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모든 기운이 다 소진되는 날은 일요일이다. 안양에 있는 교회에 다녀오는 4호선에서 나는 노약자석에 앉아서 오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진다. 단 30분의 지하철 탑승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고 지쳐 일단 집에 오면 침대에 쓰러져 잠을 청한다. 그리고 두세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그러고 나면 저녁이 되고, TV를 보기 시작한다.  

TV가 없다보니 TV는 거의 보지 않았었는데 요즘엔 하릴없이 TV를 보는 것도 좋다. 그러다보니 고정적으로 보는 프로그램도 두개나 생겼다. 하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는 가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노도철 PD의 <반짝반짝 빛나는>이다. 반짝반짝 얘기도 할 게 많은데, 오늘은 일단 머릿속을 스믈스믈 기어다니는 나는 가수다 생각부터.  

자다가 깨니 7시라 정규방송 시간을 놓쳐 급 다운로드 받아서 봤다. 스포일러 방지책으로 포털, 페이스북, 트위터 등 일체 금지. 일단 방송을 놓치니 좋은 점도 많구나. 과도한 음악 외 편집 분량을 원하는 부분만 골라서 보다 보면 1시간 30분짜리를 1시간만에 보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둥둥두두둥둥 이런 것도 너무 많아서 ;;;;; -_-

오늘 방송은 김건모가 떨어지고 재도전의 기회를 준 것 자체가 문제가 되었는데, 시청자들을 우롱한다, 뭐 이런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별로 우롱 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헐, 하는 생각이 좀 들었던 건 사실이다. 이소라가 뛰쳐나간 건 좀 놀랐고, (그걸 방송에 내보내는 건 또... -_-) 김제동이 재도전의 기회를 달라고 한 건 1등 매니저의 헐리우드 액션인 것 같았고, 후배들이 함께 울어주는 건 선배에 대한 예우이고,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작진이 재도전의 기회를 드릴테니 받아들일지 말지를 김건모더러 선택하란다. 이런 영악하신 분들 같으니... 다루기 어려운 가수들 모아놓고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받아 당혹스러운 상황이 오니, 선택은 슬쩍 가수의 몫으로 돌리다니. 어쨌든 100점은 아니지만, 100점짜리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40점쯤 되는 차선의 위기관리 능력이었던 것 같기는 하다. 40점짜리가 70점쯤이 되려면 김건모가 재도전을 하지 않겠다, 라는 선택을 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러면 기사는 '김건모, 깨끗이 승복, 패배 받아들여' 뭐 이런 식으로 나고 뭐 어쨌든 두마리 토끼를 어설프게는 잡았을텐데...) 김건모가 또 그 기회를 덥썩 잡았으니... 그러면서도 저보다는 후배들이 원하니..... 라고 말하니 "아이고 이사람아..."라고 해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뭐.. (김건모가 아니라 이건 모?) 차라리 "제가 욕심이 나네요. 다음번에는 더 잘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윤도현은 처음부터 질 것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해 계속 노력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줬다. 지난 주에도, 모두가 잘 알려진 대표곡을 들고 나와 부르는데 윤도현은 자신은 락이라는 장르를 하기 때문에, 라는 고민을 가지고 차라리 생소한 곡으로 호흡하자,는 시도를 했었다. 나는 그 무대보다 나는 그 시도가 재밌었다. 이번에도 곡 선정 핸디캡이 가장 심했던 사람 중 하나가 윤도현이었는데, 자기 스타일로 가져오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역시 핸디캡은 때론 파워풀한 자극제이기도 하구나, 하는 걸 다시 느낀다.

김건모는 떨어진 게 립스틱 때문, 뭐 이런 말을 하는데, 이건 전적으로 PD가 김건모 예우 차원에서 한 말일텐데, 본인 역시 립스틱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걸 보고 또 좀 놀랐었다. 립스틱이 전혀 플러스 요소가 아니었던 것은 맞지만 립스틱 때문에 마이너스를 준 사람들도 없었을게다. 김건모의 무대가 가졌던 문제는 나빴던 게 아니라 안정적이었던 거다. 적어도 이 승부에서는. 그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니 졌다고 슬퍼할 것도, 노할 것도, 비참해할 것도 없는 거다.

이건 청중평가단이 가장 좋았던 무대 하나씩을 꼽아 가장 좋았던 무대로 제일 적게 꼽힌 사람이 떨어지는 거다. 제일 못한 사람을 뽑아서 그 사람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 두개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명확하다. 책의 평점으로 생각해보면 A라는 책은 꾸준히 별 네개 정도의 평점 정도를 받는 책. B라는 책은 누군가에게는 전혀 이해 불가능한 별 하나짜리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별 다섯을 받는 책이라면 평균은 A가 높아도 별다섯을 받은 적이 없는 A가 결론적으로는 떨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 방송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두에게 두번째, 세번째 정도인 안정적인 무대를 만들어내는 건 소용이 없는 거다. 누군가에게 가장 좋은 무대가 되어야 하고, 그 누군가가 가급적이면 많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 박정현이 1위를 했을 때도 느꼈고, 이번에 더욱 명확해졌지만 청중 평가단은 소름끼치는 고음, 파워풀한 음악, 신나는 무대 등을 통해 본인이 어떤 강렬한 전율을 경험했을 때 그 무대가 가장 좋았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번 주 순위가 있었다면 더 명확해졌겠지만, 지난 주 순위가 박정현-김범수-김건모-윤도현 순이었다는 걸 보면 명확하다. (사실 이 기준에 나는 꽤 불만이 많지만 - 가창력 있는 가수들을 별로 안좋아해서 ㅋㅋㅋ -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여기에 이번주엔 아마 하나가 더해졌을 것이다. 곡해석의 새로움, 가수 이미지의 변신 같은 것들. 한 사람이 이렇게 자꾸만 새로워지는 대중들의 요구를 맞출 수는 없을테니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계속 새로운 무대를 선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번째 탈락자가 단추를 잘 끼워줬었어야 했을텐데, 탈락이라는 걸 그렇게 비참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어도 좋았을텐데, 그건 누구보다 또 김건모가 잘 할 수 있었을텐데, 왜 거기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고, 비통해하고, 승부를 번복하고자 하는건지...그냥 승부를 즐거운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 어제 우연히 봤던 무한도전 미남투표 같은 건 비장하고 진지하면서도 참 웃기고 즐겁더만.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라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승부를 낸다는 건 역시나 그만큼 힘든 일인건가, 역시 모자란듯 한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승부를 보는 게 더 즐거운 거였나, 뭐 이런 생각도 들고...

여튼, 앞으로의 방송의 긴긴 여정을 어떻게 헤쳐나가려고 이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뭐 알아서 하겠지만. 그냥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고, 즐거이 1등하고, 즐거이 떨어지고, 그럴 수는 없는 건가, 승부를 필요 이상으로 비장하게 만들어놓은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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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가수다 - 이건 쇼 잖아요..
    from 세상에 분투없이 열리는 길은 없다 2011-03-21 08:22 
    이제 겨우 본 경연을 한차례 벌인 이 프로그램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약점이 많은 프로그램이다.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본 경연 삼십분 정도를 뺀 나머지 한시간 반의 구성이 너무 실망스럽다.평론가들의 이야기도 너무 토막토막이고,가수들은 매번 나와서 똑같이 '너무 부담이예요'란 이야기만 반복한다.저만한 사람들과 할 이야기가 그리 없단 말인가.그래도 이번엔 노래 자르고 인터뷰하는 건 좀 많이 좋아졌더라..그래, 아직 본 게임 시작전이라 그런 거라고 넘어
 
 
치니 2011-03-21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한도전의 미남이시네요,는 오히려 대체로 좋은 반응 - '오디션, 선거 풍토, 외모지상주의를 한번에 풍자하면서 웃기기까지 해준' 프로젝트로 거듭났더라고요. ㅎㅎ 역시 드라마는 연출, 예능은 피디의 능력이 제일 중요하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듯합니다요.

<나는 가수다>는 그 발상부터가 좌충수와 무리수를 둔 발상이니 워낙 한계가 뚜렷해서 저는 본방 보면서도 그닥 충격적이지 않았는데, - ㅉㅉ 저럴 줄 알았다, 뭐 이런 심정 - 막상 나중에 보니 난리들이 났대요.
다른 건 다 떠나서 웬디님 말대로 저 역시 제발 좀 덜 비장하게 했으믄 하는 소망이 있네요. 그런 면에서 이소라는 좀 심해서 자제했음 싶고(노래가 좋은 건 별개로), 윤도현이 지난 주에 (옆에서 이제동이 아무리 난리쳐도) 그냥 편하게 하겠다고 하는 정도로 좀 걍 게임을 즐기는 정도로 제작진에서 편집에 신경 쓰길 (사실 이제까지 하는 걸 보면 기대는 별로 안되지만) 바라고 있습니당.

웽스북스 2011-03-21 12:12   좋아요 0 | URL
무한도전 미남이시네요 보면서 진짜 많이 웃었어요 ㅋㅋㅋㅋ 진짜 정신 쏙빼놓고 웃으면서 재밌게 봤어요. 확실히 연출의 능력이 중요하고, 그 전에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연출인가, 뭐 이런게 극명하게 보였던 예인 것 같아요.

저도 뭐 충격적이지는 않았는데, 어쩌려고 저러나 싶더라고요. 대중들은 강렬한 경험을 원한다는 게 두번의 방송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는데, 이제 서로가 서로를 소모하며 지치게 되는 일만 남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소라는 좀 심하긴 했지만, 연출이 방송에 내보내는 걸 좀 적절히 했으면 어땠을까 싶더라고요. (실제로 다른 방송에서도 이런 경우 많지 않겠어요? ;; - 이거 너무 팬심?) 저도 좀 놀라긴 했는데, 이소라 홈페이지 보니 완전 난리가 났더라고요 ;;;;; 왜 좋은 사람들 데려다 놓고 프로그램을 이렇게 만드나 싶어서 좀 안타까웠달까요 ;;;

2011-03-21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21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디 2011-03-2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윤도현의 노력이 놀랍고 다시 보였어요. 락이라서 대중성이 없다고 계속 말하지만 또 '윤도현이여서' 인디신에도 자기 지분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거 같은데, 그 사이에서의 치열한 고민이 보이는거 같아요.

웽스북스 2011-03-31 00:5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윤도현 이래저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봤어요. 윤도현이야말로 진짜 묘한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죠. 암튼, 윤도현의 무대는 늘 흥미로웠어요. ㅎㅎ

Kitty 2011-03-2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안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저 하나뿐인가 합니다?;;;;;

... 2011-03-21 15:36   좋아요 0 | URL
저도 있어요. 이해 절대 안되고 있는중...하하하

다락방 2011-03-24 08:52   좋아요 0 | URL
저도 안 봅니다! 우하하하.

웽스북스 2011-03-31 00:55   좋아요 0 | URL
셋이 크로스~ 하시고요 ㅎㅎ

2011-03-22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31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1-03-2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프로는 안보고 있어요.나름 가수 경력이 되는 사람들을 가지고 뭐하는 건지...

웽스북스 2011-03-31 00:55   좋아요 0 | URL
그래도 무대는 볼만하답니다 ㅋ

다락방 2011-03-24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봤어요? 웬디님 책냈네요. ㅋㅋㅋㅋㅋ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8902114

ㅋㅋㅋㅋㅋ

웽스북스 2011-03-31 00:56   좋아요 0 | URL
왜이래요 다락방님 ㅋ
저 수녀될까요?

버벌 2011-04-06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는 가수다 이 프로그램 무지 기대하고 있었어요. 일밤의 팬이기도 했고(전 일박이일안봐요. 이상하게 엠비씨아니면 잘 안보게 되는... 저도 참 알수가 없는....) 무엇보다 김영희 피디님이셨으니. 방송보면서 너무 대단하다 박수치고, 눈물도 흘리고 김건모사건에 왜 저리 못났지? 라는 생각을 했고, 나서는 김제동에게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당신이 그러면 사람들 뿔날거야.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인터넷 뒤집어졌더군요. 전.... 새로운 포멧 보다 그냥 이렇게 갔으면 해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승부를 필요이상으로 비장하게 만들어놓는거 아닌가? --> 적극 동감합니다. 하지만 경쟁이 없었다면 그런 무대들이 안 나왔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 처음에 이소라가 떼쓰는 걸 보고 인상을 썼는데 바로 다음주에 나와서 사과를 하는게 아니라. 이대로 보내기 싫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하고 싶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그대로 공감이 되더라구요. 위에 어느님 말대로 편집을 좀. 신경을 썼더라면....... 아. 잠와요 웬디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