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 비.
좋아.
우리의 마르탱파주아저씨는 이런날의 마음을 시적무정부상태라고 매우 적절하게 표현해주셨다. 아. 정말. 그렇다. 어제까지 나를 지배하고, 나를 11시까지 야근씩이나 하게 만들었던 그 정부가 사라져 오늘 나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는다. 노닥노닥. 음악을 찾아들으며 슬금슬금 무언가를 읽고 또 끄적인다. 이럴 거면 어제 왜 야근을 한걸까. 라고 묻는 내게 선아야, 그래도 그건 달라, 라고 해주는 K가 있는, 참 좋은 날이다. 그래. 어제의 쩔고 상쾌한 야근후 기분은 그 나름의 재미가 있는 거지.
C는 비가 와서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했다가 남자친구에게 경제관념이 없다는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비와 삼겹살과 경제관념의 상관관계를 전혀 모르겠는 나로서는, 흠, 좀있다가 통계프로그램 열어서 상관분석이라도 돌려봐야하나, 하는 기분이고.
언니, 그럼 비오는 날에는 뭘 먹어야 되나요? 라고 물어보는 그녀에게, 나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먹고 싶은 걸 먹는 거야, 라고 답해 삼겹살을 먹고 싶은 그녀의 마음에 힘을 더해주었다. 비에 어울리는 음식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음식보다 더 먹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오늘에 어울리는 음식 아니겠니. 그녀는 힘차게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N은 오늘 저녁에 라면을 끓여먹겠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쌀국수를 먹고싶다. 하지만 나는 너무 착하니까,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는 K의 바람을 들어주어 김치찌개가게로 갔는데, 예상치 못했던 오이지가 나왔다. 오이지를 먹을 때마다 나는 조상님들의 지혜에 감탄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식 중 하나. 결국 오이지를 두접시나 비우고 기쁜 마음으로 우산을 쓰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쌀국수 집을 지나던 K의 말. 아. 쌀국수 먹을걸. 생각을 못했네. 이런. ㅜ_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