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깨물기
이노우에 아레노 외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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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는 기획이 마음에 들었던 기억 깨물기. 익히 알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를 비롯해서 이노우에 아레노, 가와카미 히로미, 고데마리 루이, 노나카 히라기, 요시카와 도리코 등 일본의 대표 여류 작가들의 쓴 여섯 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여섯 편의 이야기 모두,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재로 초콜릿이 등장하는데,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초콜릿을 주제로 한 사랑 이야기. 여섯 편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에게 초콜릿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기억이 되었으며 그들은 초콜릿을 깨무는 것처럼 기억을 깨무는 것이다 라고나 할까.

 

어차피 에쿠니 가오리를 제외하고 다른 작가들은 몰랐던지라- 처음부터 읽자고 생각해서 첫 단편인 <전화벨이 울리면>부터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의 초콜릿은, 대학생인 와 불륜 관계에 있던 유부녀 교코가 항상 핸드백에 넣고 다니던 초콜릿이다. 자신의 남편을 감시하던 교코와 그런 교코를 돕는 ’. 그들의 일에 성과아닌 성과가 있던 날, 교코는 핸드백에서 초콜릿 대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는 그런 교코 씨의 핸드백에서 초콜릿을 꺼내 은박지를 벗겨 교코 씨의 입술 사이에 밀어 넣는다. 한 개, 또 한 개. 씁쓸한 초콜릿인 동시에, 위로의 초콜릿이기도한 <전화벨이 울리면>을 읽으면서 , 이 책의 매력은 여기에 있구나싶었다. 초콜릿이 주제인 것 같지만, 초콜릿은 소설에 등장하는 소재에 가까울 뿐이라는 사실. 우리네 이야기 속에 녹아든 달콤 쌉싸래한 초콜릿의 기억이 이 책의 진짜 주제인 셈이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인상 깊지 않았던 단편 <늦여름 해 질 녘>을 지나, 가와카미 히로미를 기억하게 만든 <금과 은>을 지나고 두 편의 단편을 더 지나서 마지막으로 만난 요시카와 도리코의 단편 <기생하는 여동생>은 이 책을 고른 내 선택을 보람 있게 만들어주었다.

 

<기생하는 여동생>은 정반대 성격을 가진 자매의 이야기다. 매사에 계획적이고 성실한 언니 가야노의 시점으로 쓰여진 이 단편은, 제멋대로에 뻔뻔하고 생각 없이 사는 듯한 동생 리미코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데서 시작한다.

원룸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의 종합병원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가야노와, 친구가 경영하는 레게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리미코, 생활 리듬이 완전히 다른 둘. 리미코는 가야노가 겨우 잠이 들 때 즈음에 들어와서 부산스럽게 야식을 먹기도 하고, 가야노 입장에서는 비상식적인 선물한 잎 깊숙이 베어 먹은 도넛, <반액 세일> 딱지가 붙은 딸기 찹쌀떡을 덜렁덜렁 들고 공짜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아이였다.

나란히 TV 앞에 앉아 NHK 홍백가합전을 보고 있으면, 출연진들에 대해 삐딱하게 말하는 가야노와 달리 편을 들어주는 리미코. 그런 리미코의 말에 폴리애나를 능가한다는 가야노의 말에 리미코는 뭐야, 그거, 좋은 점 찾기 놀이?”라면서 발을 버둥거리고 깔깔거린다. 그런 리미코를 두고, 가야노는 애당초 그런 아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험담을 하지 않는, 선한 아이. 리미코의 긍정적이고 선한 면을 볼 때마다 얘한테는 진짜 못 당하겠다싶은 가야노는 그런 마음이 든다. 50억 호화 주택에서 사는 셀러브리티에게도,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보를 장식하는 패션모델에게도, 제 돈으로 버킨백을 구입한 친구에게도 가져본 적 없는 부러움을, 이 사회의 밑바닥을 벅벅 기고 있으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것이 제대로 취직도 하지 않고 연금도 건강보험료도 내지 않은 채 마냥 부초처럼 흐늘흐늘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는 리미코에게 말이다.

 

이성간의 사랑 이야기만 있을 줄 알았던 내 예상을 훅, 깨고 들어와서 잊지 못할 단편으로 남은 <기생하는 여동생>. 동생이 있긴 해도, 리미코 같은 동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가야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가야노의 시점이 여러모로 공감이 갔다.

 

가야노에 대해 생각하면서, 가야노가 말하는 리미코 이야기는 비단 리미코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미코의 이야기 속에 가야노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건 그 누군가와 함께 한 나 자신을 떠올리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 밑줄 친 구절

 

하지만 젊은 애들이 북적거리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햄버거 정식을 먹고 있는 사이에, 가야노는 뭔가 자신의 인생이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아무 보람도 없는 듯한 허망함을 느꼈다.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햄버거가 예상 밖으로 맛있었기 때문이다. 가야노가 항상 먹어온, 두부 집 콩비지에 닭고기 다짐육을 넣어 직접 만들었던 수제 햄버거보다 훨씬, 단연, 압도적으로.

한 입, 또 한 입, 햄버거를 베어 먹을 때마다 허망함은 점점 더해갔다. 누군가 정해놓은 룰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뭔가 소중한 것을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괌보다 하와이 쪽이 레벨이 높다니, 그건 대체 어느 누가 정했는가. 페키니즈보다 미니어처 닥스훈트 쪽이, 프랜차이즈 라면집보다 고집불통 영감님이 근근이 꾸려나가는 수제 라면집이 더 고급이라고 대체 어느 누가 정했단 말인가. (p.182)

 

하지만 나는 항상 너한테 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보다 엄청 불성실하고 마구잡이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네가 훨씬 더 풍성하고 즐거운 인생을 사는 듯한, 그런 마음이 항상 든다고.”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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