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마음폴짝홀.


1. 마음산책북클럽 올해 마지막 모임으로, 김초엽 작가님 낭독회에 다녀왔다. 참석 여부 신청할 때 낭독 여부를 신청도 함께 받았는데 나는 신청하지 않았다. GV 참석 시에도 나는 100% 듣는 쪽이고, 평생 나설 만한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뭘 시킬 것 같으면 존재감을 최대한 지우고 그 시간이 기다리기만을 바라는 그런 애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작가님의 근황 이야기가 끝나고, 낭독회 시작 전에 편집자님께서 낭독 신청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혹시 현장에서 낭독해주실 분이 계시면 손을 들어 달라고.

무슨 바람이었을까, 나는 고민 끝에 마지막으로 낭독을 앞두고 손을 들었다. 으아아아 떨린다 떨려.

나는 <우리 집 코코>의 일부분을 낭독했다.

과학자들은 어쩌면 앞으로 지구상에 두 종류의
생태계가 공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추정하지.
우리는 이미 외계세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제는 어느 토양에서든 외계 생물들이 남긴 독특한 부산물들을,
혹은 외계 미생물 그 자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지질시대가 도래했다는 거야.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지구의 영역을
늦기 전에 지켜야 한다고, 지구 보존 구역을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코코를 사랑하는 이들조차 때로는 코코의 목적을 의심하지.
그것들의 최종 목적은 무엇일까? 이미 늦은 걸까?
지구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걸까?
아니면, 그게 정말로 '오염'이긴 한 걸까?
그래, 나는 상관없어.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니까.
그 오염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니까.

-김초엽 짧은 소설 <행성어 서점> 중 p.150-151
(낭독회에서 낭독한 느낌대로 구절을 나누어 보았다)

낭독을 끝내고 낭독 후기를 이야기 할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해야하는데 황송하다고 했다. 으아아아 황송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과한데! 내가 말해놓고도 당황해서 그 뒤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책을 읽고, 기억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이렇게 북클럽으로 낭독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나아가 낭독회에서 낭독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용기내어 봤다고.




2. '낭독'하면 나는 고1때 국어 시간에 읽은 구운몽이 생각난다. 그냥은 잘 읽히지 않는 작품이라, 선생님은 한 분단을 지목해서 소리내어 읽으라고 주문했다. 1명이 읽는데, 틀리면 다음 사람이 이어 읽는 식이었다. 순서는 내 차례까지 왔고, 나는 쉬는 시간 종이 울릴 때까지 책을 읽었다. 중간에 한 번 틀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고, 어쩐지 계속 읽어야 할 분위기여서 끝까지 읽었더랬다.

아이들에겐 그냥 수업 시간의 일부였겠지만, 나한텐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구운몽이 기억나지 않으면서 기억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아, 책이 이렇게 기억되기도 하는구나.

내가 언제 김초엽 작가님의 낭독회에 올 수 있을까? 이건 용기내서 낭독해보라는 낭독요정(...)의 큰 그림이 아닐까? 돌아가는 길에 후회하더라도 일단 질러볼까? 온갖 생각 끝에 번쩍 손을 들었다. 내 생각을 추려서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낭독하는 거다. 세상 안 무너진다! 할 수 있다!

혼자 애써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잘 읽었다.
확신의 INFP, 파워 내향인이 용기내어 낭독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놀 땐 잘 놀았지만,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가자고 하면 부담스럽고
약속이 취소되면 아쉬움보다 안도감을 더 크게 느끼고
하루 중 한 시간 정도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뉴스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고 하면 반갑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적절한 대응을 신속하게 못 하는

내향형 체크리스트 5개 전부 해당하는 내향인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이런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도 용기 내봅시다!




낭독회에서 작가님이 해주신 인상 깊고 재미난 이야기를 기록해두고 싶었는데,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것 같다. 낭독회 이야기는 다른 북클럽 회원분들이 잘 해주셨을테니 나는 그냥 내 이야기를 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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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일 저녁. 김초엽 작가님 낭독회 시작 전에 정은숙 대표님이 말씀하실 때 책들 잘 받아보셨냐고 걱정하시는 것을 보고, 가능하면 받자마자 "잘 받았습니다!" 기록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튼튼한 양장의 시집을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갖고있는 양장본 시집을 돌아보곤 한다. 이전에 마음산책에서 받은 메리 올리버의 시집 《천 개의 아침》과 창비시선 300 기념시선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와 소와다리에서 출간된 백석 시집 《사슴》 이렇게 4권을 갖고 있다. 양장이 주는 듬직함 덕분에 오래 곁에 두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을 받아들고 나는 제목을 불러보았다. 기러기. 기러기라면...김연수 작가님의 애정하는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그 기러기? 정답.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에 이어지는 구절이 소설에 실렸던 번역과

이 시집에 실린 번역이 조금 달라서 함께 덧붙여본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전자가 김연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번역이고, 후자는 메리 올리버 시집 《기러기》의 번역이다.

원문을 보면 어떤 번역이 내 취향인지 알 수는 있겠지만 글쎄, 굳이 취향을 가려야 할까. 나는 그냥 이렇게 흡수하고 싶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어.

그러니 네가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봐.

2. 지난 주에 박혁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행복의 속도'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내 속도대로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품은 바있다.

어느덧 마음산책북클럽 활동을 시작한지 3년. 마음산책북클럽에서 보내주는 책을 야금야금 읽고, 모임에 다녀오는 일정들이 내 행복의 속도를 맞춰 나가는데 든든한 힘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튼튼한 양장본 시집처럼,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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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에 제 얼굴을 준다. 관련된 두 단어를 연결하는 퀴즈처럼 나의 존재는 이름과 일대일로 매칭된다. 이름이라는 명사가 '무엇이라고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이르다'에서 파생된 것을 생각해 보면, 명칭만으로도 부르는 사람이 대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가늠할 수 있다. 결국 이름을 듣고 당사자를 떠올리는 일이란 그의 유일함을 되새기는 것과 같다.

(p.91)

그리고 <런 온>을 봤을 때 짜릿하고 통쾌해서 정수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젠 "공부를 좀 하라고. 젠더 감수성."이라는 말을 가볍게 던지는 인물(서단아)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재야에 숨은 여성 축구 코치, 대기업의 유능한 여성 실장, 엄마 몰래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여자 고등학생, 세계 랭킹 1위 여성 골퍼 사이에서 시대착오적인 농담과 장치는 살아남을 턱이 없었다. 모든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를 사수하고, 의지대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세계가 바로 <런 온>에 존재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성 서사가 양적 개선을 뛰어넘어 질적 개선으로까지 성장을 이룬 것이다. 더 놀라운 건 OTT 플랫폼에서 자막을 켜고 <런 온>을 시청할 때였다.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라'. 노라가 누구지? 등장인물 리스트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궁금하던 찰나, 실체를 알게 됐다. 바로 등장인물들이 자주 가는 카페 여성 사장의 이름이었다.

같은 방송국에서, 같은 해에 방영되었던 <부부의 세계>는 여우회 회원으로 등장했던 조연들의 이름을 이렇게 명시했다. '최회장 아내', '공지철 아내', '차도철 아내'. 조연이었지만 비중이 아주 적진 않았다. 오히려 최회장과 차도철의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극이 끝날 때까지 시청자는 이들의 이름을 영영 알 수 없었다. <런 온> 또한 조연들을 역할의 기능으로서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라'가 아닌, '카페 사장'이라고 기재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런 온>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이름을 새겨 넣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않아도 이건 <런 온>의 규칙이었다.

(p.131-132)

📚어제 그거 봤어?, 이자연, 상상출판, 2021

원에게 추천을 받아 읽게 된 책. '네가 좋아하는 신입사관 구해령과 런 온에 대한 글이 있더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에 예약을 걸었는데, 이전 대출자가 빠르게 반납해준 덕분에 금방 빌려볼 수 있었다.

비단 TV 뿐만 아니라 나는 영화나 공연을 볼 때도 여자의 이야기를 유심히 본다. 영화는 그래도 독립영화 쪽에서 여성의 이야기가 많은 편인데, 공연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애써 젠더 프리로 길을 열어놔도 다음 시즌엔 다시 문이 닫힌다. 그래서 레드북이나 아가사처럼 온전히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세상에서, 나를 말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줄 안나와 남들이 제 아무리 최고의 '여류 작가'라 불러도 자신을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라고 칭하는 아가사. 이렇게 단단하고 유일한 여자들을 만날 수 있어서 즐거운 2021년이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드라마만 언급했지만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글도 많다. 총 29편 중에 8편만 보았고, 21편에 대한 글은 그냥 읽었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며 드라마 '블랙독'과 '스토브리그'를 더 늦기 전에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연말엔 나의 인생드라마 '런 온'을 블루레이로 정주행 해야지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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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 : 그 모든 것이 선생님이 미래의 작가가 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요?

뒤라스 : 난 나를 짓누르는 침묵을 말하게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열두 살 때인가, 오직 글쓰기만이 방법인 것 같았죠.

(P.24)

토레 : 글쓰기와 현실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뒤라스 : 모든 작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기 자신에 관해 써요. 그들 인생의 핵심 사건인 그들에 대해. 마찬가지로 작가가 언뜻 그에게 낯선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건 늘 그의 자아, 그의 강박과 연관돼 있죠. 마찬가지로 꿈도―프로이트가 말했듯―우리의 에고이즘만을 드러낼 뿐이고요.

작가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어요. 하나는 하루하루 그를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표면적인 자아의 삶, 다른 하나는 늘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휴식을 주지 않는 진정한 자아.

(p.95)


요즘 뮤지컬 '아가사'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 위 구절이 눈에 들었다. 낯선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건 늘 그의 자아-강박과 연관되어있다는 이야기.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휴식을 주지 않는 진정한 자아 이야기.

뒤라스의 말과 아가사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감상이 좀 더 풍부해지는 느낌이 든다. 뒤라스의 말을 읽을 땐 아가사를 생각하고, 아가사를 볼 땐 뒤라스의 말을 생각하는 2021년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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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눈들은 꽃이 되겠지. 새하얀 꽃들이 늙은 나무를 뒤덮으면 마르고 갈라진 나무껍질은 보드라운 꽃잎에 가려 보이지도 않겠지. 벅차게 흐드러진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며 코끝에 매화 향이 날아오는 듯했다. 바람이 불면 새하얀 꽃잎들이 나비처럼 팔랑일 것이다. 그러다 못 이기고 한꺼번에 떨어져 함박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그때 하얀 눈송이 하나가 날아와 가지 끝에 앉았다. 꽃잎 같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송이들이 느리게 내려오고 있었다. 눈이 꼭 꽃 같네, 꽃잎 같네. 언니는 꽃이 지기 전에 오라고 자주 말했었다. 꽃이 피어 있을 때도, 꽃이 다 떨어진 후에도 그랬다.

이제 알겠다. 금주 언니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

(p.44-45)

좋아하는 시인의 시에서 인중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천사들이 배 속 아기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르쳐 준 후 다 잊고 태어나라고 아기의 입술 위에 쉿, 손가락을 얹는데 그때 인중이 생긴다는 이야기. 손을 들어 인중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다른 세계에 다녀왔지만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그 세계의 빛이 깃들었음을 안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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