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소나타

단 한 가지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 이라고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처절하게 외친다. 그렇다면, 어느 때의, 어떤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돌이켜져야 하는 것은, 돌이킨다 한들, 돌이킬 수 있는 것이 될까.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째깍째깍 시계소리와 달그락 달그락 수저 소리만 나던 밥상머리와, 제 할 일, 제 갈 길에 바쁜, 그러나 정작 서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 물질적 공급이라는 역할을 충족시킬 수 있을 때에야 세워질 수 있는 권위, 그리고 그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도, 그 한자락을 놓지 못해 폭력으로 변해버리는 권위의 모습, 이런 것들이 결국 이 영화의 중-후반의 비현실적이리만치 처절한 파국의 모습을 불러오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먼저, 더 많이 소통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좀 더 솔직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정말 돌이키고 싶은 현실이 우리 앞에 찾아왔을 때, 그 때를 위해 어쩌면 우리는 '잘 올라서는 법'이 중시되는 세상에서,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걸음 내려서는 법'을 배워야 할 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인 파국이 정신적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랜토리노

누군가는 그를 클간지라 불렀다. 아.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클간지라니. 일단 클간지님에게 감탄 한 번. 그러니까, 클간지에게 오직 간지만 존재했다면, 나는 일단 그에게 감탄부터 보내고 보는 방식으로 리뷰를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간지는 그저 간지를 위한 간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나이가 되기 전에는 절대 할 수 없는 생각, 혹은 이를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통념에 나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물론 가끔 몇몇 튀는 난놈들이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그러니까, 클간지의 유언과도 같은 영화라는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이 '복수'는 그 나이의 그가 아니었다면 생각해내기도, 그리고 해내기도 힘들었을 그 무엇. 똑똑하지만 절대 약삭빠르지 않은, 유일한 해법이지만, 안다고 누구나 할 수는 없는, 나는 감히, 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영화 속 월터의 모습은 사실 굉장히 보수적인 미국중심적 인종차별주의자. 세상에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고, 자식들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그저, 이모습 저 모습을 보며 크르렁 크르렁거리기 일쑤인. 세상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인. 노인네일 뿐이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일생 마음에 남는 죄라고는 결혼 이후 다른 여자와 키스한 것 (1회) 요트를 팔고 세금을 내지 않은 것 (1회) 그리고 두 아들을 마음으로 사랑할 줄 몰랐던 것. 뿐인. 그러니 어쩌면 그 삶은 매우 건강한, 참전자가 당연히 갖게 되는 '어쩔 수 없음의 논리'를 갖지 않고, 실은 '어쩔 수 없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가책을 평생 지니고 살아온 여린, 보수였던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 보수가 존재해야 한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는 이런 건강성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담 좀 크르렁크르렁 거리더라도, 꽤 괜찮을텐데. (사실 세상에 따지고 보면 크르렁거릴 일이 한둘인가) 
 


게다가 사실 이 할아버지, 어찌나 귀여우신지. 게다가 유머의 센스도 놀라워주시는지. 내가 할아버지의 작품들을 많이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최근작이었던 밀리언달러베이비나 체인질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매력. 평생 닫고 살았을, 그 마음의 문이 결국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이민족들에 의해 서서히 열릴 때, 어색하면서도 즐거워보이던 그 모습이 어찌나 절로 미소와 폭소를 자아내던지.

 

비장한 의미에 위트를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삶의 여유와 내공이 쌓여갈 때쯤 삶의 소멸을 맞이해야 한다는 건 참 슬픈 일이지만, 내가 보기엔 이 할배, 앞으로 세편쯤은 더 찍을 수 있을만큼 정정하시더만. 오래오래 명복을 빌어드려야 할 분이 한 명 또 늘어났구나. (3개월째 점포정리중인 강남역 지하상가 모 옷가게처럼 10작품째 유작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이라고 하셔도 눈 질끈 감고 속아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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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4-0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보셨으니까 이제 말하는데요, 저 타오를 첨 봤을 때 제 눈에는 13 ~ 15세 정도로 보였는데 나중에 직업까지 엄연히 가질 수 있는 나이란 게 좀 어리둥절 했었어요.
웬디양님도 로드무비님도 도쿄 소나타를 인상 깊게 보신 듯 하니 저도 꼭 보고 싶어지네요.

웽스북스 2009-04-05 23: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좀 어려보였어요. 한 17-18세인 것 같죠 영화에서는? 아닌가? 더되나? 흐.

도쿄소나타도 그랜토리노도 다 니나랑 함께 봤거든요. 둘다 두 영화 모두를 너무너무 좋아했었어요. 그랜토리노는 보고 나오면서 우리는 치니님의 리뷰를 읽었으면서도 내용을 몰랐다며 한탄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치니님의 고도의 '스포일러 하지 않음' 마인드로부터 비롯된 거였나봐요. ㅎㅎ 도쿄소나타도 한 번 보세요. ^-^

마노아 2009-04-0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눈 질끈 감고 속아줄 수 있어요. ㅎㅎㅎ 앞으로 10작품 더 출연하고, 10작품 더 연출하면 그때 유작이라는 걸 생각해 보자구요.^^

웽스북스 2009-04-05 23:40   좋아요 0 | URL
크흐. 마노아님도 클 할배에게 반해버리셨군요. 흐흐. 근데 또 너무 빡세게 기력을 소진하시면 안될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어요. 흐흐. 암튼, 할아버지 정말 정정하시죠? ㅋ 몸도 마음도 매우 건강한. ^-^ (그렇게 늙어야할텐데)

Alicia 2009-04-0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보셨네요 영화 좋았죠-
^^
멋진 보수주의, 근데 전 이런 사람을 만나본적이 없고 믿겨지지가 않아요.

웽스북스 2009-04-06 00:22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만나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식코에서 봤던 그 보수당을 지지하지만 복지나 의료제도에 대해서는 건전하게 사고하고 계시던 할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사실 이게 어찌 보면 더 당연한 것 같기도 한데 말이죠. 영화는 뭐. ^-^b ㅎㅎㅎㅎ

Mephistopheles 2009-04-0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랜 토리노의 백미는 마지막 그가 소멸한 후 유언장을 읽는 장면에서 바로 다시 나타나요. 희생 후 그의 부재로 좀 먹먹하다가 막판 욕이 한사발 들어간 유언장으로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뻐큐를 날리는 모습에서 아주 뒤집어 졌었다죠..^^

웽스북스 2009-04-06 19:38   좋아요 0 | URL
흐흐흐. 그래도 저는 이발소에서의 할아버지 모습에 더욱 뒤집어졌어요. 니가 죽어야 내가 다른 이발소를 갈텐데 ㅋㅋㅋ 암튼 참 센스넘치시는 할배에요.

무스탕 2009-04-06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랜 토리노 보고싶은데 울 동네서 안해요 -_-
영화보신 압구정 CGV가 신랑 회사 옆건물인데 거기가서 영화보고 신랑한테 점심을 사 내라!! 할까요? ㅎㅎ

웽스북스 2009-04-06 19:39   좋아요 0 | URL
아. 무스탕님. 안양에서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스탕님 댁이 ㅅㅂ 아니었던가요? ㅎ)

압구정 CGV 신관에서 하는지라, 매우 영화보기도 좋고, 좋던데요.
한번 데이트 하세요 데이트! 데이트!

Jade 2009-04-0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클린트 할배는 평상시에도 저런 모습일거 같아요! ㅋㅋ

웽스북스 2009-04-06 19:39   좋아요 0 | URL
긍까긍까요. 삶과 연기가 전혀 분리되지 않는 바람직한 모습이랄까요. ㅎ

프레이야 2009-04-06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쿄소나타,는 보지 못했구요,
그랜토리노는 아직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아주 놀라웠어요. 먹먹하니 한참 앉아있었지요.

웽스북스 2009-04-10 23:30   좋아요 0 | URL
그렇죠 혜경님. 저도 그랬답니다.
정말 좋은 영화였어요.