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들의 도시 세계문학의 천재들 2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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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생일이 같고, 책 코드가 잘 맞는 ssun0915님께 my favorite book 릴레이를 받았을 때, 이런 릴레이를 받아보는 게 처음이라 잠시 얼떨떨 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 책에 대해 이야기 해야지, 했던 책이 있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만, 듣는 사람은 열에 아홉은 낯설어하는 독일 작가 발터 뫼르스의 소설 꿈꾸는 책들의 도시. 이 책을 구매했던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마트 안에 있는, 지금은 없어진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발견했다. 표지에 가득 찬 책과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제목에 이끌려서 독일, 그것도 판타지 소설을 겁 없이 집어 들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사 들고 왔지만 시작은 결코 쉽진 않았다. 독일 소설이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이 책을 시작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건 오히려 판타지였다. 그 당시 너도나도 읽던 해리포터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내가 모두가 시인인 공룡족의 도시 린트부름에서 태어난 젊은 공룡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 그는 대부로부터 신비한 원고 한 뭉치를 유산으로 받게 되고, 원고의 강렬함과 풍부한 감성에 매혹되어 실종된 저자를 찾아서 모든 책들이 만들어지고, 명성을 얻으려는 작가들이 몰려들고, 출판사, 인쇄소, 고서점들이 즐비한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읽겠다고 덤벼들었던 거다. 적어도 해리포터는 사람인데, 내가 읽으려는 이 책의 주인공은 공룡이었다. , 삽화가 어딘가 모르게 비범하다고 생각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어야지, 하게 만든 건 이 책의 친절한 경고덕분이었다.

 

이것은 병약하고 겁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한테는 차라리 이 책을 다시 책 진열대 위에 올려놓고 슬그머니 아동문고 쪽으로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략) 여기서 전개될 이야기는 어느 장소에 대한 것이며, 그것을 읽는 일이야말로 진짜 모험이 될 것이다! (중략) 그렇다. 나는 이야기 첫머리에 내 독자들 가운데서 전혀 겁도 없고 대담무쌍한 소수의 독자들만이 동참하도록 제한했으니, 이제는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반갑다, 내 용감한 친구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모험을 새길 만한 좋은 재목감이다! (p.13-14)

 

나를 도발하는 경고문에 넘어갔던 것도 있고, 책 뒤표지에 열병에 걸린 듯 이야기의 스타일에 도취되어 책이 끝날 때까지 정신없이 책장을 넘겼다.’는 한 줄 평에 혹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 덕분에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는데, 한 줄 평을 쓴 사람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 빠져들어서 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이 책에 푹 빠져있었다. 소름이 돋기도 했고, 감정이입을 과하게 한 나머지 울기도 하면서 말이다. 책에 관해서 한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오롯이 살아 숨 쉬는 캐릭터들을 그려낸 작가가 그저 대단했고 감사했다. 무슨 작가가 삽화까지 이렇게 완벽하게 그렸지? 하면서 감탄했으며 이 책을 출판해준 들녘출판사가 고마웠다. 과장 같지만 사실이다. 많은 소설을 읽어 왔지만 이 책을 읽을 때만큼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읽었던 책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이 책을 선택하고, 읽기로 결심한 소수의 독자가 된다면 당신도 발터 뫼르스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자신은 그저 이 책을 쓰지 않았고 다만 번역하고 삽화를 그렸을 뿐이라고 밝히는 작가지만 에 관해 이렇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낸 걸 보면 알 수 있다. , 이 사람은 책을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구나 하고 말이다.

 

이 책을 접했던 덕분일까, 나는 시작이 쉽지 않았던 많은 소설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정유정의 7년의 밤이 그랬고, 최근에는 미비포유가 그랬다. 두 권 모두 재밌게 읽었다 손에 꼽는 책들인데, 시작은 쉽지 않았다. 이 책이 그랬고, 위 책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작이 어려운 책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떠올린다. 낯설고 어려웠지만 내 인생의 책이 되어버린 이 별난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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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변주곡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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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에세이가 책의 제목처럼 밤 열한시에 읽기 좋은 책이었다면, 고백하건대 이 책은 자정을 넘겨서 세시나 네시 즈음에 읽기 좋은 에세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작가의 전작 생각이 나서를 참 좋아해서 출간되는 책들을 꾸준히 챙겨 읽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집중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작가의 감성이 변했다기 보다는 책을 읽는 내 감성이 변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좋아했던 부분은 이런 부분이다.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게 되면, 여자는 남자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르게 말한다. 나는 그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p.15)

 

이상한 일이다. 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은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단단하고 부서지지 않는 사랑과 평화를 집 안에 가둬두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바람 불고 햇살이 비치는 거리를 그리워한다. (p.17)

 

우리는 서로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소중한 것을 공유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쉽게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 살며,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사랑한 것은 각자가 만들어낸 허상.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 점점 멀어지고 있던 거였다. (p.269)

 

대답 없음도 대답이다라던 잊지 못할 구절처럼, 그게 그렇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문장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심리를 문장으로 표현한 그녀의 글들을 참 좋아했다. 아쉽게도 이 책에는 그런 글보다는 좀 더 몽환적인 글이 많아서 읽기 어려웠던 것 같다. 지난 책들로 그녀의 감성을 좋아했던 나였기에 이 책을 읽는 것을 어려워한 것도,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힘겹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글의 다양하다면, 반응도 다양한 법이니까.

 

위에 좋아하는 구절을 모아봤지만, 사실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이 구절이다.

 

약간 변명 같지만 그때만 쓸 수 있는 글도 있다고,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쁘지 않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때의 글이 지금의 내 성에 차지 않아도, 뭐 별로 상관없지 않나, 지금도 흘러가는 인생, 이다. (중략) 이제와서 족해도 부족해도, 언젠가 존재했던 마음이고 기억이다. 그러니 그건 그것대로 소중히, 작은 그릇에 담아 선반 위에 올려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힘으로 인해 여전히 흘러가는 인생, 이다. (p.308-311 그리고 남은 이야기 중에서)

 

이 구절을 구절대로 공감한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하며 읽었다. 약간 변명 같지만 그때만 읽을 수 있는 글도 있다고,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쁘지 않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때의 글이 내 성에 차지 않아도, 뭐 별로 상관없을 수도 있겠다고. 작가의 말처럼 지금도 흘러가는 인생이며 나는 내일도 또 다른 글을 읽을 테니까. 애석하게도 나와는 맞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겐 아주 잘 맞는 책일 수도 있다. 내게도 그런 책이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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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의 기억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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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등 뒤엔 천 개의 엇갈린 기억이 존재한다는 문구를 내세운 에쿠니 가오리의 감성 미스터리 등 뒤의 기억은 감성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이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 히나코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물론, 히나코의 과거와 히나코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미스터리하게 풀려서 미스터리는 미스터리인데, 에쿠니 가오리의 감성이 더해져서 감성 미스터리라고 부르는 걸까 싶었다.

 

책 소개에서, 이번 소설 역시 그녀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정서를 고수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소설적 구도는 기존 작품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랬다. 에쿠니 가오리의 모든 소설을 읽어온 건 아니지만, 보통은 적은 수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의 시점에 충실했던 것 같은데 이번 책은 많은 수의 인물의 등장과 시점이 나온다. 인상 깊은 구절을 적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메모를 하며 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익숙하진 않았지만,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인물들 간의 개연성 덕분이었다. 자칫 집중하기 어려웠던 낯선 구성이 집중력을 살리는 데 큰 몫을 했다.

 

행복했던 기억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히나코를 중심으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그런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사나오, 과거에 얽매여 히나코 주변을 맴도는 단노 등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얽혀있다는 점이 재밌었다. 여기저기 던져놓은 미스터리들은 끝내 진실이 밝혀지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이들의 관계는 계속해서 얽혀있으므로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 역시 연장선상이겠구나 싶어서 나름대로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어쩌면 이들에겐 꽉 닫힌 결말보다는 이런 열린 결말이 해피엔딩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한 인물을 콕 집어 이야기해보자면, 역시 히나코다. 히나코를 보고 있으면 에쿠니 가오리의 또 다른 소설 하느님의 보트속 요코가 자주 떠올랐다. 한 번 지나간 일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며, 언제나 거기에 있다며, 지나간 일만이 확실하게 우리 거라던 요코 역시 행복했던 기억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히나코와 요코, 두 사람의 공통점이 눈에 밟혔던 건 최근에 읽었던 에세이 속 구절 때문이다.

 

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p.162)

 

히나코를 살게 하는 건, 동생 아메코와의 기억이었고 그 기억이 가상의 여동생을 만들었다. 요코는 딸 소우코와 함께 살아가지만 요코를 살게 하는 건 애석하게도 소우코 아빠와의 기억이었다. 이런 둘을 이해한다기보다는 짠하게 여기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게 맞겠지만, 때때로 부럽기도 하다. 한 사람을 살게 할 만큼, 그 사람을 위로한 다른 사람과의 시간이란 대체 어떤 시간일까 싶어서.

 

그러나 글을 여기서 끝내긴 싫다. 히나코도 요코도 혼자인 것 같지만, 결국 혼자가 아니니까. 물리적으론 떨어져있어도 히나코를, 요코를 생각하는 가족이 있지 않은가. 지금껏 두 사람을 살게 한 기억도 좋지만, 그 기억은 이만 내려놓고 이제부터는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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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깨물기
이노우에 아레노 외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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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는 기획이 마음에 들었던 기억 깨물기. 익히 알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를 비롯해서 이노우에 아레노, 가와카미 히로미, 고데마리 루이, 노나카 히라기, 요시카와 도리코 등 일본의 대표 여류 작가들의 쓴 여섯 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여섯 편의 이야기 모두,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재로 초콜릿이 등장하는데,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초콜릿을 주제로 한 사랑 이야기. 여섯 편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에게 초콜릿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기억이 되었으며 그들은 초콜릿을 깨무는 것처럼 기억을 깨무는 것이다 라고나 할까.

 

어차피 에쿠니 가오리를 제외하고 다른 작가들은 몰랐던지라- 처음부터 읽자고 생각해서 첫 단편인 <전화벨이 울리면>부터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의 초콜릿은, 대학생인 와 불륜 관계에 있던 유부녀 교코가 항상 핸드백에 넣고 다니던 초콜릿이다. 자신의 남편을 감시하던 교코와 그런 교코를 돕는 ’. 그들의 일에 성과아닌 성과가 있던 날, 교코는 핸드백에서 초콜릿 대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는 그런 교코 씨의 핸드백에서 초콜릿을 꺼내 은박지를 벗겨 교코 씨의 입술 사이에 밀어 넣는다. 한 개, 또 한 개. 씁쓸한 초콜릿인 동시에, 위로의 초콜릿이기도한 <전화벨이 울리면>을 읽으면서 , 이 책의 매력은 여기에 있구나싶었다. 초콜릿이 주제인 것 같지만, 초콜릿은 소설에 등장하는 소재에 가까울 뿐이라는 사실. 우리네 이야기 속에 녹아든 달콤 쌉싸래한 초콜릿의 기억이 이 책의 진짜 주제인 셈이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인상 깊지 않았던 단편 <늦여름 해 질 녘>을 지나, 가와카미 히로미를 기억하게 만든 <금과 은>을 지나고 두 편의 단편을 더 지나서 마지막으로 만난 요시카와 도리코의 단편 <기생하는 여동생>은 이 책을 고른 내 선택을 보람 있게 만들어주었다.

 

<기생하는 여동생>은 정반대 성격을 가진 자매의 이야기다. 매사에 계획적이고 성실한 언니 가야노의 시점으로 쓰여진 이 단편은, 제멋대로에 뻔뻔하고 생각 없이 사는 듯한 동생 리미코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데서 시작한다.

원룸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의 종합병원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가야노와, 친구가 경영하는 레게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리미코, 생활 리듬이 완전히 다른 둘. 리미코는 가야노가 겨우 잠이 들 때 즈음에 들어와서 부산스럽게 야식을 먹기도 하고, 가야노 입장에서는 비상식적인 선물한 잎 깊숙이 베어 먹은 도넛, <반액 세일> 딱지가 붙은 딸기 찹쌀떡을 덜렁덜렁 들고 공짜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아이였다.

나란히 TV 앞에 앉아 NHK 홍백가합전을 보고 있으면, 출연진들에 대해 삐딱하게 말하는 가야노와 달리 편을 들어주는 리미코. 그런 리미코의 말에 폴리애나를 능가한다는 가야노의 말에 리미코는 뭐야, 그거, 좋은 점 찾기 놀이?”라면서 발을 버둥거리고 깔깔거린다. 그런 리미코를 두고, 가야노는 애당초 그런 아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험담을 하지 않는, 선한 아이. 리미코의 긍정적이고 선한 면을 볼 때마다 얘한테는 진짜 못 당하겠다싶은 가야노는 그런 마음이 든다. 50억 호화 주택에서 사는 셀러브리티에게도,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보를 장식하는 패션모델에게도, 제 돈으로 버킨백을 구입한 친구에게도 가져본 적 없는 부러움을, 이 사회의 밑바닥을 벅벅 기고 있으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것이 제대로 취직도 하지 않고 연금도 건강보험료도 내지 않은 채 마냥 부초처럼 흐늘흐늘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는 리미코에게 말이다.

 

이성간의 사랑 이야기만 있을 줄 알았던 내 예상을 훅, 깨고 들어와서 잊지 못할 단편으로 남은 <기생하는 여동생>. 동생이 있긴 해도, 리미코 같은 동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가야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가야노의 시점이 여러모로 공감이 갔다.

 

가야노에 대해 생각하면서, 가야노가 말하는 리미코 이야기는 비단 리미코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미코의 이야기 속에 가야노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건 그 누군가와 함께 한 나 자신을 떠올리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 밑줄 친 구절

 

하지만 젊은 애들이 북적거리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햄버거 정식을 먹고 있는 사이에, 가야노는 뭔가 자신의 인생이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아무 보람도 없는 듯한 허망함을 느꼈다.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햄버거가 예상 밖으로 맛있었기 때문이다. 가야노가 항상 먹어온, 두부 집 콩비지에 닭고기 다짐육을 넣어 직접 만들었던 수제 햄버거보다 훨씬, 단연, 압도적으로.

한 입, 또 한 입, 햄버거를 베어 먹을 때마다 허망함은 점점 더해갔다. 누군가 정해놓은 룰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뭔가 소중한 것을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괌보다 하와이 쪽이 레벨이 높다니, 그건 대체 어느 누가 정했는가. 페키니즈보다 미니어처 닥스훈트 쪽이, 프랜차이즈 라면집보다 고집불통 영감님이 근근이 꾸려나가는 수제 라면집이 더 고급이라고 대체 어느 누가 정했단 말인가. (p.182)

 

하지만 나는 항상 너한테 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보다 엄청 불성실하고 마구잡이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네가 훨씬 더 풍성하고 즐거운 인생을 사는 듯한, 그런 마음이 항상 든다고.”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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