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재능이 없었어." 내가 말했다.

"재능이 꼭 필요할까?"

p.30

"알겠어요. 잠이 열쇠죠. 사람들 대다수는 열네 시간 이상을 자야 합니다.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부자연스러운 삶을 강요해왔어요. 바빠, 바빠, 바빠. 가자, 가자, 가자. 당신은 아마 일을 너무 많이 할 거예요." 그녀는 처방전 양식에 뭔가를 한참 끄적거렸다. "흥겨움." 그러고선 말했다. "난 그게 기쁨보다 좋아요. 여기서 행복이란 말은 쓰고 싶지 않네요. 너무 마음을 사로잡잖아요, 행복은. (후략)

p.36-37

연애편지를 간직하듯 그 집을 붙잡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처음부터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실은 내가 겪은 상실을, 그 집 자체의 텅 빈 상태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이들과 얽혀 있느니 혼자가 낫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p.85-86

"정신력으로 육체를 이겨라, 사람들이 그러죠. 하지만 대체 육체가 뭐죠? 현미경 아래에 놓고보면 그저 조그만 물질 조각이에요. 원자 입자죠. 아원자 입자예요. 그렇게 점점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트랄랄라.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똑같이 무없을무예요. 당신이나 저나 무로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벽을 뚫고 지나갈 수도 있다,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그들이 말하지 않는 건 벽을 뚫고 지나가면 아마 죽을 거라는 사실이죠. 잊지 말아요."

p.98-99

함께 살면서 우리의 유대는 강해졌다. 나는 멍하고 억눌린 우울에 빠져 있었고, 그녀는 강박적으로 말이 많아 늘 내 방문을 두드리고 닥치는 대로 질문을 던지며 말할 핑계를 찾았다. 나는 그해에 천장을 응시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허무에 대한 생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덮으려고 애썼다. 아마도 리바가 빈번히 방해했기 때문에 창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똑똑. "수다 타임, 어때?" 그녀는 벽장을 살피며 내가 상속받은 돈으로 사들인 모든 옷의 가격표와 사이즈를 확인하기를 즐겼다. 실존적 웜홀에 들어가 배회하는 나를 밖으로 끌어낸 건 물질적 세계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었다.

p.194-195

오테사 모시페그, 『내 휴식과 이완의 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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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8

“작품 완성하려고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지? 그런 거 아무나 못해. 난 말이야, 이제 나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무릎 꿇는 거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 부끄러운 건 기회 앞에서 도망치는 거야.

고태경이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덧붙였다.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말에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콧날이 시큰했다. 고태경이 나의 표정을 흘긋 살피더니 말없이 조수석의 창을 조금 내렸다. 시원한 바람과 소음이 어색한 공기를 채웠다.

p.168

“혜나야. 너 기분 좋아 보이니까 좋다. 그런데 꼭 뭐가 되어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많이 취한 승호가 나에게 헤헤 웃으며 말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그렇다고.”

그것이 진실이 아니어도, 그렇게 말해주는 승호 때문에 마음이 짠했다. 승호는 빤한 말을 굳이 표현하는 애였다. 꼭 자기 영화처럼 나이브했다. 예전에는 그게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게 내가 갖지 못한 승호의 재능이라는 것을 안다.

p.217

“어떻게 버티느냐고 물었지. 진정으로 응원해주고 지켜봐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

나는 고태경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내가 가지고 싶었으나 갖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면 가슴이 달래지기라도 할 것처럼 술을 들이켰다. 술기운이 올랐다. 내가 고태경에게 정말 하고 싶던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버티느냐가 아니었다. 영화 속 친구들 말고는 외톨이로 홀로 살면서, 어떻게 버티세요. 사람들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함께 일상을 나누고, SNS를 열심히 하는 것도 삶의 목격자가 필요해서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삶은 너무 쓸쓸하잖아요. 그 외로움과 고독을 어떻게 버티세요.

p.241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관객들이 오오, 하고 박수쳤다. 고태경의 말은 허풍처럼 들리지 않았다.

정대건 장편소설 『GV 빌런 고태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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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 같습니다, -분명 희망이 늘 크지 않은-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언젠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요, 한 편 한 편의 시들도 이런 식으로 도중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주해 있는 겁니다. 무얼 마주해 있느냐고요? 열려 있는 것,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향해서,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서요.

-223쪽,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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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궁금했다. 재능은 누군가를 훨씬 앞선 곳에서 혹은 훨씬 높은 곳에서 출발하게 만드는 듯했다. 재능이 있다면 더 열심히 쓸 참이었다. 만약 없다면 글쓰기 말고 다른 일을 열심히 해볼까 싶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이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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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을 하면서 체중계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 숫자는 내가 운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 숫자는 나를 정의할 수 없고, 나의 아름다움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조금만 살이 쪄도 잘 맞는 여성복을 찾기 힘든 한국의 성차별적 의류 시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거워지는 것이 두렵지않다. 당장은 쉽지 않더라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미용 체중‘ 같은 헛소리를 시원하게 무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이 정한 ‘정상‘ 구간에 맞지 않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자. 개인의 ‘정신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몸이 위축되지 않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마야 엔젤루의 말처럼.

*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2016)에서 재인용. - P70

친구들이 운동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여성의 성장 서사다. 꼭 성실하고 꾸준하게 운동하는 얘기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근근이 운동을 하는 얘기도, 이런저런 운동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얘기도, 심지어 운동을 얼마 안 돼 그만둔 얘기조차도 훌륭한 서사다.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를 딛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시 도전하는 여성들의 얘기.
더 많은 여성이 스스로가 가장 즐거워하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에게 ‘요즘, 나 이런 운동 한다!‘고 자랑하고 떠들었으면 좋겠다. 운동을 주제로 수다만 떨어도 이렇게 재밌는데, 같이 운동하면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여성들이 더 많은 운동장을 점령했으면 좋겠다. 세상은 넓고 운동은 많다. 그리고 모든 운동은 여성들의 운동이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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