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에 제 얼굴을 준다. 관련된 두 단어를 연결하는 퀴즈처럼 나의 존재는 이름과 일대일로 매칭된다. 이름이라는 명사가 '무엇이라고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이르다'에서 파생된 것을 생각해 보면, 명칭만으로도 부르는 사람이 대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가늠할 수 있다. 결국 이름을 듣고 당사자를 떠올리는 일이란 그의 유일함을 되새기는 것과 같다.

(p.91)

그리고 <런 온>을 봤을 때 짜릿하고 통쾌해서 정수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젠 "공부를 좀 하라고. 젠더 감수성."이라는 말을 가볍게 던지는 인물(서단아)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재야에 숨은 여성 축구 코치, 대기업의 유능한 여성 실장, 엄마 몰래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여자 고등학생, 세계 랭킹 1위 여성 골퍼 사이에서 시대착오적인 농담과 장치는 살아남을 턱이 없었다. 모든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를 사수하고, 의지대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세계가 바로 <런 온>에 존재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성 서사가 양적 개선을 뛰어넘어 질적 개선으로까지 성장을 이룬 것이다. 더 놀라운 건 OTT 플랫폼에서 자막을 켜고 <런 온>을 시청할 때였다.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라'. 노라가 누구지? 등장인물 리스트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궁금하던 찰나, 실체를 알게 됐다. 바로 등장인물들이 자주 가는 카페 여성 사장의 이름이었다.

같은 방송국에서, 같은 해에 방영되었던 <부부의 세계>는 여우회 회원으로 등장했던 조연들의 이름을 이렇게 명시했다. '최회장 아내', '공지철 아내', '차도철 아내'. 조연이었지만 비중이 아주 적진 않았다. 오히려 최회장과 차도철의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극이 끝날 때까지 시청자는 이들의 이름을 영영 알 수 없었다. <런 온> 또한 조연들을 역할의 기능으로서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라'가 아닌, '카페 사장'이라고 기재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런 온>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이름을 새겨 넣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않아도 이건 <런 온>의 규칙이었다.

(p.131-132)

📚어제 그거 봤어?, 이자연, 상상출판, 2021

원에게 추천을 받아 읽게 된 책. '네가 좋아하는 신입사관 구해령과 런 온에 대한 글이 있더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에 예약을 걸었는데, 이전 대출자가 빠르게 반납해준 덕분에 금방 빌려볼 수 있었다.

비단 TV 뿐만 아니라 나는 영화나 공연을 볼 때도 여자의 이야기를 유심히 본다. 영화는 그래도 독립영화 쪽에서 여성의 이야기가 많은 편인데, 공연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애써 젠더 프리로 길을 열어놔도 다음 시즌엔 다시 문이 닫힌다. 그래서 레드북이나 아가사처럼 온전히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세상에서, 나를 말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줄 안나와 남들이 제 아무리 최고의 '여류 작가'라 불러도 자신을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라고 칭하는 아가사. 이렇게 단단하고 유일한 여자들을 만날 수 있어서 즐거운 2021년이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드라마만 언급했지만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글도 많다. 총 29편 중에 8편만 보았고, 21편에 대한 글은 그냥 읽었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며 드라마 '블랙독'과 '스토브리그'를 더 늦기 전에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연말엔 나의 인생드라마 '런 온'을 블루레이로 정주행 해야지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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