아직 인식 없이 작용하는 의지의 객관화의 보다 낮은 단계에서 자연과학은 의지 현상들의 변화 법칙을 원인학이라 고찰하고, 현상에서 영속적인 것 을 형태학이라 고찰한다. 형태학은 개념들의 도움으로 자연과학의 거의 무한한 주제를 가볍게 해주고, 보편적인 것을 총괄하여 거기서 특수한 것을 도출해 낸다. 마지막으로 개체로서 주관의 인식을 위해, 이념이 갈 라져 다수성으로 현상하는 단순한 형식, 즉 시간과 공간을 고찰하는 것 이 수학이다. 그러므로 과학을 공통의 이름으로 갖는 이 모든 것은 다양 한 형태를 취하는 근거-을을 따르며, 이들 과학의 주제는 현상이고 그 현 상의 법칙이며, 연관이며 거기서 생기는 관계들이다. 그런데 모든 관계들 밖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홀로 원래 세계의 본질적인 것, 세계 현상의 참된 내용, 어떠한 변전에도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동일한 진리 로 인식되는 것, 한마디로 말해, 사물 자체, 즉 의지의 직접적이고 적절 한 사물 자체인 이념을 고찰하는 것은 어떤 인식 방식일까? 그것은 예술 이며 천재의 작업이다.

​(P.308)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788~1860)는 근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 된 이성주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상가다. 무엇보다도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한 인물로 중요하 다. 그의 글은 나중에 생의 철학,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및 융의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쇼펜하우어는 17세 때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 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18세의 청년 쇼펜하우어는 일기에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천만에, 이 세상은 악마가 만들었어”라고 적기도 했다 20대 초반에는 “삶은 어렵고 불쾌한 것”이며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한다.

(P.777)

출판했는데, 나중에 그 자신에 의해 방대한 작품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새벽별'로서 '유령들'을 몰아내고 낮을 알리고자 했던 쇼펜하우어의 염원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철학은 기존의 학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헤겔 철학이 지배하던 철학계에서 그의 철학은 비주류였다. 사업상으로 볼 때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작품의 정신사적인 중요성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이 책의 기본 사상은 포괄적인 두 계열의 성찰로 이루어진 4 권의 책 속에 전개되어 있는데, 이 성찰에는 인식론, 자연철학, 미학, 윤리학이 차례로 포함되어 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 사상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그의 철학에는 4 더 이상 별다른 발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떠한 내적 고투나 변화도 없 었고 기본 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재검토도 없었다. 이 책 이후의 저술들 은 그저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명료하게 하며, 확인하는 수준을 넘지 않고 있다.

​(P.784)

​ 칸트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의 현실, 즉 실질적이고 가능한 현상의 세계를 현상이라 하고,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을 실재라고 했다. 그러므로 실재는 정신의 산물이 아니며, 우리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정말로 존재하지만 경험으로 포착되지 않는 실재의 영역이 있으며, 거기서는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으며 거기에는 물질적 대상이나 시간이나 공간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실재가 존재한다는데 대해서는 거의 확신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것이 존재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을 절대로 알 수도 인식할 수도 없고, 직접 인지할 수 없으며 어떤 종류의 이미지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신이나 영혼 같은 것이 존재하는지도 절대로 확실하게 알 수 없고, 그것들이 존재하더라도 직접 인식하거나 결정적인 지식을 얻을 방법이 없다. 칸트 자신은 경건파 집안에서 성장했고, 스스로 죽는 날까지 기독교인이라고 선언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 경험의 영역을 벗어난 무언가를 사실적으로 알 수 있다는 주장을 뒤엎어 버렸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경험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깨우쳐준 칸트를 어느 누구보다 존경했지만, 우선 경험 세계의 바깥에 다수의 사물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한 점에서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시간이나 공간 속에 있을 때만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서 모든 것은 단일하고 차별이 없다고 주장했다. 따로 구별되는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은 경험 세계뿐이다. 칸트는 실재와 현상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쇼펜하우어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고, 이 점에서는 칸트 이후의 다른 모든 철학자들이 마찬가지였다. 칸트의 말에 따를 때 인과법칙이란 오로지 현상 영역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현상계를 벗어나면 어떤 것도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으므로, 쇼펜하우어는 초월계와 현상계란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는 동일한실재라고 본다. 이에 따라 쇼펜하우어는 독특한 윤리적 입장을 가지게 된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고문자와 희생자, 사냥꾼과 도망자가 결국 동일한 존재로 드러나면서 자비와 연민이 생기는데, 쇼펜하우어는 바로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통합하는 주된 열쇠가 이성이며, 윤리의 기초는 합리성이라는 칸트 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이든 아니든 존재의 궁극적인 단일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방법과 자신이 따르는 방법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칸트가 간접적이고 반성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반면 자기는 직접적이고 직각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는 탑의 높이를 그 그림자로 재는 사람에, 그러나 자신은 탑 자체에 직접 자를 갖다 대는 사람에 비유한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철학이 개념으로 이루어진 학문이고, 자신에게는 철학이 개념 속의 학문 모든 명증의 유일한 원천인 직관적 인식으로 끄집어낸, 그리고 보편적 개념으로 파악되고 고정된 학문이라고 말한다.

(P.793)

쇼펜하우어는 주저『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헤겔로 대표되 는 이성 철학을 거부하고 세계를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파악하려고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성은 두뇌 현상일 뿐이고, 의지의 제약을 받으며, 의지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다가가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인식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 즉 지성이 제한적인 것이며 의지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성 또는 지성의 배후에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점은 칸트로서는 쉽게 인정 할 수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사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객관화되는데, 이렇게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를 쇼펜하우어는 표상의 세계라고 규정한다.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의지의 세계의 존재를 우리는 신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세계를 의지로서 경험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의 구분에서 출발하는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이나 관조를 통해 가능하다.​

반면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지성을 통해 파악되는 세계는 의지의 세 계가 아니라 표상의 세계일뿐이다. 이러한 표상의 세계는 마야의 베일이며 충분근거율에 의해 조건 지어진 세계이다. 의지에 기여하는 지성을 통해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는 표상일 뿐이며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여러 특성들은 세계의 본래적인 특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한계들을 올바르게 인식할 때 본래적인 세계, 즉 의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

(P.797)

제1권은 쇼펜하우어의 학문 이론으로서 그의 박사 논문인「충분근 거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에서 전개된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실은 보이는 대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뇌가 계산해 낸 결과물이다. 이런 전제에서 쇼펜하우어 철학은 현대 뇌 과학과도 연결된다. 고양이는 컬러를 보지 못하므로 흑백으로 세상을 보고, 박쥐는 세상을 초음파로 본다. 세계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표상의 세계인데,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의지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책의 골자는 인간 인식의 조건상 주관과 객관이 구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표상으로서의 세계만을 인식하지만, 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의지라는 것이다.

​(P.804)

제2권에서는 표상된 개념들의 본질을 고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인 간은 외적으로 몸 또는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 내적으로는 만 물의 첫째가는 본질의 일부, 즉 의지가 바로 자신임을 알고 있다. 의지는 사물 자체다. 즉 그것은 단일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변화할 수 없고 시간 과 공간을 넘어서 있으며 원인도 목적도 없다. 현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현실화의 상승 계열 속에 반영되어 있다. 무기적 자연의 힘 속에 있는 맹 목적인 충동에서 시작해서 유기적 자연(식물과 동물)을 거쳐 합리성에 따르는 인간 행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욕망, 의욕, 충돌의 거대한 사 슬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사슬은 높은 형태가 낮은 형태를 상대로 벌이 는 계속적인 싸움, 목표도 없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영원한 열망, 참상 및 불행과 떼래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슬의 끝에는 죽음 이 있다. 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비난으로서, 각 개인에 게 '이제 충분하냐'는 물음을 던진다. 의지가 개별적 대상을 통해 다양 화되는 조건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체화의 원리다.

이러한 개별적 대상의 생성과 변화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주관에 의 한 인과법칙 아래에서 가능하다. 하나의 통일적인 의지가 표현되는 가시 성과 판명성의 정도에 따라서 가장 적합하게 의지가 객관화되는 다양한 단계가 있으며, 그 단계는 다시 개체화의 원리에 따라 무수한 개별자 속 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는 낮은 단계의 돌이나 식물로부터 높은 단계의 동물이나 인간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등급을 지닌다. 의지가 객관화되는 각 단계마다 사물의 영원한 형식들이 있으며, 이러한 사물의 영원한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체화의 원리와 인과율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사물의 영원한 형식은 플라본적인 의미 에서의 바로 이데아들이며, 의지의 가장 적합한 객관화다. 이러한 이데 아들은 사물 자체로서의 의지와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의 세계에 속한 개별자들 사이를 매개한다. 이데아들은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로서 플 라본적인 의미에서의 원상들이며, 개별자들은 이러한 원상들에 대한 일 종의 모상들인 것이다.

​(P.807)

제3권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술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1권, 제2권은 난해하고, 제4권의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데 비해 제3권은 지금도 충분히 읽을 만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에 대해 '충분근거율과 무관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모든 행위에는 동기가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 세계의 모든 현상은 많은 점에서 다른 현상과 맞물려 있어서, 이 세상 산물은 서로 안에 그 것의 존재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P.811)

제4권에서 쇼펜하우어는 맹목적인 의지의 단념에 대해 상세히 고찰 쇼펜하우어는 부정과 단념에 과한 동양의 종교적, 철학적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생식 행위가 삶에의 의지의 단적 인 표현이라는 이론을 전개한다. 그의 이론은 리비도가 인간의 보편적 충동이라고 설명하는 프로이트를 연상시킨다 현상계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지각하는 개별자들은 스스로를 위해 모든 것을 욕구하는데, 쇼 펜하우어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기심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세계의 원인이 되는 맹목적인 삶에 대한 의지에서 출발하여 인과적 연쇄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 는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욕구의 계속이며, 따라서 삶은 고통일 수밖 에 없으므로, 이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욕구의 상태, 즉 이 의 지가 부정되고 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이렇게 하여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인도 철학에서 말하는 해탈과 정적의 획득 을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 제시하는 쇼펜하우어는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 나면서부터 시작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최고의 덕이자 근본윤 리로 본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말하는 의지의 부정이 허무나 공허함 에 지나지 않는 무無로 보일 것을 알고 있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오히려 의지가 완전히 없어진 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의지로 충만한 모든 사람에게는 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의지가 방향을 돌려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그토록 실재적인 이 세계는 모든 태양이나 은하수와 더불어 - 무無인 것이다.”

(P.815)

쇼펜하우어가 주된 관심을 가지는 의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자연의 세계이다. 생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번식하는 생명 현상의 본질을 그는 의지로 파악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의지를 우리 자신의 자연인 몸을 통해 직접 경험한다. 우리가 몸 안에서 느끼는 온갖 충동과 본능, 욕망, 정동 및 성 욕동 통은 바로 봄이라는 인간적 자연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루는 적나라한 요소들이다. “그 때문에 신체의 부분들은 의지를 발현시키는 주된 욕구와 완전히 상응해야 하며, 그러한 욕구의 가시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즉 치아, 목구멍, 장기는 객관화된 배고픔이고, 생식기는 객관화된 성 욕동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의지란 성을 매개로 특정한 개체 속에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개체화의 의지다.

이처럼 신체와 성에 주목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은 당대 생물학 연구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은 당대의 자연과학적 발전에 대한 철학적 응답이었고, 자연과 학 및 실증주의 시대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리고 그의 의지 철학은 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신체와 성이 본격적인 철 학적 담론의 주제로 떠오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며, 이후 니체와 삶 철학을 거쳐 하이데거, 가다머로 이어지는 반합리주의의 노선의 출 발점이 된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현대의 문화적 • 예술적 담 론에서 주요 범주로 다루어지는 욕망의 범주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P.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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